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조상들은 전통적으로 명문거족 일수록 풍수지리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
조선조에만 하더라도 왕으로서는 태조와 세조 임금이 유학자로서는 하륜, 정도전, 윤선도, 이의신, 스님으로는 서산대사 무학대사 그 밖에 남사고, 토정 비결로 유명한 이지함이나 대원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촌 집안의 경우 그 윗대 조상부터 양택의 풍수와 음택풍수를 매우 신중하게 수용하였으며 집안 스스로가 풍수지리에 정통한 인재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촌선생의 조상들이 남긴 유품중에서 풍수지리를 직접 활용하였음을 보여주는 패철과 '천제보좌도표'가 있었다.
풍수지레에 정통한 확신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북향 대문을 두었다는 것은 그 집안의 풍수지리에 대한 식견을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촌전기'에 따르면 원파기중(인촌의 양부)은 '장손으로 선산을 개수하고 묘각을 세우는 일로 출비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 백련암을 옮ㄹ기게 하고 그 자리에 선친의 묘를 잡은 것도 그의 노력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인촌 김성수 가문을 일으킨 장본인은 정씨 부인으로 일컬어진다. 장성에 살던 김영환 공은 고창 해리에 볼 일을 보고 돌아가던 중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정진사댁에서 하루밤을 유숙한다. 그집 사랑에서 술잔을 나누며 김공과 정진사는 의기가 상통하여 사돈을 맺기로 언약한다. 정진사의 고명딸과 김공의 세째 다을 요협이 결혼하여 정착한 곳이 인촌 마을이며 -인촌(仁村) 김성수는 자기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호로썼다- 이곳에 터를 내렸다.
김요협의 부인이자 인촌의 조모는 두 아들 원파공과 지산공에 이르러서는 만석지가 되었다. 한편 원파공은 인촌의 양부이며 지산공은 인촌의 생부이다. 김요협은 큰 아들인 원파공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지산공에게서 난 인촌이 원파공에게 들어간다.
인촌의 가문은 이쯤 살펴보고 이제 그의 집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촌의 집은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꺼리는 북향집이다.
속설에 따르면 '북향 대문은 집안의 귀(貴:벼슬), 부(富), 손(孫),을 절멸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인촌 생가의 경우 사능선(내룡)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것을 따라 남쪽에 안방, 북쪽에 대문을 설치하였다.
양택 풍수에서는 대문, 안방, 부엌을 중요시 하는데 인촌 생가의 경우 안방은 남방, 대문은 북방이다.
즉 자문오주(子門午主)에 해당되어 '子午가 沖하는것' 이므로 나쁘나, 달리 생각하면 북쪽에 대문이 남쪽에 안방이 들어서면
수화(水火)가 기제(旣濟)하여 크게 길하고 번창한다는 역(易)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보통사람이 깨닫기 어려운 한 단계를 뛰어넘는 풍수의 한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인촌의 집안은 이 집(양택)의 명당 덕을 톡톡히 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인촌의 생가에 도깨비불이(鬼火)발생하여 이 집안을 부(富)로 이끌었다고 전한다.
인촌 김성수를 길러낸 호남 제1의 길지, 고창 김요협과 정씨묘는 병바우 동네의 술 취해 누워 있는 신선형으로 이 자리를 두고 선인취와(仙人醉臥)라 부를는 것은, 술을 다 먹고 병을 엎어 놓은 채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인촌가에서는 지금도 이 정씨 할머니를 '백결(百結)부인'이라 부를 만큼 현모양처로 받든다.
요협이 군수로 관계에 나아가도 부인은 깁고 기운 옷을 입어가며 재산을 모았고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였다.
인촌 또한 부통령 재직시 이승만의 3선 개헌을 내다보고 전시 중 부통령 사임을 결행, 권세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의 귀감이 되었다.
인촌가문의 풍수지리에 대한 식견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함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를 꼽을수 있는것이
조상무덤을 부부 합장 이나 가족장을 하지않고 한 명당 한 묘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는 것이다.
이는 풍수지리의 이론에 입각한것으로 볼수있다.
명당은 3대에 하나만 (100년)족하다는 말이 있고 보면 인촌가의
그 숱한 조상의 명당 발복으로 앞으로도 그의 가문은 크게 빛날것으로 보여진다.
고창군 흥업면 반암리 병바우 동네의 정씨묘도 선인 취와형으로 물은 남쪽에서 흘러와 서쪽으로 빠져나가니
오행에서 말하는 화국 으로 정확한 혈의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또 무장과 고창에서 흘러 오는 물이묘 앞을 가로 흘러, 서해로 흘러 가는중에 물의 흐름을 막아주는산 들이 첩첩히 서해와 맞닿고, 안산은 병바위요,서쪽은 조산인 말안장 ,백호는 하나같이 창고와 노적가리 모양을 띠고있어, 대부를 기약하고 있으니 호남8대 명당중 수혈로 꼽힌다.
정씨부인보다 2년먼저 타게한 인촌의 조부 요협의묘는 장군 대좌형으로 싸움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진중의 장군 모습이다.
순창 복흥면 화룡리 화개산 밑에있는 인촌9대 묘는 이곳 주민들 사이에 비봉포란형이라 불리는데,
주산에 해당하는 화개산이 마치봉황이나 금계의 머리모양과 흡사한 데다가 좌우 청룡 백호는 날개를 앞으로 펼쳐무덤을 감싸고있다.
또그 앞에 안사과 조산들의 생김새가 둥글 둥글 하여 새알을 연상시켜,마치 봉이나 금계가 알을 품고있는 형국과 같기 때문에 풍수지릴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수궁이 가는 형국을 하고있다.
변산 해수욕장 뒤에있는 인촌의 증조부 묘는 순창 쌍치면 보평마을 뒤산에 위치 하는데 명당의 규묘로 볼때 증조부 묘에 비해 아기자기 하면서도 풍수지리 초보자들이 표본으로 삼아 공부할수있는 교과서적 명당으로 주마탈안형(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고 쉬는형국)혹은 갈마음수형(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형국)이라 부른다.
그러나 ,사실상, 풍수지리적 관점에서의 완벽한 명당이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아니다.
또한 옥에도 티가 있듯이 천하에 완전 무결한 명당이란 그곳을 찿기도 또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