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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정 죽서루는 과연 관동제일루인가
삼척시 남양동 오십천변의 정자.
식당에서 챙겨준 박스들 덕에 안온한 잠자리에서 잠시 삼척을 돌이켜보다가 잠들었다.
실직국(悉直國)으로 문을 연 삼척.
'삼척'은 '실직'의 변음이고 '실직'은 '쇠(鐵)직이'의 변음 표기라고?
고대부터 광산지였음을 지명이 말해주고 있는가.
고려 때는 척주(陟州)로 불렸던 삼척은 넓은 탄광지역이었으나 노른자가 위(동해시)와
아래(태백시)로 많이 잘려나간데다 석탄산업의 퇴조로 어려운 처지가 된 지자체다.
1980년대 30만 인구가 겨우 7만 남짓으로 격감했다니 그럴만도 하겠다.
어업과 관광 레저산업의 한계를 통감했나 신규 원전 부지 후보를 자원했단다.
1999년에 거센 반대로 포기했고 2005년에는 방폐장 건립 추진도 무산되었다는데 또.
정자 사용에 대한 응분의 도리인가.
잠에서 깨어난 새벽에도 삼척과 관련된 생각이 이어졌다.
찬반 어느 쪽도 큰 상처 받지 않고 원만하게 해결되기 바라며 일어선 시각은 06시 50분.
2014년 지방선거에서 삼척시의 최대 쟁점이 될 것이라는데 삼척의 딜레마(dilemma)가
순조롭게 풀리기를 빌며.
삼척시의 첫 방문지는 옛 성안이라는 성내동(城內) 죽서루(竹西樓).
동쪽 죽림에 죽장사(竹藏寺)와 명기(名妓) 죽죽선녀의 집이 있다 해서 죽서루.
이승휴(李承休/1224 ~1300)의 '동안거사집' 을 근거로 하여 1266년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누정.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는
기록이 있다고 해서.
고향에 은거중인 이승휴에게 안집사가 출사를 권한 곳이 이 누정이라니까.
자호(自號) 동안거사((動安居士)인 이승휴는 삼국유사에 견줄만한 역사서 '제왕운기(帝
王韻紀)'를 쓴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삼척 출신이다.
그의 시대는 고려 23대 고종(高宗~26대 충선왕(忠宣王)때로 무인(武人)정권, 강화천도,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쟁, 원(元/몽고)에 굴복당한 시기였다.
원은 화주(和州/영흥)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서경
(西京/평양)에는 동녕부(東寧府)를 두어 자비령(慈悲嶺) 이북을 장악했다.
고려는 그 밖의 지역을 관장할 지방관으로 양계(兩界)에 안집사(安集使)를 두게 됐는데
당시의 강릉도(江陵道) 안집사가 진자후(陳子厚)였던가.
창건자도 시기도 알 길 없는 누정이 왜 중수, 증축, 단청을 거듭하며 유명해졌을까.
도계읍(삼척시)과 태백시 사이에 위치한 낙동정맥 백병산에서 발원해 무수히 굽이치며
흘러흘러 동해로 뛰어드는 물 맑은 오십천변의 명승지에 위치한 것이 이유일까.
증서는 없다 해도 관동지방의 임해정들(臨海亭)과 달리 유일한 임계정(臨溪亭)이라?
그렇다. 허목의 '죽서루기'(竹西樓記)에 담겨있다.
遊觀者獨稱西樓爲第一何也(유관자독칭서루위제일하야)
여러곳을 관광한 자들이 단연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중약>
獨西樓之勝 隔海有高峯壁(독서루지승 격해유고봉벽)
유독 죽서루가 아름다운 경승인 것은 바다와 떨어져 높은 봉우리와 절벽이 있어서다.
서쪽의 두타산과 태백산은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대천이 동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고 <중약>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고 <중약>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지는 햇빛에
물결이 돌에 부딪혀 찬란하게 빛난다. <중약>
與大海之觀絶殊 遊觀者其樂此而云云者耶(여대해지관절수 유관자기락차이운운자야)
대해를 구경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경승에 보는이들이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는 것이리.
아무튼 이조 18대현종(顯宗)때 허목(第一溪亭), 19대숙종(肅宗)때 이성조(李聖肇/竹西
樓, 關東第一樓), 24대헌종(憲宗)때 이규헌(李奎憲/海仙遊戱之所) 등 삼척부사 삼인의
현판들이 있다.
누정 내에도 여러 기문과 시판들이 번거로울 정도로 게판(揭板)되어 있는 보물제213호
죽서루는 송강 정철의 관동8경(관동별곡) 중 으뜸가는 하나다.
북에서 남하하면서 총석정, 삼일포, 청간정, 낙산사, 경포호에 이어.
<진쥬관(眞珠館) 듁셔루(竹西樓) 오십쳔(五十川) 나린 믈이 태백산(太白山) 그림재를
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한강(漢江)의 목멱(木覓)의 다히고져. (진주관 죽서루 아래
오십천 흘러내리는 물이 태백산의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그 그림자를 한강
옆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사미인곡을 비롯해 자나깨나 임금 생각뿐이니 아첨쟁이라는 빈축을 살 수 밖에.
또한 경승을 편식하고 과장이 심한 정 송강에 대해서는 가사문학의 대가라는 것 말고는
호의적일 수 없다.
유감(遺憾)스런 대한평수토찬비
매번 편히 드나들었던 죽서루 앞마당과 주변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삼척시가 옛 삼척도호부 관아인 죽서루 주변의 발굴조사를 통한 정비, 복원으로 역사
문화공원을 조성하려 한다나.
이미 2010년과 2011년에 1,2차 발굴조사를 했는데 신라토기, 삼척읍 토성, 관아 건물지
등 출토유물 및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이 일대가 내아(內衙)로 추정된단다.
4차 발굴조사까지 하겠다는 삼척시 당국자들은 속말로 또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의 혈세로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삼척도호부를 복원하면 일류 문화도시가 되고 관광객이 물밀듯이 몰려오는가.
시민들이 먹지 않아도 배불러오는가.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니고 우선순위에서 그렇게도 시급한 일이냐는 것이다.
"비단이 한끼" 라는데 산적한 시민들의 요구와 현안들은 몰라라 하고 공포의 원전까지
유치하려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엄청난 빚으로 구름잡는 짓 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오십천(죽서교) 건너 삼척의 관광타운(시립박물관, 세계동굴엑스포타운 등)으로 갔다.
오십천변 절벽 위의 죽서루, 임계정이 과연 명승이라 하는데 주저하지 않아도 되겠다.
숱하게 다녀갔음에도 전에는 왜 이번 처럼 실감하지 못했을까.
삼척문화예술회관 옆으로 난 데크를 따라 강변길로 들어섰다.
'집 주변'을 의미하는 삼척의 방언이 '오랍드리'라는데 삼척의 5개 코스 20km에 달하는
오랍드리 산소길 중 하나(3코스)란다.
적당히 오르내리고 한봉 벌통이 있는 우거진 숲과 쉼터와 간이체육시설 등 사계절 안성
맞춤길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이 걷는 맛과 멋을 올려주고 있다.
오십천교를 건너 단골집이었던 옛 천지연사우나 앞으로 해서 육향산으로 갔다.
어제 저물어서 보지 못한 강원도 유형문화재제38호인 '척주동해비, 대한평수토찬비(禹
篆閣)', 삼척포진성지, 비석거리 등을 돌아다 보기 위해.
국난극복유적지(표석) 육향산 6모 육향정(六香亭)은 삼척의 유지들이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1948년에 세웠다는 자그마한 정자다.
아담한 정자에 앉았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임금의 은총을 기리는(praise) 비'라는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때문이었다.
삼척부사 허목이 지어 목판에 새겨두었던 글을 광무8년(1904) 고종의 명으로 칙사(康
洪大)와· 군수(鄭雲晳) 등이 돌에 그대로 새겨 세운 것이라는 비석이며 중국 형산 우제
(衡山 禹帝)의 전자비(篆字碑) 탁본 77자 중 48자로 지었다는 비문이다.
이 비(碑)의 해설판 '平水土贊碑'와 '平水土讚碑'가 늙은 길손을 괴롭힌 것이다.
대충 넘겨버리지 못하는 성벽 때문이다.
그의 문집 미수기언(眉叟記言) 권지육(卷之六) 상편(上篇), 고문(古文)편의 형산신우비
발(衡山神禹碑跋)에 이 탁본을 얻은 경로가 가록되어 있다.
"왕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의 봉호)이 ‘형산 신우비문’을 부쳐 왔다. 글씨가 천지의
조화를 곁들여, 마치 새가 나는 듯, . . 신기롭고 상서로운 모양들의 힘과 얼이 번뜩이어,
도저히 필력이 미처 본뜰 수 없다. <중략>
왕손(李俁)이 고문을 몹시 좋아했는데, 지난 해 사명을 받들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이
비문을 얻어와, 내가 복희.황제의 고문을 조금 알아본다 여겨 물어 온 것이다."<후략>
서체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비문 내용과 처리 과정을 보면 허목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임금을 기리는 듯 하나 자기의 치적을 자랑하는 교묘한 글재주를 발휘했으며 반대
파의 거부감과 훼손을 의식해(?) 비를 세우지도 못했으니까.
<久作忘家 翼輔承帝 勞心營智 裒事興制 泰華之定 池瀆其平
處水犇麓 魚獸發形 而罔不亨 伸欝䟽塞 明門與庭 永食萬國>
(오래도록 집을 잊고 임금님 뜻 받들어 마음쓰고 지혜를 다하여
열심히 일하고 제도를 세웠더니. . . . . . . .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고. . . . . . . .온 천하가 길이 먹고 사는도다)
그런데, 하나의 '大韓平水土贊碑'에 대한 작은 경내의 2개의 다른 해설판.
기린다,칭송한다는 뜻으로 우리가 쓰는 한자는 '讚'인데 반해 중국과 일본에서는 '贊'을
사용하는데 당시의 허목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가.
미수기언 권지구(卷之九) 상편(上篇) '도상(圖像)'에 자기 화상(畵像)에 대한 사영자찬
(寫影自贊), 우자찬(又自贊) 등 자찬(自贊/自讚)한 글이 있다.
23세 때, 17세 아우가 그린 자기 화상(老人二十三時, 有仲弟十七有妙藝, 畫其兄惟肖)을
찬(贊/讚)한 글이다.
당시의 글들을 보면 허목 외에도 '贊'자를'기린다'는 뜻과'도운다'는 뜻으로 혼용하였기
때문에 문장 전체를 읽고 음미해야 한다.
고전의 번역자들을 고충에 빠지게 하려고 그랬을 리 없지만 훌륭한 우리글 두고 한자를
고집한 선조들이 원망스럽다.
궁촌은 잘못된 이름이다
삼척교 사거리에서 오십천을 건너면 사직삼거리다.
옥계와 북평이 그런 것 처럼 삼척도 오십천 하류 정라동과 사직동 하늘이 늘 뿌옇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 공장이라는 동양시멘트 공장(사직동)과 레미콘 공장(정라동)
때문인데 맑은 하늘 보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옛 실직곡국(悉直谷國)의 터전 마을이었는데 실직(悉直)의 변음이라는 사직동(史直)을
지나 오분동(梧粉)에서 바닷가 고성산 자락길로 가서 신설 해안로 따라 한재에 올랐다.
고산자의 십대로 중 평해대로의 대치(大峙/한재 또는 큰재)가 이 고개다.
1970년대 까지도 좁고 높은 고개였다.
많이 낮추고 넓힌 7번국도(동해대로)였는데 한재터널의 개통으로 지금은 '삼척로'라는
이름의 새 옛길이 되었으나 재마루는 여전히 동해의 빼어난 조망권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정자가 있었더라면 아마 정 송강의 관동별곡이 달라졌을 것이다.
재마루를 지나면 근덕면(近德) 땅이다.
삼척로를 따라 한재밑에 내려선 후 해안길로 들어섰다.
어디를 돌다 왔나 낭만가도가 끼어들었다.
'평화누리길' 은 간성에서 내륙으로 나갔고 '관동별곡800리길' 은 죽서루에서 끝났으며
'낭만가도' 역시 곧(삼척의 남단) 종료될 텐데 '해파랑길'은 어딜 헤매고 있나.
한재해수욕장을 지나 상맹방으로 이어지는 해변.
해안길과 상맹방길 사이에 조성되어 있는 긴 방풍림이 수난을 당하고 있나.
상맹방해수욕장 앞에서 하맹방해수욕장 지근까지 길게 차지한 씨스포빌(seaspovill)의
골프클럽과 리조트에 방풍림이 장애가 되고 있는가.
벌채반대 플래카드들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해변마을에 절대불가결의 방풍숲을 남벌
하여 마을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 같다.
예전에는 백사장(해수욕장)을 열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그래서, 특별한 시설이 없으므로 빈부의 괴리현상 또한 없는 한덩어리 해수욕장이었다.
그러나, 해안 군부대의 철수를 기다렸다는 듯 서민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고급 시설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데 씨스포빌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물 따로 기름 따로 노는 등급사회가 여기 맹방해변까지 침투한 것.
하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 거리가 먼, 천민자본주의의 금력과 후진
민주주의국의 권력이 국민적 정서를 고려하는가.
고려하는 순간 무기력해질 것이며 악착같이 소유하려는 의미마저 사라지고 말 텐데.
주차중인 수십대의 수입 캠핑카(camping car)는 임대용인가 매물인가.
우리나라 해안에서는 저 놈들이 괴리와 갈등, 악폐의 주범인데.
해발1.082m 사금산(삼척시 노곡면 상마읍리) 문의재에서 발원해 북류하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맹방과 덕산 두 해수욕장을 가르며 동해로 빠지는 마읍천(麻邑)을 건넜다.
변질에 가속이 붙은 민초들의 여름 낙원 맹방해수욕장에서 덕산해변으로 간 것.
마읍천 다리 덕봉교,덕봉대교를 비롯해 덕산리 마을이름까지 해변의 덕봉산(德峰)밑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란다.
깔끔하게 정비된 덕산해수욕장을 지나 국가어항 덕산항으로 갔다.
"바닥지형의 굴곡변화가 좋아 내외항 모두 다양한 어종을 형성하고 해수와 담수가 뒤섞
이는 하구에는 풍부한 먹잇감이 형성되어 연중 낚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어항.
과연 금진항과 비교될 만큼 강태공들로 붐비고 있으나 문외한인 나와는 무관한 광경일
뿐더러 궁촌항으로 이어지리라는 기대가 깨져 낭패를 본 기분이었다.
되돌아나와 삼척로(옛7번국도)를 따라 궁촌항(宮村)으로 갔다.
도중에 지그재그해야 하는 부남해변과 대진항(동막1리 어촌정주어항)은 생략하고.
"고려 공양왕(恭讓王)이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주고 원주(原州), 간성(杆城)을 거쳐 이
곳에 궁궐을 옮겼다 하여 궁촌(宮村)이라 했다"고 하나 당치 않은 말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꼭두각시 왕이 된지 4년만에 폐위된 고려 최후의 왕,34대 공양왕(恭
讓)은 군(君)으로 강등되어 원주(原州)로 추방되었다.
그 후, 간성(杆城)을 거쳐 이곳에 와서 세상을 떴다.
살해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곳으로 궁궐을 옮겼다 하여 궁촌(宮村)이라 했다는 것은 억지다.
엄밀히 말하면 왕릉도 아니다.
동막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살해재라 하고 그 아래에 살해골이 있다,
공양왕과 세자를 이 곳에서 살해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4년전 평해대로를 걸을 때에 비해 궁촌이 많이 변했다.
초라하고 황량했던 공양왕 무덤이 왕릉처럼 정비되었으며 공사중이던 궁촌~용화 사이
5.4km 레일바이크(Railbike)도 영업중이다.
레일바이크는 영어 국민은 모르는, 한국에서 신조된 영어 이름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구간의 레일은 일제가 동해안 철도건설을 위해 다져놓았던 기반을
손질해 깔았으며 특히 교량의 교각은 그들이 완성해 놓은 것이라는 점이다.
섬진강 남원~순창 간 향가목교의 높은 교각과 터널, 며칠 전 건너온 고성의 북천목교도
그들이 만든지 70여년씩 지났음에도 근래에 우리 손으로 신설한 것들보다 더 견고하다.
신설한지 겨우 30여년 안팎에 버려진 전국 각처의 부실교량들을 볼 때마다 일제의 장인
정신에 머리숙이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우리 민족의 노동력을 혹독하게 착취해서 만들었을 망정.
일제의 야만적 죄과에 그들의 기술혼까지 포함시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방파제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
궁촌항과 궁촌해수욕장을 지나면 원평해수욕장이다.
4년전과는 남하와 북상이 다를 뿐 같은 코스를 걷고 있으며 느낌도 대동소이했다.
궁촌과 원평을 가르는 갈내(秋川) 하류에 해안경비군인 순찰용 간이철교가 놓여있었다.
워낙 낡고 녹슬어서 건널 때 위태위태했는데 안심철교로 바뀐 것이 다르다 할까.
하나 더 있다.
일제때 조성한 노반 양편으로 장송이 우거져 있어서 추천~원평해수욕장 걷기가 감칠맛
나는 산책길이었는데 대부부을 바이크용 레일이 점유한 것.
그리고 그 숲에는 전에 전혀 본 적 없는 원평마을 주민들의 항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궁촌항방파제 파괴만이 원평 주민 살 길이다"
궁촌에 고기가 원평에는 독이라는 것(One man's meat, another man's poison)
인근 해역에 풍부한 어장이 분포되어 있는 국가어항 궁촌항을 관광 및 해양스포츠항의
복합기능을 갖도록 개발했는데 이로 인해 원평이 치명적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방파제 연장공사로 인한 해안침식으로 70~80년생 소나무 200여 그루가 뿌리째 뽑혔고
백사장 100여m가 파도에 쓸려 사라짐으로서 해수욕장이 문닫을 위기라는 것.
이에 더하여 깊이 1~2m의 침식현상이 마을 앞까지 밀려와 주민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실정이란다.
방파제를 파괴해 파도를 분산 및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여름휴가철이면 설악산에 오른 후 백암온천과 대게의 강구항(영덕)을 향하여 해안길을
달리며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벗들과 야영하던 해변의 숲.
밤을 쫓던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주선(酒仙)들은 왜 없는가.
나만 홀로 두고 가버린 몹쓸 사람들 생각에 불현듯 허전이 치밀어 걸음을 재촉했다.
레일바이크 초곡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주민의 불만을 들어보았다.
해변은 침식과 퇴적이 동시에 이뤄져 균형을 잡는데 방파제 공사로 인해 방파제 저쪽은
(궁촌) 퇴적만, 이쪽(원평)은 침식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방치하면 거금을 들인 레일바이크 철로는 물론 마을 주택과 농경지까지 위험하다는 것.
영구적인 대책이란 방파제를 허물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 외에는 없단다.
방파제 하나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 자연의 위력 앞에 초라한 인간의 모습에
자괴감이 드는 듯 했다.
초곡과 문암해변, 지방어항 초곡항에서 황영조기념공원으로 올라섰다.
1992년 8월 9일에 이베리아 반도의 바르셀로나 몬주익(Barcelona, Montjuic /Spain)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려퍼지게 한 황영조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마라톤 우승자인 그가 1970년에 이 마을에서 태어났단다.
내가 태어난 다음해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우리의 젊은이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월계관을 씀으로서 우리민족을 통분하게 했다.
이로 인해 우리 신문의 일장기 제거사건이 있었는데 56년후,태극기를 달고 월계관을 쓴
우리 선수의 기념공원이 일제가 수탈수단으로 건설하려던 철도노반 위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노반은 레일바이크에 활용되고 있다.
마라톤과 일제의 관계, 흥미로운 역사의 진행이다.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며 최고의 영예가 걸려있는 종목이다.
시상대에서 유일하게 월계관을 쓰며 올림픽에서 점유하는 비중으로 보아 명사록등재에
이의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무거운 책무도 함께 지게 됨을 의미한다.
한데, 우리나라에서 2번째지만 태극마크를 달고 월계관을 쓴 유일한 그, 온국민의 영웅
이라는 그가 불미스러운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불미스런 사생활의 풍문 때문이 아니다.
서울시로부터 체육공로자들에게 주는 전대(轉貸) 불가조건의 저가(低價)임차사무실을
받아서 고가로 전대해 많은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본인이 사무실을 자진반납했음에도 서울시가 검찰에 고발했다면 풍문이 아니며 만연된
도덕불감증을 어찌해야 한다?
삼척로를 따라 당도한 용화해변이 늙은이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해서 지체없이 떠났다.
벌써 40대 중반이 된 아들이 초등학생이던 때였다.
인연을 맺은 어촌 노실마을에 아바이 출신 P와 함께 갈 때 이따금 아들을 대동했다.
딸 뿐이기 때문인지 내 아들을 무척 귀여워한 그는 용화해변에 들러서 비싼 전복회판을
벌이기를 빼놓지 않았는데 전복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서 그랬다.
지금은 삼척 레일바이크의 종착역이지만 옛 평해대로의 용화역이 있던 어촌.
꽤 알려진 용화해수욕장과 어촌정주어항 용화항인데 P가 유명을 달리한 후로는 의식적
으로 피했건만 무심코 들렀다가 P생각이 뭉클해서.
다음 항(港)은 장호리의 장호항이다.
넓지 않고 아늑한 해변의 자그마한 항구가 의아하게도 국가어항이다.
우리나라 지도의 호랑이 등에 해당하는 지점이며 수로부인설화의 헌화가 지역이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나 삼척시는 증산해변에 수로부인공원, 임해정과 헌화가비(碑)를 세웠다.
게다가, 삼척시는 임원항 남화산에 수로부인헌화공원을 조성하고 초대형 수로부인상을
세워 삼척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삼으려 한단다.
삼척시는 동굴을 다듬고 남근공원을 만들고 레일바이크를 운행하고 죽서루를 파헤치는
등 관광삼척에 올인하는 듯 하더니 아무 지자체도 원치 않는 원전 유치에 나섰다.
이에 더하여 LNG기지 공사가 진행중이며 발전소를 비롯해 임해공단 유치에 혈안이다.
또한 수로부인의 해가와 헌화는 분리될 수 없건만 증산해변 수로부인공원은 '해가사의
터'라 하고 임원항은 헌화공원이라니 갈팡질팡하는 삼척시 당국의 마인드는 무엇인가.
내 집은 어민들의 서울 종합병원 진료 대기소였다
근덕면은 장호리에서 끝나고 삼척시의 남단이며 경북 울진군과의 경계인 원덕읍이다.
첫 마을 갈남리의 어촌정주어항 갈남항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삼척해신당공원이다.
'세계적인 성(性)민속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조성한 남근(男根)공원이다.
동해를 향한 야산 언덕에 있는 일명 해낭당(海娘堂)인 해성황당(海城隍堂:海神堂)이다.
<젊은 사공은 미역따러 가는 한 처녀를 미역이 많은 바위('애바위')에 내려놓고 석양에
데리러 올 것을 약속했다.
열심히 미역을 딴 후 사공을 기다리던 처녀는 지쳐 쓰러졌고 결국 익사하고 말았다.
사공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 사고 이후 바다에서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온갖 치성에도 흉어는 계속되고 고기잡으러 떠난 장정들은 돌아
오지 않는데 화가 난 한 청년이 술기운에 성황당 제단을 부수고 방뇨를 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 후 풍어가 계속되고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것.
이 처녀의 원귀가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라 믿은 어민들은 남근을 깎아 걸어놓고
치성을 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매년 정월 보름(陰)과 10월 축일에 어민들이 목남근(木男根)을 깎아 금줄에 걸어
놓고 풍어와 무사고(해난)를 빌고 있다는 것이 구전(口傳)되어 오는 해신당 전설이다.
'애바위' 는 처녀가 미역따다 익사한 바위로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살기 위해 애쓴 바위
라는 뜻이며 1km쯤 떨어진 해중에 있단다.
신남마을(갈남리)이 남근숭배 무속마을이 된 내력인데 남근숭배무속(男根崇拜巫俗)의
한 유형이 공원으로 발전했으나 신국도로 인해 차량통행이 뜸해 봐주는 이도 드물겠다.
산에서도 천연 또는 조형 남근석과 음문(陰門)을 종종 대면하지만 내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고백컨대 내게는 혐오스런 조형물이기 때문에 외면해버린다.
또한, 나는 지역민 우대관광지와 파격적인 도서민 우대선박 등은 입장거부, 승선거부로
내 소신을 실행하고 있다.
지방어항 신남항과 신남해변을 지나 당도한 곳은 임원리(臨院)의 임원항.
경도~중랑포를 떠난 이조시대의 평해대로는 삼척~대치(한재)~교가(근덕면소재지)~
용화~미현(임원재)을 넘고 만년원(萬年院)~옥원역창을 지나 평해에 이르는데 당시의
공공숙소인 만년원(萬年院)에 접해 있다 해서 임원리인 마을의 국가어항이다.
시멘트 적출항으로 출발해서 울릉도를 왕래하는 연안항이었던 항구다.
동해안 최대의 횟집촌이기도 한 이 어항이 1983년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 혼슈의 아키타현(本州 秋田) 근해에서 발생한 진도7.7의 지진이 해일을 일으켰고
그 해일이 바다 건너 임원항까지 와서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입힌 것.
동해와 일본해, 지도상의 명칭으로 옥신각신하는 바다 건너 먼 동쪽에서 일어난 지진이
1시간 남짓만에 우리 해안을 강타했다면 우리는 자연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천재지변)을 극복하는데는 공동 대응 외에 길이 없다는 것이다.
유사 이래 잠시라도 평화공존을 해본 적 없으며 일방적 가해자와 피해자인 두 나라.
역사를 통렬하게 반성해 보면 과거는 물론 현대사에서도 저쪽만 성토할 처지가 아니다.
가도정명(假道征明)으로 요약되듯이 섬나라의 절체절명의 욕망은 대륙이며 그들에게
한반도는 최상의 먹이인데도 대비 방비하지 못한 우리는 왜 자성하지 않는가.
우리의 역사가 못난 조상 때문에 수난으로 점철되었다면 우리의 후손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위정자와 그 임무를 맡겨달라는 자들의 대오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자기네 나라의 천황에게 충성하던 군인이 반신반인의 숭앙을 받고 있는 나라,
쿠데타를 주동해 권력의 한 쪽을 쥔 후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해도 추종자들이 줄을 서는
나라를 저들은 깔보고 있다.
가해자에 대한 증오 이상의 경각심을 가지며 경계를 해야 하건만 규탄에만 열을 올릴뿐
속이 빈 국민을 조롱하고 있다.
일제때의 내 담임선생은 일군 고쬬(伍長/하사) 출신이었는데 악질중 악질이었다.
"센징 바가야로(鮮人馬鹿野郎/ばかやろ/조선놈바보자식)"라며 어린 학생들을 핍박하고
조롱했던 그에 대한 적개심이 늙은이가 되어서는 전 일본인을 향해서 더욱 강렬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공조 공생을 압박하고 있다.
재앙의 대응은 더불어서 해도 버거운 일인데 언제까지 분개만 하고 얼마나 더 깔보이고
조롱당해야 정신이 들 것인가.
뼈를 깎는 반성 없으면 알찬 미래도 없다.
하긴, 내 동족과도 더불어 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공동대응?
원덕읍 일대의 어촌들은 한 때 달거리도 하지 않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다.
1970년대 중반에 서울의 3가족이 2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동해안을 여행중에 중상을
입은 이 곳 어촌의 어린애를 삼척도립병원까지 이송해줌으로서 인연이 시작되어.
내가 몸 담았던 대학의 한 동아리로 하여금 이 지역 초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게 한 후
그 동아리를 통해서 지원했고 나는 어촌지역민의 애로를 풀어주는데 적극적이었다.
서울 출판사들의 협조를 받아 도서실을 만들어주고 학생들의 서울여행을 도와주는 등.
내 좁은 집은 이 지역에 현대문명(의술)의 햇볕이 제대로 쪼일 때까지 원덕읍 어민들의
서울 종합병원 진료의 대기소였다.
내 아내가 문화적 충격을 많이 주는 낯선 그들에게 헌신적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입소문으로 알려져 이웃 어촌들의 환대로 이어졌고 내 친지들은 "그 지역의 국회의원이
되려고 공을 들이느냐"고 색안경을 쓰고 볼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그들도 어촌의 환자들을 돕는데 적극적이었다.
지역의료보험이 없던 때라 편법 탈법을 다 동원해 의료보험 혜택까지 보게 했으니까.
그 때의 어린애가 이미 아이 엄마가 되었고 35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결같이 인연이
지속되는 동안 김씨인 나는 장씨인 그 집안의 지존이 되었다.
노모(老母) 아래 1남 4녀인 장씨 가계의 서열에서 나는 2번째지만 남자 1번으로 졸지에
구성원 전체가 내 휘하에 들게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모두 기꺼워한다는 점이다.
새 밀레니엄 이후에는 내가 산과 길 등에 올인하느라 왕래가 뜸해진데다 나이와 핵가족
현상과 더불어 이름뿐인 지존의 자리도 물리게 된 셈이지만 이따금 들러 묵었다.
이 밤에도 그랬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