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문학기행 <61> 시인 오탁번과 제천
'낙향의 기쁨' 시안(詩眼)되어 다가온다
가난한 기억 뿐이지만 그래도 듬직한 고향
평생의 꿈 소도록이 담아 원서문학관 개설
"부처님을 모실 때도 점안(點眼)이 가장 중요하듯 시에는 시의 눈(詩眼)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말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한 편의 시로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바로 그 말 하나! 이것이야말로 한 작품의 빛나는 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탁번 시인)
오탁번 시인이 신문학기행 일행을 안내하고 있다. 폐교에 둥지를 튼 원서문학관은 주위 풍광과 잘 어울려 방문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있었다.
원서문학관에 앉아 시인의 말을 이렇게 육성으로 듣고 나서 그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
'하루 걸러 어머니는 나를 업고/이웃 진외가 집으로 갔다/지나가다 그냥 들른 것처럼/어머니는 금세 도로 나오려고 했다/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풍겨오는/맛있는 밥냄새를 맡고/내가 어머니의 등에서 울며 보채면/장지문을 열고 진외당숙모가 말했다/-언놈이 밥 먹이고 가요/그제야 나는 울음을 뚝 그쳤다/밥소라에서 퍼주는 따끈따끈한 밥을/내가 하동지동 먹는 걸 보고/진외당숙모가 나에게 말했다/-밥때 되면 만날 온나//아, 나는 이날 이때까지/이렇게 고운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태어나서 젖을 못 먹고/밥조차 굶주리는 나의 유년은/진외가 집에서 풍겨오는 밥냄새를 맡으며/겨우 숨을 이어갔다 ('밥냄새 1', 전문, 시집 '손님' 중)
이 시를 읽으며 '하동지동'이라는 시어에 이르러 그만 넋을 잃고 허둥지둥 시 속에 푹 빠져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안(詩眼)! 아기가 '허둥지둥' 밥을 먹는다고 쓴다면 그건 너무 무겁거나 어둡거나 불쌍해서 그 글은 그만 '기록'에 머물고 말 터이다.
오탁번 시인은 "'하동지동'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내고는 위스키 한잔을 들이켜고 난 것처럼 짜릿했다"고 말했다. 시가 태어난 현장에서 그 시를 낳은 시인의 말을 직접 듣고서야 뭔가 탁 터지는 느낌을 받는 이 문학기행만의 묘미란!
지난달 25일 다녀온 예순 한번째 '신문학기행'의 행선지는 충북 제천 원서문학관이었다. 오탁번(64·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인이 부산 출신의 아내 김은자(59·한림대 국문과 교수) 시인과 함께 평생의 꿈을 '소도록이' 담아 지난 2002년 고향 마을의 폐교된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를 매입해 문을 연 작은 문학관이다.
오탁번 김은자 시인 부부가 원서문학관 뜰에 함께 섰다. 뒤에 수령 350여 년의 느티나무가 보인다.
원서문학관의 주소는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 198. "애련리?" 이 곳의 주소를 확인하고는 조금 놀랐다. "뭔 마을 이름이 이렇게 아련하고 예쁠까?" 오 시인은 "사랑 애(愛)에 연꽃 연(蓮)을 쓰는데 이 곳 땅 생김새가 연꽃 모양과 비슷한 것과 연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 시인의 삶에서 고향은 온통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의 기억이다. "30대가 돼서도 나는 집에서 등록금을 대주는 아이들을 적군 취급했어요. (세상에 대한)복수심도 있었죠. 지금도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산천을 유람하는 모습을 별로 안좋아해요. 집 가까이 천등산과 박달재가 있는데, 어린 시절 내가 다닌 그 산들은 먹고 살기 위해 나무를 하고 노동을 해야만 했던 생존의 장소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고려대에서만 30년을 가르쳤고 "정년퇴임을 3학기 남겨 놓고 있는"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낙향을 택했다. "평생을 가꾼 꿈이었죠. 젊었을 때도 '돈을 조금만 벌면 교수 그만두고 고향 가서 글만 써야지'하는 생각을 줄곧 했어요. 많이 노력했고 원서문학관이 들어서기까지 일도 많았습니다. 지금도 별다른 수익 구조가 없어 힘들기는 하지만 교실 세칸짜리 작은 문학관 하나는 끝까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대나무를 기르는 사람이/영 대쪽같지 않고/난을 기르는 사람이 난커녕 잡초 되어 살아가는 한 많은 한세상/나의 삶이 끝나면//블랙홀 근처/조선 소나무 가지 위에/나는 매미나 한 마리 되어/맴맴맴/우주가 떠나가도록/울어는 보고 싶다'('우화의 꿈', 전문) 그가 2002년 펴낸 시집 '벙어리장갑'에 수록한 시다. 조정에 서늘한 상소를 올리고 그 길로 낙향하곤 했던 옛사람의 기풍이 묻어나는 이 시는 그의 '낙향꿈'과 자꾸 겹친다.
원래, 정겹고 천진하고 순수한 시 세계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고향마을 생활은 시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원서헌 연못가에/삼층석탑을 모셔다 세웠다/시집간 딸이 와서 보더니/-아빠, 이 탑 어디서 났어?/석탑에 비낀 노을을 보며 내가 말했다/-며칠 전 천둥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솟더니/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졌단다/-엥?/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마실 왔던 이장이 한마디 했다/-그럼,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일이 흔해//누가 시인이고 누가 농부인지!/나, 원 참, 정말 모르겠네('탑', 전문) 원서문학관 생활이 그에게 주는 문학적 기쁨과 가르침은 작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충북 제천시 박달재 정상에 서 있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오 시인이 고향의 사람과 정서와 아름다움에 기대 내오는 시들은 다채롭고 아름답다. 가담항설과 음담패설을 시 속으로 끌고 들어와 우리 삶 속의 감동적인 장면으로 재탄생시키는 솜씨나, '이건 아이가 쓴 것이 분명해!'하는 인상을 주는 동시풍의 시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역시 "사전 속을 유영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는 그의 말대로 우리말이 지닌 신비하고도 넉넉한 뜻을 보석 캐듯 캐내고 농부처럼 부려쓰는 모습을 보는 기쁨이 가장 컸다. '…방패연은 되똥되똥 내 액운을 싣고…' '…물풀을 잘싸닥잘싸닥 때리는 물결 따라/목화씨만한 새끼붕어들 욜랑욜랑 바쁘다…' '풀귀얄로/풀물 바른 듯/안개 낀 봄산/오요요 부르면, 깡종깡종 뛰는 쌀강아지/산마루 안개를/홑이불 시치듯 호는/왕겨빛 햇귀' '소나무 가지에서/한댕한댕 흔들리는/풍경소리/…오늘밤 들고양이가/떠돌이별처럼/으앙으앙 울겠다'
다 받아적기도 힘든 그의 맑고 깊은 시어들은 모두 서울이 아니라 고향 마을과 원서문학관(원서헌)의 삶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는 원서문학관을 '파 웨스트 러브호텔'이라고 말한다. 멀 원(遠)에 서녘 서(西)를 쓰는 원서는 백운면의 옛 이름이다. 제천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 문학관 앞에는 350살이 넘은 멋진 느티나무가 서있고 근처에는 영화 '박하사탕'(이창동 감독)의 설경구 절규 장면을 찍은 철교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온갖 만물의 생명 에너지가 충만해서 펑펑 터지는 장관을 날마다 보는 듯하다. 그래서 그 기운생동하는 정경을 슬쩍 '러브호텔'에 빗댄다. '툭/건드리면/이냥 야수가 될/저 빛나는 음경//내 소싯적 발기처럼/꽃봉오리 터지는/봄날의/외설 한마당!//4백살 난/느티나무가/나비넥타이 매고/벨보이 하는//벌 나비 쌍쌍/교미 교미하는/☆☆☆☆☆/파 웨스트 러브호텔!'('파 웨스트 러브호텔', 전문)
그럼 그는 이제 이냥 평화로워진 것일까? 그는 신문학기행 가족참가자와 청소년들에게 "나는 어린 시절을 너무나 가난하고 힘겹게 보내 이제 두려운 것이 별로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고생이 수십억 유산보다 훨씬 값어치 있다. 그리고 나는 노력도 많이 했는데 그래서인지 힘들 때 어디선가 손길이 나타나 도와주곤 했다"는 말을 들려줬다.
홀로 계간시지 '시안'을 창간해 10년 세월을 끌어오고 있는 오 시인의 힘은 아직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고향 마을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모습은 참 듬직했다.
△오탁번 시인은 1943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영문과와 국문과 대학원을 나왔다. 20대인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했다. 시집 '아침의 예언' '겨울강' '벙어리장갑' '손님 등. 최근 소설도 다시 쓰고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수상. 그가 운영하는 원서문학관에서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문학교육이 정기적으로 열리며 문학행사들도 열린다. 그가 수집한 유물과 문학자료 등도 전시하고 있다.
www.wonseo.org (043)653-097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