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조각 누룽지
召我 박정열/수필가(2016 한국문학시대 겨울호) 아침의 문학회원. 대전문학회원
나는 요즈음 자주 이런 생각을 해본다.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고…. 외로움은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거다. 건 맞다. GDP(국내 총생산)가 높아질수록 혼자 사는 사람은 늘어난다고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있어도 마땅히 만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외롭다. 헌데 외로움은 늙은 사람만 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늙으면 늙을수록 외로운 건 사실인 모양이다. 정情은 숲길 같아서 자주 다니지 않으면 사라지고 마니까.
지금부터 나는 80이 넘은 내 친구 삼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내 친구 삼촌은 참 빛나는 인생을 살았다. 평생 사업을 일구며 열심히 살았다. 불행이라면 60을 갓 넘어 상처喪妻를 했다는 것. 하는 일도 잘 풀리고 집안도 화목하였다. 알토란같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첫째는 공무원으로 최고위직에 있다. 둘째는 일찌감치 정치판에 뛰어들어 승승장구중이다. 막내는 박사학위를 받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의 교수다. 손자손녀도 일곱이나 된다. 누가 봐도 부러울 게 없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다.
잘난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바쁘다. 목소리 듣기도 어렵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전화를 하면 안부 묻는 시간도 아까워한다. 며느리들은 옆을 지나쳐도 먼저 아는 체를 안 하면 못 알아 볼 정도다. 손자손녀들과 언제 얼굴을 마주했는지 기억이 없다. 명절은 역귀성이다. 제祭를 올리면 뿔뿔이 흩어진다. 참으로 외롭고 허전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외로움이 집근처 호수공원으로 삼촌인 그이를 불러냈다. 호수에는 오리들이 무리를 지어 유영을 하고 있었다. 수변에 수초들은 보라 꽃, 노랑꽃, 흰 꽃들을 활짝 피웠다. 잠자리도 날았다. 물이 펑퍼짐한 수면에 하늘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휘-불면 잔물결은 반짝반짝 은비늘이 빛났다. 기분은 맑고 상쾌하였다. 며칠이 지났다. 이렇게 호수를 찾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한 보름쯤 돼서다. 한 여인이 같은 벤치, 같은 시간에 나와 앉아 있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했다. 삼촌은 그 여인이 마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삼촌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체면불구하고 마침내 그녀의 옆자리를 노크했다. 여인은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응낙을 한다.
“며칠째 이 자리에 계셨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어르신이시군요. 그냥 이 호수가 좋습니다. 저어기 아파트로 이사를 왔거든요.”
그 아파트는 제법 인기 있는 아파트다. 그리고 그 여인은 외모로 봐서 처지가 곤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혹시 자손들도 함께?”
“네? 네….”
귀찮다는 듯 그녀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짧다. 삼촌도 더 이상 호구조사 할 일도 아니었다.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도 그 여인은 그 자리에 나와 앉아있다. 삼촌은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는다.
“요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저 하늘이며 이 바람이 축복을 내리는 듯합니다.”
여인은 어제와는 달리 배시시 웃었다. 웃는 모습이 싫지 않은 인상이다.
“인상이 참 좋으십니다.”
“쪼글쪼글할 나이인데 뭐 그리 좋겠어요.”
“아닙니다. 젊어 보이십니다. 저야 80이 넘었으니 이제 기대할 것이라곤 없습니다만…”
“그러시다면? 저…, 이것 좀 드릴까 했는데…”
노릇노릇한 누룽지가 든 봉지가 여인의 손에 들려있다. 보기에도 참 먹음직스럽다. 얼마 만에 보는 누룽지인가. 유명을 달리한 마누라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참았다.
“그래요? 다행히 치아는 아직 쓸 만합니다. 주시려 한 것이니 좀 얻어먹겠습니다. 허허허”
아내도 생전에 끼니때마다 누룽지를 끓어 놓았다가 그가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내놓곤 했었다. 여인이 내민 누룽지는 잡곡을 섞어서 더 구수하고 맛이 좋다. 말린 누룽지에다 설탕을 뿌리고 참기름을 둘러 볶았다. 맞다. 먼저 간 아내도 끼니마다 누룽지를 보드랍게 끓였었다. 숟가락을 놓을 쯤에 상에 올려놓았다. 쌀뜨물을 붓고 끓인 누룽지 숭늉을 국보다 더 즐겼다. 입맛이 없을 때도 제격이었다.
누룽지로 시작된 만남은 이제 헤어질 때면 ‘내일 또 누릉지를 먹고 싶습니다.’할 정도가 되었다. 삼촌은 어쩌다 그 여인을 못 보는 날은 그리움이 솟아났다. 이제는 전화도 하는 사이가 됐다. 청춘처럼 들뜬 나날이었다. 삼촌은 누룽지에 진 빚을 갚고 싶었다. 딱히 묘안이 없었다. 형편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지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다 예쁘게 포장을 했다. 여인이 벤치에 앉아있다.
“저…, 누룽지로 진 빚을 갚고 싶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게 뭐예요?”
“아, 여기서 뜯지는 마세요. 댁에 가서 뜯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 돈이군요. 저는, 이 돈, 받을 수 없습니다. 누룽지 값과는 비교도 안 될뿐더러, 저는 누룽지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 이러시면 저는 내일부터 영감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거절이다.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간은 흘러, 봄에 시작된 만남이 늦은 가을로 이어졌다. 삼촌은 날이 추워지면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는 날 삼촌은 용기백배하여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양가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결혼을 선언했다. 여인 측에는 딸만 둘이다. 반대는 없다. 문제는 내 친구 삼촌의 아들들이다.
“아버지가 무엇이 부족해서 재혼을 하십니까? 저 분은 아버지 재산이 탐나 접근하는 게에요. 그 왜 그걸 모르세요. 저희가 더 따뜻이 모시겠습니다. 아버지, 제발 저 여자 분의 속내에 속지마세요.”
“나는 속아도 괜찮다. 저 여인을 만난 지 이제 불과 몇 개월이다. 그러나 너의 엄마 가고 난 뒤로 제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저 여인이 속일 리도 없지만, 설사 속인다 해도 난 괜찮다.”
결국 신혼생활은 시작됐다. 깨알보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깨 볶는 재미가 이럴 줄 몰랐다. 삼촌은 이런 날이 계속 될수록 마음 한편에 고심이 커져갔다. 이제 결단 할 때가 왔음을 감지한다.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자식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일각도 지체 없이 모여들었다.
“너희들 바쁜 줄, 나는 다 안다. 오늘 너희들을 오라고 한 것은 내 재산의 상속절차를 밟고자 한다. 내가 가진 재산 모두를 너희 어머니에게 상속하겠다. 이미 변호사손에 넘겼으니 그리 알고 누구도 딴말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여인, 그러니까 그의 새 부인이다.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부를 한다.
“안됩니다. 저는 그 재산에 단 한 푼도 기여한 바 없습니다. 모두 자식들에게 나눠주세요.”
“아버지, 그 많은 재산을요? 법적으로도 분명 우리 몫이 있습니다.”
여인은 끝내 허락을 하지 않는다. 재산 증여가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촌은 듯을 굽히지 않앗다.
“그래? 나는 너희들에게 내 힘껏 다해주었다. 원하는 만큼 가르쳤다. 서울에 집도 한 칸씩 마련해 주었다. 너희는 지금 이 나라에서 누구보다 훌륭하게 잘 살고 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내가 뭘 원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 새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해준다. 매일 매 끼니마다 누룽지를 먹게 해준다. 이래도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게야. 너희가 나에게 뭘 해줬는지. 내 재산을 너희가 받을 이유를 말해 보거라. 누룽지 값이 상속의 가치가 되느냐고 묻고 싶은 게야? 입이 있으면 말을 해”
삼촌자식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아내 사 후에 외롭기만 했었던 내 친구삼촌은 결국 그 여인에게 재산을 주기로 했단다. 어쩌면 삼촌은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주면 상대는 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