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지kluge. 세종과 장영실
코로나19의 재확산이 전국 규모로 위협이 되고 모두 숨죽여 활동을 자제하며 집안으로 숨어드는 일상 중에
'천문'이라는 영화 한 편를 본다.
이 영화를 보면 세종의 총애에 대한 장영실의 헌신의 지극함이 여실하다.
명분이 뚜렷하고 의미가 도드라지고 숭고가 실하면 죽음도 불사할 수 있겠다싶다.
등 따습고 배부른 이 편한 지경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백마고지를 향해 기어올랐던 그 병사들의 용맹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초개같이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투사들의 그 심정이 이해되든가. 그러나 장영실에 대한 세종의 총애가 저토록 지극하면 장영실은 죽음도 기꺼이 내놓겠구나..... 싶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이든 가능성 앞에 있다 할 수 있겠구나. 목숨을 던질 각오라면 세상 일 안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움은 바로 명분의 건립이 부족하거나 상실이거나 그런 것이겠다. 기질적 운명이라기보다는...... 게으름도 마찬가지다! 학문에서도 그러하고 예능에서도 그러하다!
사랑 또한 그렇지 않더냐!
사람은 명분이 있을 때 움직이게 되고 명분이 분명하면 고통을 극복할 수 있고, 명분이 뚜렷하면 무엇이든 성취가 가능하겠구나. 공부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명분이 부실하기 때문이겠지.
Joseph Heath의 Enlightenment 2.0에서 말하는 Kludge(또는 Kluge) 또한 인간의 이성의 불완전성으로부터 행동을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 즉 ‘미래의 요소를 현재로 끌어오는 꼼수’라 하더구먼.
문제는 어떤 명분을 개발, 조합하여 내 남은 생을 살아낼 것인가이다. 얼핏 느슨하게 현실의 무대에서 언제나 객석에 자리 잡고 앉아 정작 자신의 삶은 살지 못하고 남의 생을 들여다보며 가타부타 말만 거드는 그런 짓 말고. 또한 사고가 철옹성 같이 완고하여 타협을 한사코 거부하거나 세상을 냉소하며 등 돌려 무심, 무위를 가장하는 얼치기 자연인, 그런 거 말고. 자신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삶을 화장華藏의 터에 존엄한 가치로 올려 세우려는 자. 보다 의미심장한 자신만의 한 판 놀이를 제대로 놀아보려는 그런 자 말이지.
좀 그들 눈에 무모하면 어떤가. 이제 내가 물어 왔던 질문에 그 어느 누구의 답이 아니라 내 스스로 답할 때가 되었지 아마. 어차피 답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으니, 어느 지점에서는 멈춰서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산다는 일의 의미와 이치를 온몸 뱃바닥으로 궁극에까지 밀고 나가는 너의 치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