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조선시대를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계라고 비난하면서, 불교나 도교가 절멸됐다고 서술하곤 했다.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경직된 성리학의 시대’로 알려졌던 17~18세기에 불교 사찰이 가장 많이 중건됐으며, 유학자들이 도교 제사와 결합한 제사를 수행하고 정리했던 사실을 소개한 바 있다. 〈중앙일보 2021년 5월 28일자 24면〉
부처·노자·공자는 서로 다른 분들이지만, 불교·도교·유가의 문제의식은 우리의 인생에서 수시로 뒤섞여 등장한다. ‘사는 게 고통이지’ 하는 순간 해탈이나 신선을 통한 초월을 갈망하기도 하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부처·노자·공자로 표상되고, 종교나 사상으로 정식화됐을 때는 마치 다른 것 같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갖는 처지나 질문에는 혼융돼 있다.
유가는 당초 초월성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고려시대에도 정치는 유가, 종교와 사상은 불교의 선학(禪學)이 맡았다. 도교는 도관(道觀)을 중심으로 민속의 제사·수련·장수를 위한 연단(鍊丹) 등으로 이어졌다.
송나라 때 일어난 유가의 전면적 재해석은 고려 말~조선시대에 걸쳐 영향을 끼쳤는데, 이 거대한 흐름을 신유학=성리학=이학이라고 부른다.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를 받아들여 이기론(理氣論)이라고 하는 우주론을 기반으로 세계를 재해석했다. 당초 성리학은 삼교회통(三敎會通)의 사상으로 성립했다.
대학 시절, 답사 갔던 사찰 상당수가 숙종~영조, 정조 연간에 중건됐다는 걸 발견했다. 성리학이 경직화했다고 배운 시기인데, 사찰 중건이라니...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DB를 만들며 내 기억은 수치로 증명됐다. 현존하는 사찰의 3분의 2가 조선 후기에 중건됐다. 예를 들어 강화 전등사(傳燈寺)는 1625년 중건됐고, 남양주 봉선사(奉先寺)는 1749년(영조25)에,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1644년(인조22)과 1710년(숙종36)에 중수됐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뀐 것은 ‘사회=세상의 재조정’이었다. 그 한복판에 역사적 수명을 다했던 불교 사찰이 있었다. 탈세, 면세, 평민과 노비의 투탁으로 사회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사찰 개혁의 이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사찰로 갔고, 문화센터 역시 사찰이었다. 죽음이라는 절대 한계를 가진 존재에게 불교의 천당-지옥 프레임은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대략 100년 정도 이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미나가 계속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