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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흑성산 산행을 위해 사전 검색한 참고자료입니다. 전사모님들 많은 참조가 있으시기를 ...
총무께서는 보다 유익한 스켸쥴을 잡아주시기를 ...
흑성산(黑城山) 산행
흑성산성(黑城山城)은 원래 ‘검은 성’ 이라 하였는데 일제 때 (지도작업을 하면서)‘검은 성’을 그대로 한역하여 산 이름으로 ‘黑城山’ 이라 하였다고 안내판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철종 12년(1861)에 고산자 김정호가 완성한 대동여지도에도 이미 ‘黑城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안내판의 설명이 틀린 것 같다. 조선 영조 때 이름난 어사 박문수가 죽자(영조32년, 1756) 지관을 풀어 이곳 흑성산 남쪽 아래 지금의 독립기년관 자리에 묘자리를 정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곳은 2, 3백년 후에 나라에서 요긴하게 쓸 땅이라 그 때 이장해야 될 것이니 이곳에서 십여 리 동쪽에 묘를 쓰라’ 고 권하여 그 말 대로 흑성산 정동 6Km 지점의 은석산(銀石山. 455m) 남쪽 기슭으로 옮겨 썼다고 한다.(지금도 실제 박문수의 묘가 은석산 서남 기슭에 있다) 박문수가 죽은 지 235년이 지나 흑성산 동남쪽에 민족독립의 역사관, 독립기념관이 1991년에 준공되어 구국선열들의 행적을 전시해 놓고 있으니 과연 박문수의 묘를 떠나게 했던 지관은 이미 200년 후를 내다 본 명 지관이었던 모양이다.
흑성산은 독립기념관 외에도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진주목사로 주장이며, 선무공신 2등에 녹훈된 김시민(金時敏),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공신(揚武功臣) 2등에 훈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어사, 일제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주석, 의정원장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 기미년(1919년)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터에서 궐기하여 삼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게 불을 붙인 유관순(柳寬順) 열사, 청산리 전투의 영웅이요,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 해방후 미군정 때 경무부장, 초대, 4대 민의원, 민주당대표최고위원, 민주당 공천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과 대결하다가 신병으로 도미하여 치료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등 역사적인 구국 선열들이 바로 이 흑성산 아래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김시민 (金時敏, 명종9년, 1554∼ 선조25년,1592): (야후백과사전)
조선 중기 무신. 목천(木川) 출생,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충무(忠武).
선조11년(1578) 무과에 급제, 선조24년(1591) 진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신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그 직을 대리하면서 민심을 수습하여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키고,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하여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昆陽) 군수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 십수교 (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는 등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 후 염초(焰硝) 500여근을 만들고, 총통 70여병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케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10월 공격에서 적탄을 맞아 진몰(陣歿)했으나 적에게 비밀로 했다가 안정된 후 상을 치렀다.
기은(耆隱) 박문수(朴文秀, 숙종17년,1691∼ 영조32년,1756): (야후백과사전)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본관은 고령(高靈). 시호는 충헌(忠憲), 경종3년(1723) 문과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로 뽑혔다.
영조3년(1727)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되어 영남암행어사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영조6년(1730)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굶주리는 백성의 구제에 힘썼다.
영조10년(1734) 예조참판으로 있을 때 진주사(陳奏使)의 부사(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영조13년(1737) 병조판서가 되었고, 병조판서의 인신(印信)과 이군색(二軍色)의 인신을 만들어 줄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다.
영조18년(1742) 병조판서로 있을 때 지리적 여건으로 봉군(烽軍)의 충원이 어려운 북도(北道)에 각지방에서 정배(定配)된 봉무사(烽武士)로써 변통할 것을 주청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영조25년(1749) 호조판서, 영조25년(1750) 수어사(守禦使)를 거쳐 영조27년(1751) 예조판서가 되었다. 영조29년(1753) 우참찬에 올랐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하였으며,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에서 벗어나 4색(四色)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의 실(實)을 강조하였다.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아 당시 국정의 개혁논의에 중요한 몫을 했다.
영조25년(1749) 영조에게 주청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출판하였고, 글씨로는 안성의 《오명항토적송공비》가 전한다.
유관순 (柳寬順 1904∼1920)(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6년 기독교감리교 공주교구(公州敎區)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생으로 입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등과 제1학년생으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여 예배당을 중심으로 서울의 독립시위 상황을 설명하면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의 마을유지들을 규합하고 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 각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찬동을 얻어, 같은 해 음력 3월 1일 아오내(竝川 병천)장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인사들이 피살되었으며, 유관순은 주모자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 경성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항거하고 7년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항쟁을 전개하다가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석오(石吾) 이동녕 (李東寧 1869∼1940) (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천안(天安) 목천 출생, 향리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고종29년(189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이듬해 국민운동의 일선에 나섰으며 1903년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등과 기독교청년회운동을 펼쳤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고 연좌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으며, 1906년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한편,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하고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뒤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으로 가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학교의 전신)를 세웠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하였다.
1918년 상하이[上海(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초대 의정원의장·내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2년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안창호·여운형(呂運亨)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단결을 촉구하였고,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군무총장(軍務總長)을 겸임하였으며, 1925년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이 되었다.
1927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으며,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長沙(장사)]로 이전, 그 뒤 쓰촨성[四川省(사천성)] 치장에서 죽었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광복 뒤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철기(鐵驥) 이범석 (李範奭 1900∼1972) (야후백과사전)
독립운동가, ·정치인.
1913년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를 수석 졸업한 뒤 신흥무관학교 교관, 북로군정서 교관, 사단연성소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1920년 김좌진(金佐鎭)을 도와 청산리전투에서 제2대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23년 고려혁명군 기병대장, 1922~1925년 러시아합동민족군프리모르스키지구 지휘관으로 러시아혁명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중국항일군의 헤이룽장성군[黑龍江省軍(흑룡강생군)] 작전과장 등을 거쳐 1934년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의 한적군관대장(韓籍軍官隊長) 등을 지냈다.
1940년 중국군 중앙훈련단중대장을 거쳐,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연합군자격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귀국하였다.
이해 10월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을 지냈으며, 1952년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 부통령에 입후보, 낙선하였다.
1956년 무소속으로 다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참의원의원에 당선, 1963년 <국민의 당> 결성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9년 국토통일원 최고고문을 지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회고록인 《우등불》 《방랑의 정열》 등이 있고, 논설집으로 《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유석(維石) 조병옥 (趙炳玉 1894∼1960)(야후백과사전)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유석(維石). 충청남도 천안(天安) 출생. 1914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1925년 컬럼비아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였으나 좌익(左翼) 교수와 대립, 곧 사직하였다.
그 뒤 신간희(新幹會)·광주학생운동·수양동우회사건 등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5년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 총무가 되었으며, 이어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혼란기의 치안을 담당, 공산당을 색출하는 데 힘썼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대통령특사·유엔한국대표를 역임하였고, 1950년 6·25 때는 내무부장관으로 대구(大邱) 사수를 위해 진두지휘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정치노선 차이로 충돌하여 사직하고, 반이승만 세력의 선봉에 섰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신익희(申翼熙)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야당을 영도하면서 반독재투쟁을 선도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대통령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에서 가료중 별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흑성산은 고려 때도 우리나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한 김상혁상원사의 전적지다.
김사혁(金斯革: ? - 우왕11년,1385): (국사대사전)
고려 때의 무신, 시호는 충절(忠節)이며, 공민왕11년(1362)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으로 2등 공신,
우왕 초년에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서해안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싸웠으나 패전, 그 후 여러 번 충청,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와 싸워 승전, 우왕 7년(1381) 양광도도순무사(楊廣道都巡問使),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 (양광도는 고려 때 10도의 하나, 경기도 일부와 충청북도) 우왕11년(1385)에는 관직이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올랐다.
천안 흑성산에 건국기념관 건립 추진 |
천안제일고 출신인사 중심 건립운동 전개 입력: 2009/09/23 이원영 기자 |
천안 제일고등학교(전 천안 농업고등학교)출신 인사를 중심으로 한 천안 건국기념관 건립운동이 전개될 것으로 보여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향토사학자이자 교사인 신상구씨에 의하면 전 국회의원이자 전 배재대총장 이성근(72) 박사와 유종성(75·전 공무원) 씨 등 천안 농고 동문을 중심으로 건국기념관 건립운동을 전개키로 했다고 22일 밝혔다.
민간주도의 이번 운동은 민족의 성전인 독립기념관과 한민족역사문화공원이 있는 흑성산(519m) 기슭에 건국기념관을 건립, 사회교육 장소로 적극 활용하고 국민관광지로 개발해 국민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들은 특히 천안지역이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건립유치의 타당성을 두고 있다.
천안이 유관순 열사와 이동령 선생, 이범석 장군, 조병옥 박사 등 상해임시정부 요인과 치안책임자, 대한민국 정부의 요인 등을 배출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또 천안은 충남의 수부도시로 영·호남의 분기점에 위치해 도로교통과 철도교통이 편리하고 국토의 중앙에 있어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이유다.
천안은 또 독립기념관과 국학원의 한민족역사문화공원 등이 흑성산에 위치해 있고 백범 김구 선생 선양 사업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재단법인 김구재단이 있어 주변 여건이 형성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안에 건국기념관을 건립할 경우 천안박물관과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이동령 생가, 이범석 생가, 독립기념관, 상록리조트,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 기념공원, 유관순 사우, 망향의 동산 등과 연계 관광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민경제 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들은 건국기념관 건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천안시청과 천안의 3개 문화원,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시민연대, 천안시민포럼 등과 협조체제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신 교사는 “전국 처음 민간주도의 건국기념관 건립운동이 전개될 것”이라며 “획기적인 애국적 처사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