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 복고, 양동근식 대화법
2002.05.30 MW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것도 양동근이 해내면 매무새가 훌륭해진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빈대 구리구리를 연기할 때도, 래퍼 ‘YDG Madman’으로 특유의 끈적끈적한 랩을 토해낼 때도, 흑인 혼혈 사생아의 슬픈 삶을 연기할 때도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능숙하게 자신의 역할에 녹아 있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도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은 두 가지, ‘힙합’과 ‘복고’를 제대로 섞어 돌아왔다.
오랜만입니다.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네? 아 … 네, 잘 지냈어요. 아시잖아요. 영화도 찍고 뭐…앨범도 나왔고….
그와의 대화는 건조한 인사로 시작되었다. 언제나처럼…. 필요 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 애드리브가 없는 심플한 멜로디를 연상시키는 양동근만의 대화법이다. 80년대 산동네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 어설픈 반항아 ‘왕성기’ 역을 맡아 멋지게 소화해 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오늘은 영화배우 양동근이 아닌 1.5집 <양동근 골목왕 되다>를 발표한 래퍼 YDG와의 만남이다.
영화 찍는 줄 알고 있었는데 영화보다 음반이 먼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됐죠.(웃음) 이번에 나온 앨범은 정규 앨범이 아니라 영화 홍보를 위해서 만든 앨범이거든요. 오래 쉬면 실력도 녹슬고 하니까 겸사겸사… 뭐, 그런 겁니다. 영화보다 앨범이 먼저 나온 건 6월 초에 영화가 개봉되니까 그 전에 영화도 알리고 활동도 하고 해야 하니까요. 영화 홍보를 위해서 함께 출연했던 이정진 씨랑 한채영 씨가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해 주셨어요. 영화 장면도 중간 중간 삽입되고.
오랜만의 영화 작업은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아서 이래저래 방황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재미 있게 촬영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요. 근데 오늘은 앨범 이야기라면서요?(웃음)
그럼 앨범 이야기를 해 볼까요? 영화 때문에 앨범 준비 기간이 길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솔직히 그랬죠. 영화 작업이 후반부에 들어 가면서부터 조금씩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정규 앨범 낼 때처럼 많은 시간을 투자하진 못했지만 시간이 부족한 대신 곡 수가 적어서 오히려 한 곡 한 곡 욕심을 많이 부릴 수 있었어요. 들어보시면 시간 없다고 대충 만든 앨범이 아니란 거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모두 여섯 곡이 수록되어 있네요.
음… 그러니까 싱글 앨범 같은 거죠. 정확히 말하면 ‘싱글 앨범의 성격을 가진 앨범’ 이라고 해야 맞나? 보통 싱글 앨범은 서너 곡 정도가 들어 있잖아요. 이 앨범엔 여섯 곡이 들어 있어요. 우리 나라에는 싱글 앨범이란 개념이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으니까 보너스로 두 곡 정도를 더 넣은 거죠.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든 타이틀곡 ‘골목길’만 올드스쿨 형식의 곡이고 나머지 다섯 곡은 그동안 했던 스타일의 음악들이죠. 제1집 앨범을 프로듀싱해 주셨던 형이 세 곡을 주셨고, 드렁큰 타이거 형들과 씨비매스 형들도 함께 해 주셨어요. 1집 때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도 도움을 주었구요.
1집 때는 직접 썼던 재미있는 가사들이 많은 사랑을 받았었죠. 이번 가사도 기대가 되는데요.
그동안 틈틈이 노트에 써 왔던 것들을 활용 했어요. 어떤 곡은 갑자기 필이 와서 쭉쭉 써 내려 가기도 하고…. 곡 수가 적다 보니 아무 래도 부담이 덜 됐는지 이번에는 가사에 그다지 신경을 많이 안 썼던 것 같아요. 마음이 편했다고 할까요?
‘골목길’을 리메이크한 타이틀곡은 양동근식으로 새롭게 태어난 느낌이에요.
영화가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잖아요. 같은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음악도 복고풍으 로 만들었죠. 이 노래 아세요? 그때 대단한 인기였잖아요. 로봇춤도 유행했었고…. 전부터 이 곡을 꼭 한번 리메이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유요? 없어요.그냥 …한번 해보고 싶다는 느낌이었죠. 원래는 좀 빠르고 경쾌한 곡인데 힙합 스타일의 곡으로 다시 만들었어요.
무대에서의 안무도 그런 느낌을 살릴 수 있도록 복고풍으로 구성했구요. 무대에서는 멋진 춤 실력을 볼 수 있어서 반갑던 데요. 오랜만에 무대에 선 느낌은 어떤가요.
저는 항상 똑같아요. 설레기도 하고 떨리고… 그리고 재밌죠. 긴장돼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가도 무대에 서면 기분 좋고 그래요. 사실 이런 말 안 쓰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뭐, 그런 느낌입니다.(웃음) 특히 이번에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서니 더 기분이 좋죠.
오랜 친구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안무팀과 함께 한다고 들었습니다.
창훈이라고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 녀석이 있어요. 저는 랩을 하고 그 친구는 계속 춤을 춰 왔는데 이번에 절 많이 도와주게 되었죠. ‘골목길’ 안무를 이 친구가 구성해 주고 여러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춤추는 친구들을 모아 프로젝트팀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름도 지었어요. ‘양동근과 1위 후보’라고.
재밌는 이름이에요. 의미심장한 뜻이라도?
의미심장하긴요. 그냥 여기저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여 프로젝트팀으로 뭉쳤으니 이름 하나 만들자 했는데 이 이름이 재미있고 좋은 것 같아서요. 기억하기도 쉽고….(웃음) 1위하겠다는 그런 뜻 아닙니다.
이번 앨범 활동은 어느 정도 할 계획인지.
일단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는 열심히 활동 할 계획이에요. 해보고 싶었던 곡을 좋은 친구 들과 함께 보여드릴 수 있고, 무엇보다 영화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니까요. 후속곡 활동은 하지 않을 생각이구요.
지난 이야기가 되겠지만 성공적이었던 1집 활동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내려본다면.
1집이 성공했었나? 글쎄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 그냥 하고 싶은 걸 했고 많은 것을 경험 했고…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죠.
많은 경험이라면 어떤 것들일까요.
1집 활동하면서 어이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어요. 힙합 음악을 하면서 느끼는 시스템 자체의 문제도 있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음악 자체보다는 너무 ‘잘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힘들었으니까요. 그냥 음악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두 번째 앨범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지금으로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1집 활동하면서 느꼈던 것들 때문에 한동안 별 생각을 안 하고 있었거든요. 하게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안 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실 이제는 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조금의 두려움이 있어요. 부담도 생겼고. 워낙 말들이 많으니까…. 저야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해 왔으니 별로 상관이 없긴 하지만요.(웃음) 언제쯤 낼 계획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양동근과 힙합을 따로 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저도 그래요. 힙합은 그냥 내 생활이지,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매일 매일 먹고 자고 하는 것처럼 힙합이란 건 저에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음반 작업은 다른 문 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겠죠. 그동안 그래 왔던 것처럼.
새 앨범 이야기에서 지난 앨범 이야기까지, 점점 솔직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이번에도 무미건조한 양동근식 대화법의 매력을 발견한다. 한국 가요계에서 힙합을 한다는 건 힘들고 치사하기도 하고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힙합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양동근. 십 년 넘게 봐 온 연기자로서의 모습보다 두 장의 앨범을 낸 래퍼로서의 모습이 더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 그와 잘 어울리는 음악. 그의 말처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만나질 그의 다음 앨범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