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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C 제11장 광야생활 40년 : 민수기
- (2)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곧바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가데스바네아'에 머무르게 하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지난 시간 살펴보신 대로, 그곳이 바로 오늘 우리들, 밖으로 부름받은 자들, 교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쓰신 은준관 박사님은 광야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해두셨습니다.
“광야와 그 축약판 가데스 바네아는 유물론적 사관(materialistic view of history)과 유신론적 사관(theistic view of history)이 충돌하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바꿔볼까요? 믿음과 현실이 부닥치는 곳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곳이기에 오늘 이스라엘이 겪은 일들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세마저도 아론마저도, 저 족장들이 심지어는 모세의 누나도 불만과 불평을 느끼고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 이 곳의 특징을 조금 알면, 우리는 우리에게 처한 현실을 잘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특징 무엇입니까?
'가데스바네아'는 현실과 믿음 사이에 결단을 요구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민수기 13장, 32: 8절 참조)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바란 광야의 '가데스바네아'에 진을 쳤고, 거기서 모세는 각 지파에 한 명씩 12명을 선출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오라고 보내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12 정탐꾼들의 보고는 대단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포도 송이가 얼마나 컸던지, 포도 한 송이를 장대에 꿰어 장정 둘이서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민13: 23절).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풍요로운 땅을 보고 돌아온 자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이 본 가나안 땅은 풍요롭고 기름진 땅임에는 분명했지만, 그곳에는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장대한 거인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니까,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은 마치 메뚜기같이 작아 보였다고 성경(민13: 33절 참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자신들이 탐지하고 돌아온 아름다운 땅을 오히려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했습니다(13: 32-33절 참조). 그것이 그들이 육신의 안목으로 바라보게 된 현실의 실체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힘과 힘으로 대결해서 그 땅을 빼앗아야만 한다면, 당연히 몸집이 더 큰 사람의 힘이 더 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현실만 바라본다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이 어딥니까?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이스라엘 백성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고 이행해오신 하나님, 애굽의 바로를 굴복시키고 어린아이와 짐승한마리까지 구별하시고 지켜내시며 함께 출애굽시키신 하나님, 오늘까지 홍해를 가르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며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성막이 우리 진영의 중심에 딱 자리하신 거룩한 곳입니다. 이집트에서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저 눈앞의 가나안 땅에서도, 오늘 이 광야 한복판에서도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스라엘 열 명의 정탐꾼들은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현실 위에 계시면서 현실을 주도하고 계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대신, 현실만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빛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탈락해렸던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이요, 실패자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기고 만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서 그들, 싸움을 위하여 계수되었던 출애굽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이나 메마른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다 죽어가는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로 허락하신 메추라기와 만나를 하루도 빠짐없이 먹으면서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아시지요?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된 이유는 가나안 정탐 사십일 동안, 불신의 하루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사십년 동안 메마른 광야를 헤매고 다녀야만 했습니다(민14: 33-34절 참조). 이것이 가데스 바네아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거나 인생을 살아 나갈 때, 영적인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를 만날 때가 많습니다. 현실을 바라볼 것이냐, 아니면 현실 위에 계시면서 현실을 주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냐?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 신앙은 결단입니다!! 두 주간 주일낮예배 때 드린 말씀을 빌어 표현해 볼까요? 순간 순간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길, 계속 이 길을 갈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이 주변에서 벌어집니다. 박수쳐주는 이들도 사라져버린 길, 여기서 주저 앉는다고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때,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해내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발, 다시 한발을 앞을 향해, 목적지를 향해 옮겨 놓는 것입니다. 가만히 멈추어 서 있으면 떠내려 가버리는 우리의 배를 다시금 상류로 방향을 틀어 노를 저어가는 것입니다.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오늘 우리의 코치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의 음성, 아들을 딸을 품에 안고 말씀해주시는 그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기억해내며, 그 말씀을 붙잡고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저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나를 지으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음성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비전삼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굳이 신앙생활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여정 길에는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정도가 아니지요? 사느냐 죽느냐의 결단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코로나로 죽는 사람보다, 여전히 자살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1년에 자살로만 15,000명이 죽습니다. 하루에 40명이 자살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영혼들이 결단을 내려야하는 자리에서, 한걸음 더 옮겨내야 하는 자리에서,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멈추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 내 내면의 소리에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 포기하기가 더 쉬워지는 것이지요.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버티냐, 그냥 나도 포기하자. 그냥 나도 그만 뛰자, 그냥 나도 죽고 말자.
인생의 여정 길은 늘 평탄하게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험준한 굴곡의 길, 눈물의 길, 가시밭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가는 길에 ,바싹 메마른 광야를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철통같은 여리고 성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이 답답할 때도 있고, 때로는 넘실거리는 홍해가 앞을 가로 막는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예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편안하기만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매일 매일이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 같은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게 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늘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그 세상을 이길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넘어진 이를 일으키며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다 불 시험, 물 시험, 사자굴 같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도요, 신부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평안하고 좋고 건강하고 돈 잘 벌어올 때만 신부고, 어렵고 힘들고 병들고 고생스럽다고 신부 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수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로 다져진 터 위에서 신앙생활의 바통을 이어 받아 뛰고 있는 주자들입니다. 우리는 아직 안전한 포구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거듭되는 난제에 난제를 만나 끙끙거리기도 하고, 심한 태풍을 거스르며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눈동자처럼 사랑하며 아끼시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가데스바네아'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시는 환경으로 이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대한 아낙 자손같은 문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현실만 바라보고, 나는 메뚜기하며 자화상이나 그리고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승리하신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는 현실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홍해도 건너고, 요단 강도 건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풀무 불과 같은 시련도 만나고, 다니엘처럼 금방이라도 굶주린 사자의 이빨에 찢겨 죽을 것만 같은 절박함도 통과해야 합니다. 그 후에 주께서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낙심하여 주저 앉을 것이냐, 현실 위에 계시는 그분의 얼굴을 구할 것이냐? 싸움에 나갈 자를 계수해야 하는 곳,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 이것이 곧 '가데스바네아'의 비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 1-3절 상반절 말씀).”
이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곳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말씀을 믿고 모든 물 가운데, 불 가운데 힘 있게 뛰어드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광야는 어떤 곳인가? 그 광야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리에서 더욱 믿음의 결단을 내리시는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첫 번째, 광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왜? 광야는 한 마디로 인간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고 길도 없고 나무나 풀도 없고, 있는 것은 모래와 바람 뿐이고 해충과 맹수와 도적과 뜨거운 햇빛과 전쟁이 있는 곳,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보호해주시고 공급해주시지 않으면 결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광야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가 광야인 것이지요.
수많은 수도원들이 다 광야에 세워져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광야를 가보면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파란 하늘 밖에 없어요. 하늘만 쳐다보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봐야 의지가 되는 것이 없으니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 광야인 것입니다.
두 번째,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가든, 정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인 모세요, 다윗, 그리고 세례요한과 사울입니다.
세 번째,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80번이 나옵니다. 36장밖에 안되는데 80번이나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어디에서? 광야 회막에서.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광야라는 말과 말씀이라는 말의 어원이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광야는 히브리어로 ‘드바르’이고, 말씀은 ‘다바르’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소, 하나님의 계시의 장소입니다.
네 번째, 광야는 목표가 아니라 잠깐 거치는 과정입니다 .목표가 아닙니다. 목적지가 아닙니다.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예배드리러 나왔지만 그곳이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다리 위에 집을 짓지 마라.” 다리는 조심하며 빨리 지나가야 하는 곳이지,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저 에서의 보호와 인도 속에 속히 밧단아람으로 나아가지 않고, 천천히 짐승들의 속도에 맞춰 가다가 저 숙곳에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었을 때, 기억나시지요? 지나가야할 곳에 머물게 되니, 문제가 생깁니다.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세겜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게 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광야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깐 지나가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주어지는 것들로 만족하고 거기에 주저앉아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어지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가 있는 가나안 땅을 늘 마음에 품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다섯 번째, 광야는 훈련과 연단의 장소입니다. 광야의 훈련과 연단없이는 어느 누구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한 마디로 어떠했다고 했지요? 오합지졸(烏合之卒), 꿈도 없고 비전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고 그저 본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들, 가나안 땅보다 고깃가마 곁이 좋았던 사람,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여야 하는 낯설기만한 자유보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노예의 일상이 익숙하니 좋았던 사람들, 이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편안하고 쉬운 바닷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의 거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곤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훈련과 연단의 장소입니다.
여섯 번째, 광야는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한 곳입니다. 광야에서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이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무엇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웬수 같은 사람하고 함께 가려면 단 하루도 가기가 어려운 곳이 광야입니다.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유언을 그렇게 남기신 것이지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왜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순간, 이 광야는 당장에 천국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째, 광야는 아름다운 축복의 장소입니다. 광야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물론 그 사막의 모습도 사진을 찍어놓으니까 아름답더라구요. 밤에 그곳만큼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쌩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이런 대사가 나오지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샘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막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비밀이 바로 이 광야에 숨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덟 번째, 광야의 고난은 영성의 길에서 주어지는 ‘자기정화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례의 길을 걸어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정화입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을 마주하고 씻어내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는 아담의 타락한 죄성이 있잖아요. 교만, 시기, 질투, 미움, 정욕, 자랑, 탐욕 등이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갖고 싶은 마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이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 저와 같아지거나 저보다 더 높아지고 싶은 마음, 이것이 깨끗하게 씻겨질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욥에게 있어서 그가 겪은, 그 숱한 고난의 시간은 ‘정화의 시간’이었습니다. 욥기 42장 5-6절에 기록한 것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귀로만 듣던 하나님, 교리적 하나님, 지식적인 하나님은 영의 눈으로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성의 길에서 최고의 수준인 것이지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속이 시커매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정화, 사실은 기도의 핵심적인 목표도, 정화에 두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이것 저것 주십시오. 물론 그 기도도 드려야지요. 자식으로서 아버지께 당당히 구해야 하지만, 그러나 내 마음의 정화가 먼저입니다. 내 마음이 더럽고 내 마음이 오염되어 있는데, 무엇을 구한들 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새벽에도 잠시 말씀드렸지요? 형이 동생의 대통령 사면장을 품에 넣고 사형집행일을 앞둔 동생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형은 잠시 뒤 그 사면장을 그대로 품에 넣고 나왔습니다. 왜요? 형이 동생을 만나 물었습니다. “만약에 네가 사면받아 이 곳을 나가게 된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냐?” 그랬더니 동생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형님, 나는 복수심에 불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나가는 길로 내게 사형언도를 내린 판사와 법정에서 내게 불리한 증언을 한 사람을 찾아가서 총으로 쏘아 죽이겠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마음에, 오늘도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마음에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대로 칼을 쥐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비뚤어지고 그릇되어 있는 마음에 물질과 권력과 건강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귀로만 듣던 복 주시는 하나님, 눈으로 뵈올 수 있습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 광야에서 더욱 마음을 정화하시고 청결히 하심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광야에 관한 내용들을 교재에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정리하겠습니다. 99쪽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시작!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광야에서 나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민수기에는 하나님께서 ‘광야 회막’에 나타나시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80회 이상 나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애굽의 바로 궁전이 아니라, 험한 삭풍이 불어대는 광야가 하나님의 계시 장소인 것입니다. 광야는 풀과 물이 없으며, 나무와 그늘이 없고, 단지 모래와 자갈, 그리고 맹수와 독충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바로 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자기 백성에게 나타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체험했던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모두가 떠나도 여전히 함께 하실 우리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는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비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에게서 배우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게 들려주시고, 내게 가르쳐주시고, 내게 말씀해주시고, 내게 보여주시고, 내게 느끼게 해주시는 대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질문에 “하나님을 향한 내 고백”을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오늘도 광야에 서게 하셨습니다.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법을, 그리고 더욱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는 법을 배우시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매 순간의 행보를 결정하게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음시간 예습 성경 : 민수기 1~36장 교재 : 99~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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