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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쎈더냐 1잔의 커피냐 ?
50일이 넘은 2차 까미노 생활 중 질병 또는 상처 없이 몸 상태가 가장 저조한 날이 어제였다.
한낮 이후 회복되는 듯 하여 다행이다 싶었으나 이 아침은 더 악화된 느낌이었다.
오늘도 내세울 만한 이유 없이 알베르게를 떠날 때의 시간이 8시 반이었으니까.
뻬레그리노스 간에 회자되는 악 소문 때문인지 주인을 맞지 못한 베드가 태반인 알베르게.
역 코스는 늙은이인 내가 유일하며 순 코스도 한자리 수를 간신히 면한 젊은이들 뿐이라 편히 잠들 수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뽀르뚜갈 시간은 7시 반이지만, 평상의 출발 시간이 6시 전인 내게는 여전히 많이 늦은 출발이었다.
그럼에도 최 고령자인 내가 가장 일찍 나섰으므로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늦잠꾸러기들인가.
아직껏 베드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완전히 건조되었는데도 천근인 백팩을 메고 비틀거리는 꼴은 아마도 주정뱅이의 몰골이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쨍쨍하지 않고 비도 오지 않고 흐린 날씨가 부조하는 아침.
화살표를 확인할 기력마저도 없지만, 평지에서는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걷기를 시작하면 절로 작동하는
관성으로 얼마쯤은 걸을 수 있을 만큼 단련된 것이 다행인 몸.
어제 중단했던 뽄치 길을 따라 남서진, N1 국도 앞까지 나아갔다.
국도를 따라 남하하다가 비로소 보인 것이 바르게 진행중임을 확인해 주는 노랑과 파랑 화살표였다.
까미노는 정남으로 곧게 뻗은 N1 국도를 따른다.
직선인데다 대소 차량들의 질주로 인한 매연과 위태로움 때문에 고역스럽고 불안한 길.
전회(前回)에 언급한 대로 국도 이전에는 시 군도로였거나 일반 소로였을 것이며 그 이전에는 숲길이
였을 것이라는 증좌(證左)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잠시 국도의 갓길(인도)을 따르던 까미노가 로터리를 지나 별도의 인도를 따른다.
안심 길이다.
스페인의 프랑스 길과 여러 까미노에는 '까미노 쎈다'(Camino Senda) 또는 '쎈다 데 뻬레그리노스'
(Senda de Peregrinos)' 라는 이름의 표지판(순례자 오솔길/footpath)이 서있다.
각종 차량들이 왕래하는 포장 대로와 나란히 가는 비포장 길이다.
차량이 다니기는 고사하고 진입 자체가 불가능하며, 뻬레그리노스에게 절대 안심의 이 길이 더러 있지
만 뽀르뚜 길에서는 드문 길.
노변의 학교(Escola Secundaria Mealhada/고등학교?)를 지난다.
공원(Parque Cidade cafetaria do parque)도 지나는데, 노변에 아줄레주 벽(azulejo/뽀르뚜갈 특유
의 陶瓦) 음수대(Fonte Mealhada)가 있는 공원아다.
유감스운 것은 이 음수대도 먹통이다.
곧 화살표의 안내 대로 국도를 건넜다.
지자체 메알랴다의 다운타운 지역으로.
1. 2km쯤의 걸음이 워밍업(warming up)에 해당되었는가.
약간 부드러운 듯 하여 바르 레니스( Lenis)에서 커피를 마셨다.
출발 직후부터 뭔가를 마시고 싶었으나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것이 1잔의 커피였던가.
와인을 뿜어내는 분주대(噴酒臺)가 조화로울 것이다
한결 활력적이 되어 라르구 샤파리지스(Largo Chafarizes) 길을 따라서 N234 도로를 횡단했다.
이어서 남남서진하는, 폭이 넓지 않은 길 (R. Prof. Dr. Costa Simões) 1.5km 정도의 직선로를 남하
했다.(R. Dr. José Cerveira Lebre ~ R. visc Valdoeiro)로 이어지는 길)
조금 전에 헤어졌던 국도(N1)에 다시 합류하기 까지, 지나가는 약국(Farmácia Brandão)과 우체국
(CTT Mealhada) 앞애서 잠시나마 멈춰섰다가 떠났다.
용무 유무를 확인하느라 멈추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인데 아직 업무개시 전이라 무위한 시간이 되었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에 내게는 한 버릇이 생겼다.
알베르게를 떠난 아침나절에 위 두 곳을 지나게 될 때는 잠시 머무르는 것이 습관으로 고착된 것.
전일에, 아침에 숙소를 나설 때까지도 어떤 약이 필요하거나 발송할 우편물이 있슴을 확인하고도 정작
약국 또는 우체국 앞에서는 까마득이 잊고 지나친 후 몹시 아쉬워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치매 전단계라는 건망증이 시작된 것인가.
이어지는 비스크 발도에이루 길(R. Visc. Valdoeiro)이 옆 길(Av. Dr. Manuel Lousada)에 흡수되는
지점에 분수대가 서있다.
포도나무와 비뇨(wine) 연구소(Instituto da Vinha e do Vinho)건물 앞인데 옆 길인 도또르 마누엘
로사다의 노변(반대편은 철로변)에는 낡았으나 거창한 건물이 있다.
이름하여 '안띠고스 아르마젠스 다 준따 나씨오날 두 비뇨' (Antigos Armazéns da Junta Nacional
do Vinho/옛 국립 포도주 창고?)다.
이 창고가 역사적 명소란다.
늙은 뻬레그리노가 걸음을 멈추고 심도 있는 관찰을 하게 한 이유다.
와인이 가득 찬 거창한 창고 옆에 세운 철도 화물차에 와인이 빼곡히 실리면 사방팔방 철길을 달릴 때
화물열차의 기관사와 종사자들은 얼마나 신명이 났으며 군침을 얼마나 많이 흘렸을까.
나는 호주가다.
들거나 메고 가라면 거절해도 마시고 가라면 두주불사하는 대주가.
당연히 군침이 돌려고 해서 도중에(Bar에서) 와인 1잔을 마시겠다는 타협으로 무마했는데.
단지, 와인 창고 앞에서도 그랬는데 와인으로 가득 채워진 와인 열차를 운행하는 그들에게 화중지병에
불과했다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분수대는 왜 있는가.
와인도 85% 이상이 물임은 분명하나 와인연구소와 와인창고에 물 분수대는 조화롭지 못함도 분명한데
분수대와 와인은 어떤 관계였을까.
까미노는 합류한 국도(N1/IC2)를 따라 로터리까지 500m쯤 남하한다.
철길과 입체 교차하기 위해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기 때문에 교량처럼 가드레일(guard rail)이 있는 길.
대형 로터리의 중심부에 조형물, 바커스(baccus/酒神)가 있다.
500여m의 상거는 있으나 와인과 바커스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근의 비뇨연구소와 거대한 비뇨
아르마젱(vinho armazem/와인창고), 주신이 가족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화로우려면 물을 뿜는 분수대가 아니고 와인을 뿜어내는 분주대(噴酒臺)여야 하지 않을까.
안내표지 불모지대?
로터리를 4분의 1쯤 도는 지점에서 N234 도로가 서쪽으로 분기한다.
까미노는 분기한 도로(N234)를 따라서 역(逆) 'ㄱ '자로 공원(Parque de Merendas de Ponte Casal
Comba)을 반바퀴 돌아도 되지만 직진하여 공원 끝에서 서진해야 하는데 무심코 전진했다.
화들짝 놀라 돌아서게 한 것은 전주의 파란 X자.
파띠마(Fatima) 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 지점에서 파띠마 길이 아니라면 당힌히 까미노 뽀르뚜게스도 아니니까.
공원 끝길(R. Catarrosa)을 따르라는 갈고리 화살표를 어렵잖게 찾아냈다.
로터리에서 시작하는 까따호사 길 0.5km 지점에서 남남동진하는 까미노.
양편이 모두 포도밭 뿐인 비포장 농로, 흔한 이름도 받지 못한 길이다.
어쩌다 발견되는, 유칼립투스 나무에 그려진, 파란 화살표 또는 X자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는
안내 표지 불모지대다.
지자체 메알랴다에는 6개의 소교구 마을(freguesia)이 있다.
그 중 하나로 동명인 메알랴다(Mealhada, Ventosa do Bairro e Antes)는 지자체의 다운타운이다.
번화한 것이 당연하나 같은 프레게지야지만 안내표지 불모지대인 까잘 꼼바(Casal Comba)와는 극과
극의 차가 있다.
뽀르뚜갈의 이 지역에서 야고보의 까미노에는 별무 관심이기 때문이라 해도 파띠마까지 외면당한다는
의미 아닌가.
가라는 표지(화살표)와 가지 말라는 X자.
적극적 유도와 소극적 만류를 의미하는 기호다.
어느 것이라도 필요한 곳마다 있어 주면 좋으련만 그것들에 매우 인색한 지역.
이 불모지대가 그다지 넓지 않고 많지 않아 다행이며 최악의 미스(mistake)라 해도(길을 잘못 들어도)
1km 안팎이므로 대미지(damage)가 크지 않아 이 또한 다행이다.
더구나 이 길들은 무명이기는해도 여하한 고행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순도 100%의 오리지널 까미노다.
다지선다형(多枝選多形) 문제라면 화살표는 정답이고 X자는 오답이다.
선다형 문제에서는 정답을 몰라도 오답들을 골라내면 남는 것이 당연히 정답이다.
그러므로 까미노에서는 X자도 정답이다.
가라는 길을 가는 것이 정답이며 가지 말라는 길 외의 길도 정답이니까.
성정머리 고약한 목부들
대부분이 포도밭과 옥수수밭, 산죽지대인 무명의 길 1km 쯤을 남하하는 까미노.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목장들이 길 아닌 길 주변에 있는가.
송아지만한 몸체의 양떼(염소?)를 몰고 가는 무지스런 인상의 목부들.
그들의 성정머리가 어찌나 고약한지.
보기도 민망할 정도로 터질 듯 부풀은 배,
땅에 닿을 만큼 늘어진 젖통,
대열에서 낙오되고 있는 것은 해산이 임박했음을 의미할 텐데 장대로 마구 두들기는 목부들.
맞으면서 따라가려고 기를 쓰다가 곧 길바닥에 새끼를 낳을 어미 양에게 무자비한 매질을 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잔악할 수 있는가.(잠시 후 새끼 낳는 장면을 목도했다)
저 고약한 목부들을 왜 양몰이 개로 대체하지 않는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콜리(collie), 셰틀랜드(shetland), 셰퍼드(shepherd) 등 양몰이개(牧羊犬)가 있지 않은가.
뽀르뚜 ~ 싼띠아고 데 꼼뽀스뗄라(Central Route)의 발렌사(Valença / Minho 강이 스페인의 Tui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도 뽀르뚜갈 땅이다.
그 지역 목장들에서는 양떼를 몰고 다니는 개들을 보았다.
송아지 만큼 큰 대규모 양떼의 목양견들이 어찌나 신비스러운지 한참을 매료되어 있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큰 목장은 미국에 있다.
미국에서 제일 큰 목장은 텍사스의 킹 랜치(King Ranch)다.
그러니까 킹 랜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목장이다.
목부가 6천명이며 그들의 가족을 위한 교육시설로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운영했다는데 내가 방문했을
때(2000년?)는 유치원 외의 모든 교육기관이 폐쇄된 상태였다.
6000명의 목부가 45명으로 줄었기 때문에 피교육자가 없고, 그래서 각종 학교를 폐쇄했다는것.
목부의 수가 0.75%로 줄게 된(99.25%를 감축) 까닭은 목부의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하는 헬리콥터의
등장으로 목부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잔혹한 인간(목부)보다 감정 없는 기계가 낫다는 뜻인데 뽀르뚜갈의 목장주들이 심사숙고하기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들(목부)은 성정뿐 아니라 무례하고 무지 무식하기도 이를 데가 없다.
나를 본 그들은 내 국적 알아맞추기 내기라도 하는 듯 서로 치노와 자파니스라고 우겨대고 있었으니.
꼬레아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프랑스 길에서 조우한 역 방향 뻬레그리노는 꼬레아를 안다는 뽀르뚜게스다.
2002년의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자기네 나라의 승리를 강탈한 나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꼬레아에 대한
이미지는는 부정적이지만 꼬레아노에게는 예의 바르게 처신한 중년남.
그는 내가 꼬레아의 늙은 뻬레그리노임을 알고는 더욱 각별했는데 이 자들은 축구에도 무지한가.
꼬레아를 모르는 놈들에게 꼬레아노라고 말한 것이 후회될 만큼인 자들인데 무슨 탓을 하겠는가.
그래도, 국내에서는 비판적이고 반체제 진영이라 해도 해외에 나가면 절로 애국자가 된다잖은가.
내 나라를 좋게 알릴 기회일 수 있는데 흘려버린대서야.
그들의 언행이 예의 바른 헝가리의 젊은이들을 클로즈업(close-up)시킨 셈이니 수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기에 부드럽게 응대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향기로운 빵 굽는 냄새
까미노는 아레이아스 길(R. Areias/남서진) ~에이라 벨랴 길(R. Eira Velha/북서진)을 따르다가 좌측,
비미에이라(Vimieira/Casal Comba의 루가르)를 지나는 폰치 꼬르구 길(R. Fonte Corgo)을 따른다.
이베리아 반도 특유의 돌 광장(largo São Romão)에 자리한 상 로망을 지나는 길이다.
상 로망은 슈라인(shrine)에 다름 아닌 작은 예배당(Capela de São Romão)이다.
교회는 마을의 규모를 가늠하는 척도라 할 수 있다.
그 마을의 주민수와 종교적 열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희소한 예외 외에는)
비미에이라는 지자체 메알랴다의 햄릿(hamlet/작은마을)이다.
더 작은 마을, 심지어 마을 이름만 남아있거나 1가구 1인 마을도 있다.
아무리 신심이 열강하다 해도 그런 마을에 교회가 있겠는가.
길 이름에 폰치(fonte/샘)가 포함된 지역에는 천연 또는 인공 샘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옛 지명에 정(井), 수(水), 온(溫) 등의 글자가 포함된 지방에는 특이한 우물 또는 온천이
있거나 물이 풍부한 것 처럼.
이 길(R. Fonte Corgo)에도 있겠거니 두루 살폈으나 허사였고, 상 로망 길(R. São Romão)에 합류해
남하하여 곧 당도한 곳은 렌디오사(Lendiosa).
프레게지아 까잘 꼼바의 루가르 비미에이라와 렌디오사, 두 마을의 시종점이다.
도로의 이름도 이스꼴라 길(R. Escola)로 바뀌고.
메알랴다의 숙박소 헤지덴씨알 일라리우(Residencial Hilário)에서 5.5km 쯤 거리의 마을이다.
차량의 왕래가 심심찮게 있지만 농가들이 띄엄띄엄 있는 평범한 농촌길가에 자리한 마을.
한 때는 부촌이었을 듯한 마을, 렌디오사.
대부분이 리모델링을 하였으며 남아있는 옛집과 분위기가 그같은 추측을 하게 한다.
IT시대인 오늘날에는 도농의 벽이 허물어졌고 공간 개념도 희박해졌다지만 철벽같은 시 공간을 극복할
수 없었던 때의 시골에서는 빵굽는 냄새 유무로 부농 빈농을 구별했단다.
축제가 진행중인 스페인의 한 농촌에서 들은 말인데 빵굽는 냄새를 맡게 된 이곳에서 반추하게 되었다.
까미노에서 갖게 된, 죽기 전에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추억 하나는 빵굽는 냄새다.
빵이 구워지면서 내보내는 냄새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게 구수하고 무거운 향을 느끼게 한다.
하루같이 걷는 중이라 다른 어떤 냄새보다 더 시장기를 자극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백팩 안에 먹거리가 잔뜩 있고 만복 상태일 때도 들러서 막 구워나오는 빵(주로 바게뜨)을 사서 먹으며
걸을 때는 행복감에 취하게 된다
이렇게 걷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다 할까.
한데, 바로 그 냄새를 맡으며 걷고 있는 렌디오사 길.
시장기가 느껴질 때도 되었지만 빵굽는 냄새를 맡고 있으니 다음 행동은 물으나마나다.
냄새가 흘러오는 진원지를 향해서 걸음을 옮기는 것은 지당 중 지당한 일 아닌가.
어렵잖게 찾은 집은 까미노에서 약간의 거리가 있는 위치다.
음료수로 캔 맥주(판매용이지만)도 비치되어 있는 집.
여느 때처럼 먹거리가 백팩 안에 있음에도 맥주1캔을 곁들여 솜털 같은 바게뜨를 먹었다.
남은 것을 백팩에 넣고 값을 치르려 할 때 빌에는 1.02€ 가 찍혀 있지만 1€만 받겠다는 주인.
그는 클라이언트(client)를 고무하는 특별한 재능(talent)을 가졌는가.
2%지만 2¢에 불과한 금전으로 내 지갑을 다시 열게 하고 내 걸음을 가볍게 했으니.
백팩 안에 먹거리가 풍성한데도 바게뜨 하나를 더 샀다.
약속은 빚이다
와인 창고 앞에서 한 합의의 이행이 우선인데 본말이 전도되었다.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백팩만 열면 해결되도록 이미 준비되어 있으므로 시장기 때문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바르, 까페가 띄지 안았기 때문인데 까미노로 귀환해 얼마 가지 않아서 해결되었다.
진행 방향 좌측의 까페 원 웨이(Cafe One Way)와 1.5€가 바로 해결사였다.
2분의 1병(350ml)의 와인 효과였을까.
마치 중요한 의무를 이행한 후 처럼 홀가분한 기분이었으니까.
약속이란 상대가 누구건, 자기 자신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빚이며 책무다.
등산, 길 걷기 가릴 것 없이 마음 먹었다는 것은 이미 그 산 그 길과 약속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가족이나 누가, "기다리는 아무도 없다"면서 만류해도, 폭우와 폭설의 경우에도 강행하는 이유다.
제독 넬슨(Horatio Nelson/1758~1805)이 사망 직전에 한 최후의 말이라는 "I have done my duty"
(나는 내 의무를 완수했다)는 그래서 명언일 것이다.
"이생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이 명언 처럼 그(Nelson)는 과연 자기 일생의 의무를 완수하고 세상을 떠났는가.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뜨면서 한 최후의 말 :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신약성서 요한복음19:30)와 같은 뜻의 말인가.
예수의 말은 금전으로 말하면 한 푼도 남김 없이 다 지불하였다(paid in full)는 뜻으로 인간의 속죄를
위해 피 한방울, 살 한점도 남기지 않고 다 바쳤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넬슨의 말은 뜨라팔가르 해전(Trafalgar/지브롤터해협의 북서쪽에 있는 스페인의 자치지방
Andalucia의州 Cádiz의 岬)의 승리로 이 전투의 총책인 제독의 의무를 완수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1805년의 이 전투에서 스페인 - 프랑스 연합 함대를 격파함으로서 영국은 이후 100여년 동안 제해권을
갖게 되었으니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한 넬슨이 할만한 말이 아닌가.
M616 도로로 바뀐 길 양편에 포도밭이 있는 시골 마을은 말라(Mala)로 바뀐다.
렌디오사 처럼 까잘 꼼바의 루가르다.
한 때는 열차가 다녔음을 의미하는 간이역사(Mala/건물)가 남아 있다.
철길의 흔적도 있고 철길을 건너는 오버 브릿지(over-bridge)가 현재에도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다.
까미노는 삼거리에서 남쪽 길(R. 25 de Abril)을 따라 남남서진과 남하를 반복하며 말라 마을을 관통,
이름이 다른 우측 길(R. covada)을 따라야 한다.
어떤 골몰에 빠지지 않았고, 기력도 회복되었으므로 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혼란스런 길도 아닌데서 알바를 했으니.
25 지 아브릴 길에서 꼬바다 길(우측)로 바꿔 타야 하는데 직진(R. 25 de Abril)했기 때문이다.
프레게지아 까잘 깜보의 같은 루가르인 킨따 지 말라(Quinta de Mala) 까지 갔다가 돌아선 것.
왕복 2km, 30여분을 허비하고 복기해 본 결과다.
꼬바다 길을 따라 베이글(bagel) 전문 제과점을 지났다.
베이글은 내가 선호하는 빵류 중 하나인데다 바야흐로 정오지만 미련 없이 패싱했다.
렌디오사에서 실컷 즐긴 직후였기 때문이며 알바로 인한 허비 시간의 만회를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까뻴라 광장(Largo Capela)의 교회 못지 않은 규모인 깐데이아스 성모예배당(Capela de Nossa Sen
hora das Candeias)도 같은 이유로 지나쳤다.
간벌 임도와 까미노, 누가 먼저 태어났을까
알바 직후라 예의 주시하며(화살표 확인) 폰치 길(R. Fonte)에 들어선 후 피치를 올렸다.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말라의 종점(순방향은시점)을 지나 도로(폰치길에 이은 CM1344)에서 분기지점까지 1.2km의 까미노.
내게 다행인 것은 눈을 빼앗기거나 걸음을 멈춰야 될 만큼의 관심 지역이 아니라는 것일까.
관심 갖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는지 아주 볼 품 없는 유칼립투스 숲이며 노변에 농 목장이 없고 포도밭
이나 과수원도 없으므로 당연히 민가도 보이지 않는 지역이니까.
직각을 이루는 왼쪽 비포장 숲길이 시작된다.
노랑 파랑 두 색의 화살표가 말한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라고.
우측에도 같은 형태의 길이 있다.
까미노가 아닌 이 길이 말한다.
간벌 임도(間伐林道)라고.
그러니까, 까미노도 간벌 임도다.
허늘로 뻗은 유칼립투스 군락의 정비를 위해 있는 숲길.
우측 길은 까미노가 아니므로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좌측의 길에는 다툼이 도사리고 있다.
누가 형이냐고.
임도와 까미노, 까미노와 임도.
누가 먼저 태어났을까.
까미노가 다른 길들 처럼 임도를 따르고 있는가.
임도가 까미노 구간을 이용하는 것일까.
이 명제는 어림잡아 1.5km가 넘을 듯 싶은 숲길의 무료를 해소해 주었지만 정답은 아직도 모른다.
남서진하는 CM1344 도로에서 직각 좌회전하였으므로 남동진이 된 까미노를 맞기 위해서(?) 북서진한
간다라 길(R. Gândara)에 들어섬으로서 숲길 까미노가 끝났다.
명실 공히 드물게 남아 있는 보물 까미노가 끝나고 이름(Gândara) 대로 모래땅(沙地)을 따라 N1국도
에 합류한 것.
이 지점의 국도는 1km이상 아베이루와 꼬임브라 두 현(Distrito)의 경계를 이룬다.
지자체는 메알랴다의 프레게지아 까잘 꼼보와 바르꼬수(Barcouço), 꼬임브라의 프레게지아 쏘셀라스
(Souselas)가 접해 있고.
국도변의 싼따루치아(Santa Luzia/Restaurante와 cafe Bar)에서 맥주 1잔을 마셨다.
부족한 듯 하여 1잔 더 마셨다.
이 잔은 백두대간의 삼도봉들에서 하였듯이 꼬임브라에서 마실까 했으나 국도의 횡단이 편치 않은데다
건너편에 마실 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앉은 자리에서 거푸 마신 것이다.
백두대간 삼도봉에서는 먹고 마시고 잘 때나 배설할 때, 그 때마다 기분 따라서 도(道)를 달리 했다.
경남 전남 전북, 경남 경북 전북, 경북 전북 충북 등 3개의 삼도봉에서.
양 다리로 2개의 도를 지배할 수 있으니까.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