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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발현(창안)과 인식의 표상(재현)
- 삶에서 함, 함에서 앎.
우선 사유의 방법에서, 방법론이 여럿 있지만, 대략적으로 두 가지 길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사물이든 대상이든 분할(division)의 방식이 있으며,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처럼, 또는 데카르트처럼 분석에 의해 인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식이 발생과 과정을 겪으면서, 자연의 생물체들의 계열화처럼, 분류(classification)의 방식이다. 둘 다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이지만, 하나는 인위적으로 사물이든 자연이든 각각의 고유성에 따라 경계를 지어서 서로들 간에 달리 규정지을 수 있다고 여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행하는 것이 아니자 자연이 행하는 것이며, 생명체가 생겨나는 방식으로 달리 살아가는 방식을 계열로 이어가기에 다른 선(계보)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유의 극한에서 변할 수 없는 요소를, 사람들은 본질이라고 부르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어떤 원인으로부터 주변과 시간의 경과에서 선들(계보들)을 달리하고, 각 선은 자기의 고유성을 또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철학에서 형이상학이란 이름으로, 본질의 규정을 따라 사유하면서, 우주와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하나의 원리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형이상학(meta-physis, 자연배후학)이란 이름이, 자연 배후를 탐문하는 학문으로서, 자연의 거쳐 온 과정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자연의 배후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자연의 배후에 ‘뭣’이 있기는 한가? 아니면 자연이 자기에 의한 자기의 발생과정을 거쳐 가고 있는가? 그런데 학문이 생기는 당시에는 자연의 기나긴 과거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뭔가를 조금 알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도 불의 온도를 높여서 철기를 다루는 시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7천 년 전에 구리를, 그러고 나서 5천년 전 쯤에서 규소를 섞은 청동을 다루었고, 다음으로 철을 다루면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우월성을 가졌다고들 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삼았을 뿐만이 아니라, 철기를 다루면서 한 종족이 다른 종족들을 대상으로 다루기도 한다. 이런 대상들의 취급을 대표로서 기호화할 수 있는 것이 소위 말하는 대리(표상, 재현)의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삶의 편리를 위하여, 교환하는 물건들을 대신하는 화폐도 표상의 것이다. 그 화폐의 상징(기호)이 물건(물체)을 대신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공동체에서 위계질서의 참주(황제, 왕)들이 나라를 대신한다. 상징이 표기들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이, 상징의 체계(體系)를 세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도 사회 제도의 위계질서의 체제(體制)에서도 제1의 상위 지위를 차지하는 자가 신의 지위를 갖게 되기도 한다. 신정정치라고 부르는 제도에서 신관은 제도화된 체제에서 황제(참주)와 같다. 과거의 참주는 힘으로 제1 지위를 차지하였다. 마하바르타와 길가메시 설화에서 영웅설화들은 이런 제1의 상징을 지니고 있다. 제우스를 중심으로 그리스의 신화도 이와 닮았다. 그런데 생각에서 만들어진 다른 하나는 신이 먼저 있었다고도 한다. 이 신의 먼저는 백성의 편에선 현자들이 대리 표상의 역할로 만들었다고 한다. 재현의 표상으로 상호호혜[홍익인간과 재세이화]로서 산다는 것은 현자들의 실행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공감성으로 느끼는 시절에 다른 종족의 인간도 자신처럼 대우하였을 것이다. 석기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구리 다음으로 청동기시대에 힘에 의한 지배에서 도구의 무기화로 영웅시대를 열었다. 철기 시대와 더불어, 물질의 교환을 대신하는 기호의 교환으로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 지중해에서 아테네를 이어서 알렉산드리아로, 그리고 로마 황제(참주)제의 성립이다. 예수가 너 이웃을 제 몸처럼 대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로마의 지배 하에서 개돼지 취급받는 민중이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공감성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자연과 제도 사이에서 어느 쪽을 더 우선적으로 생각하느냐에 이르렀다. 자연으로 살기에는 부족함과 불안이 있지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제도로서 산다는 점에서는 편리와 습관이 고착되어 굴레와 구속에 얽매인다는 것도 알게 된다. 부족을 메꾸기 위해 학문(과학)을 일반화하고,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덕과 종교를 일상화하려 하였고, 그리고 국가제도에서는 위계질서 고착으로 사람들의 삶에 어려움이 쌓여감에 따라 백성들의 저항과 봉기는 시간의 흐름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학문(철학과 과학), 도덕과 종교는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려고 정교하게 또는 포괄적 일반화(보편화)의 길을 고안하였다.
학문에서 우선은 우주와 세상을 종합적으로 다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삶의 터전과 활동의 범위가 좁은 지역으로 한정되었던 시절이었다. 편리와 안락을 구하기 위해 좀 더 넓게 또한 삶의 과정에서 깊이를 들여다보면서, 자연의 이해에 두 갈래의 사유가 달리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학문의 체계가 성립하는 시기와 제도의 위계질서와의 시기가 서로 비슷하게 일어나며, 문자의 전승으로 점점 더 길고 견고한 체계를 이루어 가면서, 완전한 체계를 위해 비교와 대조, 비판과 정립, 수정과 재정립 등을 거쳐왔다.
체계의 성립에서, 대체로 수학과 논리학에서, 공리와 공준을 기준으로 최상위의 원리(전제)의 성립을 긍정으로 세워야만 했다. 이런 원리의 성립에서 다음 규준과 규칙들을 이어가는 방식은 삶에 도움이 되고, 전달과 명령에도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런 원리에 맞게, 학문과 자연의 통합으로서 통일성을 세우고, 이에 비추어서 세상의 삶을 (자로) 재고 (수로) 헤아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연을 체계 속에 정돈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 자연이 체계 속에서 기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들은, 다음에도 동일하게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을 착안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이 동일하게 자동인형과 같지 않은 발생과 과정들도 있고, 동일성에 맞는 부분들 보다 그렇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는다. 어쩌면 사람들은 학문의 분화가 이런 다른 부분들을 달리 각각에 맞게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수학과 논리의 연역적 체계와 달리, 생물학과 사회학(생리학)은 생명과 경험을 바탕으로 실행 또는 실천하는 방식이 다른 만큼 다른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제와 같은 신의 절대성을 믿는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과 불안에 한편으로 공포와 위협으로 다른 한편으로 죄의식을 심으면서, 학문의 두 갈래와 달리 최상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유일신앙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선량한 백성을 마남사냥 하였다. 신앙의 제1원리 또는 제1의 신인 유일신이 인간의 논리적 사유의 극한이 만든 표상 또는 상징일 뿐이라 말하는 것이, 범죄 또는 악마로 취급하던 시절이 있었다. 표상 또는 상징이 검증할 수 없는 선전제로서 이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착각이라고 해도, 신이 실재한다고 믿는 자들은 착각이라 말하는 자를 죽이려 든다. 그래야 자기들의 이야기가 맞고 통용된다고 믿고 산다. 이들은 한 방향의 인식(un bon sens)에 타의 방향을 내치고, 악마화 하고 있는데, 다른 방향에선 현자는 그 한 방향이 여러 방향 중의 하나이라 한다. 그 유일신도 신앙하는 방식들에 따른 각각의 신이라는 한다. 각 신이란 빛의 발산이 무수히 많은 방향으로 발산한다는 것이 자연의 이법에 닮았다.
수학과 논리학에서 공리와 공준을 기준으로 삼고, 이 기준에 적합하지 않는 다른 것을 부정하려 한다. 다른 것을 부정함으로서 자기 자리로 되돌아온다고 착각한다. 생명은 다른 길을 창안하고 발명하며 회오리처럼 확산되어 나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과 논리의 적용이 사실과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많다. 이런 의미(방향)에서 연대와 계약, 상호호혜가 삶에서 필수적이다. 다른 한편, 자연학과 생물학에서는 이법과 섭리를 근거(이유)로 한다. 이법은 원리와 달리 방향의 다양성의 생산한다. 그리고 그 방향들 각각에 따른 삶에 대한 존중과 상부상조가 필수적임을 안다. 크게 보아 두 체계(수학 대 생물학) 사이의 차이가 있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함에서 각 학문의 성립과 더불어 자연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예를 들어, 남과 여는 수학과 논리에서 다루듯이 반대도 대립도 아니며, 소위 말하는 반정립을 재정립하는 변증법적 해결이 있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적대적 모순의 통합으로 여기는 배중율의 원리로 다루어서도 안 된다. 생물에 관한 담론은 수학과 논리학의 원리로도 천체물리학과 미세물리학의 법칙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생명체, 인간들 사이도 상호호혜의 연대, 자연권의 양도 없는 자유 실현 또는 공화(제)를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전자는 진리와 거짓을 가르며 판단과 심판을 하려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삶의 연결과 공감으로 자기 위상 또는 다른 길 사이의 공감성을 찾으며, 평결과 연대를 이루려한다.
아마도, 이런 원리와 이법 사이의 차이는 사회제도 안에서 사법과 민법의 차이와 닮았으리라, 위계 속에서 지배와 명령에 따를 것을 강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과,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공감하고 공통분모 속에서 서로의 부분 또는 참여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 후자의 경우에 사회제도에서 집회 결사의 자유가 있다. 전자에서는 제도에 맞지 않은 이들을 마남사냥하거나, 보안법이나, 메카시수법처럼 빨갱이를 만들어서 편을 갈라서 죽이거나 감옥으로 보내거나 입과 글들을 틀어막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비해, 세상에 함께 산다는 것은 다른 생각과 다른 동아리가 잘 어울리는 것이라는 생각이며, 20세기 후반의 다양체(다중성, 다중지성), 또는 국제 사회의 다극체라는 용어가 등장하면서 이런 사유가 일반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분할과 분류의 구별을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에 서양 사상의 도래 140여년에 앵글로색슨의 철학이 철학이라고 알고 있는 남녘의 젊은이들에게 진솔한 다양성의 철학교육이 절실하다.
철학교육의 필요성은, 현재 남녘은 일제의 연속인 독일철학, 미국 제국의 언어분석의 철학으로 되어 있는데, 이와 다른 공동체의 철학으로서 자연과 생명, 그리고 우주발생론을 다루는 방식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 휴머니스트가 아니라 휴머니떼르, (네오)리버럴리스트가 아니라 리베르떼르로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게다가 후자의 공동체로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유를 마남사냥 하려드는 국가보안법은 철폐 되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젊은이들이 원리의 사유와 이법의 사유를 겸비하면서, 전지구적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젊은이 세대는 다극체제 세계 속에서 우리에 맞는 다른 세상을, 다른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39, 57VMG) (3:38, 57VMI)
서울대 교수 연구자들의 선언문 속에서 반성
<우리 서울대 교수·연구자들은 국민과 역사에 대한 부끄러움, 사죄와 통탄의 심정으로 윤석열 정부의 퇴진을 촉구합니다. 서울대 교내 곳곳에 나붙은, 윤석열과 동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제자들의 대자보가 양심의 거울처럼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이끌었던 지성의 전당, 그 명예로운 역사의 흔적을 윤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공직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서울대가 교육과 연구에서 제대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가르치지 못한 채 ‘영혼이 없는 기술지식인’을 양산해 온 것은 아닌지 참담하고 죄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24년 11월 28일
윤석열 대통령 퇴진과 김건희 특검을 촉구하는 서울대학교 교수·연구자 일동
11월 28일 14시 현재 총 52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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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버리고 짐승이 되다.
< 4. 대통령 윤석열 씨의 경우는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는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다고 우기는 ‘거짓의 사람’입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은 다 없애고, 쳐서 없애야 할 것은 유독 아끼는 ‘어둠의 사람’입니다. 무엇이 모두에게 좋고 무엇이 모두에게 나쁜지조차 가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앞세우는 ‘폭력의 사람’입니다. 이어야 할 것을 싹둑 끊어버리고,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을 마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하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민이 맡긴 권한을 여자에게 넘겨준 사익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 그러잖아도 배부른 극소수만 살찌게, 그 외는 모조리 나락에 빠뜨리는 이상한 지도자입니다. 어디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파괴와 폭정, 혼돈의 권력자를 성경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다니 7,7)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는 통에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친 선열과 선배들의 희생과 수고는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양심과 이성은 그가 벌이는 일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24.11.28.
하느님 나라와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하며, 천주교 사제 1,466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