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학교 태권도학과 이규형 교수
정말 흐트러짐 없이 태권도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지난 9월 22일. 서울 미동초등학교(학교장 권무, 이하 미동)에서 이규형(계명대, 61) 교수를 만났다. 지난밤에 대구에서 올라와 피곤할 만도 한데, 미동 태권도부와 중학생들을 특별 지도하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해 보여 물어보니 지난해 해외 시범 중 다쳤다고 한다. 덕분에 1년째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학생들 지도가 끝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1948년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이규형 교수. 그는 어려서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해 학교에서 늘상 주변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허약한 아이였다. 이 교수가 10살이 되던 해. 장수에 태권도장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자신의 허약한 몸을 강하게 바뀌겠다는 생각으로 그는 태권도에 입문하게 된다.
태권도에 빠져 한창 수련에 열중하던 중 뜻하지 않은 불운이 찾아온다. 그를 지도하던 사범이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초단 심사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기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승이 떠나자 수련생 대부분이 태권도를 중단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산에 올라가 더블 백(샌드백 모양의 군대 배낭)에 모래와 톱밥을 넣고 혼자만의 수련을 계속했다.
하루 8시간의 강훈련이었지만, 개인수련으로는 한계가 있었는지 그는 초단(1단) 심사를 두 번이나 떨어지고 만다. 당시만 해도 승단 심사제도가 엄격했다고 한다. 겨루기를 두 명과 하는데, 이중 한번 이라도 지게 되면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스승과 함께 체계적으로 수련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느꼈다”며 “스승 없는 제자의 슬픔을 그 때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어렵게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초단 승단에 합격한다. 지금은 초단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태권도 초단은 지역 사령관 대우를 받았다. 생활이 어려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던 시기에 장수 경찰서장이 경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며 요청을 해 왔다. 고등학생 신분이었지만 당시 장수에서 유단자는 이규형 교수 혼자였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경찰서 운동장에서 경찰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되고, 일과시간 이후에는 경찰서 운동장을 빌려 일반인들에게도 태권도를 가르쳤다. 이규형 교수는 “장수군 7개면 중 6개면 사람들을 다 가르쳤다. 1967년도에는 인원이 2000명에 육박했다”며 “당시 신문에도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인원이 많다 보니 전주로 승단심사를 보러 갈때 버스를 대절하기도 했다”고 추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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