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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벧엘교회 구요셉목사님
교회가 무너지고 있다! 도둑과 창기와 살인자로 가득 찬 욕심의 예배!! 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어제 저녁에 지지난주의 메시지가 올라간 댓글을 한 번 더 확인을 해봤더니 교회에 대한 욕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불신자분들도 많이 찾아오셨고,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도 불만들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가고 싶지 않은 분들의 댓글들도 굉장히 많으셨다는 것은 교회가 처해 있는 현 주소입니다. 어제 통계를 봤더니 2012년에 한국의 개신교회가 22.5%였는데 이때를 정점으로 해서 2022년에는 15%로 하락해서 굉장히 떨어졌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그렇습니다. 아무 종교도 갖고 있지 않은 무종교인이 가장 많이 늘어나서 우리 국민은 무종교인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종교인의 66%가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던 분들입니다. 이 분들이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굉장해서 종교에 관심이 없어진 분이 35%이고, 불신과 실망 때문에 교회를 떠나신 분이 29% 입니다.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분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서 개신교인의 26.6%가 가나안 성도입니다. 무려 4분의 1이 넘는 성도가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신 분들이 종교를 가진 분들에 대한 호감도가 기독교는 약 33%, 불교와 카톨릭은 52.5%, 51.3%입니다. 결국은 종교가 없는 분들이 가장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고 일반인들에게 교회는 배척의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비호감도에서 49%가 매우 부정적으로 교회에 ‘교’자만 나오면 몸서리친다는 분들이 무려 반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제가 어려서 교회 다닐 때는 크리스찬이 직장에 취직을 하면 그 당시에는 교인이 얼마 안 됐고 한국에서 기독교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직장에 기독교인이라고 적으면 무조건 합격시킨 이유가 크리스찬은 정직하다, 성실하다, 나는 크리스찬이 아니지만 크리스찬이니까 믿고 쓰겠다고 취직이 잘 됐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라고 적으면 안보고 탈락시키는 분들이 많고 과거에 숫자가 적었을 때는 질이 좋았었는데 수가 많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질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계속 줄어들고 있고, 사실은 모든 종교가 없어지고 있으며 무종교인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선진국이 되면 종교가 필요 없어지고 종교를 믿지 않는 분들이 급속히 늘어납니다. 한국도 비종교인이 종교인보다 훨씬 많습니다. 줄어드는 속도가 가장 빠른 게 불교이고 그 다음이 기독교입니다. 희망적인 것은 청년층에서 숫자가 적지만 기독교인 숫자가 많고, 현재 양산되었던 우리 연령대의 기독교인과 숫자가 비록 적지만 청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많이 달라서 저는 여기에서 희망을 얻습니다. 이것은 종교에 관한 것을 우리가 이해를 하면 됩니다.
왜 사람들은 종교를 가질까요? 종교를 가지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교회에 오신 분들도 두려움 때문에 오신 분들이 많은데 교회에 오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해드립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절에 가고 점치러 가면 두렵지 않도록 이야기를 해주고 안심을 하고 안정이 되어서 신경정신과를 대신 해주는 경향이 있고 댓가를 지불하고 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와 계신 분들이 교회에 많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오신 분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독교인에 대해서 비호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분들 중에서 크리스찬이 아닌 분들이 기독교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언가 복을 받기 위해서 옵니다. 불교에서 어디 가면 아들 잘 낳는다, 어느 절에 가면 사업이 잘 된다고 몰려가는 곳도 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특정한 종교를 찾아가는 경향들이 많이 있고 어디를 가든 똑같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것과 절에 가면 복받는다는 말이 다른게 없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정확히 이해하셔야 됩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은 급한 일이 생기면 가령 병이 크게 들었다든지, 사업이 망할 지경이 되었다든지, 자녀에게 큰 일이 생겼다든지, 큰 충격적인 일이 있을 때 기적을 원하게 됩니다. 기적을 원하게 되어서 교회를 찾고 무당을 찾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기를 원해서 기도원에 가서 뿌리를 붙잡고 기도합니다. 무당이 칼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이 신의 계시와 기적을 바랍니다. 원하던 기적이 일어나면 크리스찬이 된 분들이 있는데 그걸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머무르면 아직 종교인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가 특정한 일을 겪고 나서 병이 나았다 하면서 자랑을 하고 하나님이 특별히 역사했다고 합니다. 무당 찾아가서 문제 해결된 분들도 많고 절에 가서 병 고친 분도 많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잘 아는 이단에 가서 병이 나아서 그 이단에 평생 붙잡힌 분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왜 거기 붙잡혀 있을까요? 자기의 급한 일이 해결되면 붙잡히는 것인데 교회에만 그런 일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이 핵심인 줄 알고 교회를 가서 기도하면 쓰러지고 금가루 은가루 떨어지고 거기에 예수 있는 줄 알고 찾아가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과 예수와는 무관합니다. 여기까지 잘 생각을 하셔야 되고 잘못하면 응답한다는 개념에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응답받고 기적을 일으키고 권능을 행하던 분들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치고, 주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시행은 해주셨으되 그들의 이름을 모르시는 것은 불법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고 큰 이적을 보고 교회에 오신 분들은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매일 응답하시고 말씀하시고 꿈에 보여주시고 늘 동행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과 신앙은 무관합니다. 잘못했다가 여러분이 만난 신이 성령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굉장히 유의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도 종교인이고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헷갈리는 바로 사람이 가장 추구하는 지적 욕구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공부시키는 것은 충족되지 않는 지적 욕구를 만족하기 위해서 내가 낮은 학교 갔지만 자식은 좋은 학교 보내기 위해 부모들은 생명을 겁니다. 사람은 지적 욕구가 자기 생명을 내줄만큼 강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고 했습니다. 하와는 무엇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보암직한 것도 본능입니다. 우리는 TV에 나오는 보암직한 것을 봅니다. 오늘 아침에 나올 때는 보암직하게 부끄럽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꾸미고 옵니다.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는데 죄를 범함으로 흉해졌고 내가 흉한 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꾸미는 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얼굴을 부끄럽지 않게 치장을 하고 오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보암직한 것들입니다.
먹음직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기도 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장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같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본능속에 숨어 있는 가장 큰 욕구가 지혜에 관한 욕구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장 존중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는 분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을 깨닫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분들을 찾고 그분들을 가장 존중합니다. 종교에서 가장 높게 여기는 것이 서양이었든 동양이었든 마찬가지입니다. 유교도 사실은 종교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공산주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도 종교입니다. 사람이 가장 추구하는 것이 지적 욕구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무종교인이라고 하지만 지적 욕구에 관한 것은 치열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창조적인 지혜를 주셔서 모든 인류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활용하고 생육하여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말씀하시고 모든 인류는 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만큼 지혜롭고 싶었고 마귀가 하나님만큼 지혜롭고 싶어서 망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종교가 아닌 것 같지만 가장 큰 것이 바로 지적 욕구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들 중에서 사람들이 그 교회에 가면 너무 좋은 교회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좋은 신대원을 나오셨고 유학을 갔다 오셨고 고스펙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미국의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으셨고 누가 보아도 뛰어나신 분의 설교를 들으면 어떤 욕구보다 더 만족됩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이것도 사람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들이고 여기까지가 종교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성철 스님의 깨달음에 사람들이 존경하고 감동하는 것이 지적 욕구입니다. 공자 선생님께 왜 다들 고개를 숙입니까? 사람들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지적 욕구를 충족해주는 분으로 믿는 분들 많은데 여기까지는 종교입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고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간단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가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내 마음에 품고 사는 크리스찬이 모여야 진짜 기독교이고 이들이 빛과 소금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팔복 끝에 말씀하신 것이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다만 밖에 버려져 밟힐 뿐이니라 하셨는데 현재 기독교가 밖에 버려져 밟히고 있습니다. 교회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예수를 믿고 예수께 예배드리러 왔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꽉 차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종교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전부 개혁해야 되고 숫자가 아니라 진짜 예수를 믿는 자들이 회복되셔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7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심령이 가난한 게 무엇인지 지금까지 고민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게 뭔가를 알아야 천국이 저희 것인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제가 다시 생각하고 또 상고했는데 이번 주에 한 번 더 보겠습니다. 심령은 마음이고 심령과 마음은 8절에 마음이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곧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낮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인데 놀랍게도 마음만 낮아져서 천국 갈 수 있을까요? 마음이 낮아진 대상이 하나님께만 있지 않고 사람에게도 낮아져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마음이 낮아져야 되고 사람 앞에도 마음이 낮아져야 됩니다. 우리 마음은 자꾸 높아지려고 해서 ‘가난하다’는 히브리어에 고통을 받다. 억압을 받다는 뜻이 있습니다.
종교라고 말씀드렸던 대부분의 내용들은 나를 만족시키고 높이려고 하는 행위들입니다. 기독교의 요체는 나를 만족시키고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높아지고 싶은 내 마음을 억누르고 나를 낮추는 반대의 행위입니다. 많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는 것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만족시키면서 비기독교인들을 낮춰보고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질은 너 자신의 마음을 억눌러 낮추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기의 마음을 억눌러 낮추라는 뜻입니다. 정말 자기 마음을 억눌러 낮추라는 뜻인지 마태복음 18장을 읽으면 확실하게 들어옵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절부터 6절 10절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임을 18장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린아이 하나라도 영접하지 아니하면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한다는 것은 선대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또’가 붙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께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입니다. 마음으로 낮추는 것은 하나님 앞이고 행동을 낮추는 것은 사람 앞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겉으로 한 행동을 보고 진짜 마음이 낮아져 있음을 인정하시겠다고 합니다. 천국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심령이 낮아진 것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마음 중심을 먼저 말씀하시고 우리의 영이 거듭남에 대해서 얘기하신 것입니다. 거듭난 자는 거듭남에서 그때 감사하고 끝나지 않고 거듭남을 계속 행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뒤에 ‘또’라고 하신 이 말씀은 너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영접하고 소자 하나라도 존중하고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낮아진 상태로 인생을 사는 것이 심령이 낮아진 것입니다.
기독교는 ing (진행형) 이고 개념의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것은 그 상태를 유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지하지 아니하면 일회성 고백으로 끝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보았더니 항상 다른 사람에게 선대하며 존중하며 귀하게 여기라 하시고 그리할때 심령이 낮아진 것을 인정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이게 전부 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하나님 곁을 떠났습니까? 자기를 높이려고 할 때,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 할 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였 때 하나님이 버리신 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주셨고 아담과 하와가 받지 못한 건 딱 한 개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 말고는 다 주셨고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 말고는 다 받았는데 하나님같이 되고자 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마귀 되었던 방식으로 하와에게 자기의 불만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에 걸려든 것입니다.
사탄과 인류가 자기를 높이려고 할 때 멸망당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면 대부분 물질욕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이 욕심은 높아지려는 욕심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자기를 억누르고 낮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이 성경 전체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다가 멸망당했습니다. 아까 설명했던 두려워하는 것과 복 받는 것 말고 종교의 마지막 끝판왕은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높이는 것이고 지혜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예수와 무관합니다. 여러분을 낮추셔야 되고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행위를 복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바라크〕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겸손히 낮아지는 자가 바로 천국 가는 자입니다.
우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나를 높이기 위해서 물질이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고 외형도 필요해서 성형을 하고 더 아름답게 하려는 것은 자기 높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깨끗하고 아름다우면 되고 부끄럽지 않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자기를 높이기 위한 것들이고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낮추어야 하나님은 그런 자와 함께하십니다. 우상은 자기를 높이고 마음을 높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고 예수를 믿는 분들인데 헛된 신을 여러 가지 갖고 있습니다. 보암직한 신도 가지고 있고 나에게 먹을 것 주는 신도 갖고 있고 나에게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은 다 종교 행위입니다.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똑같습니다. 천주교에 가서 들어보나 불교가서 하는 제사법이나 보면 비슷합니다. 자기를 높이기 위한 행동들이어서 종교 행위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가기 때문입니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 신을 섬기고,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섬기고, 하나님께 존중받으려고 섬깁니다. 급한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신을 섬기고, 지적 욕구가 충만하기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들은 다 자기를 높이는 행위들입니다.
오늘날 왜 자꾸 종교를 떠날까요? 잘 살게 되었더니 만족이 되고 물질이 풍족해지고 외형적으로도 잘 꾸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옷도 좋은 것을 살 수 있어서 만족이 되니까 종교는 필요 없고 종교를 가진 분들이 숫자가 적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지만 실제로 종교를 믿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다시 예수께 돌아와야 됩니다.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무엇입니까? 네 마음에 있으면 바깥으로 우상도 섬기고 행동을 해서 예수님이 심령 곧 마음속에 하나님을 섬기고 그 아래에 있으라는 똑같은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고, 이 말씀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똑같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며 삽시다. 우상은 무언가를 높여주는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개혁해야 되고 완전히 예수께 돌아와야 합니다. 숫자만 많고 천국 갈 자가 없는데 정말 정신 차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장 2절부터 4절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자식을 양육하셨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했다고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겉으로 숫자는 많지만 실제로 무너지고 있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범죄하고 행위가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다. 율법의 행위는 제사 지내고 할례하는 이런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하니까 바울이 딱 끊어서 한 말입니다. 율법의 행위와 (삶의) 행위가 어떻게 똑같은 말입니까? 여기 4절 말씀에도 행위가 악하여 하나님이 분노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1장 10절부터 15절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하나님이 교회가 하는 예배 행위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분노하고 계십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거룩한 행위를 많이 하는 오늘날 예배는 예식이 되어버렸고 종교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거룩하게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두렵지 않게 해 주시고, 내가 하는 산업에 함께 해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절에 가는 것과 교회에 가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분노하고 계십니다. 무엇을 바라고 오는 것과 자신을 높이고 만족하기 위해서 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시고 삶이 예배가 아닌 것을 어떻게 받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삶 속에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선을 베풀지 아니한 것을 어찌 하나님을 믿는 자로 여기겠느냐고 통탄하십니다.
아무리 예배를 잘 드려도 오지 말라 하시고 아무리 기도할지라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1시간 기도해서 안들어 주시면 3시간, 어떤 목사님은 하루에 5시간 기도 안하시면 불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10초만 해도 불안이 사라집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분이 우리 아버지인데 왜 불안합니까? 자기가 우상되어서 5시간 기도해도 불안하다니까 7시간 기도하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기도는 우상숭배가 되었고 자기를 괴롭혀서 신을 감동시키는 행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행위 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실제 행위는 우리의 마음을 고쳐서 낮은 자 되라 하신 것입니다. 15절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7시간 기도는 아무 상관없고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자기의 예배 행위로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뭔가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이미 돌봐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악인도 돌보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함께 비와 햇빛을 내려 주시고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한 것은 누구를 죽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의 행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무관심은 살인 행위라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통탄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21절에서 23절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오늘 제목을 여기서 받은 것인데 지금까지 제목이 너무 과격해서 순하게 하려고 했더니 하나님은 저보다 더 세게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관심없고 이웃을 업신 여기는 것은 살인 행위라고 말씀하시고 내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피와 은혜, 긍휼과 사랑으로 구원받아 영원히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전하면 물을 섞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보면 물이 너무 많아서 피는 안 보이고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놓고 기독교라고 하는데 주님은 포도주만 먹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실하던 성읍이 창기가 되었는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기가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 믿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마음속에 자기를 높이고, 물질을 사랑하고, 스스로 지혜 있기를 원하며, 남과 지혜를 경쟁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왔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사랑하지 않고 너를 사랑하고 있는 창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적과 짝하며 뇌물을 사랑하고 목사부터 타락해서 교회도 물질 만능에 물들어버렸습니다. 모든 교인들은 예수 믿고 복받아서 물질이 충만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온 이유와 목적이 자기의 만족과 생활의 안정과 풍요를 원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여러분이 낮추고 계시면 자연히 주시고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의 그릇대로 안받는 게 복이거나 겸손히 있으면 채워주십니다. 많고 적음은 관계없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다 자녀입니다. 인생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은 아버지시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제일 좋은 것으로 주셨다고 믿으세요. 마누라를 이상한 여자 만났는데 그래도 제일 좋은 분 주셨다고 믿어도 아내가 안 바뀌면 그분이 나를 차고 갑니다. 어찌 어찌하여 차임 당한 여러분 축복드립니다. 예수만 믿고 천국만 가시면 하나님은 나에게 최선으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자녀도 애먹이는 자녀를 복받았다고 생각하시고 나를 고치기 위해서 좋은 자녀 주셨다고 믿고 사랑하시고 섬겨주십시오. 그 자녀는 반드시 구원받을 줄 믿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인은 감사해야 됩니다. 아버지가 나를 진심으로 돌볼 것이니까 내 생명을 가져가셔도 되고 내가 생명을 드려야 천국 갈 수 있으니까 각자의 환경에 맞춰서 아버지가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걸 믿으시면 달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고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들은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예수를 구하고 천국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걸 더하시리라.말씀하십니다. 부가서비스에 집중할 필요 없고 예수를 구합시다. 천국을 사모합시다.
이사야 1장 29절부터 31절
29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 나무는 아까 말씀드린 것들과 종교 행위는 전부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교회에 와서 우상숭배 행위를 하고 있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네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잎사귀 마른 상수나무 같고 물 없는 동산같이 되어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라고 지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수 믿는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6절부터 20절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마음을 씻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끗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회개는 내 행위를 고치는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 우리가 고쳐야 될 것은 생각을 고치셔야 됩니다. 항상 좋게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할 줄 알아야 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되고, 말할 때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며. 이 악업은 삶 속에서 먹고 살려고 하는 악한 행위들, 악행은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우리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전부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다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너희가 나를 닮으라 하십니다. 예수를 닮아야 천국 갑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 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 곧 심령이 예수님의 심령을 배웁시다. 온유한 것은 ‘대답하다, 순종하다’ 뜻이고 겸손은 가난하여 자기를 낮추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섬깁니다. 놀랍게도 천국은 섬기는 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배우라 하신 것이고 우리 그렇게 섬기는 자 됩시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누가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함께 하나가 되어 웁시다.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합시다.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 말씀을 하십니다. 행위는 하나도 안 바꾸고 이 구절만 외우고 기도만 하면 다 죄를 사해 주신다고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를 돌이킵시다. 예수님을 따라 온유한 자 되고 겸손한 자 될 때 주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진홍 같은 죄가 양털같이 될 줄 믿습니다. 어린 양 예수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그를 따라갑시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은 주님이 이 성경 전체를 왜 쓰셨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성경 말씀 전체는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를 깨달아 알아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나를 낮추고, 내가 이웃에게 가서 나를 낮추고 살도록 말씀하신 걸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이 말씀으로 다시 설명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심령을 가난한 채로 살겠습니다.
늘 나 자신을 낮추고 살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