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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너머의 세계와의 대화, 혹은 꿈꿀 권리
김 유 중(문학평론가, 서울대 국문과 교수)
1. 도전이 가지는 의미
욕망의 그물에 걸려
신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만
두려운 그러나 강렬한 눈빛으로
아직은 도전을 멈출 수 없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그것을 알 때까지는
--- 「도전을 멈출 수 없다 – 이중섭 <흰 소>」 부분
시인의 이력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새로운 세계,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교사의 길을 걷는 대신 한동안 기업체에 몸담고 근무한다. 이후 회사 사정으로 더 이상의 직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늦은 나이에 대학으로 돌아가 경영학 석사, 박사 과정을 이수한다. 이론과 실무 양 쪽의 지식을 겸비한 그는 무난히 학위를 취득하고, 이어서 교수로 변신한다. 정년을 전후하여 그는 다시 신학과 문학 분야의 공부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그리하여 신학 석사 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현재 그는 문단 내외에서 시인과 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 가지 업무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인이 지닌 이러한 다채로운 이력은 단연 경이와 찬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100세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멀티 플레이어적인 능력의 전형인 동시에 우리 시대가 필연적으로 당면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위한 하나의 모범적인 참조 사례에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도전과 변신은 이처럼 늘 성공적이었다. 다방면의 재능과 뛰어난 적응력으로 그는 매번 무리 없이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부러워할만한 성과들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보를 단지 실버 세대의 성공적인 중, 장년기 안착의 예로만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어쩌면 그 의미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축소, 왜곡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단선적인 이해는 실제 그가 생의 고비고비마다 겪어야 했던 위기와 결단의 순간들, 그리고 그 순간들마다 경험해야만 했던 실존적 의문과 고뇌의 무게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뉴턴의 사과가 우는 이유
시인이기 이전에 그는 우선 경영학 전공 교수였다. 구체적으로 기업체의 재무 구조와 투자 파트의 리스크 관리와 분석을 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그리하여 고도로 치밀하고 전략적인 사고를 요하는 분야에 관여했던 셈이다. 한 치의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그리하여 사소한 오류조차도 곧바로 기업 경영의 성패나 자체의 존망과 직결되는 현실을 자주 목도하였다.
어찌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 앞서야 하는 것이 순리겠으나, 매순간 부딪치는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거기에는 과학적인 접근과 분석만으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기 어려운 수많은 변수들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종종, 게다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치밀한 분석과 그에 따른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빗나가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에게 인간과 세계 이해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세계는, 그리고 인간은 과연 합리적이기만 한 존재인가. 우리는 혹 더 중요한 사실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비밀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은 논리적인 방식만으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측정하거나 예단하려고 해서는 절대 풀리지 않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인간 내면과 무의식의 실체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들은 말끔히 정리될 수가 없었다.
정교한 논리와 체계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세계가 그리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집중과 긴장감이 꼭 부담스럽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나아가 그러한 심리적인 고충들을 이겨내고 도출된 결과가 현실 속에서 들어맞았을 때의 쾌감이란 직접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성적 판단과 추론 너머에 자리 잡은 불투명하고 어수선한 세계의 그림자에 더더욱 끌렸다.
삶 = 무의식 + 방어기제^2 + 불안^3 +알파
정답이 없는 방정식
--- 「일그러진 영웅 – 베이컨 <앉아있는 형상>」 부분
제 아무리 치밀하고 정교하게 정식화를 시도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란 애초에 ‘정답이 없는 방정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세계는,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경우에 따라서는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가 낳은 사고와 행동은 합리적으로만 이해되고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무한한 헌신과 자애로움으로 자기희생까지를 기꺼이 감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인간으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엽기적이고 끔찍한 일조차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한 일탈 행위들을 합리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번번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성적인 판단과 추론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느꼈다. 이 즈음에서 그의 시선은 촘촘하게 짜인 이성의 그물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 삶과 내면의 진실, 그 신비로운 세계로 향하게 된다.
뉴턴의 사과가 울고 있다
몇 억 개의 뇌세포 중
겨우 10%도 못 쓰면서
에덴을 훔치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체온이 없는 컴퓨터는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꽁꽁 냉동되었다가
아주 적은 온기에도 급팽창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인데
이성의 무딘 칼은 집어던지고
알몸의 이브나 만나러 가자
--- 「세잔의 사과를 만나러 가자 – 세잔 <병과 사과가 있는 정물>」 부분
위 텍스트에서 시인은 ‘몇 억 개의 뇌세포 중 / 겨우 10%도 못 쓰면서 / 에덴을 훔치겠다는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래, 맞다. 제 아무리 잘난 체 해봐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인간이 지닌 뇌세포 가운데 채 10%도 쓰지 못한 상태에서 얻어낸 결과물일 따름이다. 이제껏 인류가 이룩한 빛나는 성취와 업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본다면 그 언저리에 겨우 머물러 있는 것일 뿐이다.
‘뉴턴의 사과’가 울어야 하는 이유, 마침내 울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간직한 깊고 단단한 진실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에는 ‘이성’이란 여전히 ‘무딘 칼’일 뿐이다. 인간이 창조한 이론과 지식이라는 것도 고작 해봐야 ‘체온이 없는 컴퓨터’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인간 사고와 행동의 신비를 밝혀보겠다는 시도 역시 따지고 본다면 ‘에덴을 훔치겠다’는 치기어린 만용에 가깝다. 섣불리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결국‘산산조각’부스러지고 말테니까.
이성적 주체에 대한 맹신은 과감히 수정될 필요가 있었다. 이성은 결코 만능이 아니며,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해질 때 주체는 자아와 세계를 주어진 그대로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어디까지나 그 너머에 존재한다.
3. 잡히지 않는 진실의 소재를 찾아서
무엇보다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이성적 판단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면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접근법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다시 출발해보려는 자세 변화가 요구되었다. 그러자면 이성 너머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의 존재를 찾아,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뒤따라야 했다. 학문의 본질은 논리며 과학이라고 믿어왔던 학자로서 그런 방향 전환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길이기에 도리어 그는 가보고 싶었다.
애초에 그는 이 문제를 여전히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 다루어보려 시도했다. 강의 틈틈이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그는 상담심리 분야의 지식을 쌓는다. 합리적인 이해와 추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을 인간 무의식에 대한 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접근방식에 기대어 분석해보려고 했다. 무의식의 저편 너머에 웅크리고 있는 내면적 타자들과의 조심스런 대화를 통해, 그것의 특성들을 파악해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시도가 앞서의 문제점들을 해소하는 데 일정 부분 보탬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과제들이 남아 있었다. 상담은 피상담자와의 언어를 통한 대화를 전제로 하며, 이때의 대화란 기본적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언어로 번역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대화이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의 언어는 의식의 언어에 의존할 때에만 해독 가능했다. 그러나 그가 만나본 피상담자 가운데 상당수는 당면한 내적인 고민이나 문제들을 내뱉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문제는 결국 언어였다. 인간의 언어가 의미를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면, 상담 과정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의미 표현과 전달의 도구로서 언어를 대하고 있음을 느꼈다.
언제 언어의 감옥을 탈출하여
내님을 만나러 갈 수 있을까
--- 「도전을 멈출 수 없다 – 이중섭 <흰 소>」 부분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의미로 덧씌워진 이 차가운 ‘언어의 감옥’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고민과 노력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존 언어 체계에 근거한 표현법으로는 인간은 결코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 그 전체의 진실을 담아 온전히 표현하고 전달할 길이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안타까운 표정이요 몸짓이었다.
이성적 사유에 기초한 기존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는 내적인 정서와 욕망들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가서야 하는가? 혹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절대자에 대한 귀의는 한 인간이 처한 개별적이고 실존적인 고민들을 애써 희석시키거나 무마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이성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신성에 대한 의존 또한 인간이 처한 이런 어려움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일면적이고 맹목적인 해법에 머문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 의문의 끝자락에서 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바로 예술이 지닌 존재 의의이며 그 가치였다.
4. 예술, 욕망, 구원
그에게 예술이란 자아의 해방과 구원을 향한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아니, 그 빛을 향해 돌진하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요, 그와 함께 다가오는 숨 막힐 듯한 환희의 순간이자 들뜬 날갯짓이었다. 그 앞에서 더 이상의 무슨 분석이, 무슨 논리가 필요할 것인가.
우리 내부에는 스스로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 타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기회를 갖길 갈망한다. 그러나 적어도 의식의 표면 위로 그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그 속에서 명멸하는 무수한 감정과 욕망의 흐름들을 논리적인 언어로 옮겨 적지 못한다.
예술이란 바로 그러한 간극, 그러한 틈새를 메꾸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드러내보기 위한 처절한 영혼의 고투이며 그 기록인 것이다. 그는 예술 작품 속에서 이성적 언어를 통해서는 도저히 표출해낼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내면적 고뇌와 열정을 읽는다. 그리고 그만의 방식으로 그들과의 정서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론 강 위 하늘에서 떠돌던 별들은
당신과 나의 진한 키스에
깔깔거리며 강물위로 달려듭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우리만의 세상을 세우시지요
돈 화가만이 갈 수 있는 나라
그림도 그리고 시도 그리고
어제도 버리고 내일도 버리고
불빛 별빛
온 세상을 휘마는 회오리
우주의 블랙홀 속으로
시(詩)마저 그림자마저
기꺼이 몸과 함께 던지면
별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 「별빛은 우리를 구원하고 – 고흐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전문
달빛은 조용히 절규하고 있다
항상 폭풍우 불고 있는
그대 어둔 마음, 첫사랑을 만나
그림에 포근한 터를 잡고 있다
사랑의 깊이는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잴 수 있어도
환한 달빛 순간이 있어
가슴에 튼실한 성을 쌓고 있다
옷을 벗어 신비가 걷히고 나면
가슴 두근대던 맥박도 잦아들고
사랑은 그저 흔한 일상
사랑은 항상 달빛으로 오고
태양이 뜨면 사라져 버린다
낮달은 발가벗고
세상 빛에 아부하지만
이미 힘을 잃어 버렸다
--- 「뭉크의 첫사랑 – 뭉크 <달빛>」 전문
그는 고흐와 뭉크의 회화 속에서 이성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표현될 수 없었던, 그렇기에 예술로 승화될 수밖에 없었던 예술가만의 고민과 열정을 읽는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자신만의 감각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전유해보고자 한다. 이 과정은 예술작품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전제로 한다. 작품은 그를 향해 말을 걸고, 그는 다시 그것에 화답한다. 그러나 이들의 대화는 일상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서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한 대화이다.
그러므로 그 대화의 방식은 과학과 신학에 기초한 상담심리 분야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즉, 폭발하려는 내면의 감정을 다스리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대화, 짓눌리고 파편화된 내면의 무의식들을 발굴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해보기 위한 대화, 그리하여 그 상처의 근원을 추적하여 이를 치유하고 위로하여 절대자에 대한 신심으로 인도하기 위한 대화가 아니다. 차라리 논리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었던 내면의 뒤엉킨 욕망이나 정서가 다른 방식으로 분출되는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새로운 창조에의 열정으로 승화되는 것을 감각적인 형태로 고양하여 체감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대화이다.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이 깊이 아로새겨진 작품들과의 이 같은 소리 없는 대화를 통해, 그는 거기에 자리 잡은 예술가만의 은밀한 욕망과 정서를 그것 자체로 수용하며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어 속에 담아 표현해보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대화의 틀 위에서 서로의 욕망은 욕망과, 느낌은 느낌과 통한다.
‘대리석에 갇혀 있는
억눌린 형상을
해방시켜야 한다.’
울부짖으며
미친 듯, 미쳐서 돌을 쪼는
아, 그러나 창조주의 영역은
신성불가침이었나
대리석을 탈출하지 못하고
노예로 묶여 있구나
이 새벽에도 피를 흘린다
언어로 형상을 만들고
혼을 불어넣어
신명나게 춤을 추려 해도
문득문득 손발을 붙드는
아폴론의 날카로운 눈빛
오, 디오니소스여
미완성의 완성이라도 허락하소서
이성의 불빛, 촉수를 낮춰주소서
신비로운 축제가 열리게 하소서
저 견고한 대리석에서
해방시켜주소서, 해방시켜주소서.
--- 「초혼(招魂) – 미켈란젤로 조각 <노예상>」 부분
이 텍스트에서 시인이 읽어 내려간 것은 하나의 형상 위에 아로새겨진 어느 조각가의 굴하지 않는 도전 의지였다. 작품 속에 담아 완벽하게 표현해내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표현해보려는 예술가적인 끈기와 열정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피가 흐르지 않는 차가운 조각 작품은 그에게 더 이상 단순한 대리석 덩어리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해방’을 위한 울부짖음이며, 그와 동시에 ‘신명’난 ‘춤’이었다. ‘미완성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성의 불빛’으로도 지울 수 없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신비로운 축제’였다.
‘창조주의 영역’은 물론 인간으로서는 범접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 불가침’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예술가는 끝내 그것에 다가서기 위한 시도들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예술이란 어쩌면 그런 헛된 욕망을 실현시켜보고자 하는 발칙한 상상이요 음모다. 예술가란 그 해방의 선두에 서서 인간 한계의 사슬을 끊고 자유와 구원을 향해 다가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노예’인 것이다. 그 노예의 시도는 당장은 헛되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영예롭다.
그러기에 여기서의 좌절은 좌절에 그치지 않으며, 실패는 다만 실패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의 ‘해방’을 겨냥한 고결한 투쟁이자 숭고한 자기희생이기 때문이다.
5. 원본이 사라진 시대, 예술의 의미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기에 완전해질 수 없는, 뿐만 아니라 섣불리 완전해지기를 바라서도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런 스스로의 한계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넘어서고자 노력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완성을 꿈꾼다. 그런 그의 태도는 분명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모든 위대한 창조물이라는 것도 그런 점에서 본다면 태생적인 모순과 이율배반의 산물인 셈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은 지식이나 학문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다. 학문적 지식이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와 약점을 보완해가며, 그것을 메우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들이라고 한다면, 예술적 상상력과 창조력은 도리어 인간적인 한계나 약점을 그대로 껴안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키거나 초월하고자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매번 좌절 속에서도 영원을 꿈꾸며,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완전을 지향한다.
문제는 예술이라는 것도,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것도 일정 부분 시대 변화의 흐름을 탄다는 점이다. 상상력과 창조의 핵심은 독창성에 있으며, 이때의 독창성이란 훼손될 수 없는 원본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기존의 가치관과 믿음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바짝 마른 장미꽃 다발에서
앵앵거리는 꿀벌의 날갯짓 들리나요?
닳아빠진 촛불에서
넓디넓은 꿈을 읽을 수 있나요?
장맛비에 휩쓸려온 뼛조각에서
화장품 냄새를 맡을 수 있나요?
지금 우리 자리는
죽은 자들 이미지의 묘지가 아닌가요?
우리 삶은 또 다른 복제물
복제물, 복제물이 아닌가요?
원본의 기억은 살아있나요?
원본은 있기는 있나요?
--- 「살아있는 것의 이미지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부분
시인은 신에 가깝다고?
에라이, 시뮬라크르
너는 어떤 모습으로 복제된 거지?
어느 것도 원본은 없고
그저 차이만 반복된다면서?
y = ax + b, 변수들의
변치 않는 정의는 무엇일까?
y = 나
x = 너 아니 하나님
a와 b는?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를 그린 그림에 불과하지
--- 「보이는 것 저 너머 –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부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배반>을 모티프로 한 텍스트들이다. 시인은 여기서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이미지의 묘지’는 아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가 이미 ‘또 다른 복제물’은 아닌지를 묻고 있다. 원본은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추방되고 지워져버렸으며, 따라서 이 시대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창조적인 활동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삶의 원형으로서의 원본, 예술가의 절대적인 이상으로서의 원본은 벌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그것을 되찾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실물로서의 원본이 사라진 시대, 그리하여 그것이 남긴 이미지만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 현재, 우리 시대인 것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면, 과연 애써 창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수히 많은 원본들이 존재한다면, 원본은 복제본과 무엇이 다른가. 독창적인 것들을 꼭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까. 시대와 환경이 달라진 이상, 독창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조차 그 가치를 인정해주어야만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예술은 과연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선뜻 답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편집된 기억과 조작된 현실 속에서는 무엇이 실재고 무엇이 허상인지를 가려내기란 불가능할뿐더러 사실상 무의미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예술가란 독창적인 원본을 창조하거나 생산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기술적인 조작자이며 편집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런 주장에 따른다면 예술이란 실재를 향한 인간의 이상과 열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실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허상, 즉 이미지일 뿐이다. 완전이니 불완전이니 하는 개념도 적용될 수 없으며, 오직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반복’만이 진열된‘복제’품들의 의미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시뮬라크르’란 본디 그런 것이다. 거기에는 개별 작품들마다 전해지는 인간다운 고유한 숨결과 손길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예술을 진정한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런 시대일수록 예술이 지닌 창조적 가치는 존중되어야 하며 그 속에 담긴 예술가적인 고뇌와 열정이 지닌 무게 또한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림자가 없다
청정한 하늘너머
살아서 볼 수 없는 세상에는
지금 여기는
스모그가 가득하고
너무도 에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이마고 데이
지평선 맞은편에 있는 나라의
새들은
우리를 안타까이 바라다보며
손짓을 하고 있다
당신의 원본은 아직도
오염되지 않았다고
--- 「시로 그린 그림 - 호안 미로 <지평선 맞은편의 새들>」 전문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애초 창조주이신 하나님처럼 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에 등장한 것이다. 아담이 건넨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그대로 사물의 이름이 되고 세상의 질서가 되었다. 그러한 이름과 질서 속에서 모든 것들은 조화롭고 완벽했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그토록 완벽했던 낙원의 질서는 깨어졌다. 아담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마고 데이 Imago Dei’)는 지워지고, 이윽고 그는 에덴에서 추방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원죄를 안고 태어나야만 하는 불행한 존재가 되었다. 그로부터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인간은 이제 낙원에서 살던 기억조차도 떠올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는 모순되고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다만 부족한 존재로 스스로 적응하며 살아가야 했다. 게다가 현실의 모순과 불완전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은 인간을 지속적으로 타락시켰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 인간을 위한 구원의 손길은 어디에도 쉽사리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언제든 어두움 속에서도 희망은 남아 있는 법이다. 기억 속에서는 비록 까마득히 잊혀져버렸을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아직 꿈꿀 권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추방당한 낙원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낙원을 그리면서 끝내 그것을 되찾으려는 시도와 노력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술이란 그런 꿈꿀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는 마지막 방패이자 보루인 것이다. 그 속에는 ‘아직도 / 오염되지 않’은 최초의 인간에 대한 진한 그리움,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원본’에 대한 오랜 기억이 은밀하게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