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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의원 90여명이 지난 8월 30일(2004년) 2박3일간의 호남 연찬회를 마치면서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다니 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더욱이 이재오(李在五) 의원은 “한나라당이 직접 가해자는 아니지만 5․6공을 이어온 정당이므로 과거 원죄에 대해 두고두고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가 모르는 것은 이것이다. 누가 성냥불로 집 한 채를 태웠을 때 소방대가 얼른 달려와서 불을 껐다. 그러나 약간 불탄 자국이 남아있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책임은 방화범에 있는 것이다. 5.18광주사태가 그와 같다. 물론 광주사태는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일어났지만, 만약에 5월 15일에 일명 서울역 회군이라는 십만 명의 시위가 없었더라면 광주사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즉, 서울역 회군의 불똥이 광주로 튄 것이 광주사태였으며, 광주 운동권과 연락을 취하면서 준비하였던 서울 시위 주동자는 현 한나라당 의원 심재철과 현 열우당 의원 유시민이었다. 따라서, 광주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제공은 당시 서울대 3년에 재학 중이었던 심재철과 유시민이 하였던 것이다. 단지, 최규하 대통령의 제4공화국 정부는 소방대 역할을 하였을 뿐인데, 그 책임을 5․6공에 돌린다는 것은 실로 무지의 소치이다.
그런데 광주폭동 진압작전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심재철 때문에 백담사로 유배 갔고, 그의 경호원들은 헌혈로 심재철의 생명을 구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었다. 그리고 실은 심재철 의원이야말로 광주사태 발생에 책임이 있는 인물인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광주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것도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심재철 의원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연은 악연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악연의 뿌리는 1975년 월남의 공산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무도 가난하여 군인에게 군화조차 지급할 수 없었던 월맹은 굶어죽느냐 아니면 남침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때 호지명의 적화통일 전략은 월남 중부 지방에 민간인 복장의 월맹군을 투입하여 위장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한편, 월남 내의 간첩단과 자생 간첩단을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월남 전국에 퍼뜨렸다.
반공주의자인 티우 대통령은 이것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공산군의 남침이니 막아 싸울 것을 국민과 군부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월남 좌익 정치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색깔론을 비방하였다. 특히, 한국의 김세환 추기경 이상으로 월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짠후탄 신부는 민중봉기의 민의를 받아들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였다. 짠후탄 신부의 의도는 정말 대통령이 하야하는 것보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 후보가 총선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월남도 총선 시즌이었는데,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낙선운동만 하고 있었던 것이 오늘의 한국 상황과 똑같았다.
짠후탄 신부는 자기편 정당에 유리하게 하기 위하여 군부에 이런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금 일어나는 민중봉기는 민주화운동이니 군은 국민과 싸우지 말고 무기를 버리라.” 무장 시민군의 정체는 공산군임을 아는 월남 장성들은 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짠후탄의 말을 더 신뢰하던 군인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탈영하였다. 월남군은 월맹군보다 군사력이 10배나 강했고, 미국이 지원해진 최신 무기들이 있었으나 군인들이 모두 탈영하였기에, 적군에 빼앗기며 계속 후퇴하였다. 그리고 월맹 공산군이 일사천리로 수도 사이공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었다.
월남군이 사실상 마비가 됨에 따라 티우 대통령은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탁닛한 스님이 미국 전역을 돌며 “지금 월남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니, 미국이 지원병력을 월남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반전 평화 여론을 일으키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미국 역시 대선을 앞두고 반전 평화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으며, 미국은 월남에 파병할 수 없었다. 월맹 공산군이 시시각각 수도 사이공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으나, 월남 국민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당시 월남 언론은 좌익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안보 위기감을 조성하여 티우 대통령이 독재하려 한다며 맹비난을 하였다.
월남 중부지방에서 광주사태와 흡사한 민중봉기가 일어난 지 한 달쯤 되어 월남 좌익은 반공주의자 티우 대통령을 축출하였다. 실로, 그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였는가? 아니다. 새 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월맹 탱크들이 사이공 시내로 들어왔으며, 새 대통령은 체포되었다. 월남 국민은 그제야 그것이 민주화운동이 아니고, 공산군 침략임을 알았다. 그러나 땅을 치고 한탄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새 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한 일은 월맹군에 체포되어 항복하는 것이었다. 월남은 큰 나라이다. 그러나 대통령만 체포하여 항복을 받아내면 전쟁은 끝난다.
그리고, 월남 국민의 대탈출 작전이 시작되었다. 120만 명이 이른바 보트 피플이 되어 바다에 몸을 던지고 있었다. 누가 보트 피플이 되었는가? 상당수가 월남 좌익과 그 가족이었다. 아니, 그들이 반미 시위하였으며, 월맹과의 민족 공조를 노래하였으며, 반공 정당들을 와해시켰으니 월맹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상을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아니었다. “한번 민주주의 체제를 배신한 자는 언젠가는 공산주의 체제를 배신한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논리였다.” 그래서 적화통일에 성공한 월맹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월남의 좌익들을 학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구백 만 명이 학살되었다. 이처럼 오늘날의 한국 상황과 똑같았던 월남에서 구백 만 명이 학살되었을 때 월맹군에 돈을 주면 보트 타고 바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민족공조론 부르짖다가 생명과 나라를 잃었으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자 김일성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적화통일의 기회로 삼으려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주한미군 때문에 남침할 수 없었던 김일성은 월남에서 일어났던 민중봉기가 한국에서 일어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는 듯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에 정치권에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 정당 당원들은 서로 각목 들고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고, 재야 운동권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연일 연야 하고 있었다. 만일 그때 김일성이 대학가 소요를 더 확대되게 하려면 누구를 이용하고자 하였을까?
드디어 한국이 치안 부재 상황이 되었을 무렵인 그 당시 서울대 학생회장 심재철씨에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괴전화가 걸려온 것은 1980년 5월 초 어느 날이었다. 물론, 그 괴전화는 거짓말이었다. 심재철과 유시민은 지금도 그 괴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 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던 때였음을 안다. 그럼에도 당시 심재철과 유시민은 그 괴전화의 발신자 신원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수상한 발신자가 전해준 유언비어에 신빙성이 있었는지 확인하지 않고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대학가에 퍼뜨렸다. 그 유언비어에 서울대 몇몇 교수도 속아넘어가서 심재철의 시위 주동을 도왔다. 그래서 5월 15일 서울역 집회에 십만 명도 넘는 시위대가 운집하였으며, 다시 그 유언비어가 광주로 전해져 5월 18일 광주사태를 점화하는 성냥불 역할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취임한 최규하씨 정부는 대선 일정을 거쳐 양김씨에게 정권 이양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새 정부가 대선 관리를 하여 새 정부를 구성하고 정권을 이양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직접 선거를 위한 선거법 개정을 하고 대선 관리를 하려면 10달의 시간은 필요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행정 전문가였으며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행정에 무지한 양김씨는 당장 하야하라고 난리를 쳤으며, 5월 22일로 예정되어있던 김대중의 쿠데타가 광주사태를 점화하는 기름 역할을 하였다. 내란을 일으키려 한 김대중에 실망한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을 새 대통령 적임자로 판단하였던바, 아마도 최규하 대통령의 치적은 그런 현명한 판단으로 박정희 대통령 이래의 한강의 기적이 힘차게 전진하게 한 것이리라.
1980년 5월 초에 심재철과 유시민 등 서울 운동권이 퍼뜨린 쿠데타설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광주사태 이후 국난 타결을 위해 최규하 대통령 지시로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소집되고, 9월에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였을 때 심재철 등 운동권은 5월에 그들이 퍼뜨린 소문이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구실을 찾는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는 없었다.
1980년에 시위를 주동하던 학생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1983~84년부터 다시 대학가에서 시위가 시작된다. 그런데, 심재철 등 광주사태를 합리화시키려는 이들이 전두환 쿠데타설을 주장하기 위해 12.12 사태가 쿠데타였다는 거짓 이론을 조작하기 시작하였다. 12.12 사태는 비정규육사 출신 장성들이 후배인 정규 육사 출신 장성들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비정규 대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이 몇시간 충돌하였던 군 내부의 문제였지, 결코 쿠데타는 아니었다.
심재철과 전두환은 성격이 극히 대조적인 인물이다. 전두환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분이다. 장성 시절 그는 별 달고 직접 낙하 시범을 보였으며, 구보 훈련 때 육군 소장이 선두에서 달렸다. 그의 선임 장성들도 후배 장교들도 한결같이 그를 지지하였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던가. 나불나불 변명을 잘하는 노무현씨와 달리 그는 변명을 도무지 안 한다. 그는 변명할 줄 모르는 바보이다. 한편, 심재철은 계속 이론을 만들어내는데 명수였다. 12.12 사태에 전두환 장군이 관여한 적도 없다. 그는 정승화 장군측 헌병대가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헌병대 장교가 자기 생사를 걸고 오히려 전두환 장군을 보호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면모를 안다. 그리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에게 광주시민 학살자라는 누명을 씌우려던 김대중 홍위병들은 12.12사태가 쿠데타라는 거짓 논리를 만들어 왔으며 그런 거짓 논리 만들기에 심재철도 한몫을 하였다. 훗날 1988년 노무현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지던 청문회 때 MBC 기자 신분이었던 심재철 증인으로 나타났을 때 오로지 나라의 장래만을 생각하고 자기를 위하여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침묵하시며 모든 누명을 스스로 홀로 뒤집어 쓰셨다. 그는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면서도 국민 에너지가 그 일로 낭비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고 백담사로 유배 갔다.
그 후 다시 5년이 지난 1993년 6월 30일 새벽 5시 30분에 심재철은 양재동에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대수술을 받았다. 그의 심한 출혈과 패혈증 때문에 이것은 엄청나게 B형 피를 많이 요구하는 수술이었다. 당황한 의사는 병원 바깥 거리로 뛰쳐나가 B형 피를 외쳤다. 연대 총학생회에서는 심재철을 위해 헌혈을 호소하는 교내 방송을 내보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뜻밖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원들과 그의 사전 전경들이 심재철을 위해 헌혈하러 달려왔다. 여전히 운동권 학생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광주사태 학살자로 여기고 증오하던 때였기에 그의 신변 경호는 아주 중요하였다. 만일 연대 운동권 학생들도 헌혈하러 왔다면 여기에 아주 묘한 만남이 있다.
연세대와 연희동 전두환 사저는 그리 멀지 않지만 연세대 운동권 학생들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원 및 전경들 사이는 그야말로 앙숙이다. 그런데, 1980년이래 여태껏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인격적으로 사회에서 매장시켰던 심재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전두환의 경호원들과 연세대 학생들이 같이 만나 팔뚝을 걷어붙이고 심재철에게 피를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심재철이 주동하였던 시위에서 여러 명의 전경이 학생들에게 학살된 일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함께 피를 나누었다는 데에 감동적인 그 무엇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잠시라도 자기 곁에서 경호원들과 전경들이 떠나 있게 하는 것은 신변에 위협을 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근무 중 모두 가서 헌혈하였다. 엄한 군기는 근무 중 이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를 국민의 머슴으로서 여기던 지도자는 군기보다도 심재철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이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폭도들의 손에서 광주를 되찾아 광주시민들에게 되돌려준 계엄군이 아침에 부지런히 광주시를 깨끗하게 청소한 후 광주시민들에게 쌀을 배급해 주었다. 5월 22일 아침부터 5월 27일 아침까지 폭도들의 해방구 치하에서 광주 시민들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난을 겪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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