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풍물은 전형적인 놀이 형식의 예술이다.
풍물은 오랜 기간에 걸쳐 민중들에 의하여 갈고 다듬어져 전승되어온 전형적인 놀이 형식의 예술이다. 놀이 형식의 예술은 무대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놀이판을 구성하고 있는 집단의 창조물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인 갈등이나 고뇌가 주 내용이 아니라 집단적인 염원이 주종을 이루고 개인의 기호나 취미보다 구성원들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앞선다.
이러한 집단적인 놀이 형식의 예술은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삶의 가치 획득에 그 목표를 두게 되며, 시시각각으로 삶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현실에 맞서서 근원적인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데 그 역점을 두게 된다. 그래서 놀이는 단순한 유휘나 오락이 아니라 그 집단이 필요로 하는 여러가지 덕목과 품성을 일구어 내는 사회교육적인 기능을 지니게 된다. 놀이를 통하여 개인은 그 집단에서 요구되는 덕성을 스스로 기르고 집단은 놀이로서 집단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그 구성원들을 충원해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놀이는 그 집단을 기본적으로 지탱해 주는 생산활동에 의하여 규정되어 지고 또한 다양하게 펼쳐지게 된다. 이리하여 집단적인 놀이는 생산과 그들이 소망하는 세계와의 통로가 된다.
2. 풍물은 신명에 바탕을 둔다.
풍물은 모든 집단적인 놀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놀이의 규모가 크고 역동적일 때에는 거의 대부분 풍물이 놀이판을 밑바탕에서 받쳐주고 있다. 극히 개인적인 놀이를 제외하고 이른바 대동놀이의 경우 풍물이 없다면 그 판의 생명력은 반감될 것이다. 풍물의 경우 대동놀이에 있어서 단순한 길놀이나 뒷풀이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판 전체를 꿰고 있으며 판을 꿰뚫고 있는 풍물의 밑바탕에는 바로 우리 삶을 본래의 질서로 회복시키는 신명이 흐르고 있다. 신명이 흐르지 않으면 장단이 흐르지 않고, 신명이 막히지 않아야 그 춤이 생명력을 갖는다.
풍물의 모든 소리와 춤과 장단은 신명과 연결된다. 신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개념의 정의는 어렵다. 우리의 언어가 그렇듯이 신명이라는 말도 대단히 포괄적이다. 신명도 그 명암을 갖는다. 어떻게 따지면 신명은 "한"의 밝은 부분인것 같기도 하다. 신명은 풍물의 밑바탕에서 풍물의 역동성과 낙천성을 일으켜 세운다. 적어도 풍물에서는 고뇌, 실망, 낙담, 처절의 정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풍물의 언어는 활달하고 희망차고 역동적이고, 환희에 가득 차 있다. 풍물의 이러한 성격이 어떠한 놀이판에서도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잘 어울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3. 풍물판은 언제나 다른 판과 연결되어 있다.
풍물의 판은 언제나 풍물만의 것이 아니었다. 풍물판은 또 다른 판, 혹은 다른 상황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대동놀이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연희가 중심인 남사당의 공연도 풍물판이 독자적으로 마련되지 않는다. 판굿도 그것만으로 연행되지 않고 항상 지신밟기 혹은 뜰밟이, 마당밟이와 결부되어 있다. 마을의 잔치판에도 흔히 풍물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잔치라는 상황속에서 풍무판이 어우러져 진다. 지금와서 풍물이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세워질 수 있는가 다양하게 실험되고 있지만 적어도 전통적인 놀이판에서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같은 놀이판과 풍물판의 결합이 풍물의 성격 규정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듯 하다. 즐거운 놀이판이 풍물의 전제가 되기 때문에 풍물의 정서는 적어도 파괴, 패배, 실의, 처연함 등과는 거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혹자는 풍물을 구성하는 악기의 성질 자체가 그러하다고 하지만 시나위에 장구와 징이 쓰이고 상여소리에 북이 쓰이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러한 것도 아니다. 풍물의 동작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풍물춤에서 살풀이나 승무같은 정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풍물춤은 활달하고 꿋꿋하며 힘차서 애잔한 정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설장구로 혹은 북춤으로 고뇌에 찬 혹은 실의에 찬 개인의 모습을 표현하려 한다면 적어도 풍물판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춤과 놀이와 소리에는 분명히 현실의 명암이 갖는 대립적인 정서가 있으며 이를 표현해 낼 수 있다. 현실의 어두운 면이 극도로 처연한 정서를 춤과 노래를 통하여 표현 할 수 있지만 풍물판은 분명 이석을 넘어서 있다. 현실이 갖는 여러가지 적대적인 대립, 투쟁의 모습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풍물은 이러한 것이 극복된 상태나 세계를 표현 해 낸다. 그런 세계가 아니면 신명을 물러내지 못할 것이고 신명이 나지 않는 이상 풍물판이 풍물판답게 푸지고 흐드러지지는 않는다. 확실히 풍물의 소리와 동작은 억압받고 왜곡된 형태는 아니다. 풍물의 언어가 구축하고 있는 정서의 세계는 단순하고도 분명하다. 그곳에는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일체의 것은 없다. 가장 자연스러운 공간에서의 인간이 내지를 수 있는 소리와 몸짓만이 존재한다. 뿐만아니라 복색도 어둡지 안하다. 밝고 화려한 색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어두운 느낌은 갖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풍물의 색은 바탕색이며 화려한 빛깔이다.
4. 풍물판의 중심은 놀이판의 구경꾼이 된다.
"판"이든 "마당"이든 풍물판은 치배가 중심이 되지 않는다. 잽이가 비록 판굿에서 잠시 중심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뒷풀이나 대동놀이의 경우에는 오히려 관객이 아니면 놀이판의 구경꾼이 놀이 참여자의 중심이 되고 오히려 치배는 이들의 신명을 단지 받쳐주는 역할로 물러난다. 풍물판의 구성을 보면 전통적인 춤판과 매일반으로 구경꾼이 참여하는 폭이 넓다.
소리판을 들여다 보면 광대는 구경꾼이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서사구조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그때 전개되는 상황을 구경꾼과 소리꾼이 어떻게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심청이 이별하는 장면은 그 줄거리를 모르고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거에 괸심을 가지고 소리를 듣지않는다. 단지 부녀가 이별하는 그 상황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가 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판소리는 하나의 서사구조를 가지고 기, 승, 전, 결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않아도 좋다. 느닷없이 "사랑가"를 부르다가 "쑥대머리"를 부를수도 있는 것이다. 풍물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풍물에 나오는 장단은 다 알고 있다. 구경꾼들도 그 정도의 장단은 다 두드릴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새로운 장단이 나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익히 알고 있는 장단을 어떻게 풀어내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장단을 어떻게 "내고 달고 맺고 풀어 가는가"에 구경꾼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치배가 내는 장단의 흐름에 자신의 신명을 같이 풀어내는 것이다. 풍물의 놀이는 자명해진다.
풍물은 보여주고 들려주고 알려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풍물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펼쳐가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풍물의 발전을 개인의 창작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서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