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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는 토스트.
세상은 빵집입니다. 허영이란 효소가 반죽을 잘 부풀려주면 자태가 아름다워지죠. 향기 또한 기가 막힙니다. 부푼 놈들은 팔려가고 그러지 못한 놈들은 쓰레기통에 처박힙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러운 향기로 풍요롭습니다. 자본은 향기를 맡고 커다랗고 탐스러운 자태에 반하니까요.
세상을 빵집의 미니어처 정도로 생각하는 저지만, 그날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끌림이 강했습니다. 밥이 질렸거든요. 삼일 치 밥을 한꺼번에 취사하여 오랜 기간 보온된 밥. 밥에서도 누린내가 납니다. 흰 쌀밥이 아니라 꼭 뭐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야지 묵은내가 덜 나서 그런가봅니다.
네, 고시원에 저는 살고 있습니다. 기본으로 제공하는 라면과 김치와 쌀밥으로 연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주 전에 택배 상하차 일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못 나가는 중입니다. 원래는 노가다 뛰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달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합니다. 한의원에서 침 맞는 비용 빼고는 담뱃값이 지출의 전부입니다.
원래는 이정도로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월세방에 살면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죠. 원래 용돈을 받고 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아르바이트 하고, 학자금 대출 받고, 생활금 대출 싸게 받아서 그냥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비트코인 하나에 2000만원 할 때 들어간 게 문제였습니다. 돈 다 털어서 1000을 만들어서 들어갔죠. 4000만원 까지 오르면서, 한 반년은 편하게 살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놓지를 못 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하락장에서도 결국엔 팔지 못하고 어영부영. 결국엔 반 토막에 반 토막 났습니다.
왜 사람들이 한강 가자, 한강 가자, 하는지를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코인판 들어갈 때, 임차 형식으로 방을 뺐습니다. 보증금이 필요했거든요. 딱 3개월만 여기 살자고, 그렇게 생각하고 고시원에 왔는데 어느덧 1년을 이곳에서 살게 됐습니다. 바로 휴학 때리고 노가다 시작했습니다. 정말 눈물 나더군요. 기본으로 먹고 살 돈은 벌어야 하니까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빚을 져서까지 판에 들어가지 않았으니까요. 아직 저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서 졸업장을 따고 어디 좆소기업이라 불리는 중소기업에 바로 갈 겁니다. 1년만 여기서 더 고생하면. 그럼 3층 정도에 햇빛 잘 들어오는 원룸 잡고 펑펑 기쁨의 눈물 흘리며 잘 수 있을 텐데. 고시원 쪽으로는 침도 안 뱉으리라, 속으로 항상 다짐하고 있습니다.
밥솥 뚜껑 닫고 바로 고시원에서 나와 파리바게트로 향했습니다. 방에 창이 없어 몰랐는데 벌써 깜깜합니다. 가게로 들어가 저는 가장 싼 식빵을 집어들었습니다. 옆에 보이는 복숭아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득할 당분을 생각하면 벌써 침이 흥건해지지만 돈이 아까워 그만두었습니다. 계산대에 식빵을 올렸습니다. 4000원입니다. 캐셔의 말투는 딱딱했습니다. 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한 움큼 꺼내 식빵 옆에 나란히 놓았습니다. 캐셔는 말없이 일일이 100원짜리 30개와 500원짜리 4개를 세어봅니다. 그러곤,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합니다. 저도 네 라고 답합니다.
식빵을 백처럼 달랑 들고 슬슬 걸어 고시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용부엌에 잠깐 들러봅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끼니때가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릇에 슬쩍 김치를 퍼 담는 척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냉장고를 슬쩍 열어봅니다. 제 눈알 굴러가는 소리만 들리는 듯 긴장감이 감돕니다. 누군가 반 쯤 먹은 스팸이 탐스러운 자태를 뽐내며 신선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범행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전자레인지에 덥힐 시간 따위 없이 품에 넣어 방으로 돌아왔습니다.
반뿐이 먹지 않은 아름다운 스팸을 건지는 날은 자주 있는 날이 아닙니다. 기분이다, 찬장을 열어 쟁여둔 처음처럼 한 병을 꺼냈습니다. 요즘엔 돈이 없어 자주 마시지 못했지만 이런 좋은 안주가 있는데 어떻게 넘어갈까요. 자그마치 스팸인 걸요. 뚜껑을 열고 세 모금 병나발로 마십니다.
이곳에서 소주는 일상입니다. 애당초 갑갑하고 창도 없어 공기가 탁한 공간입니다. 항상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곳이죠. 항상 불면이지만 소주가 있으면 말이 달라집니다. 제 아무리 답답하더라도 쉬이 곯아떨어질 수 있습니다. 서 있으면 어지러울 정도의 술기운이 돌면 공용 화장실로 가 이를 닦고 자면 됩니다.
소주병을 탁자인지 책상인지 티비다이인지 모를 것 위에 올리고 식빵 비닐을 뜯습니다. 빵 위에 김치를 깔고 그 위에 하이라이트인 스팸을 숟가락으로 뚝 때어 올립니다. 뇌수가 침을 으로 가득 차는 느낌입니다. 한 입 베어무니 맛이 풍요롭습니다. 맛의 환희를 씹다가 어금니 옆으로 잠시 이사시켰습니다. 소주가 들어갈 시간이니까요. 투명한 그것을 들이키고 알콜향이 올라오기 전에 토스트를 혀 위로 다시 안착시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코로 쓴 향을 내뿜는 것입니다. 음식물에 소주의 잔향이 올라 섞여버리기 전에 말입니다.
소주는 금방 떨어졌습니다. 익히지 않은 토스트는 채 세 입을 먹기 전입니다. 시간은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기장판을 틀고 제 하반신을 두터운 이불로 덮습니다. 그러면 혈액순환이 빨라져 조금만 있으면 술기운이 확확 오릅니다.
김치 토스트를 다 먹고 남은 식빵은 다 헐어 변색된 고무줄로 꽁꽁 싸매 찬장에 올려둡니다. 점차 오르는 술기운은 니코틴의 부재 상황을 긴급하게 알립니다. 저는 디스를 입에 물었습니다. 물론 고시원 내부는 금연입니다. 국민건강증진법에 위반되는 사항이죠. 공용생활건물에서의 흡연은. 그러나 여기는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불이 나든 말든 내일 유독가스 중독으로 죽든 불타서 작열통 가득하게 죽든 혹은 담배연기로 폐암에 걸려 힘겹게 죽든 이곳 사람들은 신경 하나 쓰지 않습니다. 서울 하늘에서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고시원인걸요. 아무렴, 가장 싼 방이 15만원인데요.
제가 사는 방은 205호입니다. 앞 라인은 201~203호 제 라인은 204~206호가 있죠. 그 중에 유일하게 제 오른쪽 방 204호 칸트할아버지가 담배를 태우지 않습니다. 칸트 할아버지는 택시를 운전하십니다. 당뇨병이 있어서 담배를 멀리 하시지요.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식단도 채식 위주, 고시원에서는 최악의 조건이지만 버티는 악바리 할배입니다.
할아버지의 별명 칸트는 제가 지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아침 9시, 그리고 저녁 9시에 항상 두유에 견과류를 섞어 믹서기에 넣습니다. 칸트와 같이 1분 1초의 정확함을 유지합니다. 그렇게 마시는 일이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하면서요.
그렇게 마시는 건 상관이 없으나 문제는 소리입니다. 고시원의 벽은 세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합판 2개 정도로 이뤄져 있을 뿐입니다. 방귀소리 코 고는 소리 기침소리, 심지어 자위할 때 휴지가 사각거리는 소리까지 방을 가로지릅니다. 그곳에서 믹서기를 갈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옆방은 지진이 나고 앞 라인에서는 싸이렌 소리가 들립니다.
1년 전 일입니다. 칸트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처음 흘러들어왔을 때, -고시원은 이사란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흘러들어왔다는 말이 어울립니다. - 저녁 9시 견과류 갈아죽는 소음에 모두가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201호사는 실장이 찾아갔습니다. 주의를 주려는 것이죠. 그러나 칸트할배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구청직원 불러다가 흡연자들 벌금 먹이겠다고 완벽한 카운터펀치를 먹였죠. 결국 합의에 이른 것이, 흡연자는 흡연을 하고 칸트할배는 믹서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지요. 보금자리에서 붙이는 담뱃불의 아득함을 포기할 정도로 믹서기에서 나는 소리가 크지는 않았으니까요.
담배를 타 피우고 화장실로 가 이를 닦았습니다. 화장실은 남녀 공용입니다. 그런데도 칸막이는 위아래가 훤히 뚫려있습니다. 애당초 범죄가 일어날 곳은 아닙니다. 노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그렇습니다. 여자라고 해 봐야 거의 다 할머니거든요. 성욕을 엄한데 쓰는 변태가 살지 않는다면 별 일 없을 겁니다.
이 고시원에 유일한 젊은 여자는 203호에 사는 누나입니다. 젊음의 개념도 상대적입니다. 아마 30 중후반은 됐을 겁니다. 그 누나는 어디 이름 모를 지역 오피스텔에서 일하다가 관리자랑 대판 싸우고 이리로 흘러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보도 뛰면서 살고 있습니다. 입에 욕을 달고 삽니다. 그래도 착한 사람입니다. 가끔 고시원 앞에서 마주치면 맥주라도 한 캔 사주는 마음씨를 가지고 있죠. 언젠가 그런 날이었습니다. 누나가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는 17살에 35살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딸 찾으면 저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하더군요. 자기를 닮았으면 예쁠 거라고. 근데 남자를 닮았으면 키는 작을 거라고요. 눈주름 사이로 어둠이 깊이 읽혔지만 누나는 웃고 있었습니다. 고시원에는 햇빛이 없습니다. 어둠이 피부에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당신은 저를 볼 때 이를 느꼈나요? 여차여차 어쨌든 사람은 착합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금성전자 17인치 완전평면 브라운관 티비로 드라마를 잠시 봅니다. 머리가 기분 좋게 어질 거립니다. 그렇지만 그 소소한 행복에 눈을 감고 있는 시간도 잠시입니다. 곧 9시 땡 하며 칸트 할아버지의 믹서기 소리가 합판을 잔인하도록 떨게 합니다. 할아버지 시끄러 말 하고 돌려. 202호 사는 외국인 노동자 따뿐롬이 문을 열고 소리칩니다. 한국말이 서툴러 말이 짧습니다. 어이, 쏘리. 칸트 아니랄까봐 예의는 억수로 바릅니다.
한참 꿈을 설치다가 배가 슬슬 아파서 눈을 떴습니다. 어디선가 나프탈렌 냄새가 확 납니다. 누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어 깜짝 놀라며 일어납니다. 문자. 206호 독거노인이 휴대전화를 들이밉니다. 항상 꾸질하게 다니는데 오늘은 월남전 참전모자에 누빔 코트까지 걸쳤습니다. 문 안 잠갔다고 막 들어오면 어떡해요. 저는 휴대전화를 받아들며 뭐라고 합니다. 미안타. 노인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누구한테 뭐라고 칠까요. 최익순한테 종삼 10시. 종삼이 큰데 어떻게 만나려고요. 그리고 전화하면 되지. 최익순을 낡은 2G폰으로 찾아봅니다. 저장된 사람이 몇 없어 초성으로 찾는 것 보다 스크롤을 내리는 것이 빠릅니다. 귀가 갔다. 최익순이. 노인네가 바라는 대로 문자를 쳐 주고 휴대전화를 건넵니다. 이런 부탁을 받은 날이면 돌아올 때 붕어빵이라도 하나 사다주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유혹입니다.
노인이 나갔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없습니다. 저는 스마트폰 잠금을 해제합니다. 시간은 8시 59분이었습니다. 곧 칸트 할배의 믹서기가 울렸습니다. 노인네가 우산을 들고 가기에 복도에 나가 창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오고 있었습니다. 꽤 많이 오고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선 흔한 일이지만 서울에선 교통이 마비될 정도의 양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눈에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물었습니다. 발목까지 눈이 차있습니다. 연기로 심호흡을 하니 장에서 신호가 밀려옵니다. 대장의 압력으로 야기된 요의가 심해집니다. 장난기가 들어 눈밭에 소변을 눕니다. 제 이름 석자를 쓰다가 김연ㅅ에서 끊겼습니다. 갑자기 복통이 크게 들며 괄약근이 조여졌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을 가던 계단에서 따뿐롬과 마주쳤습니다. 따뿐롬 손에 이상하게 쥐어져 있습니다. 그게 뭐야? 궁금증에 물었습니다. 물똥약이다. 그게 왜 필요한 건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변비야? 그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냉장고 사라진다. 스팸이랑 삼각김밥. 다. 그래서 어제부터 약 바른다. 혼 좀 나야한다. 일순 항문 사이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듯 긴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똥 안 나올 때 먹은 거다. 거의 죽는다. 이 약. 저는, 나쁜 놈이군. 이라고 잘라 말하고 따뿐롬이 지나갈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겨우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장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광포한 금관악기의 고음을 연신 뿜어대던 항문이 드디어 내용물을 뱉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마그마처럼 뜨거웠습니다. 입에 담배를 물고 온 몸의 힘을 풀었습니다. 설사는 끝없이 나왔습니다. 다 나온 줄 알았건만 다시 뱃속에서 용암이 끓었습니다. 두 번 더 화장실에 다녀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 배에 핫팩을 꺼내 올리고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따뿐롬, 멍청한 줄 알았건만 악하고 치밀합니다. 따뿐롬 씨발롬. 들리지 않는 소리가 계속 흘렀습니다.
화장실에 한 번 더 가려고 할 찰나에 따뿐롬의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이번 달 공짜다. 돈 안 줘도 된다.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6개월 선납했지. 맛있는 거 사먹어 따뿐롬. 실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런데? 실장이 따뿐롬에게 묻습니다. 이번에 아내 아들 아파트 간다. 2년은 더 있다 갈 거다. 대화는 금방 길어졌습니다.
배는 계속 아픕니다. 따뿐롬은 가족 얘기를 하면서 자기 애 사진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고시원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피부로 스민 어둠에 멜라토닌 분비가 촉진되고 세로토닌이 줄어들어 우울하고 슬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누구 한 명과 대화를 시작하면 기본 1시간은 갑니다.
참을 수 없이 쌓여 결국 비닐봉지로 해결할까 하다가 냄새와 소리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마지막 선택으로 저는 샤워용품과 속옷을 챙겨 방문을 열었습니다. 실장과 따뿐롬이 저를 쳐다봅니다. 연석 어디 가냐. 따뿐롬이 묻습니다. 약속이 있다고 돌려 말하고 샤워장으로 갑니다. 샤워기 물을 틀고 그대로 항문의 힘을 풉니다. 허벅지를 타고 뜨거운 물이 흘러내립니다. 혹여 냄새가 날까 샤워를 하고 담배를 피웁니다. 배수구에 건더기가 걸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청바지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먼지 냄새가 나는 패딩을 걸쳤습니다. 따뿐롬과 실장은 아예 참치 캔에 소주를 까고 있었습니다. 실장과 따뿐롬은 잘 다녀오라고 인사합니다. 저는 신발장에서 다 늙은 파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눈은 그치지 않고 더 내리고 있습니다.
약국으로 일단 가 지사제를 사먹고 정처 없이 걷다보니 11시 반입니다. 할 일이 없었습니다. 다시 돌이켜보니 그냥 내가 먹었다고 해도 별 일 없을 일이었습니다. 사과 한 번 하면 될 일인데 왜 그랬을까요. 어디 카페라도 가 있으면 다 돈인데 말입니다. 만날 사람은 당연히 없습니다. 지하철 여행이라도 할 심산으로 슬슬 석계역으로 걸어갔습니다. 빵집 구경이 어쩔 땐 가장 재미있는 일입니다.
역 개찰구 앞에서 누군가 반갑게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자의 목소리입니다. 어디가 애기? 203호 누나입니다. 퇴근길인지 화장도 옅고 옷은 쫙 달라붙는 검정 레깅스에 베이지색 패딩 차림입니다. 원래는 숙취 가득한 표정으로 와 방에서 뻗는데 오늘은 걸음이 씩씩합니다. 약속이 취소돼서 할 게 없어요. 대충 둘러댑니다. 어제 호구 한 명 제대로 물어서 오늘 지금까지 있다 오는 길이야. 누나는 자랑하듯 말합니다. 주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근데 약속 없는데 지하철은 왜 타? 누나가 물어봅니다. 사람 구경이나 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누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저에게 팔짱을 낍니다. 잘 됐다. 나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 부탁이 무엇인지 일순 누나의 직업 때문에 경계심이 일었지만 아침부터 비어버린 장의 허기짐을 이겨내긴 역부족이었습니다. 또 외식이란 개념이 너무나 아득해졌기에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SNS에서 유명하다며, 누나는 종각에 위치한 쌀국수집에 가자고 말합니다. 저는 그 부탁이 무엇인지 노인 냄새 가득한 1호선 의자에 앉아 추궁해 봅니다. 그러나 누나는, 조금 있다가. 라며 답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론 별 말 없이 서로의 스마트폰 불빛과 함께 목적지로 달려갔습니다.
쌀국수집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눈이 와서 당연히 그런 것 같습니다. 음식은 빠르게 나왔습니다. 누나는 많이 먹지 않았습니다. 닭 쌀국수 작은 사이즈 하나를 다 먹지도 않고서 저에게 넘깁니다. 대신에 누나는 맥주로 배를 채웁니다. 저는 지사제를 먹이지 않은 잔여물을 처리하고 돌아와 남은 음식까지 싹싹 비웠습니다.
너 노가다 뛰지? 말이 없던 누나가 드디어 운을 띄었습니다. 건설업 인턴이라고 해 주시죠. 누나는 깔깔 웃습니다. 하루에 얼마 받아? 12정도 받아요. 내일 내가 그 돈 주면 내가 하라는 일 할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나랑 같이 자는 거야. 풉, 하고 마시던 맥주가 튀어나왔습니다. 몸은 안 팔아요. 말해놓고서야 잘못 말했음을 알아차립니다. 잘 포장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봅니다. 성기가 이상하게 발기합니다. 빵 반죽 부풀 듯 의미는 없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누나의 표정은 태연합니다. 장난이야. 누나는 넘어간 듯 보입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본론을 꺼낼까 싶었던 누나는 그만두고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고요하고 눈 쌓이는 미세한 소리만이 바닥에 깔립니다. 날도 꿀꿀한데 술이나 마실까? 언제부터 우리가 커피 마시면서 궁상을 떨었던 적도 없잖아. 앞장서던 누나가 몸을 돌립니다. 하마터면 부딪힐 뻔합니다. 지금 오후 1시인데요. 제가 의아함을 보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렇습니다. 벌써 따뿐롬과 실장은 빨간 뚜껑을 세병 넘게 깠을 겁니다. 일 공친 날에는 나날이 먹는 게 술입니다. 어째서 술 마실 시간을 따졌는지 저조차 의문이 듭니다.
조금 걷다가 적절한 순대국밥 집으로 들어가 돼지머리고기와 처음처럼을 시켰습니다. 쌀국수 가게에서 맥주를 이미 1000cc나 마셨는데도 누나는 소주를 글라스로 부어 마십니다. 왜 이렇게 빨리 마셔요. 누나의 손에서 뺏듯이 소주를 가로챕니다. 누나는 인상을 쓰고 다시 소주병을 가져옵니다. 나 어제 그 새끼 만났어. 누나의 글라스로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옵니다. 좆만한 새끼가 손님으로 왔더라고. 난 바로 알아봤지. 그런데 그 새끼는 나를 못 알아보더라고. 하긴 그럴 만하지. 나는 어리고 예뻤었으니까. 17살, 마지막으로 봤을 땐 말이야. 그래서 아양 떨고 갖은 스킬 다 써서 2차까지 갔어. 우선 둘이 있어야 죽이든 사과를 받든 할 거 아니야. 누나는 글라스를 벌컥 들이킵니다.
시발, 모텔 가서도 날 잘 모르더라고. 그래서 그냥 말했어. 내 딸 지금 어디 있냐고. 잘 있냐고.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더라고. 네가 누구냐고. 화연이 맞냐고. 화연이가 맞다고. 손에 있는 점이 기억난다고. 지랄. 고등학생 꼬실 때랑 똑같이 말해. 누나의 이름을 저는 처음 듣습니다. 화연, 어쩐지 누나의 외모와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머리고기를 오물거리며 누나의 이야기를 계속 듣습니다.
딸은 20살이래. 나 차버린 후에 지 애미 손에서 기르다가 재혼 후에 새엄마랑 같이 키웠대. 내가 그래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 그러니까 뭐라는지 알아? 시발, 안 된대. 딸이 친엄마 이런 모습 보면 충격 받는대. 엄마가 창녀가 됐는데 어떻게 너도 그렇게 당당히 만나게 해 달라고 할 수 있냐 하더라고. 그때 꼭지 돈 거지. 누나는 흘러가던 얘기를 잠시 멈추고 핸드백에서 담배를 집어 들어 흔듭니다. 우리는 나가 담배를 피웁니다. 눈이 몰고 온 습도에 담배연기가 진해 피우는 맛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내가 여기서 경찰 부르고 당신 성매매 한 거 까발리겠다고 했어. 경찰서 온 딸내미 얼굴 보면 된다고 했지. 그랬더니 안절부절 떨면서 손 모으더라고. 미안하대. 자기가. 돈도 많이 주겠대. 딸은 만나지 말래. 그래서 계속 땡깡 피웠지. 그랬더니 500만원 줄 테니 딱 하 한번만 보라고 하더라? 누나는 담배를 검지로 능숙하게 털어 불을 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저도 담배를 끕니다. 같이 다시 자리로 돌아갑니다.
받았지. ATM까지 같이 가서. 그냥 나사 한 개가 빡 하고 터져나간 것 같아. 나도 아무 생각 없다가 손님으로 온 그 새끼 얼굴 보고 딸이 보고 싶어진 거니까. 그래서 내일 보기로 했어. 어떻게든 딸 보내겠대. 근데 막상 만난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 아무리 10달 내 배에서 존나게 간직한 아이라 하더라도 생판 남일 거 아니야 이제는. 나 봐봐야 어차피 모를 거고. 어떻게 컸는지 궁금하긴 한데 굳이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리고 만약에 걔 반응이 싸늘하기로도 해봐. 내가 얼마나 무안하겠니? 누나는 도통 안주를 먹지 않고 술만 계속 마십니다. 그러니까 연석아. 네. 네가 대신 가서 만나라. 누나는 패딩의 안주머니에서 두터운 흰 봉투를 꺼내듭니다. 봉투를 열어 몇 장을 꼬집어 제 앞에서 흔듭니다. 15만원이면 돼? 저는 고개를 가로젔습니다. 누나 딸인 걸요. 그럼 20만원. 누나는 한 장 더 꺼내듭니다.
서로 얼큰하게 취하며 협상은 마무리됩니다. 잠깐 만났다 오면 20만원, 해 봐야 20분입니다. 아무래도 돈 벌리는 장사입니다. 오후 4시, 눈발은 약해졌습니다. 누나는 인사불성이 됐습니다.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려는 누나의 손을 붙들고 억지로 끌고 나왔습니다. 정신 차려봐요. 누나는 술을 더 마시자고 합니다. 취해 자신 마음이 가는대로 목적지 하나 없이 걷다가 세 번이나 자빠집니다. 그럴 때면 전 누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습니다. 누나는 다시 앞으로 걸어갑니다. 그렇게 오래, 눈이 쌓여 눈썹이 생긴 이정표는 이곳이 종로 3가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누나와 고군분투 하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다가옵니다. 익숙한 실루엣이 점차 진해집니다. 206호 할아버지입니다. 노인네는 참전 모자를 벗었다가 훵하니 빈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씁니다. 학생이란 놈이 만날 년이 없어 갈보년을 만나나. 노인네가 말합니다. 당연히 화를 낼 줄 알았던 누나는 의외로 저에게 매달려 울기 시작합니다. 항상 당찼던 누나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어린 놈 한 번 맛보려고 그러나? 갈보년이 갈보년이지. 노인의 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인에게 다가갑니다. 화가 오릅니다. 누나는 나를 잡고 말립니다. 노인네는 약간 긴장한 듯 뒷걸음질 치더니 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누나는 슬프게 웁니다. 서럽게도 울고 있습니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울음이 번져갑니다. 과한 호흡 끝에서 누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습니다. 토 하고 싶어. 누나는 훌쩍거리며 술 냄새 쩌든 트림을 합니다. 저는 주변 화장실을 찾아봅니다. 근처 건물엔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돌아가니 누나는 고개를 숙이고 토를 하고 있습니다. 먹은 게 없어서 맑은 술만 내립니다. 옷을 타고 흘러 패딩을 흥건히 적시고 있습니다. 술 냄새가 축축하여 저도 만취할 것만 같습니다.
하는 수 없어 근처 모텔로 누나를 데리고 들어갑니다. 대실을 하고 누나의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내 계산합니다. 패딩을 벗기고 누나를 침대에 눕힙니다. 다행히 옷 안쪽에는 토가 묻지 않았습니다. 휴지로 누나의 입가를 닦아줍니다. 꼭 감은 누나의 눈에선 아직도 물이 흐릅니다. 많이도 흐릅니다. 눈물도 닦아줍니다. 저는 화장실에서 누나의 패딩 겉을 씻습니다.
정리를 마치고 담배를 피우려고 합니다. 제 담배가 떨어져서 누나의 담배를 훔칩니다. 약한 타르의 멘솔담배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누나는 독초를 태울 것 같은데 의외로 약한 담배를 태운다는 것을. 담배를 연달아 세 대 정도 태우다가 화장대 앞에서 꾸벅 잠듭니다.
전화벨이 울려 깨어납니다. 연장 하실 거예요? 수화기 너머 바깥의 냉기가 스미어 나오듯 합니다. 저는 누나를 바라봅니다. 너무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저는 연장한다고 합니다. 카운터로 내려가 5만원을 건네 숙박으로 전환합니다. 시간은 8시 45분입니다. 15분 후엔 칸트 할아버지의 믹서기 소리가 들릴 시간, 아직 잠들면 안 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괜찮습니다. 별 생각 없이 이를 닦고 누나 옆에 눕습니다.
누나는 어째서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을까. 의문에 꼬리를 물다가 문득 저는 이 누나를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 정해져있지 않은 여자입니다. 누군가의 엄마이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였고, 수많은 남자들의 일시적인 여자입니다. 이를 하루 만에 모두 겪은, 투명하다 못해 캄캄해진 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톡, 노인의 한마디에 터져버린 여자. 저는 누나에게서 슬픔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누나를 꼭 안아줍니다. 항상 당찼던 모습이, 그러나 지금은 쭈그려 새우잠을 자는 모습이 너무 연민이 갑니다. 너무나 가녀려 보입니다. 고시원 작은 침대에 의지해 눈물 지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 아픕니다. 그리고 저는 발기합니다. 낮의 발기를 생각합니다. 그 발기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다. 이 여자에 대한 연민이 커져버린 것이라, 고. 그렇게 말을 했던 것이 부끄러워집니다.
누군가는 모텔에 가면 자신의 공간이 아니기에 잠을 잘 못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에겐 이보다 편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깨지도 않고 일찍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9시까지 푹 잠들었습니다. 일어났을 때 누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기다란 멘솔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일어났니? 누나는 싱긋 웃어줍니다. 기억은 나요? 누나는 저에게 다가와 대답 대신 입을 맞춰줍니다. 쉽게 혀가 들어왔고 서로를 휘감아 세밀한 감정을 공유합니다.
샤워를 하고 담배를 태우고 퇴실시간에 가까워질 때 즈음 해장국을 먹으러 갑니다. 어제와 달리 해가 떠 있습니다. 해장술이라도 마실까 했는데 누나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밥을 먹고 누나는 저의 손을 잡고 백화점으로 들어갑니다. 신이 난 듯 누나는 저를 남성의류 코너로 데려갑니다. 적당한 곳으로 들어가 누나는 네이비색 정장 하나를 고릅니다. 이거 입어봐. 누나는 점원을 부릅니다. 이거 비싸요. 그리고 백화점에 현금 돼요? 누나에게 귓속말을 합니다. 못 사는 티 내지 말고 얼렁 들어가. 반 강제로 탈의실에 들어갑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직원이 멋지다고 칭찬을 해줍니다. 거울을 한 번 봅니다. 역시 비싼 게 확실히 예쁘긴 합니다. 구두 셔츠 타이 포함 총 1,270,000원입니다. 다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점원의 목소리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옵니다. 바짓단 정리 얼마나 걸려요? 한 시간 내로 필요한데. 누나의 목소리도 섞여 들어옵니다. 3시간 정도는…… 점원이 말을 흐립니다. 저는 밖으로 나옵니다. 누나는 직원에게 10만원을 더 건네고 있습니다. 1시간 후에 올 게요. 그러자 직원은 활짝 웃습니다. 네 고객님.
왜 갑자기 정장은 사 주는 거예요? 누나에게 물어봅니다. 너 그 꼴로 딸년 만날 거야? 안 돼. 다음은 미용실입니다. 원체 짧은 머리를 고수하기에 머리 정리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코스는 보석코너입니다. 누나는 얼마 걸리지 않아 목걸이 하나를 고릅니다. 18K 금줄에 꼬냑 다이아몬드가 붙은, 젊은 여자가 차면 예쁠 것 같은 목걸이입니다. 누나는 70만원을 이번에도 현금으로 계산합니다. 포장된 박스에서 빵 냄새가 풀풀 오릅니다. 걔한테 이거 주면서. 누나는 잠시 망설입니다. 사랑한다고…… 풉. 그래 한 번 말해줘. 내 입에서 나오는 게 웃기다만. 사랑한다고. 저는 말없이 예쁘게 포장된 목걸이를 받습니다.
수선 맡긴 정장을 찾고 그곳에서 갈아입은 채 밖으로 나옵니다. 코트까지 사준다는 누나를 겨우 말립니다. 양지의 눈들은 금방 녹아납니다. 광화문 가. 광화문 카페에 5시까지 온대. 얼른 가봐. 지금 4시 반이니까. 누나는 제 허름한 짐을 뺏어들고 손짓합니다. 멀리서 보지도 않을 거예요? 제가 묻습니다. 괜찮아. 아. 그리고 이름은 서희래. 혹시 나 닮은 예쁜 년 서넛 있으면 외쳐. 서희씨 있냐고. 서로 눈이 마주치고 껄껄대며 웃습니다.
5시에 맞추어 카페에 도착합니다. 들어가자마자 당신이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누나를 닮았습니다. 키도 다행히 큰 듯싶습니다. 혹시 서희 씨? 네. 맞아요. 당신의 표정엔 경계심이 가득합니다.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서 본능적으로 내장된 어머니의 향을 맡은 것일까요. 동물의 본성이 가득 남아있는 게 인간이니까요.
어머님께서 급하게 일이 생기셔서 못 오게 되셨어요. 자연스레 자리에 착석합니다. 그럼 그쪽은 누구에요? 직장 후배입니다. 역시나 두루뭉술하게 둘러댑니다. 갑자기 선배가 해외출장을 가게 돼서요. 당신의 눈빛은 흔들립니다. 그럼 못 온다, 아빠한테 말 하면 되지 왜 딴 사람을 보내고 난리야. 당신은 다리를 꼬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저는 목걸이를 건넵니다. 선배가 이거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가져가요. 당신은 딱 잘라 말합니다. 제 손은 멈추지 않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선물을 밀어냅니다. 가져가요. 그 잘난 선배한테 사랑할 자격이 있냐고 물어봐요. 나는 그 선배라는 사람 엄마라고 생각 안 해요. 키워준 내 엄마가 따로 있는 걸요. 대답은 여전히 퉁명스럽습니다. 서희 씨 그래도 선배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주세요. 저는 아예 당신 앞에 목걸이를 내려놓습니다. 낳아줘서 고맙다고 정도는 나도 하려고 했는데 뭐? 일이 바빠서 못 와? 그 여자 인생에서 나는 가끔 감성을 팔 용도로 남아있는 거 아니야? 일이 바빠서? 그냥 가져가요. 당신은 핸드백에서 볼펜을 꺼내 냅킨에 무언가를 적습니다. 이 번호로 직접 하라고 해요. 그럴 자신 있으면. 당신은 코트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당신의 움직임에 바람이 훅, 불어옵니다. 화연누나의 향이 희미하게 공기를 적십니다. 저는 당신이 먹다가 남긴 바닐라 라떼를 홀짝 마셨습니다. 멜랑꼴리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나오는 기분을 설명해줍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만 머리에 가득한 상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없는 날의 기분을요. 그래서 툭 건드리면 눈물이 왈칵 하고 쏟아지는 날. 슬픔 보다는 머리가 새로운 관념에 꽉 차 용량 과다로 눈물이 새어나오는 날을.
점차 하늘에는 구름이 드리워집니다. 다시 눈이 내릴 것만 같습니다. 해가 완전히 질 때 까지, 세상이 캄캄해질 때 까지, 저는 그 카페에 앉아있습니다. 혹시나 이 목걸이라도 가지고 가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당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카페를 나와서 목걸이를 버릴까 고심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합니다. 고이 품어 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지하철을 타고 석계역에 내립니다. 다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역에서 고시원까지는 금방입니다. 올라와 누나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잠깐만요. 목소리엔 졸음이 묻어납니다. 연석아, 어떻게 됐어? 뭐라디? 주머니에 고이 접혀있는 그 냅킨을 꺼내야 하는데,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들었습니다. 목걸이 봉투를 쥐던 손이 저절로 뒤로 향합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진실을 말할까.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손이 너무 달달해서일까요. 크리스피 크림 도넛의 끈적함이 생각나는 달달함. 저는 참을 수 없이 그냥 질러버렸습니다.
사랑한대요. 자기도. 그리고 키 크게 낳아줘서 고맙대요.
고마워. 누나는 핸드백에서 주섬주섬 봉투를 꺼냅니다. 저는 사양합니다. 그러나 누나는 굳이 자켓 주머니에 돈을 넣어줍니다. 돈 봉투에는 이상한 냄새가 납니다. 담배 찌든 냄새, 이를 가리는 진한 향수. 저는 이 돈이 받기 싫어 밀어냅니다. 당신이 전에 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누나는 전의 저처럼 멈추지 않습니다. 아직 300이나 남았어. 걱정 마. 누나는 희미하게 웃습니다. 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왜 할 말 있니? 아니요. 쉬세요. 저는 방문을 닫습니다.
방에 들어가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목걸이 가격대를 대충 알아봅니다. 착용한 적 없는 새 물품은 예상보다 높은 가격대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다 일순, 몸에 오싹한 기운이 돕니다. 스마트폰 상단에 위치한 알림바는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옆방의 문이 열리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장 선생. 장 선생. 문 열어보쇼. 204호에서는 어떤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문을 열어봅니다. 따뿐롬도 나옵니다. 9시 1분이 되었습니다. 오늘 장 선생 택시 안 몰고 쉬었다. 몸 안 좋다 해서. 노인네는 저를 잠깐 째려보더니 다급하게 노크를 합니다. 실장이 열쇠를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수많은 열쇠에서 204호 열쇠를 콕 집어 찾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국 저와 따뿐롬이 힘을 합쳐 문고리를 부숩니다.
칸트 할아범은 누워있습니다. 아주 반듯합니다. 두 손을 명치 위로 모으고 작은 침대에 딱 맞게 누워있습니다. 따뿐롬이 옷에 실밥을 뜯어 칸트할배 코앞으로 가져갑니다. 실밥은 따뿐롬 손의 떨림에만 반응합니다. 할아버지의 손을 만져봅니다. 시체의 손은 차갑고 전기가 흐르는 듯 닭살을 올립니다.
앰뷸런스가 오고 실장과 206호 할아버지가 따라갑니다. 실장은 익숙한 듯, 시신을 찾아갈 사람 없을 테니 저승 갈 때 까지는 옆에 있어줘야 한다고 합니다. 앰뷸런스는 소리도 내지 않고 등대처럼 불빛만 멀리 내밀며 천천히 멀어져갑니다. 눈이 내려 소리를 먹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고시원 현관엔 내일부터 외벽공사가 있을 거란 안내문이 붙어있습니다.
담배가 떨어졌기에 편의점에 들어갑니다. 마침 진열대에 스팸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팸도 하나 고릅니다. 디스 한 갑 주세요. 9000원입니다. 봉투에서 오만 원을 꺼내 건넵니다. 직원의 얼굴이 약간 찌그러집니다.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옵니다. 옷을 갈아입고 공용 부엌으로 향합니다. 찬장에 식빵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후라이팬을 꺼내 빵을 굽습니다. 그 다음엔 김치를 굽고 옆에 스팸을 잘라 굽습니다. 식빵 6쪽과 김치, 그리고 스팸 한 통으로 토스트 3 개가 나옵니다. 토스트를 가지고 와 따뿐롬과 누나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배 안 고파요? 누나와 따뿐롬 모두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고시원의 음산함도 허기를 이기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너무나 좁기에, 그래서 너무나 비어있기에, 이 공간은 언제나 공허하기에 그럴 것입니다.
서로가 방문을 열고 침대에 앉아 토스트를 먹습니다. 찬장에서 소주를 꺼내 잘 익은 토스트와 곁들입니다. 바삭거리는 게 맛이 좋습니다. 이틀 전에 먹었던 생 토스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한 맛의 환희는 이곳에 있군요.
연석 왜 우냐. 소주를 따라주던 따뿐롬이 말합니다. 아니야. 그냥 빵 냄새가 기가 막히잖아. 제가 말합니다. 누나가 갑자기 웁니다. 따뿐롬도 갑자기 웁니다. 속이 심란합니다. 토스트를 먹다가 남깁니다. 방문을 닫고 엄청 울었습니다. 소리가 새어나갈까, 그것이 두려워 심지어 입을 틀어막습니다. 그래도 여하간에, 냄새 하나는 죽이는 토스트였습니다.
서희 씨, 이 문자를 보시면 꼭 답장해 주세요. 목걸이를 돌려드리지 않으면 제가 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끝-
당선 소감.
1.
당선된 후, 처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날이 언제인지 되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스마트폰 메모장은 문득 떠오른 스토리와 일상의 관찰로 가득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종이와 펜이 있으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에 시를 썼고, 쉬는 날에는 태블릿과 키보드를 들고 카페에서 소설을 썼습니다.
그 '어느 순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글이 일상에 녹아있기에 굳이 기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2.
소설 '죽여주는 토스트'는 제가 고시원 살 때의 경험을 토대로 쌓아 올린 작품입니다. 광운대학교 앞 한마음 고시원. 그곳에서 저는 수많은 사람을 보았습니다. 매일 취해서 살거나, 계속 혼잣말을 하거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곳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브라운관 티비가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구인 사람들.
그래도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생각보다 훈훈하게. 오늘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3.
아직도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더욱더 공부하고 읽고 쓰겠습니다.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글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를 키워주시며, 문학과 예술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도와주신 서정아 시조 시인,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 K.동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 작품을 매번 읽어주었던 누나 K.현유. 동기들. 용필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네가 작가가 되겠냐고 했던 사랑하는 강릉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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