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SANTO DOMINGO DE GUZMAN, 1170-1221 ; (라)DOMINICUS, (영) DOMINIC, (프) DOMINIQUE)는 스페인 북쪽의 부르고스(Burgos) 근처에 있는 깔라루에냐(Calaruega)에서 귀족인 아버지 펠릭스(Felix)와 어머니 제인(Jane)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구미엘(Gumiel)의 수석사제였던 자기 삼촌으로부터 사제가 되는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7세에 팔렌시아(Palencia)대학에 들어가 그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196년 오스마(Osma) 교구의 주교 디에고(Diego)의 부름을 받아 주교좌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으며, 1203년 오스마 주교의 로마여행을 수행하였다. 남부 프랑스지역을 여행하던 중 당시의 이단인 카다리파(Cathars, 일명 알비파, 물질적인 세계는 악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저등한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주장한 이단)의 지도자들은 잘 교육받고 조직적인 면에서 막강하였으며 민중들에게 존경을 받는 반면 카톨릭의 사제들은 경멸을 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카다리파의 지도자들만큼 금욕적이고 헌신적인 인물들을 길러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여행 중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에게 설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갖게 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남부 프랑스지역에서 이단을 몰아내기 위해 적절한 인물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도미니크는 설교자로서 남부 프랑스로 보내어졌고. 도미니크는 그곳에서 카타리파 이단들이 비록 진리에 서있지는 않았으나 청빈한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있음을 보고, 말로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설교할 때 진정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와중인 1216년 오순절 경에 설교자 수도회를 설립하였는데, 1216년 12월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가 성어거스틴 규율을 채택한 설교자 수도회로서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의 창설을 인가하였고,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는 1217년부터 카다리파 거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도미니크는 1207초 프루예(Prouille)에 카타리파에서 개종한 여인들을 위한 수녀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도미니크 수도회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도미니크는 청빈을 강조하여 1220년 제1회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 총회에서 탁발(구걸, 그 당시까지의 성직자들의 구걸생활은 금지 금지되어 있었다)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규약을 제정하였는데 개인도 교회도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수도사 개인은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수도원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도미니크 설교수도회는 수도원의 재산 소유도 불허하였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된 프란시스 수도회와 함께 중세 카톨릭의 양대 탁발 수도회라 할 수 있다.
도미니크는 1221년 8월 6일 볼로냐에서 세상을 떠났다.그가 죽고 난 후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는 영국,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독일 등 전 유럽으로 급속히 확장되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설교와 연구를 강조했다. 성서와 학문연구를 추구하는 수도회로서 "우리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설교를 잘 해야 한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한다" 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까닭에 이들을 설교자수도회(Order of Preachers; Predigerorden;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라고도 부른다. 도미니크 수도사는 설교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4년 동안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다. 실제로 그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볼로냐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들은 대학도시에 선교사들을 보냈으며, 남자수도사는 설교에 종사하고 여자수도사는 교육에 봉사하였다.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의 특징은 주지주의적이며, 때로 귀족적인 면도 있었다. 그들은 밖은 검은색이고 속은 흰 모자가 달린 검은 외투를 착용했고, 높은 직위에 있는 자는 흰색모자, 그리고 일반회원들은 검은색 모자를 썼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검은 의상 때문에 검은 옷의 수도사들(Black Friar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핵심인물들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엑크 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등이 이 수도회 출신들이었다.
이 교단의 또한가지 주요한 활동은 이단을 개종시키는 것으로서 1232년부터는 종교재판에 관여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이단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그들의 비정통적 신앙을 깨우쳐 회심을 유도하고 거짓 가르침에 대항하였으나 1415년 보헤미아(현 체크공화국)의 개혁자 얀 후스에 대한 재판에서볼 수 있듯이 고문과 화형이라는 폭력을 사용하고 중세에 마녀사냥을 주도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들은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교황의 사냥개"(Sp rhunde des Herren)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미니크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대적이었다. 당시 추기경 카제탄(Cajetan), 잉골스타트의 신학교수 에크(Eck), 그리고 면죄부 설교자 텟첼(Tetzel)등은 면죄부판매를 행한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루터와 가장 직접적으로 대치한 도미니크회의 사람들이었다. 종교개혁이 성공하여 개신교회가 설립되고 이에 자극받아 1534년 카톨릭 자체내의 개혁운동으로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파리대학에서 예수회(Jesuit)가 창설된 후(이것을 count-reformation이라고 부른다) 도미니크회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다시금 주로 학문적인 분야에서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오늘날 도미니크회의 중심지들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그리고 비유럽국가들에 산재해 있다. 한국에서도 현재 도미니크 설교자수도회가 활동중이다.
2002. 10. 1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