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에르메스의 모든 것은 말(馬)에서 시작되었다
조혜덕 ‘아트 컴퍼니 인터알리아’ 아트컨설턴트
12살짜리 소년이 처음 잡은 것은 실크 양산이 펴지는 신기한 지팡이였다. 첫 돌을 맞은 아기가 실, 돈, 쌀, 펜, 책 등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돌잡이처럼, 수집가(collector)에게 있어 처음 선택한 물건은 그의 컬렉션 방향과 안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소년은 왜 그 지팡이를 골랐을까? 그 뒤 무엇을 계속 수집했을까? 말이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이었던 당시, 에르메스의 3대 경영자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Emile-Maurice Hermes·1871~1951)는 평생에 걸쳐 마차를 비롯하여 안장·채찍 등과 같은 다양한 마구용품, 말을 그린 그림·조각 등 모두 말(馬)과 관련된 것을 마구마구 수집했다. 한마디로 그는 어릴 때부터 말에 미쳤던 것이다.
올해로 174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에르메스는 왕족과 귀족의 애마를 대상으로 안장, 채찍, 헬멧 등의 마구용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할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에밀 모리스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기병대에 공급할 안장 가죽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했다. 거기서 그는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고 마차를 대체할 미래의 교통수단이 될 것이라고 바로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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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에 있는 ‘에르메스 박물관’.
가방, 스카프, 넥타이, 향수, 시계, 액세서리, 장갑, 부츠, 여행용품 등 에르메스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명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말이나 마차를 탈 때 사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마구(馬具)용품이다. 귀족에게는 안장, 채찍, 헬멧, 장갑, 부츠 같은 직접적인 마구용품뿐 아니라 가방, 스카프, 향수 같은 것도 마구용품이었던 것이다.
에밀 모리스에게 자동차는 새로운 종류의 말이었다. 귀족을 위한 마구는 에밀 모리스의 영감을 거쳐 귀족을 위한 차구(車具)로 변신했다. 마구를 만들던 에밀 모리스의 장인들은 새들 스티칭(saddle stiching·말 안장에 쓰던 박음질 기법)을 적용하여 귀부인이 자동차를 탈 때 드는 가방을 만들어냈다. 새들 스티칭은 에르메스의 혈통을 드러내는 믿음직스러운 문장(紋章)이 됐다.
캐딜락 자동차에서 후드를 열고 닫는 지퍼를 보고 영감을 얻은 에밀 모리스는 재빨리 가방과 의류에 사용하는 지퍼 사용권을 따냈다. 이렇게 해서 1923년 탄생한 것이 바로 가방에 지퍼를 단 볼리드 백(Bolide Bag)이다. 가죽과 자동차의 결합, 그것은 지퍼로 가능했던 것이다. 가죽가방을 들고 마차에 오르던 귀부인들은 볼리드 백을 들고 자동차를 타고 싶어했다.
에르메스 명성을 확고하게 해 준 켈리 백(Kelly Bag)도 마구였다. 기수들이 사냥을 나갈 때 마구용품을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프티 삭 오트(Petit Sac Haute) 백이었다. 영화배우 출신으로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든 것이 화제가 되어 켈리 백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방만이 아니다. 여성 승마복에 장식용으로 쓰던 실크가 지금 한 폭의 그림 같은 실크 스카프로, 말을 탈 때 끼고 신던 장갑이나 부츠도 귀부인들이 최고급 자동차를 탈 때 필요한 명품으로 변신했다.
향수 브랜드가 ‘마차’라니? 그것도 여성용 향수인데 말이다. 에르메스가 내놓은 여성용 향수 브랜드인 칼레시(caleche)는 ‘2륜 마차’라는 뜻이고, 그 뚜껑은 기수의 모자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 이처럼 에르메스가 만든 모든 것은 말과 연관되어 있다.
에르메스의 로고 ‘칼레시’도 당연히 말을 소재로 한다. 고급마차가 빈 채로 손님을 기다리는 장면을 담은 이 로고는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드뢰(Alfred de Dreux)의 ‘뒤크(4륜 마차)’와 말이 그려진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품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지만 그 작품들에 생명력을 넣어주는 것은 고객이다”라고 말하는 에밀 모리스의 철학을 담은 로고다.
전령의 도구는 예술
에르메스재단은 2000년 미술상을 제정하여 한국의 역량있고 창의적인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2009년 수상한 박윤영 작가의 설치 작품 ‘검은 날개’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의 세계를 예견하는 메신저의 역할은 에르메스와 닮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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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한 박윤영의 ‘검은 날개’.
‘검은 날개’는 조카에게서 받은 장난감 유리 구슬을 오브제로 동양화, 미술사, 과학, 영화, 문학 등으로 의미를 확장하여 소통을 시도한다. 병풍에 새긴 내용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에서나 통용될 것 같은 기하학적인 문자, 그리고 여기저기 놓인 의자 등은 마치 박물관에 있는 시대를 초월한 컬렉션을 보는 듯하다.
그의 작품 ‘지팡이’는 외할머니의 지팡이가 땅에 닿을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헝겊을 싸주기로 한 과거의 약속을 소재로 한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작가의 이야기를 확장하여 헝겊에 싸인 지팡이를 천장에 매달고 땅에 닿은 지팡이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여준다. 역시 과거와 현실, 그리고 가상의 세계를 연결하여 동시대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