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隋代(수대)로 분류한 인물들은 모두 南北朝時代(남북조시대)에 활동하던 인물이므로 함께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남북조시대와 수대에 願生(원생) · 往生(왕생)한 인물은 65명으로 蹶公則(궐공칙)을 제외한 인물들이 晋(진)의 강남 천도(371년) 이후에 활동했으므로, 그 이후부터 수의 멸망인 618년에 이르는 약 300년에 걸쳐 있다. 그리고 唐(당)왕조(618∼907)의 존속기간이 약 300년임을 감안하면 74명의 숫자는 남북조·수대에 비해 조금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남북조 시대의 왕생자 중 慧遠(혜원)을 비롯한 여산의 念佛結社(염불결사) 참여자 15명이다. 혜원은 402년 謝靈運(사령운)과 劉遺民(유유민) 등 승속 123인과 무량수상 앞에서 서원을 세우고 淨土行을 닦았다. 그런데 왕생설화에 따르면 이들 중 15명이 서방정토에 왕생했다고 했지만, 佛(불) 跋陀羅(발타라) · 佛陀耶舍(불타야사) · 慧持(혜지) 등의 참가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한편 혜원의 염불결사에 대해 唐代(당대)의 迦才(가재)는 "一身(일신)만을 선하게 한 것으로서 후학이 배울 바가 없다"고 평하였다. 迦才(가재)의 이러한 비판은 혜원의 아미타신앙이 당시 사회에 확산되어 중생 전부를 평등하게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士(사)계층에 한정된 自力修道(자력수도)의 阿彌陀念佛三 (아미타념불삼매)의 실천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이들 염불결사에 참여한 왕생자는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廬山(여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염불결사를 통해 동시에 수행하던 사람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하나의 사례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혜원 주도하의 염불결사와 그밖의 50명 정도가 왕생자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에 비해 唐代(당대)에 74명이 왕생했다는 것은 아미타신앙이 보다 널리 보급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미타불이 중국에서 널리 신앙되기까지에는 曇鸞(담란)과 道綽(도작), 善導(선도) 등의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담란(476∼542)은 大集經(대집경)의 주석서를 저술하다가 병이 났는데, 그 후 불노장생의 신선술을 배우기 위해 전 중국을 돌아다니다가 陶弘景(도홍경)에게서 신선술을 배웠다. 귀로에 낙양에서 북인도로부터 온 菩提流支(보리류지)를 만나 인도의 장수법을 물으니, 보리류지는 윤회를 초월한 不死永生法(불사영생법)으로서 그에게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을 주었다. 담란이 만년에 이를 계기로 정토에 회심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장생불사를 원했던 그는 아미타불이라는 명칭에 포함된 無量壽(무량수)와 無量光(무량광)이라는 뜻 가운데 무량수만을 취해 아미타불을 무량수불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북위인들이 장생불사를 추구했던 시대풍조와 관련하여 아미타신앙을 빠른 속도로 전파시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아미타신앙이 널리 유포되면서도 아미타정토만이 우월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극락의 우월함이 강조된 것은 道綽(도작) 이후의 일로 보인다. 道綽(도작; 562∼645)은 아미타불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방법을 淨土門(정토문)이라 하여 자력수행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聖道門(성도문)과 구별하였다. 즉 아미타정토에의 왕생은 중생 구제의 본원을 세운 아미타불의 本願力(본원력)에 근거한 것이므로 易行道(역행도)라고 규정함으로써 아미타신앙을 고취했다. 이러한 시각은 정토라는 개념을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한정시키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도작은 講說(강설)을 버리고 정토행만을 닦았는데, 그의 노력으로 인해 幷州(병주) 3縣(현)에서 일곱살 이상의 사람은 아미타불을 염할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아미타신앙은 唐(당)의 발흥지인 山西省(산서성) 일대에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도작의 제자인 善導(선도; 613∼681)는 산서성의 정토교를 장안에 옮겨 놓았다. 續高僧傳(속고승전)에 의하면 스승 도작이 입적한 3년 후인 648년 장안에 들어가 교화를 널리 행해 士女(사녀)로서 그를 받드는 사람의 수가 한량이 없었다고 한다. 즉 장안의 大慈恩寺(대자은사)에 중국을 대표하는 고승 101인 중 한 사람으로 초빙되어, 현장이 새로이 불경 번역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때에 그곳에서 아미타신앙을 고취하고 정토의 宗旨(종지)를 지도하여 太宗(태종), 高宗(고종) 및 승속의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선도의 활동과 그에 따른 아미타신앙의 성행은 이미 유포되어 있던 미륵신앙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현장의 제자로서 후일 法相宗(법상종)의 開祖(개조)가 되는 窺基(규기; 632∼682)의 아미타신앙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서방극락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아미타불보다 예토에 와서 인간을 구제하는 미륵불의 자비심이 더욱 깊음을 찬탄함과 동시에 아미타신앙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법상종계 승려들이 '극락왕생은 현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別時意說(별시의설)과 함께, 당시 아미타신앙의 급속한 보급에 대한 미륵신앙자로서의 비판이라는 시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도작과 선도는 순수하게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한 칭명염불을 강조하여 대중을 교화하였으며, 그 후 小康(소강; ?∼805)에 이르르면 마을(睦郡;목군)에서 걸식하여 돈을 모으고 어린이들에게 염불 1聲(성)에 1錢(전)을 주기를 1년 남짓 하였더니 남녀노소 귀천 없이 소강을 보는 사람은 모두 아미타불을 칭하여 염불소리가 도로에 가득 찼다고 한다. 그리고 소강은 서방정토에의 왕생을 권하기 위해 [往生西方淨土瑞應㈜傳; 왕생서방정토서응㈜전]을 편찬하여 48인의 전기를 전하기에 이르렀다. 唐(당) 후기 이후 아미타신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는 아미타신앙자의 계보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아미타신앙의 경우 禪(선), 天台(천태), 華嚴宗(화엄종) 등과 달리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뚜렷이 전하지 않는데,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함께 宋代(송대)에는 그 계보가 정리되었다.
(1) 慧遠-善導-法照-小康-省常-宗?(혜원-선도-법조-소강-성상-종?) (2) 慧遠-善導-承遠-法照-小康-延壽-省常(혜원-선도-승원-법조-소강-연수-성상)
(1)은 宗曉(종효)가 [樂邦文類(낙방문류)] 권3(1199년)에서 정리한 것이고, (2)는 志磐(지반)의 [佛祖統紀(불조통기)] 권26 淨土立敎志(정토립교지)에 정리되어 있는 계보이다. 위의 두 계보에서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선도의 스승인 도작과, 도작이 영향을 받은 曇鸞(담란)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칭명염불을 중시한 일본의 法然(법연; 1133∼1212)이 중국 정토종을 셋으로 나누어 慧遠(혜원; 觀念念佛:관념염불), 道綽(도작) · 善導(선도; 稱名念佛:칭명염불), 慈愍(자민; 禪淨融合:선정융합) 類(류)가 있다고 하고 자신은 曇鸞-道綽-善導-懷感-小康(담란-도작-선도-회감-소강)을 계승하였다고 한 것과 비교된다. 둘째로, 小康(소강)을 법조의 계승자로 간주하고 있는 점이다. 소강은 785년경 洛陽(낙양)의 白馬寺(백마사)에서 善導(선도)의 化導文(화도문)에 접하고 長安(장안)의 善導影堂(선도영당)에 가서 예를 행했는데, 선도의 遺像(유상)이 공중에 떠오르며 중생을 교화하면 安養(안양)에 날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아미타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선도와 소강 사이에 법조를 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조는 慈愍(자민) 慧日(혜일) - 承遠(승원)을 계승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 慧日(혜일; 630∼748)은 義淨(의정)을 만난 후 13년 동안 인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雪嶺胡鄕(설령호향)에서 4년을 보내며 고생한 후 학자들에게 괴로움이 없는 곳을 물어 극락에 왕생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리고 북인도 建(건) 羅國(나국)에서 관음보살의 '정토법문이 諸行(제행)보다 수승하다'는 예시를 받은 후 21년만인 719년 귀국하였다. 그리고 당시 성행하였던 선종에 대해 禪(선)과 염불을 아울러 닦을 것을 강조하였다. 즉 염불과 讀經(독경) 등의 모든 정토행이 곧 禪(선)임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念佛禪(염불선)의 원류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성행하던 선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承遠(승원)에게 이어져 염불삼매를 닦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承遠(승원)의 제자인 法照(법조)는 염불삼매야말로 깊고 오묘한 禪門(선문)이라 하면서, 염불삼매의 실천방법으로서 염불을 다섯 가지 곡조로 변화시킨 五會念佛(오회염불)을 제시하였다. 물론 소리내어 염불한다는 점에서 법조는 선도, 소강과 흐름을 같이 하지만, 염불삼매를 중시하고 선과 정토행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셋째, 宋代(송대)에 들어서면 선종 승려들에 의해 정토종이 계승되었다고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延壽(연수; 904∼975)는 선종의 한 갈래인 法眼 文益-天台 德韶(법안 문익-천태 덕소)로 이어지는 법을 이었다. 그러나 그는 國淸寺(국청사)에서 法華黎(법화려)을 행한 후 '一心禪定(일심선정)' '萬善生淨土(만선생정토)'라는 두 개의 산가지로 점을 쳐 정토왕생의 실천행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宗 (? 1098∼?)도 선종 승려이다. 따라서 송대의 宗曉(종효), 志磐(지반)에 의해 파악된 중국 정토신앙의 계보는, 두 사람이 모두 천태종 소속의 승려였다는 점과 당시의 일반적 흐름이 선·정토를 겸하여 수행하던 경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에서는 唐末(당말) 이후 선종의 성행과 함께, 도작과 선도의 口稱念佛(구칭염불)만이 강조된 것이 아니라 禪淨融合(선정융합)의 경향이 있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아미타신앙이 天台宗(천태종), 禪宗(선종) 등의 여러 종파에서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Ⅲ. 아미타신앙자의 修行과 感應(아미타신앙자의 수행과 감응) 1. 往生을 위한 수행방법(왕생...) 佛國土(불국토)와 그곳에 상주하는 佛(불)에 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佛土(불토)·佛身(불신)을 어떻게 보는가는 수행방법에 많은 차이를 야기한다. 담란이 아미타불을 報身(보신), 극락정토를 報土(보토)라 하여 佛(불)의 本願力(본원력)을 강조한 이래 많은 사상가들이 이에 관한 논의를 거듭해 왔다. 智의(지의)와 淨影寺(정영사) 慧遠(혜원)은 應土·應身(응토·응신)임을 주장하여 중생의 수행과 업에 따라 감득하는 것임을 강조하였고, 攝論系(섭론계) 승려들은 報身 · 報土(보신·보토)임을 주장하면서 別時意說(별시의설;참고-攝論師는 범부의 왕생을 거부하였다)과 관련시켰다. 이러한 견해는 범부의 왕생가능성을 부인하거나 어렵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도작과 선도는 아미타불의 因位(인위)에서의 願行(法藏; 법장보살의 48 願行;원행)에 따라 이루어진 報土·報身(보토·보신)임을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아미타불의 本願力(본원력)을 增上緣(증상연;다른 법을 일으키는데 강한 힘이 되는 것)으로 강조함으로써 중생의 극락왕생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며, 나아가 稱名念佛(칭명염불) 등의 쉬운 수행을 통해서도 왕생이 가능함을 역설하게 되었다. 일반 민중이나 승려들은 극락왕생을 위한 수행 과정에서 이러한 사상가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왕생담에 나타난 수행법을 분석함으로써 중국 아미타신앙의 성격을 조명해 보려고 한다.
먼저 아미타신앙자들의 수행을 시대별로 정리해 보면, 남북조시대에 왕생했음을 전하는 46사례 가운데 승려는 35(비구 32, 비구니 3), 재가신자는 11사례가 나타난다. 그런데 재가신자 중 (26)의 사례는 魏世子(위세자)의 가족이 모두 왕생했음을 전하고 있다. 딸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자신과 父(부), 兄(형)은 서방에 태어났음을 고하고 평소에 西方行(서방행)을 닦지않던 어머니에게 수행을 권하였으며, 그 결과 가족 4인이 모두 왕생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45) 葛濟之(갈제지)부부의 사례는 부부의 왕생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11사례에 포함된 사람은 15명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재가신자 중에서 往生集(왕생집)에서 王臣往生類(왕신왕생류)로 분류되어 지배층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11)張野(장야), (16)劉遺民(유유민), (26)魏世子(위세자), (34)庾鐥(유선)의 경우이다. (34)의 경우, 관직에 오르지 않았으나 武帝(무제)가 黃門侍郞(황문시랑)을 삼으려 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지배층의 일원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 외의 (1)蹶公則(궐공칙), (9)周續之(주속지),(12)張 (장 ), (27)童子 阿曇遠(동자 아담원), (36)高浩像(고호상), (46)孫良(손량) 등은 處士往生類(처사왕생류)에 분류되거나 신분이 명기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45)葛濟之(갈제지)부부의 경우 처 紀氏(기씨)가 베틀에 있다가 西方佛(서방불)이 현신한 것을 보았다고 하므로 일반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신앙사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慧遠(혜원)의 白蓮結社(백련결사)에 참여한 사람이 혜원을 비롯하여 16명이 立傳(입전)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1)蹶公則(궐공칙)은 西晋代(서진대)의 사람으로서 중국 최초의 왕생자라고 칭해지는 사람이므로, 蓮社(연사)에 참여한 사람에서 제외되는 것이 옳다. 그 외에는 (6)혜원에서 (20)曇順(담순)에 이르는 15명은 蓮社 18賢(연사 18현) 등으로 칭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포함한 수행자들이 念佛(염불) 등 서방정토행만을 닦은 것은 아니었다. 禪(선)을 닦기도 하며(14,21), 經典硏究(경전연구) 및 講說(강설)에 힘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단지 경·론에 능통했다거나 典籍(전적)에 능통했다고 전하는 경우도 있으며(12,13,15,18,29), 특정한 經論(경론)에 주석을 달거나 번역하기도 하고 講經(강경)하기도 하였다. 즉 (10)曇詵(담선)은 {維摩經(유마경)}에 註(주)를 달았고, (14)佛 跋陀羅(불 발타라)는 {觀佛三 經(관불삼 경)}을 번역하였으며, (19)僧叡(승예)는 {成實論(성실론)}을 講(강)하였고, (23)慧虔(혜건)도 新譯經典(신역경전)을 講(강)하고 그것을 회향하였다. (32)法度(법도)는 {無量壽經(무량수경)}을 강하였으며, (37)慧光(혜광)은 4分律(분율)·華嚴(화엄)·跡槃(적반)·十地經(십지경) 등의 疏(소)를 저술하였고, (39)道憑(도빙)도 {十地論(십지론)}·{跡槃經(적반경)}을 강하였다고 한다. 隋代(수대)의 19건에 이르는 신앙 사례 중 승려는 14[사례 18의 경우 沙彌(사미) 2人(인)이므로 15명], 재가신자가 5[사례17의 경우 부부의 왕생사례이므로 6명]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승려들은 모두 비구이며, 재가신자는 남자가 3명, 여자가 3명 왕생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 중 주목되는 것은 隋 文帝(수 문제)의 妃(비)가 女身(여신)을 싫어하여 念佛行(염불행)을 닦아 왕생했다는 점이다. 나머지 신자들은 신분을 전하지 않은 채 翁(옹)·婆(파)17), 恒州人(항주인)(4)이라고 하여 이름이 미상이거나 신분이 명기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일반민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수행자들도 염불 등의 정토행만을 닦은 것이 아니라, 講經(강경) 등에도 종사하였다. (1)曇延(담연)은 跡槃經大疏(적반경대소)를 서술하였고, (6)登法師(등법사)와 (11)慧海(혜해)는 열반경을, (8)智舜(지순)은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을, (10)曇遷(담천)은 攝論(섭론) · 楞伽經(능가경) ·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등을 강하였다. 唐代(당대)의 신앙 사례로는 74사례가 전한다. 이 중 승려는 54 사례[비구 51,비구니3(4명)], 재가신자는 19, 畜生(축생; 鸚鵡:앵무) 1로 구분할 수 있다. 재가신자 중 남·여의 분포는 남자가 15명(5는 승려였다가 周 武帝(주 무제) 폐불시 환속한 사람), 여자가 4명이며, 이중 지배계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58)白居易(백거이), (67)馬子雲(마자운), (71)韋之晋(위지진), (73)邵彪(소표)로서 각각 縣尉(현위),觀察使(관찰사),安撫使事(안무사사) 등의 지위에 올랐다. 그 밖에 신분과 관련하여 唐代(당대)에만 보이는 주목되는 것은 (29)張鍾 (장종 ), (69)張善和(장선화)의 경우이다. 이들은 각각 殺鷄(살계), 殺牛(살우)에 종사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唐代(당대)에도 불경 연구에 종사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1)普明(보명)은 [승만경] ·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 跡槃經(적반경)을, (9)灌頂(관정)은 維摩經(유마경) · 정명경(淨名經)과 法華經(법화경)을, (11)道昻(도앙)은 [華嚴經 十地論(화엄경 십지론)]과 法華經(법화경)을 강하였다. 그리고 (14)僧衒(승현)은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과 道綽(도작)의 安樂集(안락집), (18)神素(신소)는 소승의 阿臻曇論(아진담론)과 成實論(성실론), (19)道綽(도작)은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을 200번, (21)大明(대명)은 華嚴經(화엄경) · 열반경 · 우란분경, (28)慧寬(혜관)은 지옥경을 강했다. (47)齊翰(제한)은 法華經(법화경)에 통달했으며, (52)道遵(도준)은 法華玄義(법화현의) · 天台止觀(천태지관) · 四分抄文(사분초문)을 강했고, (64)功?은 法華經(법화경)을 강하는 한편 佛地論疏(불지론소) · 攝論疏(섭론소) · 法華義疏(법화의소)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唐代(당대)의 講經(강경) 사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法華經(법화경) 계통의 강경이 많이 행해진 점이며, 이는 天台宗(천태종)의 승려들이 念佛(염불)과 止觀(지관)을 동시에 수행했던 사실과 관계된 것으로 보인다. 연대미상의 수행자는 8사례가 전한다. 이 중 승려는 비구니 2명, 재가신자는 6명이다. 재가신자 가운데 (3)烏場國王(오장국왕)만이 王臣往生類(왕신왕생류)에 立傳(입전)되어 있고, 나머지는 4명의 처사와 1명의 우바이로 나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수행사례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수행자를 살펴보면 수행자의 신분은 皇后(황후), 王(왕)에서부터 村民(촌민), 도살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것은 아미타신앙이 폭넓게 여러 계층에서 수용된 것을 의미한다. 둘째, 隋 文帝(수 문제)의 황후가 아미타신앙자가 된 이유는 女身(여신)이 싫어서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출가에 의해 正法時代(정법시대)가 줄었다거나 女人(여인)의 成佛(성불)은 불가능한 것으로 설해져 왔다. 그러나 아미타신앙과 관련된 경론에서는 극락에는 여인이 없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극락에 왕생하면 여인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文帝(문제)의 황후는 그것을 위해 극락정토에 왕생하려고 염불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魏世子(위세자) 조항에서도 먼저 왕생했던 딸이 어머니에게 염불을 권하고 있는데, 이는 일찍부터 여인의 극락왕생이 당연시되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 남북조시대에 尼 3, 魏世子傳(위세자전)에 附傳(부전)된 母女 2(모녀 2), 葛濟之(갈제지)의 妻(처), 隋代(수대)에 황후와 約山村(약산촌)의 노파, 唐代(당대)에 尼 3과 재가 여신자 4인 및 시대 미상의 尼(니) 2, 재가 여신자 1인이 각각 왕생하였다. 셋째, 惡人(악인)의 왕생이 염불에 의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淨土往生集(정토왕생집)}에서는 惡人(악인), 畜生往生傳(축생왕생전)을 따로 분류했는데 唐代(당대)에 왕생한 惡人(악인)으로 4인을 들고 있다. 그 중 두 사람(張鍾 , 張善和;장종 , 장선화)은 소와 닭을 잡는 도살업에 종사했고, 한 사람(雄俊;웅준)은 승려로서 戒行(계행)이 없었을 뿐 아니라 환속하여 軍門(군문)에 몸담아 살륙을 자행하다가 다시 승려가 되었다. 또다른 한 사람(惟恭;유공)도 승려로서 非類(비류)에 친압하며 위,아래 사람을 경멸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도살업에 종사한 두 사람은 임종시 자신들이 죽인 닭과 소가 자신들을 해치려함을 보고 참회하여 염불하였으며, 특히 장선화는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의 10念이면 왕생할 수 있다는 설을 듣고 稱名念佛(칭명염불)하여 10聲(성)이 차지 않았는데도 부처가 맞이하여 왕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웅준은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칭하면 50억겁 생사의 죄가 없어짐을 듣고 염불하였으며, 유공도 한가한 경우 誦經(송경)하거나 염불하였다. 이들의 왕생은 왕생을 위한 수행이 매우 쉽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왕생집류의 찬자들과 당시인들이 살생을 가장 큰 악으로 간주했으며 계율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살생을 업으로 하던 사람들조차 염불에 의해 왕생할 수 있음이 강조됨으로써 일반 범부의 왕생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 있었을 것이다.
넷째, 왕생담에 나타난 수행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 아미타신앙자의 수행법분포 |
|
念佛 염불 |
稱名 칭명 |
觀行 관행 |
誦經 송경 |
寫經 사경 |
懺悔 참회 |
造像 조상 |
기 타 |
남북조(46) |
16 |
5 |
12 |
9 |
1 |
3 |
4 |
燒身(소신), 浴僧(욕승) |
수(19) |
12 |
3 |
5 |
4 |
|
2 |
3 |
飯僧, 德施(덕시), 齋 |
당(74) |
33 |
12 |
17 |
21 |
4 |
12 |
6 |
浴僧, 放生, 燒手(소수), 齋(재) |
미상(8) |
7 |
1 |
2 |
2 |
|
1 |
|
飯僧(반승) |
계 |
68 |
21 |
36 |
36 |
5 |
18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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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에서 가장 많은 수행법은 염불이다. 염불은 稱名念佛(칭명염불)과 憶念念佛(억념염불)로 나눌 수 있는데, <표 2>에서는 칭명염불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염불로 처리하였다. 따라서 염불 수행 중 어느 정도의 비율이 소리내어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염불이었는지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표 2>에서 주목되는 것은 칭명염불의 비율이 남북조시대가 10.9%, 수대가 15.8%, 당대가 16.2%로서 당대에 접어들면 증가한다. 이것은 담란이 칭명염불을 강조한 이래, 도작 · 선도 · 소강 · 법조로 이어지면서 소리내어 염불하거나 곡조에 맞춰 염불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데 기인한다. 염불에 의한 정토왕생의 용이성은 '아미타불을 한 번 칭하면 80억겁 생사의 무거운 죄가 멸해진다'고 믿어졌던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염불왕생의 경우 造像(조상) · 寫經(사경)과 달리 물질적 요구가 없으며 觀行(관행)과 달리 삼매에 들기 쉽다는 점은 일반민의 왕생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觀行(관행)의 경우에는 남북조시대 26%, 수 26%, 당 23%로 약간의 감소를 보이고 있지만 항상 취해지던 수행법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관무량수경]에서 설해진 16觀(관)이 정확히 지적되어 있는 것은 드물지만 禪 · 念(선·염) 등의 표현 속에서 觀行(관행)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관행은 남북조시대에는 般舟三매經(반주삼매경)을 근거로 하였으나, 점차 [관무량수경]에 근거하게 되었다. 慧遠(혜원)의 廬山念佛結社(여산념불결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반주삼매경]에 입각해 見佛三 (견불삼매)를 꾀하는 것이었지만 왕생담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후 智 (지 )는 常行三 (상행삼매)를 아미타불에 대한 專稱念佛(전칭염불)이라 해석하고 90일간 입과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唱(창)하거나 念(염)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가 설명하는 아미타불 · 정토의 모습은 [관무량수경]에 근거한 것이며 아울러 [관경]의 '是心作佛 是心是佛(시심작불 시심시불)'과 같은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염불과 함께 觀行(관행)이 계속 중시되었던 것은 아미타신앙이 독자적인 종파를 형성하기보다는 다른 여러 종파와 융합하여 지속되었던 사실과도 관계가 깊다고 보인다. 즉 法持(법지;635∼702)는 정토를 생각하여 9년 동안 觀想(관상)하였는데, 禪宗(선종)의 5祖 黃梅 弘忍(황매 홍인)이 자신의 傳法者(전법자) 10인 중 한사람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이것은 石頭 希遷(석두 희천)처럼 선종 승려로서 唯心淨土(유심정토)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禪師(선사) 중에는 法持(법지)와 같이 禪淨(선정)을 동시에 수행했던 사람도 상당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道遵(도준; ?∼784)은 天台一心三觀法門(천태일심삼관법문)을 배우고 항상 법화경을 중시했지만 淨土當生業(정토당생업)을 닦고 彌陀佛(미타불)을 조상했다. 이것은 法華三 (법화삼매)를 닦던 天台宗(천태종) 승려인 道遵(도준)이 아미타신앙자였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따라서 慧思(혜사), 智 (지 ), 灌頂(관정)으로 이어지는 天台宗(천태종)의 공통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표 3> 讀誦 대상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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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경 |
관 경 |
아미타경 |
법화경 |
금강경 |
미 상 |
기 타 |
남북조 |
3 |
4 |
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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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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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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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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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佛偈(찬불게) |
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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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4 |
7 |
6 |
2 |
戒本, 華嚴十地論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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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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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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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8 |
7 |
11 |
7 |
3 |
2 | |
이러한 경향은 아미타신앙자들이 왕생을 위해 읽던 經(경)에서도 잘 나타난다. <표 3>을 보면 정토왕생자들이 가장 많이 독송하던 경전은 정토3부경으로 칭해지는 '무량수경 · 관경 · 아미타경'이다. 그러나 단일 경전으로서 가장 많이 읽힌 것은 [법화경]이며, [금강경]도 그에 못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대해 설하지 않은 '법화경 · 금강경' 등의 경전도 독송하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迦才(가재)와 懷感(회감)이 정토왕생을 입증하는 경론으로 정토사상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大集經(대집경) · 占察經(점찰경) · 文殊般若經(문수반야경)' 등까지 제시하고 있는 것과도 흐름을 같이 한다. 또 [법화경]은 아미타신앙을 널리 수용하였던 天台宗에서 중요시하던 경전이며, 現實求福的(현실구복적)인 觀音信仰(관음신앙)과 관계가 깊어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던 경전이기 때문에 가장 많이 독송되었을 것이다. 한편 [금강경]이 唐代(당대) 이후에 나타나는 것은 5祖 弘忍 (홍인)이래 禪宗(선종)에서 중시했던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 ㉮'중국정토교발전'에 의하면, 중국 전시대에 걸쳐 왕생자들이 많이 이용한 경전은「관경」·「법화경」·「아미타경」·「화엄경」의 순서라고 한다. ㉯'중국정토사상가'들은 '專稱念佛(전칭염불)'의 구절을 아미타불에의 염불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리고 참회의 경우에도 특별한 참회법이 명시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6時禮黎(6시례려)·法華懺(법화참)·觀音懺(관음참)이 각 2회, 方等懺(방등참)이 4회, 撲懺悔(박참회)가 1회 나타난다. 6時禮懺(6시례참)은 善導(선도)가 [往生禮讚(왕생예찬)]에서 밤낮으로 6時(6시)에 예불하고 참회할 것을 권유함에 기인하였다. 그런데 法華懺(법화참)은 天台 智 (천태 지의)의 [法華三 懺(법화삼 참)]에 의해 모든 佛(불)을 예배하고 6根(6근)의 죄를 참회하고 行道(행도), 誦經(송경), 觀法(관법)을 행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방등참도 天台 智 (천태 지의)의 [方等三昧行法(방등삼매행법)] 1권에 의거하여 방등삼매를 행해서 6根(6근)의 죄를 참회하는 의식이다. 6時禮懺(6시례참)보다 방등참, 법화참이 많이 행해졌음을 볼 때, 종파나 특정 경전에 관계없이 誦經(송경), 참회 등이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방법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재가신자의 경우 吩陽縣(분양현)의 노인이 法忍山(법인산)의 빈 방을 빌려 묵으며 염불한 것처럼 혼자서 수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廬山(여산) 念佛結社(염불결사)에서 보듯이 승려와 재가신자들이 함께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여산에서 혜원이 道俗(도속) 123인과 결사를 체결한 이래 왕생담에서 결사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智琰(지염;564∼634)이 승속 500여 인과 매달 한차례씩 10년을 모였다는 것, 小康(소강)이 烏龍山(오룡산)에 정토도량을 세웠는데 齋日(재일)마다 3천여 명 정도가 운집하였다고 한 것, 神皓(신호; 716∼790)의 西方法社(서방법사)와 知玄(지현; 809∼881)의 蓮社(연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尼 悟性(오성)이 병을 앓다가 함께 염불하던 사람들을 보았다던가, 齊翰(제한)의 流水念佛道場(유수념불도장), 법조의 5회염불도량과 華嚴院 念佛道場(화엄원 염불도장) 그리고 韋之晋(위지진)의 西方道場(서방도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함께 모여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修行에 따른 感應(수행에 따른 감응) 앞절에서 살펴본 여러 종류의 수행을 통해 아미타신앙자들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定(정)이나 꿈 속에서 見佛(견불)하거나, 임종시 佛(불)·보살 등의 來迎(내영)을 따라 정토에 왕생하거나, 생존시에 福(복)과 利益(이익)을 얻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수행에 따른 감응사례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북조시대의 46건에 이르는 수행사례 중 32사례에 수행에 따른 감응이 나타났다. 禪(선)이나 念佛(염불), 誦經(송경) 등의 三昧(삼매) 속에서 佛(불)·보살이 來迎(내영)하거나 향기, 광명 등의 異相(이상)이 나타난 것이 27사례에 달한다. 異相(이상)으로는 아미타불과 관음, 대세지보살이 來迎(내영)하는 외에도 蓮華台(연화태)가 맞으러 오기도 하고, 樹(수), 願公(원공), 聖衆(성중), 賢聖(현성)이 맞으러 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음악, 구름, 향기, 광명 등을 통해 수행자의 왕생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써 아미타신앙을 고취하기도 하였다. 隋代(수대)의 신앙사례 19건 가운데 17사례에 감응이 나타나 있다. 그 중 삼매 가운데 감응이 있어 佛(불), 보살, 정토 등을 본 것은 3사례이며, 임종시의 佛(불), 보살의 마중, 음악, 異香(이향) 등의 異相(이상)은 감응이 나타난 17사례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한편 隋代(수대)의 감응사례에서 주목되는 것은 (4)恒州人(항주인)의 경우이다. 그는 小豆(소두)를 세어 염불하였으며 齋(재) 후에는 콩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사람의 몸으로 나투어 걸식하기를 청하였고 식후에 異香(이향)이 나며 공중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唐代(당대)에 등장하는 惟岸(유안)의 사례와 함께 관음, 대세지보살의 적극적인 도움사례로서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74사례에 달하는 唐代(당대)의 수행자들에게서 54사례에 감응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三 중에 佛(불)·보살·정토를 본 것은 10사례이며, 염불할 때 입에서 광명이나 佛(불)이 튀어나왔다고 한 것이 2경우, 왕생을 약속받은 것이 6사례이다. 왕생을 약속받은 사례 가운데 2사례는 불·보살이 授記(수기)하였으며(三 사례와 중복), 2사례는 허공에서 소리가 나고 산신이 예언했다고 한다. 한편 임종시의 불·보살 등의 마중과 異相(이상)은 48사례에 해당한다. 한편 (35)惟岸(유안)의 경우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나타난 후, 알 수 없는 화공이 나타나 두 보살의 모습을 그려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은 見佛(견불)과는 또다른 감응으로서 관음, 대세지보살이 현실에서 수행자를 위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연대 미상의 신앙사례 중에는 6사례에 감응이 나타난다. 염불시의 감응은 (7)張文熾(장문치)의 처가 염불하던 중 어떤 승려가 연꽃을 꺾어준 1사례이며, 6사례 모두에 임종내영의 異相(이상)이 나타난다. 이상에서 나타난 감응사례들을 종합하여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수행자가 생존해 있을 때 현실에서 이익(福;복)을 얻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隋代(수대)에 慧思(혜사)가 꿈에 아미타불의 설법을 들은 후 총명함과 지혜가 뛰어났으며 辯才(변재)에 걸림이 없었다는 것, 唐代(당대)에 邵彪(소표)가 安撫使(안무사)에 오른 것, 馬子雲(마자운)이 租(조)를 운반하다가 침몰하여 벌을 받게 되었는데 염불공덕으로 5년만에 사면받게 된 것, 永安縣(영안현)의 老母(노모)가 3년 만에 눈을 뜬 것 등이 있을 뿐이다.
<참고>한국신앙사례에서 관음보살이 왕생을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례들이 종종 있음에 비해, 중국의 경우 많은 사례 중 두 사례에 불과하다는 점은 두 나라 사람들의 사유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둘째, 중국 아미타신앙에서는 見佛(아미타불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표 4> 감응 중 見佛(견불)사례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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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감응 총수 |
三味 · 꿈 |
임종시 불보살 |
남북조 |
32 |
11 |
17 |
수 |
17 |
3 |
6 |
당 |
54 |
13 |
19 |
미 상 |
6 |
1 |
2 | |
아미타신앙에 있어서 아미타불을 만나는 것이 중요함은 이미 살펴본 적이 있다. 극락의 우월함은 왕생 후 아미타불을 만남으로 해서 成佛(성불)이 보장되고 윤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淨土三部經(정토삼부경), 특히 [무량수경]에서는 아미타신앙자들에게 임종시의 불·보살의 來迎(내영)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임종시의 견불은 극락왕생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중요시되었음은 당연하다. 또 불·보살 외에도 연화대·異香(이향)·光明(광명) 등의 異相(이상)이 임종시의 來迎(내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임종시 불·보살의 來迎(내영)을 포함한 異相(이상)이 시대별로 29, 17, 48, 6사례씩 나타나는 점을 통해 볼 때, 중국 아미타신앙자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하여 자신을 극락에 데려갈 존재의 출현이었다고 보인다. 또 바꾸어 말하면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아미타신앙을 수용토록 하는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한편 염불·觀(관) 등의 三昧(삼매)에 들거나 꿈에서 見佛(견불)한다는 사례의 비율은 남북조시대에 가장 높다. 이것은 남북조시대의 아미타신앙이 [般舟三 經(반주삼 경)]에 근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반주삼매경에서는 염불삼매시의 견불을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중국 아미타신앙자들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염불과 觀行(관행)을 겸하였으므로 수 · 당대에는 三매 중 見佛(견불)사례가 상당수 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또 아미타신앙에 있어서 아미타불의 협시불인 관음·대세지보살의 도움도 주로 임종시의 來迎(내영)으로 나타난다. 즉 佛(불)과 함께 수행자의 왕생을 授記(수기)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직접 도움을 주는 것은 수대의 1, 당대의 1사례에 불과하다. Ⅳ. 맺음말:新羅 阿彌陀信仰 사례와의 비교(신라 아미타신앙 사례와의 비교) 중국에서는 安世高(안세고), 支婁迦讖(지루가참) 등 초기 譯經者(역경자)들에 의해 後漢 桓帝(후한 환제) 이후 많은 아미타신앙 관계 경전이 번역, 보급되었다. 그에 따라 蹶公則(궐공칙) 이후 많은 아미타신앙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아미타신앙자가 극락에 왕생했다는 설화가 유포되고 왕생전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왕생전은 아미타신앙을 더욱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신앙자들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중국 아미타신앙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왕생전과 고승전에 전하는 왕생설화를 분석하였다. 우선 宋代(송대) 이전의 총 147 사례의 왕생설화 가운데 시대별 분포를 보면 南北朝時代(남북조시대)에 46, 隋(수) 19, 唐(당) 74, 미상 8 이다. 남북조시대의 경우에는 山念佛結社( 산념불결사)에 참여한 15명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아미타신앙은 唐代(당대) 이후 급속하게 보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造像(조상)사례에 대한 연구 결과와도 일치한다. 自力修道的(자력수도적) 성격의 廬山念佛結社(여산념불결사)와 달리 북중국의 曇鸞(담란)은 당시인들이 長生不死(장생불사)를 추구하던 것과 관련하여 阿彌陀佛(아미타불)을 無量壽佛(무량수불)로 번역하였고, 稱名念佛(칭명염불) 등을 통해 아미타신앙을 널리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道綽(도작) · 善導(선도) 등은 아미타신앙을 聖道門(성도문)과 구별되는 易行道(역행도)로서 강조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였고, 少康(소강)·法照(법조) 등이 이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아미타신앙은 독자적 종파를 형성하지 못하고 天台(천태)·禪(선) 등의 종파와 융합하여 전개되었는데, 이는 송의 宗曉(종효)·志磐(지반) 등이 정리한 아미타신앙의 계보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왕생전과 고승전에 실려 있는 수행과 감응 사례를 분석하면, 중국 아미타신앙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도작과 선도가 아미타불의 本願力(본원력)을 강조함으로써 중생의 왕생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설화에 나타나는 수행자는 황후에서부터 촌민, 도살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淨土論(정토론)}(世親;세친)에서 '극락에 여인이 없다'고 설한 것과 관련하여, 여자들이 왕생했다는 사례를 통해 여인의 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극락왕생이 모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국왕으로부터 하층민인 婢(비)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에 의해 신앙되었던 신라 아미타신앙도 중국과 흐름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가장 많이 이용된 수행방법은 염불로써, 唐代(당대)에 들어서면 급속히 稱名念佛(칭명염불)이 증가한다. 단지 念佛(염불)로만 표현된 경우 稱名念佛(칭명염불)인지 觀念念佛(관념염불)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우나, 승려들을 제외한 일반민들의 경우에는 칭명염불이 더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殺生(살생)을 業(업)으로 삼던 사람조차 10念(염) 염불이면 왕생할 수 있음을 듣고, 임종 전 염불하여 10聲(성)이 차기 전에 왕생했다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일반민들은 칭명염불을 통해 쉽게 삼매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造像(조상) · 寫經(사경) 등과 달리 물질적 요구가 없는 칭명염불은 일반민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라의 왕생설화 가운데 廣德(광덕)과 嚴莊(엄장), 布川山(포천산) 5比丘(비구), 婢 郁面(비 욱면) 등이 모두 칭명염불을 통해 왕생했다고 한 것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중국인들은 淨土經典(정토경전)에 설해진 염불, 16觀(관) 외에도 禪(선), 誦經(송경), 懺悔(참회) 등의 모든 신앙행위를 통해 극락 왕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觀行(관행)의 경우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에서 설한 16觀(관)의 명칭이 제시된 경우는 비교적 적고, 禪(선)·念(염) 등의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誦經(송경)의 대상도 阿彌陀經(아미타경) · 觀無量壽經(관무량수경) · 無量壽經(무량수경)의 정토3부경뿐 아니라 法華經(법화경) · 金剛經(금강경) 등이 많이 나타난다. 또 참회도 중요시되었는데, 칭명염불을 통해 왕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善導(선도)의 6時禮懺(시례참)보다 方等懺(방등참) · 法華懺(법화참) 등 天台宗(천태종)과 관계된 사례가 더 빈번하다.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특정한 아미타신앙 관계 경전이나 수행방법만이 왕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된 것이 아니라, 誦經(송경) · 참회 등의 모든 수행은 서방정토에의 왕생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아미타신앙이 여러 종파와 결합되어 지속되었음과 관련될 것이다. 신라의 경우에도 탑과 불상의 조성, 염불, 觀法(관법) 등의 수행을 통해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주목되는 점은 아미타불을 언급하지 않은 法華經(법화경) · 金剛經(금강경) 등의 誦經(송경)이나 天台宗(천태종)과 관련된 참회 등을 통한 왕생사례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의 경우 중국과 큰 차이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신라 下代(하대)의 왕생사례가 전하지 않으므로 단언할 수 없지만, 각 종파에서 아미타신앙이 행해졌던 사실을 감안하면 중국과 같은 경향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점은 고려 이후의 신앙을 연구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일 것이다. 넷째, 아미타신앙을 통해 중국인들이 希求(희구)했던 점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염불 등 수행의 결과로서 기대했던 것은 살아있을 때의 福樂(복락)이 아니라, 定·夢(정·몽) 중에서의 見佛(견불)과 死後(사후)의 극락왕생이었다. 특히 감응사례를 살펴보면 임종시의 佛·보살의 來迎(내영)과 異相(이상)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異相(이상)도 佛(불)과 보살 내영의 상징이므로, 감응을 통해 편안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중국의 경우 佛(불)과 菩薩(보살)의 직접적인 내영이 훨씬 강조되고 있으나, 신라의 경우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즉 신라의 왕생설화에서는 聖衆(성중)이라고 표현된 것이 1사례일 뿐이고, 天樂(천악)·蓮花臺(연화대)·光明(광명) 등으로 내영이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신라의 경우 왕생설화의 수가 많지 않으므로 단순한 수적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佛(불) · 보살이 내영했다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미타신앙이 중국의 경우보다 쉽게 수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중국의 경우에는 攝論師(섭론사)와 法相宗(법상종) 승려들에 의해 別時意說(별시의설)이 주장되었으므로, 아미타신앙의 수용과정에서 일정한 제약을 극복해야 했었다. 또 미륵신앙자들은 兜率天衆(두솔천중)의 내영을 받는다고 말해졌으므로, 아미타신앙자들에게도 佛·菩薩(불·보살)의 직접 내영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에는 唯識學僧(유식학승)들이 다방면에 걸친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義寂(의적), 憬興(경흥)도 아미타신앙 관계 경전에 주석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金志誠(김지성)은 甘山寺(감산사)에 彌勒(미륵)과 阿彌陀佛(아미타불)을 동시에 봉안하였으며, 月明師(월명사)는 현실의 재앙을 소멸시키고자 兜率歌(두솔가)를 지어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누이동생과 극락에서 만나기를 기원하는 祭亡妹歌(제망매가)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미륵상을 조상하기는 하지만, 도솔천에의 上生(상생)을 기원하는 예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또 미륵신앙자가 도솔천에 상생했다는 설화도 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라에서는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이 큰 갈등없이 병존했으므로, 아미타신앙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생설화 등에서 불 · 보살의 직접적인 내영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점차 아미타신앙이 성행함에 따라, 가고자 하는 이상적 死後世界(사후세계)는 보통 서방극락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즉 아미타신앙 수용 초기에는 사후세계로서 兜率天(두솔천)과 혼동되거나 우열이 논해졌지만, 점차 염불 등의 쉬운 방법을 통해 죽은 후에는 모든 사람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즉 사후세계로는 극락이 희구되었으므로, 그 결과 아미타신앙과 병존하는 과정에서 미륵신앙은 上生信仰(상생신앙)보다 下生信仰(하생신앙)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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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中國의 阿彌陀信仰_중국의 아미타신앙 A Study on Amitabha Faith in China - 남북조∼당대의 신앙사례를 중심으로 - 金 英 美 (Kim, Young-mi)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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