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어요”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전순동(충북대 명예교수)
Ⅰ
현재 60・70대 연령의 사람들은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에 움돋고 꽃피는 봄이 왔어요~~”로 시작하는 “봄이 왔어요”라는 노래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 동요가 흘러나오면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함께 따라서 흥얼흥얼 하는 사람이 많다.
이 노래는 “박재훈 곡, 박청남 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작곡자 박재훈은 바로 되어 있으나, 작사자는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을 필자는 20여 년 전에 「일제기 청주지방의 민족교육운동-청남학교를 중심으로」(『중원문화논총』 2.3 합집(중원문화연구소, 1997. 6, 127쪽)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때 이를 지적하게 된 근거는 당시 청남학교 학생이었고 후에 청주제일교회 장로가 된 이창수 장로의 자서전 『회상록』(계명사, 1998), 최창남 선생으로부터 직접 배운 청주여자고등학교의 제자(이혜숙)의 증언에 의해서였다. 이창수 장로의 자서전에 동요 "봄이 왔어요"의 작사자는 최창남 선생이라고 지적했다. 1952년 청주 여고 1학년 시절 최창남 선생으로부터 국어를 배웠다는 이혜숙 씨는 “최 선생님이 댁에 계시는데, 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노래가 바로 선생님이 지어 발표한 동요였대요. 창밖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어 보니, 선생님은 본래 ‘바스스 잠깨어 뛰어납니다.’라고 동요를 지었는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바스스 잠에서 깨어납니다.’로 조금 바꿔 부르고 있었다고 수업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증언해 주었다.
이들 제자들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 판단하여 이 노래는 작사가가 박청남이 아니라 최창남이라고 논문에서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동요의 작사자가 ‘최창남’이라는 것을 직접 밝혀주는 문헌 기록이 어디서도 발견되지 못한 채, 단순히 회상록과 제자의 증언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내 꺼림직 했다.
Ⅱ
그런 가운데, 필자는 1920・30년대, 아직 충북 지방에 아동문학이 싹트지 않았던 시절, 최창남 선생이 충북지역에서 어떤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아동문학을 개척하여 나갔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문학 작품을 찾아 나섰다. “아이생활”, “어린이” “한글” “동광”, “신생”, “진생”, “신동아”, “동화”, “종교교육” 등의 잡지와 “기독신보”(주간 신문) 등 여러 신문을 섭렵한 결과, 현재 그에 관한 글 70여 편의 글이 모아졌다.
그의 작품을 발굴하는 중에 몸에 전율을 느끼는 일이 있었다. 지난 해 겨울에 『아이생활』 14권 4호에서 ‘봄이 왔어요’의 글을 지은 사람이 ‘최창남’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생활』(조선주일학교연합회)은 1926년 3월 1일에 창간되어 1944년 1월 제19권 1호를 끝으로 폐간된 월간 어린이 잡지로, 이는 일제강점기의 잡지 중 최 장수 잡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저곳 도서관 찾고 사람을 만나 자료를 모으는 가운데, 동 잡지 14권 4호(1939년 4월호) 20-21쪽에 동요 “봄”, 작사자 이름은 “崔昶楠(최창남)”이라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사가 음악책에 있는 “봄이 왔어요”와 똑 같고, 동요를 지은 사람의 이름이 한자로 ‘崔昶楠’이라 기록되어 있었다. ‘박청남’이 아니라 “최창남”이라는 것이 확실히 나차나 있다.
다만 『아이생활』의 동요의 제목은 “봄”인데, 초등학교 음악책에는 “봄이 왔어요”로 되어 있다. “봄이 왔어요”의 노래는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사용된 문교부 출판의 『초등 노래책』 5학년 교과서에 실린 노래로, 당시 학생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다. 최창남이 지은 원 제목 “봄”이 “봄이 왔어요”로 교과서에 실린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음악에서는 작곡자나 교과서 집필자가 형편에 맞게 제목을 수정하거나 운율에 맞춰 가사의 일부 글자를 고쳐 쓰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음악책에 제목이 ‘봄’에서 ‘봄이 왔어요’로 바뀐 것도 그런 경우로 해석된다.
Ⅲ
그럼 어떻게 되어 ‘최창남’이 ‘박청남’으로 바뀌게 되었을까하는 것이다.
필자는 오랜 동안 ‘박청남’의 인물에 대하여 조사하고 찾아보았다. 작사자 박청남의 생존 시기 및 활동, 특히 문학 활동의 여부 등 그이 실존과 활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찾아 봤으나, 어디서도 그를 찾아볼 수 없었고, 그 인물에 대한 유추도 불가능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이번에 단서가 잡혔다. 그것은 작곡자 박재훈으로부터 나왔다.
작곡가 박재훈(한양대 음대교수, 목사)는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불렀던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등을 지은 한국 동요의 대부다. 또한 그는 “오페라 손양원”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어 캐나다 토론토 ‘큰빛장로교회’에서 목회하였으며, 현재 그곳 원로 목사로 계신다.
1922년에 강원도 김화군 김성에서 태어난 작곡가 박재훈은 해방 전, 평남 강서 문동초등학교 교사(1942-45)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2학기 개학이 바로 코앞에 닥쳤을 때, 학생들에게 딱히 가르칠 우리 노래가 없었다. 그때 학생들이 부르던 노래는 주로 일본 군가였고 우리 노래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개학 전에 한글로 된 우리 동요를 만들어 아이들이 우리 노래를 직접 부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가사를 물색하였다. 여기 저기 수소문 끝에 마침 월간잡지 『아희생활』을 100권이나 소지하고 있다는 분을 소개 받았다. 그분을 찾아가 소장하고 있던 『아희생활』 100권 가운데 50권을 빌려와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두문불출하고 그 잡지에 나와 있는 50편의 동시를 골라 곡을 붙였다. 그런 후 검토해 보니 가사는 다르나 곡이 비슷하게 된 노래들도 많이 있어서 여기에서 다시 25곡을 추려 작곡을 완성했다. “그때 만든 노래가 ‘시냇물은 졸졸졸’ ‘눈꽃송이’ ‘산골짝의 다람쥐’ 등이었다고 한다.
박재훈은 이듬해 1946년 4월 소련군 치하의 압제를 피해 38선을 넘었다. 작곡한 봉투를 품에 안고 월남하여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도 동요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1주일 동안 등사기를 밀어서 악보집 500부를 만들어 소개하였는데 이틀 만에 동이 났다고 한다. 이후 그는 ‘어머님 은혜’ 등 1,000여곡의 동요를 지었는데, 이들은 전쟁과 가난으로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박재훈과 최창남은 전혀 면식이 없는 가운데서 “봄이 왔어요”를 통해 작곡자와 작사자로 만난다. 해방 후에 빌린 “아이생활” 50권 중에서 3일 동안 가사로 사용할 좋은 동요 동시를 골라 작곡할 때에 『아이생활』14권 4호(1939년 4월호)에 실려 있는 최창남의 동요 “봄”이 박재훈의 눈에 띄어 작곡자와 작사자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동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 그것을 골라 곡을 붙인 이 노래가 1948년 음악 교과서에 실렸다. 교과서 집필자가 그것을 택하여 5학년 교과서에 실은 것으로 해석된다. 훗날 한국 동요, 찬송가, 오페라에서 굵은 족적을 남긴 한국음악계의 거장 박재훈과 최창남은 이렇게 만난 것이다.
그러니 전혀 면식이 없는 상태에서 ‘봄이 왔어요’라는 노래를 통해 작곡자와 작사자로 만났기에 여러 차례 작사자를 이기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최창남’이 ‘박청남’으로 변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 착오라 생각되며, 그 점은 또한 박재훈과 최창남이 전혀 면식이 없는 관계였다는 것도 반증해 주는 일이다.
Ⅳ
청남학교 교사이며 이 노래를 작사한 최창남(崔昶楠, 1897~1980)은 청주 토박이다. 갑오경장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은 1897년 음력 11월 18일, 청주군 남주내면, 곧 지금의 남문로 1가 32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후, 11세가 되던 1907년에 청주보통학교(현 주성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제1회 졸업생이 되고, 이듬해 도립청주농림학교(현 청주농고)에 입학하여 1914년 제2회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는 1916년 20세 약관의 나이로 청주군 북일면의 면서기가 되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1918년에는 집 가까운 청주면사무소로 근무지를 옮겨 면서기로 봉직하여 근무하던 중, 민노아 목사를 만나고, 김태희 선생의 영향을 받아 예수 믿게 되었다. 1920년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좋은 공직을 버리고 사립 청남학교 국어 교사로 부임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최창남은 교회에서는 신실한 집사요 청년회장으로, 청남학교에서는 자애로운 교사로, 사회에서는 열성적인 사회 계몽과 민족운동가로 이름이 나 있었다.
특히 그는 1926년부터 ‘문학’과 ‘어린이’와 ‘민족’을 함께 아우르며 교육현장에서 이를 적용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감수성이 예민하여 감동이 많았고, 문학적 재능도 갖추고 있던 그는 청남학교에서 저학년을 담당하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어린이를 위한 동화, 동시를 많이 지어 발표했다. 그것도 단순히 어린이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동심을 그려 어린 새싹들에게 꿈과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나라 잃은 소년소녀들에게 민족정신과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그는 동화, 동요, 동시, 소설, 전설, 외국동화, 동극 등 아동문학의 다양한 장르에 걸쳐 글을 지어 『아이생활』, 『신생』, 『진생』, 『신동아』 『동화』, 『기독신보』 등 여러 잡지와 신문에 ‘근당(槿堂)’, ‘상당성인(上黨城人)’ ‘늘봄’ 등의 아호를 사용하여 발표하였다.
192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중앙에서 아동문학 및 어린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지방에까지는 아직 확산되지 못하고 있던 시절, 최창남은 이 지역의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고 접촉하면서 1926년부터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1927년에는 “아이생활”에 창작 동화 “호랑이 동생”을 발표한 이후 많은 동화, 동시를 지어 아이생활 및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함으로써 충북 아동문학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일제 강점기 충북 지역 어린이 운동가,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그의 창작동요가 “봄이 왔어요”라는 제목으로 해방 후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널리 애창되었다는 것은 충북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충북에서 어린이에 대한 계몽적, 아동문학적 두 요소를 붙들고 교육과 아동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최창남의 활동이 더 이상 사각지대로 몰리지 않고, 올바로 평가되기를 기대한다. 그의 대한 외면은 충북 ‘아동 문학사’의 초창기의 바탕과 뿌리를 송두리 채 뽑아버리는 우를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감상을 위해 “봄이 왔어요” 가사를 아래에 소개한다.
산 높고 물 맑은 우리 마을에/움 돋고 꽃 피는 봄이 왔어요
한 겨울 땅 속에 잠자던 개구리/ 바스스 잠 깨어 뛰어납니다.
앞 내와 뒤뜰에 얼음 풀리고/ 남산에 쌓인 눈 녹아내리니
넓은 들 잔디는 속잎이 나고/ 실버들 가지가 파랗습니다.
쟁기 맨 농부들 밭 갈러 가고/ 이웃집 아가씨 나물 캐는데
하늘에 종달새 노래 부르고/ 멀리서 피리 소리 들려옵니다.
* “엮은이 전순동, 『근당 최창남의 아동문학 50선』”이 ‘엠엘피 서원’에서 2019년 1월에 출판될 예정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