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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일어나시오. 그런 호칭을 감당하기 어렵소. 난, 지금, 지금.”
조영이 떠듬거리다 말을 이었다.
“지금, 당나라 무태후의 일개 시위장에 불과하오.”
조영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앞가슴에 특이하게도 한 송이 진분홍색 장미가 수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조영의 말에 그녀가 일어나며 복면 사이로 두 눈을 크게 뜨고 조영을 바라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태자 전하, 제 이름은 미시아美示雅라고 합니다. 제 왼편에 앉아계신 어르신이 저의 외할아버지이십니다.”
“오, 그렇군요. 임대인의 손녀이시군요.”
조영이 받았다.
“태자 전하, 그런데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시진 않나요?”
“···?”
조영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 녀석이 아직도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어서 전하께 사죄를 드려라!”
임씨 노인의 말이다. 그러자 고승이 말렸다.
“임대인, 이곳은 우리 사람들뿐이니 조영에게만큼은 영손녀令孫女의 얼굴을 보여주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오, 그렇다면 그건 큰 영광입니다.”
임씨 노인이 이렇게 대답한 후 주변을 한 차례 휘둘러보았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복면 괴한들은 일제히 방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그들 역시 미시아라는 이 여인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되는 것 같았다.
복면 괴한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것을 확인한 여인은 얼굴에서 천천히 두건을 벗었다. 그와 동시 삼단 같은 머리털이 끝만 묶인 채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실내의 촛불 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 여, 여미아···!?”
소스라치게 놀란 조영이 말을 더듬거렸다.
조영의 놀란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다보던 여인이 갑자기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호, 호호호!”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깜짝 놀란 듯 얼른 웃음을 추스르며 그녀의 외조부와 고승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외조부도 놀라서 그녀를 나무란 후 고승에게 사죄했다.
“소신의 손녀가 아직 철이 없어서 노황 기하 앞에서 이런 방자한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습니다. 부디 용서하소서, 노황 기하!”
조영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여인을 쳐다보고 있다가 겨우 떠듬거리며 임씨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아는 여미아라는 아가씨와 너무나 닮아서 제가 실언했습니다. 아가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태자 전하의 잘못도 아닙니다. 실은, 이 아이가 여미아의 언니입니다. 둘은 일란성 쌍생아죠.”
임 대인이라는 사람이 해명했다.
“아, 그렇군요. 어쩐지··· 하지만 두 아가씨의 성격은 일견지하에 판이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미시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조영에게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뭐랄까? 여미아 아가씨는 말이 없고 조용하고 차분한, 말하자면, 정적이 깃든 새벽 호수 같은데, 미시아 아가씨는 그 호수의 물결을 살랑거리게 만드는 맑은 바람 같습니다.”
조영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용한 것을 감지하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꽃에 비유한다면, 여미아 아가씨는 봄철에 화려하게 피어나는 진분홍 모란이나 백첩홍매화를 닮았고, 미시아 아가씨는 여름철에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사람의 후각을 강렬히 마취시키는 진분홍 장미와 흡사하다고나 할까요?”
조영은, 그녀의 흑의 가슴 쪽에 진분홍색 장미가 수 놓여 있는 것을 의식하며 말했다.
장미여인 미시아가 그의 말을 듣고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다가 물었다.
“태자 전하, 똑같이 진분홍색인가요?”
조영이 멋쩍어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녀가 되물었다.
“여미아하고는 어느 정도 친밀하신가요?”
조영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녀가 저를 대할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깍듯했으며, 저 역시 그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앞가슴에 장미가 수놓인 여인 미시아는 조영을 향해 환한 웃음을 한 차례 지은 후 두건으로 다시 얼굴을 감쌌다.
조영은 여미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지금 여미아 아가씨는 어디에 있는가요?”
“여미아는 태자전하와 동행하지 않았던가요?”
“네, 맞습니다.”
그녀가 다시 킥킥거리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제가 여쭈어보아야 할 말이 아닐까요?”
조영은 한참 동안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나 불민하고 어리석어, 우리 일행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신은요?”
“물론 나 자신조차도 건사하지 못했죠.”
“그러면 어떻게, 일국의 태자로서 훗날 만백성을 지킬 수 있겠어요?”
장미여인 미시아의 말은 예리한 비수처럼 조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이런 무례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고승과 임씨 노인 두 사람 다 그녀에게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조영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장미여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대기는 무거웠다. 조영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 전하! 저를 따라 오시겠어요? 제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조영의 귀에 장미여인 미시아의 고운 목소리가 울렸다. 조영이 고승을 쳐다보니 고승이 머리를 끄덕였다.
장미여인 미시아가 허리를 숙여 조영에게 예를 표하며 밖으로 나갈 것을 권했다.
“전하께서 먼저 나가시면 뒤를 따르겠습니다.”
조영이 밖으로 나오니 어느 새 날은 환하게 밝아있었다. 장미여인 미시아는 조영을 집 뒤뜰로 안내했다. 뒤뜰에는 널따란 연무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손에 검을 든 흑의인들이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에게 절했다. 그들 모두는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었다.
“태자 전하 앞에, 어서 무예 시범을 보이세요!”
장미여인 미시아가 명하자, 흑의인 중 한 사람이 검을 들고 천천히 연무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조영과 장미여인 미시아에게 한 차례 정중하게 절을 한 후 그 흑의인은 천천히 검을 움직이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처음에 느긋한 눈길로 바라보던 조영의 자세가 점점 긴장되고 그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한 것은 흑의인이 검을 휘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흑의인이 구사하고 있는 검법은, 조영이 익히 알고 있고 천만번도 더 연습해 그의 골수 속에 새겨진 해모수 임금의 삼극팔괘검법이었다.
하지만 흑의인의 신법을 보라! 나비처럼 날렵함과 맹호처럼 웅위로움, 날아가는 가랑잎처럼 가벼움과 태산처럼 무거움, 기기묘묘한 변화와 완급의 율동, 규칙적인 듯하면서도 예측불가능하게 불규칙적인 몸놀림, 검과 몸의 혼연일체.
그것은 조영이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신묘하기 짝이 없는 검법이었다. 자신이 익힌 삼극팔괘검법임이 분명한데도, 그 흑의인이 구사하는 검법은 자신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하기 짝이 없고, 웅장하기가 비길 데 없으며, 쾌속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략 삼사장三四丈의 원폭 안에서 구사하는 흑의인의 검법은 그 안팎에 설사 천군만마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죄다 요절낼 것처럼 사방팔방을 그물처럼 휘젓고 폭풍처럼 뒤집어 놓았다. 흑의인이 검법을 마치고 나자 조영은 마치 한바탕 회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흑의인이 삼극팔괘검법 시범을 끝낸 후에도 조영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조영의 정신을 깨운 것은, 아리따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태자마마, 검법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네? 아, 정말 놀라운 검법입니다.”
“태자마마께서도 흥미로우시다면, 소인들의 안목이 넓어지도록 저희들에게 태자마마의 검술을 친히 펼쳐 보여주실 수 있는지요?”
장미여인 미시아가 검은 두건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조영은 그냥 속이 떨릴 뿐이다. 조영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방금 전 흑의인이 보여준 바와 같은 초고도 경지의 검법과 신법을 전개할 자신이 없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해모수 임금의 삼극팔괘검법에 이토록 초절하게 정통하고 있을까?’
조영이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토로했다.
“나는 워낙이 천학둔재라, 저분 같은 놀라운 솜씨를 보일 재간이 없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장미여인 미시아가 낮은 소리로 몇 마디 내 뱉었는데, 그것은 조영의 신경을 사무치게 찢어놓았다.
“나라 잃은 난세에, 무예가 무명 소녀의 한 부하에게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다면, 어찌 고토를 회복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울 수 있겠습니까?”
장미여인 미시아의 말을 들어보니, 방금 전 신묘한 검술을 선보인 흑의인은, 미시아의 부하인 것 같았다.
조영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무예만 고절하다고 하여 고토를 수복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평소 조영은 자신의 무예에 대해 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적어도 낙양성 무술대회에서 중원의 무사들이나 이해고 등과 겨루어본 후까지도 그런 자부심은 여전했다.
물론 여미아라는 일개 비녀의 출현은 그를 당혹스럽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자신을 깊이 감추고 아무런 무예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여미아라는 이루하의 시비가, 위중한 순간들에 조영이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초절한 무예들을 몇 번 내보인 적이 있었다. 그 때 조영이 자신의 무예에 대해 회의를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미아의 쌍둥이 언니라는 장미여인 미시아와 이 흑의괴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수십 년 공부가 얼마나 미흡하고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깊은 우물 속의 개구리였는가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조영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신분도 체면도 모두 버리고, 겸손히 허리를 숙여 장미여인 미시아에게 절하며 말했다.
“저는 실로 지금껏 헛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장미여인 미시아는 조영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다가 물었다.
“태자마마께서 흥취가 있으시다면, 제가 이 사람을 상대로 약간의 권각법을 선보일까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영광입니다. 보여주신다면.”
조영은 체면을 제쳐놓고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장미여인 미시아가 좀 전에 검술시연을 보인 흑의인에게 손짓을 하자 그는 즉시 검을 빼들고 미시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미시아는 적수공권으로 그를 맞았다.
“사정을 보지 말고 공격하시오!”
장미여인 미시아가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흑의인에게 명했다.
흑의인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시아를 향해 검을 맹렬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미시아의 자태가 검속에 싸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의 시간이 지나도 흑의인은 미시아의 터럭하나 다치지 못한 듯 두 사람은 여전히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조영은 두 사람의 신법과 검법이 하도 현란해 도저히 그들의 신법을 일일이 읽거나 파악할 수 없었다. 웬만한 고수들이 서로 대결하고 있을 때, 곁에서 지켜보는 고수들은 대개 두 사람의 신법과 검법을 거의 소상히 식별할 수 있다.
하지만 조영은 두 사람의 수법을 눈과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속으로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무예의 길이 얼마나 깊고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얕은가를 절감했다.
뜨거운 숭늉 한 사발 정도 마실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미시아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이어서 흑의인은 왼팔로 오른 팔을 감싸 쥔 채 뒤로 물러났는데, 검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미시아가 어떻게 그를 물리쳤는지 조영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수법에 흑의인이 급소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자신이 검으로도 도무지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흑의인을, 적수공권으로 물리치는 장미여인 미시아의 무예에 조영은 경탄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영이 눈여겨 살펴보니, 흑의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장미여인 미시아는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자태와 호흡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장미여인은 흑의인들을 장내에서 내보낸 후 조영과 단둘이 있게 되자 조영에게 물었다.
“태자마마, 소녀의 하찮은 무예에 염증을 느끼지는 않으셨는지요?”
‘여태껏 내 앞에서 무예를 뽐내서고 무슨 말인가?’
조영은 속으로 불만이 없지 않았으나 웃으며 대꾸했다.
“아가씨의 무예는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고절한 기예입니다. 아가씨를 제외하고 단 한 사람에게서만 그런 출중한 무예를 언뜻 본 적이 있습니다.”
장미여인 미시아는 조영이 자신을 칭찬하다가 다른 어떤 인물을 언급하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저 같은 하찮은 무예는 강호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태자마마께서 그토록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근데 몹시 궁금합니다.”
“···?”
“저와 같은 무예를 보이신 분은 어느 고인이신가요?”
“아가씨도 잘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미아?”
“네, 맞습니다.”
“흥, 그 아이가 태자마마 앞에서 자신의 무예를 뽐내었다구요?”
조영이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아, 아닙니다. 무예를 자랑한 것은 결코 아니고, 평소에 전혀 무예를 모르는 여인처럼 행동하다가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치자 서너 번 정도 자기도 모르게 그 무예를 발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아이의 무예가 뛰어난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직감이랄까요? 저는 구사할 수 없는 무예였습니다.”
“그 아이가 그 동안 무예에서 얼마나 장족의 발전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조영은 미시아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몹시 알고 싶었으나, 얼마 전 방안에서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가 무안을 당했던지라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조영의 맘을 알아차렸는지 장미여인 미시아는 웃는 듯한 목소리로 조영에게 물었다.
“태자 마마, 여미아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염려되지 않나요?”
“솔직히 말씀 드려 걱정됩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도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장미여인 미시아는 동녘하늘을 쳐다보며 먼 하늘을 향해 말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셔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
“잊지 마십시오. 태자전하께서는 지금 자유로운 몸이지만 원래 저희에게 포로가 되어 여기에 오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건 조영의 부끄러움이었다. 조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흥! 대장부가 어찌 그리 기백이 없어요?”
장미여인 미시아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갑자기 냉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영이 두건 사이로 번쩍거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칼날처럼 번득이면서 동시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상한 색채를 담고 있었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원치 않게 일국의 태자가 되었다고 하나, 나는 원래부터 초야에서 자란 촌놈이며 의지가지없는 외로운 야인입니다.”
장미여인 미시아는 아침 햇살에 비친 조영의 아름다운 얼굴에 약간의 수색과 처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집어 삼킬 듯 응시하다가 말했다.
“세 갈래 길이 태자마마 앞에 놓여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즉시 고려의 황성으로 돌아가 황궁에서 태자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장미여인 미시아는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며 마치 시를 읊듯 천천히 작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둘째는, 당나라의 무 태후를 따라가 여전히 무 태후의 시위장수 노릇을 하는 거죠.”
“···.”
조영은 착잡한 심정으로 땅을 내려다보다가 심기일전하기 위해 하늘을 쳐다보았다. 장미여인 미시아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셋째는, 여기에 남아 우리 여미단麗美壇의 일원으로서 제 밑에서 제 부하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여미단? 이름이 고상하군요. 뭐하는 단체입니까?”
장미여인 미시아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조국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재당在唐 비밀결사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조영이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가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 조직의 회원들 외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알아서도 안 되는 비밀 중의 비밀입니다. 태자마마께서는 우리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서 이 극비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름이 하필 여미단입니까?”
“원래 저의 외조부께서 지으신 것인데, 여미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합니다. 끝에 무리 단團 자 대신 제터 단壇 자를 쓴 것은, 우리가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을 극진히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영은 고요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한 참 후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가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로 해야 하나요?”
“네.”
미시아가 짧게, 단호히 대답했다.
조영은 긴장하며 미시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미시아는 두건을 벗으며 그 아름다운 얼굴과 삼단 같은 머리채를 아침 햇살에 드러냈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얼음 같이 차가우면서도 옅은, 매우 기이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태자 전하, 제 얼굴이 어때요? 여미아보다 제가 더 못생겼나요?”
‘어쩜 저렇게 여미아와 똑같이 생겼는가? 하지만, 언행은 여미아와 어찌 저토록 다른가?’
조영은 그녀의 질문을 외면하며 달리 물었다.
“내게 시간적 여유를 주실 수는 없는지요?”
“드릴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여전히 냉정한 말투다. 조영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오, 하나님!’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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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5. 31.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