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언어 예법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개혁 교회 직분자들과 교우들
朴埰同 (2013.12.15.19:51)
우리나라 높임법(존대법)에 ‘압존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군대나 회사 예를 들자면, ‘사령관이나 회장 같은 윗사람’에게 ‘자신의 상관’을 말할 때는 ‘자신의 상관’을 높이지 않는 예법입니다. 그러므로 이 ‘압존법’을 군대나 회사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소위: 사령관님, 홍길동 소령님이십니다. / 사령관님, 홍길동 소령님 오셨습니다. → “홍길동 소령이 나보다 더 높으냐?”는 사령관에게 뺨 맞습니다. 그러므로 (X)
소위: 사령관님, 홍길동 소령입니다. / 사령관님, 홍길동 소령 왔습니다. (O)
재벌 2세인 젊은이가 회장인 회사에서 사장을 시아버지로 둔 과장: 회장님, (제 시아버지) 홍길동 사장님 오셨습니다. → 이 역시 “니 시아버지가 회사에서 나보다 높으냐?”는 회장 말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X)
재벌 2세인 젊은이가 회장인 회사에서 사장을 시아버지로 둔 과장: 회장님, (제 시아버지) 홍길동 사장 왔습니다. (O)
이 ‘압존법’을 학교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초교생 (혹은 교사, 혹은 교감) : 문교부 장관님, 우리 학교 방정환 교장 선생님이십니다. (X)
초교생 (혹은 교사, 혹은 교감) : 문교부 장관님, 우리 학교 방정환 교장 선생입니다. (O)
이 ‘압존법’을 학교에 적용하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즉, ‘O, X’가 뒤바뀐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초교생이 대통령이나 문교부 장관에게 자기 학교 교장을 소개할 때 “대통령님, 우리 학교 방정환 교장 선생입니다.”는 소개가 이상하게 느껴져 ‘O, X’가 뒤바뀐 것으로 보이신다면, 그것은 압존법이 이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압존법’이 이같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 않을까요? 그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압존법은 일본어 예법이지, 우리나라 전통언어 예법은 아니다.”→ 국립국어연구원 {표준화법 해설}에서.
국립국어원에서 폐기한 ‘일본어 예법으로서 압존법’
朴埰同 (2013.12.16.10:41)
제가 ‘압존법’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초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남기심, 고영근 {표준국어문법론} (서울: 탑출판사, 2002)’에 적힌 [높임법]을 읽고서였습니다. ‘압존법’, 저에게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이 책 327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3.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직 안 왔습니다.
말하는 이에게 아버지는 ‘~(으)시~’를 붙여 높여야 할 대상이지만 듣는 이인 할아버지보다는 낮기 때문에, 할아버지보다는 낮추어야 할 상대이기 때문에 3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이른바 “압존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 제 할머니와 아버지께 교육을 받기를 “할머니, 아버지가 아직 안 왔습니다.”고 말씀드렸다가는 혼났습니다. 즉, “할머니, 아버지 아직 안 오셨습니다.”로 교육받았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에게 하댓말을 쓰지 않으셨던 할머니, 제 아버지에게 반半존댓말을 쓰셨던 할머니께서는 “아버지 집에 오셨냐?”고 물으셨습니다.
또한 제 아버지보다 웃어른이신 동네 분들도 “아버지 지금 집에 계시냐?”고 물으셨지, “아버지 지금 집에 있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압존법’에 따르면 묻는 분이 제 아버지보다 웃어른이심으로 “예. 아버지 지금 집에 있습니다.”고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 아버지 지금 집에 계십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제 {페북}에서 “목사가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하거나, 자기 남편보다 윗사람에게 우리 강도사님, 우리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교역자 부인들을 보면 불편하다.”는 내용을 담은 글, 제 페친 PEJ 목사님 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편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나라 언어 예법에 맞는 표현입니다.”는 내용을 담은 댓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PEJ 목사님 페친 분들에게 그르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제 댓글에 반론하신 분들은 개혁 교회 은퇴 장로님이시거나 집사 같은 직분을 맡으신 교우분들이셨습니다. 그 지적에는 “권위주의 소산입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혼돈을 느낀 저는 제 아내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내 역시 “자기보다 윗분이지만 듣는 이가 그분보다 더 윗분일 때는 그분을 낮춰 말하는 것으로 학교 다닐 때 배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할머니와 아버지 가르침을 더듬어 보면서 저는 ‘아내가 배운 것이 틀렸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덧글은 그만 다시고 인터넷 검색을 하시든지, 잘 아는 사람에게 알아보시기 바랍니다.^^”는 PEJ 목사님 권면을 받들어, 어제 저녁 무렵에 인터넷에 ‘압존법’을 검색해 봤습니다. 그래서 ‘압존법’이 ‘일본어 예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또한 “국립국어원에서 폐기한 예법이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바른 예절 교육’을 해 주신 할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권위주의 소산으로서 압존법’을 교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60대) 담임목사: (30대 중반) 김 강도사 어디 갔어?
교회에서 사무를 보는 (20대 중반) 청년: 김 강도사 기도실에 갔습니다.
교회에서 사무를 보는 청년: 목사님, 김 강도사 왔습니다.
담임목사: 들어오라고 해.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언어 예법을 교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담임목사: 김 강도사님 어디 가셨습니까?
교회에서 사무를 보는 청년: 김 강도사님 기도실에 가셨습니다.
교회에서 사무를 보는 청년: 목사님, 김 강도사님 오셨습니다.
담임목사: 예. 들어오시라 하세요.
이같이 우리나라 전통언어 예법을 따르게 되면, 담임목사나 강도사나 청년이나 ‘서로 존중하는, 서로 섬기는(종이 되는)’ 예법을 따르게 됩니다.
슬프고 안타깝지 않습니까? ‘일제 강점기 권위주의 소산’으로서 ‘일본어 예법’이 ‘압존법’인데, 교회에서 목사나 사모를 호칭하는 일에서 ‘압존법’이 통용될 때 ‘권위주의 소산’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나라 교회 현실이 말입니다.
댓글
류순규
귀한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십니까? 장로님이십니까? 교수님이십니까? 해박한 지식이 부럽습니다.
朴埰同
목사님, 칭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덕트Duct’ 제작 설치 일을 하는 일반 신자입니다.
류순규
와, 주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시군요. 존경합니다.
전종득
광주 어느 교회에 있을 때 담임목사님께서 ‘압존법’을 강조하셨습니다. 어찌나 민망하고 힘들던지요.
황희상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朴埰同
제가 ㅡ1991년 3월에 3학년으로 편입ㅡ 광주대학교 야간 영어학과를 다닐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서른살 때였습니다. 주간에 광주신학교 신학부 신학과를 다니며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섬기는 급우가 있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세 살 어렸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어리고, 급우였습니다만, 비록 그 급우가 목사는 아니지만 저는 그 급우를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교회 교사’로 여기며 그 급우를 “전도사님”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했습니다.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형님들은 처음에는 그 전도사님을 막 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전도사님을 깍듯이 대하자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형님들 가운데 교우이신 분도 깍듯이 대하게 되고, 그래서 불신자 형님들도 막 대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ㅡ저보다 한 살 어린 천주교 수사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급우에게도 “수사님”이라고 부르며 존댓말을 썼습니다.ㅡ
“교회도 아닌 학교인데,”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는 제5계명을 해설하면서 “제5계명에서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사회에서 은사나 직분에서 자신보다 위에 두신 자를 뜻합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직분자를 세우셔서 자신의 왕권을 드러내시는 주님’, ‘주님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이어짐’을 우리는 ‘유념’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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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예배 시 기도할 때 목사를 “목사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바른가, “목사”로 호칭하는 것이 바른가?’가 {페북}에서 논란이 되고 있어서 원문을 조금 다듬어 올린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Hxh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