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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면류관 박두진
가시 면류관
비로소 하늘로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죽음의 바닥으로 딛고 내려갈 수 있는 사다리.
빛이 그 가시 끝 뜨거운 정점들에 피로 솟고
비로소 음미하는 아름다운 고독
별들이 뿌려 주는 눈부신 축복과
향기로이 끈적이는 패배의 확증 속에
눌러라 눌러라 가중하는 이 황홀
이제는 미련 없이 손을 들 수 있다.
누구도 다시는 기대하지 않게
혼자서도 이제는 개선할 수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갈대 박두진
갈대&
갈대가 날리는 노래다
별과 별에 가 닿아라.
지혜(智慧)는 가라앉아 뿌리 밑에 침묵(沈黙)하고,
언어(言語)는 이슬 방울,
사상(思想)은 계절풍(季節風),
믿음은 업고(業苦),
사랑은 피흘림,
영원(永遠). ―너에의
손짓은
하얀 꽃 갈대꽃.
잎에는 피가 묻어,
스스로가 갈긴 칼에
선혈(鮮血)이 뛰어 흘러,
갈대가 부르짖는 갈대의 절규(絶叫)다.
해와 달 해와 달 뜬 하늘에 가 닿아라.
바람이 잠자는,
스스로 침묵(沈黙)하면
갈대는
고독(孤獨).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갈보리의 노래 2 박두진
갈보리의 노래 2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恥辱)을, 불붙는 분노(憤怒)를, 에어 내는 비애(悲哀)를, 물새 같은 고독(孤獨)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槍)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背叛)하고, 매어 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怨讐)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强)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波濤)같이 밀려오는 승리(勝利)에의 욕망(欲望)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떵게 당신은 패(敗)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弱)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血滴)으로, 어떻게 만민(萬民)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神)인 줄을 믿었는가? 커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나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 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神)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人間)일 수 있었는가? 인간(人間)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神)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人子)여! 인자(人子)여! 마지막 쏟아지는 폭포(瀑布)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강 2 박두진
강 2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강(江)물은 숲에서 나와 흐르리.
비로소 채색(彩色)되는 유유(悠悠)한 침묵(沈黙)
꽃으로 수장(水葬)하는 내일에의 날갯짓,
아, 홍건하게 강(江)물은 꽃에 젖어 흐르리
무지개 피어 젖은 아침 숲 짐승 울음.
일체의 죽은 것은 떠내려가리
얼룽대는 배암 비늘 피발톱 독수리의,
이리떼 비둘기떼 깃쭉지와 울대뼈의
피로 물든 일체는 바다로 가리.
비로소 햇살 아래 옷을 벗는 너의 전신(全身)
강(江)이여. 강(江)이여. 내일에의 피몸짓.
네가 하는 손짓을 잊을 수가 없어
강(江) 흐름 핏무늬길 바다로 간다.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강강수월래 박두진
강강수월래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 흔들리고 있다.
강 속을 흐르는 달이 차갑게 흐느끼고 있다.
조그만 바람에도 출렁이는 달빛
조그만 물살에도 산산이 부서져 흐느끼는 달빛
옛날에 옛날에
옥으로 금으로 만든 도끼로 찍어다 지은
계수나무 기둥과 서까래
초가 삼간도 헐리고 폐허
영하 200도의 침묵의 잿빛 벌판
달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달이 물 속을 흐느껴 가고 있다.
강 강 수월래
한가위 하늘이 저 달의 얼굴
달의 가슴 달의 사랑
눈알이 노란 청년 몇 사람이
무거운 기계의 몸으로 올라가 꽂아 놓은
순결의 상처에 이마 찡그리고
달은
강 강 수월래
옛날을 생각하고 옛날을 잃어버린 사람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
꿈을 생각하고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다.
어쩐지 부끄러운 마음의 우리들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저 달빛,
달은 하나인데 우리들 둘의 마음
천의 마음.
마음과 사랑 꿈은 하나인데
저 둘의 달빛 천의 달빛,
강―강 수월래 강 강 수월래
올려다보는 달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저마다 우리들
하나씩의 가슴의 달이 흐느끼고 있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검법 박두진
검법(劍法)
칼을 간다.
달밤에 홀로
벌판에서
칼을 간다.
엉겅퀴 한 잎
흐르는 강물을 베이기에도 무딘
칼날.
함부로 떼지어
광기로 끼얹는 잔내비떼의
흙탕물,
밤에 와서 뿌리고 가는
횡포의 이리떼의
유혈로 녹이 슬은,
달밤에 홀로
칼을 간다.
저렇게 틀어막힌 봉쇄의 입,
저렇게 틀어막힌
절벽의 귀,
저렇게 캄캄하게 눈 칭칭 가리운 채
묶여서 투하되는 대낮의 자유,
소용돌이 심해 속의
칠색 오로라여.
더러는 툭툭한 구둣발
더러는 투망
더러는 공중잡이
더러는 배차기로
학살되는 지성,
그 양심,
이제는
잊어버린
밤에
홀로,
이성의 돌을 닦아
칼 쓱쓱 간다.
대 상단 높이 들어
파람을 끊어,
썽둥 달을 둘로 잘라
장강 터 놓는다.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결투 박두진
결투(決鬪)
죽어서 평등한 빈 벌의 뼈의 달빛
피에 취한 맹수들이 으릉으릉 온다.
깃발도 하나 없이
너도 이미 가 버린
혼자로다 신나는 무인 광야 결투,
다만
별 하나 훌쩍 따서 손아금에 쥐고,
맨발로 창 하나로 치고 치고 친다.
밤의 광야 달빛 활활 불을 지른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결투의 거북 박두진
결투(決鬪)의 거북
입으로 비수를 받겠다.
천만 개 별과 별이 칼날이 되어
쏟아져도,
엎드려 푸른 등
등으로 모조리 맞받겠다.
금으로 번쩍이는
내 가슴 한복판의 임금 왕자,
찔리면 피 흐르는
가슴팍 그대로 맞받겠다.
그 비수를 받아
네게로 다시 뿌리겠다.
하늘로 윙윙대며
바람을 끊고 날아가는
내리 꽂는 칼날들의
풋풋한 전율.
단 한 개
한 개씩만으로
너의 급소와 급소를
노려,
오만한 힘의 근원
근원을 모조리 지질르겠다.
새로 펄펄 나부끼는
해와 달은 내 것,
일어서서 일제히
바다들이 환호하고,
푸른 내 등의 껍질
아침 출렁임,
쏟아지는 햇살을
심해를 갈고 가며,
하나씩의 하늘마다 손 흔들겠다.
스스로 내 피의 상처
아물리겠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고독의 강 박두진
고독(孤獨)의 강(江)
빛에서 피가 흐르는
강(江)
고독(孤獨)이 띄우는
찬란한 꽃불은
밤이다.
짐승과 짐승들이 일으키는
내일의 종말(終末)을 위한
끊임없는
교역(交易),
도마 위
푸른 칼 앞에
움직일 수도 없이 눕는
평화(平和)와 자유(自由)여.
오랜 앞날에
오늘의 밤을 증언(證言)할
고양이의
불붙은 눈과
목으로 토(吐)하는
가마귀의
피 기록(記錄).
바람이 술이 되고
햇볕이
눈물이 되고
저승과 이승을 위한
늙으신 주례(主禮)는
지금 침묵(沈黙).
무덤과 혼례(婚禮)를 장식할
최후(最後)의 꽃다발은
이미 짓밟힌
절망(絶望)의 진눈깨비.
잘 길들은
식민지(植民地)의 지성(知性)이 선량(善良)해서
밤이 편쿠나.
펄럭이던
깃발의 신호(信號)가 내려지자
구름과
바람마저 반란(叛亂)하는
벌판,
비둘기가
그 짝의 이름을 외우다
쓰러져 간
고독(孤獨)한 강(江)가에,
늙은 눈먼 청동(靑銅)말 하나
먼 노을을 향해
떨면서 울음 운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고산식물 박두진
고산식물(高山植物)
아슬히 깎아질린 벼랑에 산다.
내 가슴 이 비수(匕首)는 자라 오르는 난(蘭)
짙은 안개 비에 서려 바람에 떤다.
찬 달빛 거울 비치면 맹금(猛禽)의 상한 죽지
언덕을 밀물 덮던 현란한 기폭
포효(咆哮)가 지금은 꽃으로 떨어져 말이 없는
그 침묵 심연(深淵) 이쪽 벼랑에 산다.
언젠가는 다시 불을 하늘 아침 폭풍(暴風)
땅에는 동남(東南) 서북(西北) 혁명(革命) 치달려
비수(匕首)가 그 사슬을 그물을 그 밤을 찔러
마지막 빛의 개벽 꽃 흐트러뜨릴
난(蘭)이여 안개 떠는 벼랑에 산다.
自苑캣 高山植物), 일지사, 1973
광장 박두진
광장(廣場)&
뜨거운 침묵의 햇살이 쌓이고,
바람은 보고 온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젊음이 달리던 함성의 파동
열기를 뿜었던 흔적의 피를
증발하며,
다만
파랗게 몰고 올 바다의 개벽
이념의 별들의 신선한 폭주를 기다리며,
증언의 푸른 나무
정정한 수목들에 둘리워
하얗게 끓고 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금강전도 박두진
금강전도(金剛全圖)
밤에도 낮에도 별이 펑펑 쏟아지고,
달이 열 개 해가 열 개 높게높게 걸려 있고,
억억만 동해 파도 하얗게 밀고 오고,
금사다리 은사다리 일만이천 별사다리,
찰박이던 달의 폭포 달의 골짝 거기,
육천만 가슴 속 이 저마다의 눈멀음,
응어리 안의 넋이 불로 활활 탄다.
아으, 서로 얽힌 넋의 사슬 끊을 수가 없다.
넋 철철 피로 솟아 강산 적신다.
갈수록 더 골짝마다 맹수의 떼 들끓고,
하늘 아래 제일강산 검은 먹구름.
언제나 그 자유 천지 하나의 날 그때일지,
온 산을 다 뭉개도 못 다스릴 이 아픔,
일만이천 주룩주룩 서서 너는 운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기 박두진
기(旗)&
기(旗)! 그것은,―
찬란하게, 우리 앞에 나부끼어야 한다.
바람결 띠끌마다 흐려져 온 것, 미쳐 뛰는 물결마다 휩쓸려 온 것, 아우성의 저자마다 찢겨져 온 것,
그것은,―
어쩌면 핏빛, 어쩌면 별빛, 어쩌면 초록, 어쩌면 눈물, 어쩌면 꿈! 어쩌면 활활 타는 불꽃 빛으로, 가슴마다 살아 있어 나부끼는 것,
펄펄펄펄 창궁(蒼穹) 위에 펼쳐 오르면, 저마다의 기(旗)폭들이, 아득하게 한 폭으로 피어 살아 오르면, 우리들의 눈은 다시 부시어져 온다. 가슴들이 둥둥 새로 틔어 부퍼 온다. 피가 더욱 새로 맑아 펄덕여져 온다.
기(旗)! 다시 오른 기(旗)폭은 찢겨지지 않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빛발들이 흩는다. 펄펄펄펄 기(旗)폭에서 꽃가루가 흩는다. 기(旗)을 향(向)해 우리들은 행진(行進)을 한다. 파다아하게 모여들어 새로 뽑는 합창(合唱).―손뼉들을 흠뻑 친다. 하얀 새를 날린다. 눈빛 같은 하얀 새뗄 파닥파닥 날린다.
기(旗)! 그것은,―
우리들 젊은, 우리들 뛰는, 가슴마다 당신께서 주신 것이다.
기(旗)! 그것은,―
기적(奇蹟)처럼 찬란하게, 당신께서 우리 앞에 날리셔야 한다.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꽃과 항구 박두진
꽃과 항구(港口)
나무는 철을 따라
가지마다 난만히 꽃을 피워 흩날리고,
인간은 영혼의 뿌리 깊이
눌리면 타오르는 자유의 불꽃을 간직한다.
꽃은 그 뿌리에 근원하여
한 철 바람에 향기로이 나부끼고,
자유는 피와 생명에 뿌리하여
영혼의 밑바닥 꺼지지 않는 근원에서 죽지 않고 탄다.
꽃잎. 꽃잎. 봄 되어 하늘에 구름처럼 일더니,
그 바다―, 꽃그늘에 항구는 졸고 있더니,
자유여! 학살되어 바닷속에 버림받은 자유여!
피안개에 그므는 아름다운 항구여!
그 소녀와 소년들과 젊음 속에 맥 뛰는
불의와 강압과 총칼 앞에 맞서는
살아서 누리려는 자유에의 비원이
죽음―. 생명을 짓누르는 공포보다 강하구나.
피는 꽃보다 값지고,
자유에의 불꽃은 죽음보다 강하구나.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꽃들의 행렬 박두진
꽃들의 행렬
현란한 꿈의 무지개도
아침 바닷소리의 싱싱한 설레임도
새들의 낭랑한 지저귐도
생각하는 나무의 푸른 그림자도
지금은 없네.
뜨거운 햇살의 입맞춤도
바람의 부드러운 포옹도
유유한 구름의 손짓도
거윽한 별들의 속삭임도
지금은 없네.
꿈의 자락 갈래져 찢기우고
새들은 침묵하고
생각하는 나무의 잎새들 조락하고
햇살은 핏빛 전율
바람은 발광
구름들 스스로 분노로 불이 일어
어둠에 피 묻히는 꽃들의 저 행렬
안으로 무너지며 밤에 쌓이는
그 강가 가시벌의 꽃대열이어
내일에의 꽃의 절규
푸드득거림이어.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너의 융기 박두진
너의 융기(隆起)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가슴이어.
천만년 또는
천만리 멀고 멀은
계곡을 불어 치는 윙윙한 하늘 바람,
한 떼씩의 바다가 일어서려다 주저앉고
치달리며 피 흐르는 산맥들의 발목
지금은 적막한
절름대는 광야의 상한 짐승이어.
너에의 달디 달은
유혹은 꿈의 늪
체념은 느린 죽음
육신은 마른 흙
바다보다 더 설레는 안의 바람 속
춤추는 이 회오리 마음 어지러움이어.
그 죽어도 다시 살을
오직 하나 불씨
서로 보며 불 튀는 눈과 눈의 영원
포옹이 그 육신으로 영으로
푸득거릴,
어떻게 너에게 닿을까
사랑이어.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달과 이리 박두진
달과 이리
이리는 이리 정신, 왜 이리로 태어났나 스스로는 모른다. 축축한 어스름 때 달이 걸린 새벽을 싸다니며, 왜 피의 냄새, 피의 맛, 살의 맛에 미치는지 스스로는 모른다. 심술로 약한 자를 덮치고, 성나서 물어 뜯고, 턱주가리 달을 향해 꺼으꺼으 운다. 제 서슬에 피가 더우면 십리 백리 뛴다. 먼 먼 피의 향수, 달이 걸린 삘딩숲을 벌룸벌룸 뛴다. 활활 눈에 불을 켜고 옛날 향수 취한다. 휜 이빨 달을 향해 꺼으꺼으 운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도봉 박두진
도봉(道峯)
산(山)새도 날러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듯,
홀로 앉은
가을 산(山)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山)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 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생(生)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돌베개, 야곱 박두진
돌베개, 야곱
그때 집을 나와 빈 들에 잠잘 때 베고 자던 돌베개 홀로 이슬 젖고, 피빛 눈물 젖고,
별들이 떨구고 간 꿈의 부스러기, 눈물 부스러기, 쓸어모아 깔고 자는 잠자리, 한밤에 뻗쳐오른 사다리 꿈,
오르락내리락 하늘까지 높고 높은 천사들의 옷깃소리 노랫소리 웃음소리 황홀하던,
남가일몽, 일장춘몽 새벽녘,
서녘 멀리 한 조각 푸른 달 걸려 떨고,
풀버러지 즐즐 울고,
배고픔,
외로움,
뉘우침만 뼈저려,
어떡할까 막막한 들 돌베개 고쳐 베는.
눈물 철철 고쳐 베는.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마법의 새 박두진
마법(魔法)의 새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온
몇 번만 날개 치면 산골짝의 꽃
몇 번만 날개 치면 먼 나라 공주로,
물에서 올라올 땐 푸르디 푸른 물의 새
바람에서 빚어질 땐 희디 하얀 바람의 새
불에서 일어날 땐 붉디 붉은 불의 새로
아침에서 밤 밤에서 꿈에까지
내 영혼의 안과 밖 가슴 속 갈피 갈피를
포릉대는 새여.
어느 때는 여왕으로 절대자로 군림하고
어느 때는 품에 안겨 소녀로 되어 흐느끼는
돌아설 땐 찬바람
빙벽 속에 화석하며 끼들끼들 운다.
너는 날카로운 부리로
내 심장의 뜨거움을 찍어다가 벌판에 꽃 뿌리고
내가 싫어하는 짐승 싫어하는 뱀들의
그것의 코빼기를 발톱으로 덮쳐
뚝뚝 듣는 피를 물고 되돌아올 때도 있다.
너는
홀로 쫓겨 숲에 우는 어린 왕자의 말이다가
밤마다 달빛 섬에 홀로 우는 학이다가
오색 훨훨 무지개 속 구름 속의 천사이다가
돌로 치는 군중 속의 피 흐르는 창녀이다가
한 번 맡으면 쓰러지는 독한 꽃의 향기이다가
새여.
느닷없이 얼키설키 영혼을 와서 어지럽혀
나도 너를 알 수 없고 너도 나를 알 수 없게
눈으로 서로 보면 눈이
넋으로 서로 보면 넋이
타면서 서로 아파 깊게 깊게 앓는,
서로 오래 영혼끼리 꽃으로 서서 우는
서로 찾아 하늘 날며 종일을 울어예는
어쩔까 아 징징대며 젖어오는 울음
아직도 너를 나는 사랑하고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묘지송 박두진
묘지송(墓地頌)&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묵시록 박두진
묵시록(黙示錄)
나의 사랑하는 이의 꿈이여 거기에 있거라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하늘 언덕의 노을자락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하늘 꽃의 꽃언덕
그 무지개로도 햇볕살로도 바람결로도
이슬 방울로도 하늘 푸르름으로도
짜낼 수 없는 깁,
그 맞닿아야 할 가슴과 가슴의 따스함
입술과 입술의 보드라움
눈과 눈의 깊음
살과 살의 향기로움이 내려 엉긴
아, 어디까지 어디까지 가도 그 멀음 끝이 없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가도 그 오램 끝이 없는
너와 나 닿고자 하는 언덕의 사랑이여
이루어지고 싶은 그 꿈의 꼭대기
자리잡고자 하는 사랑의 안칡이여 거기
있거라.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별밭에 누워 박두진
별밭에 누워
바람에 쓸려 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 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 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인지 서러움인지 분간 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自苑캣 高山植物), 일지사, 1973
봄에의 격 박두진
봄에의 격(檄)
일어나라.
나무여. 잠자는 산이여. 돌이여. 풀이여. 땅버러지여.
물이여. 웅덩이여. 시내여. 바다여.
이러한 것들의,
죽음이여. 넋이여. 얼이여. 영이여.
이러한 것들끼리의 사무침,
이러한 것들끼리의,
눈물이여. 한숨이여. 피보래여. 반항이여.
불덩어리여.
일어나라.
산에서는 오래 두고 산이래서 사는 것,
입이 붉은 너희,
칡범이여. 개호주여. 살가지여. 곰이여. 여우여.
승냥이여. 오소리여. 멧돼지여.
바보 같은 사슴이여. 노루여. 너구리여. 토끼여.
방정맞은 다람쥐여.
너희들은 또 너희들끼리의,
눈물이여. 피흘림이여. 잡아먹음, 접아먹힘이여. 쫓겨 감이여.
달아남이여. 한숨이여. 불덩어리여.
그 중에도 친친한, 어둠 속에 들엎드린,
능구렁이여. 까치독사여. 독 이빨이여.
일어나라.
이제야 너희들은 너희들끼리의,
오래고 억울한 사무침을 위하여, 혓바닥을 위하여, 어금니를 위하여,
발톱들을 위하여, 핏대들을 위하여, 약탈을, 살륙을, 겁탈과 결투,
승리를, 둔주를, 패배들을 위하여,
정복을, 추격을, 피흘림을 위하여,
일어나라.
숲에서는 오래오래 숲이래서 사는 것,
날개쭉질 가진,
멧새여. 할미새여. 무당새여. 꾀꼬리여.
비둘기여. 산제비여. 칼새여. 지미새여.
쟁끼여, 까투리여. 부헝이여. 올빼미여. 독수리여. 매여.
너희들의 입부리, 너희들의 발톱,
너희들의 깃쭉지의,
너희들은 또 너희들끼리의,
사랑이며, 노래며, 보금자리며, 속삭임이며, 따스함이며, 보드라움이며,
싸움이며, 할큄이며, 피흘림이며,
죽임이며, 쫓기임,
눈물이며, 안도며, 승리며, 또 평화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아, 물에서는 또 물이래서 오래 사는,
그 중에서도 못생기디 못생긴,
미꾸라지여. 구구락지여. 자가사리여. 개멱자구여. 실뱀장어여.
모래무지, 징검새우, 물무당이여, 똥방개여, 참방개여. 송사리떼여.
너희들의 집단, 너희들의 보람, 너희들의 투쟁,
너희들의 사상, 너희들의 유전, 너희들의 발광, 너희들의 죽음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눈물, 너희들의 피, 너희들의 분노와 반항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땅버러지여.
흙일래 흙 속에서 흙낼 맡고 사는,
지지리도 못생긴, 아, 그 중에서도,
개밥뚜기여. 오줌쌔기여. 소금쟁이여. 굼벙이, 지렁이, 쇠똥벌레여.
딱정벌레, 찝게벌레, 방구벌레여.
노린챙이, 투구벌레, 지네 새끼여.
이제야 너희들은,
너희들의 보람, 너희들의 쾌적, 너희들의 사랑,
너희들의 투지, 너희들의 혁명, 너희들의 승리들을 위하여,
일어나라.
그리하여,
산에서는 산읫 것, 물에서는 물읫 것, 바다에선 바다읫 것,
흙에서는 흙읫 것이,
이제야 일제히들,
휘날리며 휘날리며 깃발들을 들라.
뿔들을 뻗치라, 이빨을 발톱을, 부리들을 갈라.
목청들을 돋우라. 비약하라. 선전하라, 행진하라. 돌격하라.
합창하라. 노호, 절규,
승리하라. 정복하라. 개선하라. 환호하라.
패배하라. 둔주하라.
진실로, 독에는 독, 칼에는 칼, 피에는 피로,
눈물에는 눈물, 사랑에는 사랑, 포옹에는 포옹으로, 아, 그 중에서도,
불이 붙는 사랑에는 불이 붙은 사랑으로,
있고 나고, 나고 죽고, 사랑하기 위하여,
있는 것 일체의,
생명이란 생명의,
산이며 숲, 물이며 바다, 하늘이며 흙 속의, 바람결 속의, 정이며 넋,
얼이며 영들까지,
아, 일체의 있는 것은,
너희들, 스스로를 위하여,
이때에야 진실로,
일어나라.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1
붉은 부리의 새 박두진
붉은 부리의 새
바람보다도 가볍게
햇살보다도 더 부드럽게
영혼의 네 날개
가을 하늘 훨훨 지는 쭉지 갈이 깃
기억할 수 있는 것의 모두는
강물에 둥둥 떠서 바다로 멀어가고
안에 받은 상처
피 뛰어 머나먼 별과 별의 불로 타
다만
당신의 기억하심
기억하심 당신 안의 하ㅎ지 않은 삶
어느만큼 삶의 의미 알아 주실지
가을 강 저 볕에 우는
부리 붉은 새.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비 박두진
비(碑)&
―한 마리만 푸른 새가 날아 오르라. 비(碑).…… 한 마디만 길다랗게 소릴 뽑으라.
천년(千年) 이천년(二千年)을 삼천년(三千年)을 조으는 것, 이끼마다 눈이 되어 꽃잎으로 피라. 이슬처럼 꽃잎마다 녹아 흐르면, 아득한 하늘 밖에 별이 내린다.
비(碑). 오오, 돌.…… 무엇을 호흡(呼吸)하는가. 오래 숨이 겹쳐지면 깃쭉지가 돋는가. 목을 뽑아 학(鶴)처럼 구름 밖도 나는가. 비바람과 눈포래와 내려 쬐는 뙤약볕. 미쳐 뛰는 세월(歲月)들이 못을 박는다. 징을 박는다.
―월광(月光).…… 또는, 별이 글성 배어 내려, 거울처럼 맑아지면 다시 네게 오마. 넌즛 한번 내어밀어 손을 쥐어 다오. 벌에 혼자 너를 두고 훌훌 내가 간다.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사도행전 2 박두진
사도행전(使徒行專) 2
□ 1
카인이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몇 개의 돌덩이와
흔들리는 쑥대
들리는 듯 멀리서 바다가 울고 오고
바람은 은색
피로 땅에 스미면서 혼자였었네.
당신은 없었네.
늦게 해가 허릴 굽혀
이마를 와 짚어 주고
주저앉아 멀리서 카인의 울음
그 울음 멀어 가면
혼자였었네.
□ 2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어디론가 웅성대며 몰려가는 소리
벼랑을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날아오던 돌의 소리, 아우성 소리,
미친 듯
그, 바다로 비탈길로 내리닫던 군중
당신들을 피해가면 혼자였었네.
더러는 창을 들고
더러는 침을 뱉고
더러는 싱긋 웃고 곁을 와서 끼던
아, 보고 싶은 이웃
벼랑을 돌아가면 혼자였었네.
바다 멀리 푸른 데서
혼자였었네.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산맥을 간다 박두진
산맥(山脈)을 간다
얼룽진 산맥(山脈)들은 짐승들의 등빠디
피를 뿜듯 치달리어 산등성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 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포효(咆哮)는 절규(絶叫). 포효(咆哮)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을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 해가 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 해가 한 덩이.
미친 듯 밀려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삼월 일일의 하늘 박두진
삼(三)월 일(一)일의 하늘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삼(三)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젖어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이어야 함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 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쨘다르끄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휜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유관순,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삼(三)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 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관순 우리 누난 보고 싶은 누나
그 뜨거운 불의 마음 내 마음에 받고 싶고
내 뜨거운 맘 그 맘 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삼(三)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성 고독 박두진
성(聖) 고독(孤獨)
쫓겨서 벼랑에 홀로일 때
뿌리던 눈물의 푸르름
떨리던 풀잎의 치위를 누가 알까
땅바닥 맨발로 넌즛 돌아
수줍게 불러 보는 만남의 가슴 떨림
해갈의 물동이
눈길의 그 출렁임을 누가 알까
천 명 삼천 명의 모여드는 시장끼
영혼의 그 기갈소리 전신에 와 흐르는
어떡할까 어떡할까
빈 하늘 우러르는
홀로 그때 쓸쓸함을 누가 알까
하고 싶은 말
너무 높은 하늘의 말 땅에서는 모르고
너무 낮춘 땅의 말도
땅의 사람 모르고
이만치에 홀로 앉아 땅에 쓰는 글씨
그 땅의 글씨 하늘의 말을 누가 알까
모닥불 저만치 제자는 배반하고
조롱의 독설,
닭울음 멀어 가고
군중은 더 소리치고
다만 침묵
흔들리는 안의 깊이를 누가 알까
못으로 고정시켜
몸 하나 매달기에는 너무 튼튼하지만
비틀거리며
어깨에 메고 가기엔 너무 무거운
몸은 형틀에 끌려 가고
형틀은 몸에 끌려 가고
땅 모두 하늘 모두 친친 매달린
죄악 모두 죽음 모두
거기 매달린
나무 형틀 그 무게를 누가 알까
모두는 끝나고
패배의 마지막
태양 깨지고 산 웅웅 무너지고
강물들 역류하고
낮별의 우박 오고
뒤뚱대는 지축
피 흐르는 암반
마리아
그리고 막달레나 울음
모두는 돌아가고
적막
그때
당신의 그 울음소리를 누가 알까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성숙 박두진
성숙(成熟)
가장 가까우나 무한거리
사철을 방황하는
가장 가난한 나의 꿈이, 비로소 오늘
네게서 포만하고
바람이 처음 열어 보는 오월의 넋의 비밀
안에서 포화하는
꽃벌음이어.
저 아침의 한낮의 달밤의
그 바다의 첫번 팽창
아직은 저절로 유지되는 위태로운 균형이
네 순수 체온, 황홀하고
미끄러운 허릿매로
내 앞에 누워 있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성처녀 박두진
성처녀(聖處女)
금빛 햇덩어리의 마음으로
푸르디 푸른 오월 바람결의 마음으로
혼자서 흐느끼는 여울물의 마음으로
너를 굽어보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볼 비비고
따뜻하게 가슴 품고 방황하며 있었다.
짐승 소리 들렸다
이리 늑대 말승냥이 소리
개호주 살가지 칡덕범 소리
들개 호박개 불여우 소리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꽃은 꽃으로
피는 피로 짓이겨
낮에도 달밤에도 울음 울었다.
저희끼리 으르렁이며 피를 흘렸다.
오직 내 끓는
심장의 뜨거움
혈조의 싱싱함으로
하얗게 눈부시게 백열한 사랑
영혼의 푸른 높이
쏘는 눈
윙윙대는 날개의 사랑으로
더 깊고 그윽한 산의 가슴
바다 가슴으로
다만 작은 아기
내 넋의 전부
불멸의 마리아로 너를 안았었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속의 해 박두진
속의 해
푸른 달밤의 가마귀떼
훠이훠이 쫓는다.
낮에도 나타나는 도깨비
양의 탈의 이리
변절의 박쥐
올빼미
부엉부엉 부엉이떼
훠이훠이 쫓는다.
햇살로 엮어 만든 빗자루
훠이훠이 쳐 두들겨
밤의 악령 쫓는다.
죽음과 그 그림자
잿빛 회의
칠흑의 절망 첩첩
밤의 날개 쫓는다.
꽃으로 서서 우는 눈물
신록의 바람과 햇살로 흔들리는 살의 나신
뜨거운 선의 흐름
영혼의 열의 향기
사랑이 그 꿈을
꿈이 승리를
승리가 영원을 보장하는
시
시의 집권
시의 평화
시의 환희
로 활활 타는 너의 속의 시
불멸의 속의 해의
너와 나는 하나
신나라 아 하나의 해
우주 영원 탄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수석 회의록 박두진
수석(水石) 회의록(會議錄)
돌밭의
돌들이 날더러 비겁하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어리석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실망했다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눈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피 흘리라고 한다.
돌들이 일제히 주먹질한다.
돌들이 일제히 욕설 퍼붓는다.
돌들이 나를 향해 돌을 던진다.
돌들이 다시 또
돌들이 날더러 일어설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도망할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숨어 버릴 것이냐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분노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불질러 보라고 한다. 어둠에.
돌들이 날더러 또 사자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독수리가 되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말승냥이가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표범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돌들이 날더러 학이나 비둘기
사슴이나 산양이 되라고 한다. 차라리.
아, 돌들이 이번에는
돌들이 날더러 하늘의 별들을 따 와 보라고 한다.
햇덩어리 이글대는
이글대는 햇덩어릴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저 달의 달그림자
눈물의 얼음벌을 쏘아 떨어뜨려 보라고 한다.
돌들이 또 날더러
바다 위로 쩔벙쩔벙 걸음 걸어와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돌로써 빵을 빚고
손으로 돌을 쳐 콸콸 솟는 샘물
모세처럼 돌에서 샘물을 솟게 해 보라고 한다.
돌들이 날더러
이런 소리 끝까지 듣고 있는 바보
돌들이 날더러 바보가 아니냐고
돌들이 날더러 돌이나 되라고 돌이나 되라고 한다.
그렇게 내가 손들고 일어서서
진실로 한 점
돌이 될 것을 선언하자,
이제 천천만 돌들의
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
돌 속의 의지, 돌 속의 평화, 돌 속의 사랑,
돌 속의 자유,
돌 속의 우주, 돌 속의 환희
있는 것 일체 모두
하나로 엉겨,
하늘 천지 땅 천지 둥둥 뜨는 함성
만세 만세 돌들의 외침 끝이 없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시집 박두진
시집(詩集)
푸른 바닷가 모래벌에
시집 하나 하얗게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펄럭펄럭
한 장씩의 책장을 넘겨 가고 있었다.
슬프고 아름다운
가슴이 찍혀 있는 따스한 시집 글자
그 활자들이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높이높이 가물거려 하늘 속에 잠기는
하얀 새의 시, 하얀 시의 새.
꽃잎들이 하들하들 지고 있었다.
새가 되어 하늘에서 시를 외던 새가
그 외던 시 잊어버려 못 외었기 때문
꽃이 되어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먼 먼 하늘 속의 별이 되고 있었다.
새가 되어 하늘에서 시를 외던 새가
슬프고 아름다운
이 세상의 시
그 시집의 시 낭랑히 다 외어 냈기 때문
별의 나라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식민지, 20년대 춘궁 박두진
식민지(植民地), 20년대(年代) 춘궁(春窮)
삼동을 벗어나면 춘궁이었다.
길고도 아득한 굶주림이 기다렸다.
하늘도 햇볕도 허기로 타오르고
흙덩어리 팍팍한 황토의 목메임.
마을은 기진한 채
죽은 듯 늘어져 잠잠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바라볼 것도 기다릴 것도 없었다.
아홉 굽이 창자마다 쪼로록거리는 울음
어질뜨려 노오랗게 하늘과 땅이 핑핑 돌고
한낮에 오슬오슬 소름 돋치는 신열
아무데나 주저앉아 이명소리 견디고
이마에는 진땀,
정신이 돌면 또 한 번씩
허리띠 끈을 졸라맸다.
띄엄띄엄한 20호 미만의 고장치기
영세 소작의 극빈자
분노도 원망도
체념조차도 사치로워 죽지 못해서 사는 채로
그냥 살고 그냥 굶으며 시들어 갔다.
특권 지주 수탈의 원흉 동양척식회사
군림하는 그 이민
백색 흡혈귀에게
소작료로 비료값으로 장리쌀로 빼앗기고
키 까불러 알곡으로만 몇 곱절씩 빼앗기고
고리채로 또 되묶이고 덜미를 잡혀 졸리우는
피와 땀의 무한 농노 죽어지지도 않았다.
석복이네도 그랬다.
길영이네도 그랬다.
재돌이네도 동방삭이네도
쇠돌이네도 그랬다.
조당수 묽은 죽에 얼굴 어려 비치고
비료용의 콩깨묵 죽, 스래기 죽,
그것마저 바닥이 나면
씨오쟁이를 털었다.
어린아기 젖이 안 나 지쳐 잠들고
영양실조 기갈증
성인들은 부황이 들어
누렇게 부어서 비틀댔다.
어머님, 어머님,
반듯하고 너른 이마 둥글고 큰 눈
그때 우리 어머님은 수심에 찬 얼굴
단정하게 무릎 위에 바느질감 드시고
긴긴 해를 말이 없이 삯바느질만 하셨다.
누비질로는 골의 으뜸
이따금씩 찾아오는
누비옷을 맡으면
이불 한 채에 얼마
바지 저고리에 얼마
좁쌀 사고
월사금 내고
제사상도 차리셨다.
하루 한 끼 죽, 혹은 두 끼 죽,
다른 식구 거둬 주고 스스로는 늘 줄여
눈 침침하고 손 떨리고
현기증이 나면,
나 몰래 식구 몰래
가만가만 걸어 나가 장독대로 가서
맨간장물
물에 타서 훌훌 마시셨다.
아으 그래도 사람들은 죽지 않으면 살았다.
풀이 나면 풀을, 잎이 나면
잎을 뜯어
들, 산, 아무데나
먹을 것을 찾아 헤매었다.
질경이, 쑥, 명아주, 비듬,
아욱, 시금치, 쑥갓, 부루,
산에서는 고사리, 취, 뚝깔, 원추리,
먹는 풀은 무엇에고
좁쌀 한 줌 넣고
시퍼렇게 죽을 쑤어 끼니를 때웠다.
왜 가난한지
왜 굶는지
누가 못살게 하는지
일인들이 무엇인지
왜 그들이 지주로서 착취해 가고
왜 우리는 소작인으로서 착취를 당하는지
팔자소관 운명의 탓
살다가 그대로 죽어가는
20년대의 식민지,
벌판 마을 고장치기는
외롭고 또 아득했다.
눈물과 땀
피와 살점
골수까지 빨아 가던
제국주의 아귀
기름진 땅 알곡
좋은 것은 빼앗기고 나쁜 것마저도 잃어
아무것도 손에 없이 시름시름 죽어 간
잡혀 가고 쫓겨 가고
굶주려서 죽어 간,
조선 팔도 삼천만
무한 농노 너무 착한 우리들의 넋.
포옹무한(抱擁無限), 범조사, 1981
신약 박두진
신약(新約)
만(萬)년 뒤에도 억(億)년 뒤에도
우린 그때 그렇게 있을 것이라 한다.
모두는 끝나고
바다와 하늘뿐인
뙤약볕 사막벌의 하얀 뼈의 너
희디 하얀 뼈로 나도 너의 곁에 누워
사랑해, 사랑해,
서로 오래 하늘 두고 맹서해 온 말
그 가슴의 말 되풀이해 파도 소리에 씻으며
영겁을 나란하게
바닷가에 살아
우린 그때 그렇게 있을 것이라 한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야생대 박두진
야생대(野生代)
왕성한 혈기의 표범들이 밀림을 뛰고 있다.
쫓기는 사슴을 덮쳐서 골짜기에 뉘어 놓고
뜨거운 선혈의 살점을 뜯고 있다.
영원을 무료히 내려 쬐는 한낮의 땡볕
한 자락 바람도 숲에는 일지 않고
뻑뻑구욱 뻑뻑구욱
핏덩어리 토해 내며 뻐꾹새만 울고 있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어떤 노을 박두진
어떤 노을
우박비 자욱하게 쏟아지고 그치고,
번갯불 불 붙어 팔팔대고 그치고,
우릉우릉 천둥소리 우릉대고 그치고,
믿었던 모두는 도망하고 잠적하고,
믿었던 모두는 배반하고 떠나고,
멀디 먼,
당신이 홀로서 걸어가는 벌판에 노을이 젖어 있다.
벌판이 끝없이 바다로 이어지는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전신이 노을에 젖어 있다.
노을은 주황빛, 보랏빛,
그 속의 장미빛, 그 속의 진달래빛, 그 속의 황금빛,
혹은 그 속의 선혈빛 임리히,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발자국을 물들이고,
홀로서 안고 가는 당신의 젖빛 꿈을 물들이고,
홀로서 울고 가는 당신의 눈물을 물들이고,
벌판엔,
뜨겁게 분출하던 어제의 만세 소리
내일의 함성 소리
이젠 없고,
다만
떼지어 뒤를 쫓는 이리 울음 들릴 뿐,
당신이 들고 가는
찢어진 기폭 하나 바람에 펄럭인다.
그 우박비 그치고 적막하고,
번갯불 그치고 적막하고,
천둥 소리 그치고 적막하고,
저녁 해 곤두박혀 바다에
별은 아직 돋지 않고
노을로 불타는 주황빛 하늘 땅,
홀로서 걸어가는 당신의 벌판에 노을이 젖어 있다.
벌판을 홀로 가는 당신의 전신이 노을에 젖어 있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어서 너는 오너라 박두진
어서 너는 오너라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 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북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오도 박두진
오도(午禱)
백(百) 천만(千萬) 만만(萬萬) 억(億)겹
찬란한 빛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압도(壓倒)하여 주십시요.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 쨍, 영겁(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광야(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全) 영(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차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요.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요.
핏방울이 더욱도 곱게 하여 주십시요.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상처(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주(主).
당신은 나의 생명(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은 것을 아셨습니까.
뙤약볕에 기진(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오도(午禱), 영웅출판사, 1954
완벽한 산장 박두진
완벽(完璧)한 산장(山莊)
어디로 해서 너의 문을 들어갈까.
어떻게 어디로 해서 너의 내부
너의 가장 안의 너의 너
너의 너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네가 정말로 드러내는 너의 사상
네가 정말로 소리내는 너의 음악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너의 말을
들어볼 수 있을까.
밖으로부터도 너의 안은 빛으로 비쳐서 밝힐 수 없고
안으로부터도 너의 빛은 밖으로 비쳐서 밝히지 않는
다만
푸르디 푸르게 견고한 지붕
푸르디 푸르게 견고한 기둥
푸르디 푸르게 밀폐된 벽
푸르디 푸프게 충전된 안
그러한 둘레로 견고히 차 있을 뿐
싱싱한 황금의 햇살도 조용히 몸으로
칠칠한 밤의 어둠도 조용히 조용히
몸으로 빨아들여
낮과 밤 사시장철 영원 혼자 있어
말하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도 않고 있어
슬프지도 노하지도 기쁘지도 않고 있어
바람에도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랑에도 독주에도 취하지 않는다.
천의 만의 억의 부피
천의 만의 억의 깊이
천의 만의 사색의 억의 갈필 지닌
너 의연하고 자약한
안의 푸른 무게
너의 너의 가장 안에
열 개의 뜨거운 태양을
열 개의 출렁대는 바다를
열 개의 태풍을
열 개의 개벽 천지 천지 개벽을 지니고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함성을
무한 무한 침묵 속에
억만 명의 깃발을
억만 명의 금나팔과
억만 명의 합창
그 황홀한 천지를 지니고도
지금은 다만 잠잠한
너, 나의 앞의 너의 너여
있으리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박두진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鮮血)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절규(絶叫)를 멈춘 것이 아니다.
그렇다. 그 피불로 외쳐 뿜는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불길이여! 우리들의 대열(隊列)이여!
그 피에 젖은 주검을 밟고 넘은
불의 노도(怒濤), 불의 태풍(颱風), 혁명(革命)에의 전진(前進)이여!
우리들 아직도
스스로는 못 막는
우리들의 피 대열(隊列)을 흩을 수가 없다.
혁명(革命)에의 전진(前進)은 멈출 수가 없다.
민족(民族), 내가 사는 조국(祖國)이여.
우리들의 젊음들.
블이여! 피여!
그 오오래 우리에게 썩어 내린
악(惡)으로 불순(不純)으로 죄악(罪惡)으로 숨어 내린
그 면면(綿綿)한
우리들의 핏줄 속의 썩은 것을 씻쳐 내는,
그 면면(綿綿)한
우리들의 핏줄 속에 맑은 것을 솟쳐 내는,
아, 피를 피로 씻고,
불을 불로 살워,
젊음이여! 정(淨)한 피여! 새 세대(世代)여!
너희들 이미 일어선 게 아니냐?
분노(憤怒)한 게 아니냐?
내달린 게 아니냐?
절규(絶叫)한 게 아니냐?
피흘린 게 아니냐?
죽어간 게 아니냐?
아, 그 뿌리어진
임리한 붉은 피는 곱디 고운 피꽃잎,
피꽃은 강(江)을 이뤄,
강(江)물이 갈앉으면 하늘 푸르름.
혼령(魂靈)들은 강산(江山) 위에 햇볕살로 따스워,
아름다운 강산에 아름다운 나라를,
아름다운 나라에 아름다운 겨레를,
아름다운 겨레에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우리들이 이루려는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
절대공화국(絶對共和國).
철저한 민주 정체(民主政體).
철저한 사상(思想)의 자유(自由),
철저한 경제 균등(經濟均等),
철저한 인권 평등(人權平等)의,
우리들의 목표는 조국(祖國)의 승리(勝利),
우리들의 목표는 지상(地上)에서의 승리(勝利),
우리들의 목표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자유(自由), 평등(平等), 인간애(人間愛)의 승리(勝利)인,
인민(人民)들의 승리(勝利)인,
우리들의 혁명(革命)을 전취(戰取)할 때까지,
우리는 아직
우리들의 피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 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 불길,
우리들의 전진(前進)을 멈출 수가 없다.
혁명(革命)이여 !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웅 박두진
웅(熊)
내가 죽으리라.
너희들이 내 몸뚱일 터뜨렸구나.
내가 죽으리라.
가죽이 필요하냐?
내가 죽으리라.
발바닥이 필요하냐?
내가 죽으리라.
두고 온 어린 새끼
못 만나 본 짝이여.
살다가 온 골짜기여.
못 밟아 본 산줄기여.
칙칙한 나무숲
하늘 펀히 트이더니,
돌아가누나. 내 살점 경련하며 황토흙으로.
돌아가누나. 내 핏줄 굽이치며 뜨건 강으로.
내가 죽으리라. 언제까지 이대로 두 눈 뜨리라.
내가 죽으리라. 언제까지 이대로
심장 뛰리라.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유방 박두진
유방(乳房)
누구가 저기를 올라갈까
꿈으로 쌓아 올린 하늘 닿는 저 꼭지
터지면 샘물 솟을 융기의 저 내밀
누구가 저기를 올라갈까
손 씻고 발 씻고 넋을 마저 씻고서도
그대 아니 가슴 열면 기웃조차 할 수 없는
정해라 펄펄 오는 꽃의 사태 그 너머
희디 하얀 저 봉우리를 누구가 올라갈까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은하계, 태양계, 대우주천체 무한도 박두진
은하계, 태양계, 대우주천체 무한도
원제 : 은하계(銀河系), 태양계(太陽系), 대우주천체(大宇宙天體) 무한도(無限圖)
너는 돌이 아니고 별이다. 별이 아니고 꿈이다. 꿈이 아니고 불이다. 불이 아니고 분노다. 분노가 아니고 참음이다. 참음이 아니고 포용, 포용이 아니고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고 살, 살이 아니고 넋, 넋이 아니고 피의 응어리, 그리움의 응어리, 기다림, 외로움, 목숨과 목숨의 뼈, 뼈의 영원, 살의 영원, 꿈의 영원, 알맹이 그 억억 조조 미립자, 빛, 핵, 빛의 핵, 핵의 빛, 천지 우주의 무한 있음, 무한 있음의 내 앞에 있음, 만남, 초자연 속의 자연, 자연 속의 초자연, 있음의 그 영원 속의 눈이 부신 실존이다. 억만 개의 햇덩어리, 너의 안에 이글대고, 억억만 별의 나라 너의 속에 윙윙대는, 너 한 개 돌, 나도 한 개 돌, 돌과 돌이 끌어안고 엉이엉이 운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이상한 나라의 꿈 박두진
이상한 나라의 꿈
펑펑 함박눈은 눈으로 얼음 얼어 하얗게 얼어붙고
꽃은 꽃으로 빨갛게 얼음 얼어 꽃으로 얼어붙고
풀은 풀 나무는 나무 숲은 숲으로 얼음 얼어 푸르게 얼어붙고
바다는 바다로 파랗게
물고기는 물고기로 펄덕펄덕 비늘 싱싱한 채
하늘을 날으는 새들은 새들의 날갯짓
새들의 날으는 꼴로
날으면서 얼어붙고
밤은 밤으로 펑펑 까맣게
낮은 낮으로 눈부시게 햇살 밝게
새벽은 새벽 노을은 노을로 빠알갛게 얼음 얼어 얼어붙고
안개는 안개로 자욱하게
소낙비는 소낙비 천둥은 천둥으로 번개는 번개
무지개는 무지개로 얼음 얼어 얼어붙고
구름은 구름으로 멀디 먼 성좌는 성좌로
은하는 은하로 얼음 얼어 얼어붙고
언어는 언어 마음은 마음 꿈은 꿈으로 하얗게 얼어붙고
역사와 문명 사랑과 미움 향락과 탐욕 횡포와 억압
불안과 공포 분노와 항거
인종과 체념 전쟁과 살육 절망과 허무
행복과 불행 눈물과 탄식
기다림과 희망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평화와 자유 독재와 폭력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음악과 춤 포옹과 입맞춤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지구 덩어리 달덩어리 억억만 별과 별
우주 천체
일체 있음 무한 영원 그 영원도 얼음 얼어 얼어붙고
햇덩어리 벌겋게 활활 타는 햇덩어리 얼음 속에 빨갛게 얼어붙고
그때 어쩌면 하느님 하느님
어이 어이 높게 높게 홀로 울으시고 울으시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자화상 박두진
자화상(自畵像)&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쳐 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
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
달빛이 나를 두들기고,
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
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아, 훌훌한 낙화가
꽃잎이 나를 두들기고,
바람이 나를 두들기고,
가랑비 소낙비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
우박이 나를 두들기고,
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회의와 불안,
고독이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
끝없는 기다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
진리와 평화
자유가 나를 두들기고,
겨레가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잔내비 박두진
잔내비
잔내비 칼 휘두른다.
꽃밭이고 소년이고 양의 떼고 없다.
피 보면 미친다는
이리 넋에 취하여
어쩌나 둘러 서서 침묵하며 지켜보는
대낮 여기 잔내비떼
칼 휘두른다.
심장을 마구 찔러 목숨 다치고
은 장식 조상이 내린 거울 깨뜨리고
꽃밭 함부로 낭자하게
개발 짓밟어
남녘에서 들뜬 바람
독 어린 발정
죽을 줄 제 모르고
칼 휘두른다.
해, 청만사, 1949
전설 박두진
전설(傳說)&
서리 서리 능구리가 감아 오르는데
잔허리를 능구리가 감아 오르는데
가슴과 모가지와
모가지와 코밑
혓바닥이 코밑으로 늴름거려 오르는데
종소리는 아직도
울지 않는데
까투리야 까투리야
나는 그 새파란
비수(匕首)라도 한 자루 있어야겠다.
손아금에 비수(匕首) 하나
쥐어야겠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절벽가 박두진
절벽가(絶壁歌)
절벽이 아니라 무너져 내리는 별들이네.
별들이 아니라 서서 우는 절벽들이네.
별들이 별들 위에
절벽이 절벽 위에 있네.
절벽이 절벽 아래에도 있네.
절벽이 절벽 앞에, 절벽 뒤에,
절벽이 절벽 안에도 있네
절벽은 절벽끼리 손을 서로 닿지 않네.
절벽은 절벽끼리 말을 서로 할 수 없네.
절벽이 절벽끼리 눈을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귀를 서로 가리우네.
절벽이 절벽끼리 입을 서로 막네.
절벽들의 햇불을 절벽들이 못 보네.
절벽들의 절규를 절벽들이 못 듣네.
절벽은 스스로
사랑의 뜨거움을 말하지 않네.
절벽은 그 외로움
절벽은 그 분노
절벽은 그 내일에의 절망을 말하지 않네.
절벽의 가슴속엔 쏟아지는 별의 사태,
절벽들의 가슴속엔 피와 꿈의 비바람,
절벽들의 가슴속엔 펄펄 꽃이 지네.
어디에나 홀로 서서 절벽들이 우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젊은 죽음들에게 박두진
젊은 죽음들에게
누가 알리.
선혈로 강을 이뤄
한 바퀴 친친히 지구를 띠 두른
그 넋들 서로 안고
오늘을 울어옘을.
별빛 그 눈동자들 지금은 하늘엘까?
낭랑한 그 목소리들 지금은 공중엘까?
푸른 그 애띤 넋들 지금은 햇살 속엘까?
바람 속엘까? 떨리는 풀잎
꽃이 지는 꽃나부낌 속엘까?
그 착한 얼굴 모습들 지금은 강물 속엘까?
거울로 어리우는 바위 속엘까?
나무 그늘엘까?
잔잔한 호수 속엘까?
그 물 속 거꾸로인 하늘 그림자엘까?
알아서는 무엇하리.
너희들 뜨건 피와
찢긴 살은 흙거름, 거름 위에 뿌리한,
나무와 풀잎들과 꽃망울과 꽃,
죽음들이 잠들은 죽음 위에 서서
피와 살로 기름진 흙을 밟고 서서
우리들 여전히 히히대며 사는 것을
짐승들도 인간들도 어금니를 갈아
피흘리며 죽여가며 흥성흥성 사는 것을.
그러리.
무엇엔가 그러나 너희들은 살았으리.
너희들 뿌려 흘린
그 뜨거운 붉은 피가 유유한 강이 되고, 그래서 푸르르고.
그 빛나는 눈동자들 찬란한 별이 되고, 그래서 총총하고.
그 찢기운 붉은 살들 툭툭한 흙이 되고, 그래서 기름지고
희디 하얀 백골
뼈가 녹아 샘이 되어, 그래서 샛말갛고.
너희들의 숫된 맘은 푸른 바람결,
이름 석 잔 바람결,
혼령들은 햇살이 되어
오늘 저 볕살 속에 살아 있으리.
우리들 스스로도 알아지지 못하는
풀포기, 물굽이, 바람결과 가지 끝에
꽃이팔, 모래톱, 양지와 그늘 속에
혼령 속 마음 속에 피 흐름에 있으리.
살음 속에 영원히 잔잔하게 있으리.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젊음의 바다 박두진
젊음의 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땅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바다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무너지는 우리의 사랑을
무너지는 우리들의 나라를
무너지는 우리들의 세기를 삼키고도
너는 어제같이
일렁이고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아침의 저 햇덩어리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저 달덩어리
달덩어리
언제난 모두요 하나로
착한 자나 악한 자
우리들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꿈도 자랑도 슬픔도
파도 덮쳐
너의 품에 용해하는
다만
끝없이 일렁이는
끝없이 정열하는 무한 넓이
무한 용량
푸르디 푸른
너 천길 속의 의지
천길 속의 고요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천도설 박두진
천도설(天桃說)
맨발로 네가 올라간다. 맨발로 네가 올라가는 달밤의 달무지개. 이십세기, 이십오세기, 이백오십세기의 날개의 협곡, 아니, 오늘 너와 나의 오늘의 날개의 협곡, 죽음의 무지개의 너와 내 협곡, 나는 죽어도 그 협곡, 황홀한 늪 속에 빠지고 싶다. 너의 맨발, 너의 낮잠, 너의 안개, 너의 이슬, 아니, 너의 그 포기, 너의 그 획득, 너의 그 황홀에 사로잡히고 싶다. 아, 죽어도 좋은 무지개 너의 협곡, 무지개 층층을 맨발로 내가 올라간다. 너의 그 융기, 너의 그 승화, 너의 그 절정, 다만 너와 단둘이의 절정을 지금 올라간다. 그리고 그리고 떨어진다. 천길 낭떠러지, 안개의 협곡으로 떨어진다. 구름의 협곡 허무의 협곡 절망의 협곡으로 떨어진다. 복숭아여, 털복숭아여, 너 절정의 황홀의 하늘복숭아여. 울음이 강이 되어 너는 울고 있다. 황홀이 절망이 되어 너는 울고 있다, 날개도 속옷도 없이 너는 울고 있다. 발갛게 발갛게 울고 있다.
속 수석열전(續水石列傳), 일지사, 1973
천부주전 상백시 박두진
천부주전(天父主前) 상백시(上白是)
학의 쭉지 꼴짝마다 낭자하옵고
동남 서북 맹수들이 포효하옵고
아직 아직 당신 음성 안 들리옵고
침묵들이 보는 앞에 죽어가는 자유
뻗어도 닿지 않는 꿈의 날개 끝
갈대는 비수 고독
응어리 안에 끓어 별이 되옵고
별이 되옵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천태산 상대 박두진
천태산(天台山) 상대(上臺)
먼 항하사
영겁을 바람 부는 별과 별의
흔들림
그 빛이 어려 산드랗게
화석하는 절벽
무너지는 꽃의 사태
별의 사태
눈부신,
아
하도 홀로 어느날에 심심하시어
하늘 보좌 잠시 떠나
납시었던 자리.
한나절 내 당신 홀로
노니시던 자리.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청산도 박두진
청산도(靑山道)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찌면 만나 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띠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해, 청만사, 1949
칠월의 편지 박두진
칠월(七月)의 편지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해, 청만사, 1949
토르소 박두진
토르소
지금은 멀디 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 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 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 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 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지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 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 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팔월의 강 박두진
팔월(八月)의 강(江)
팔월(八月)의 강(江)이 손뼉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몸부림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고민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침잠(沈潛)한다.
강(江)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강(江)은 저 은하계(銀河系) 찬란한 태양계(太陽系)의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昇華)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강(江)은 팔월(八月)의 강(江)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평원석 이변 박두진
평원석(平原石) 이변(異變)
고향이었다. 어릴 때였다. 풀밭, 들길, 논두렁길이었다.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아침 이슬이 발끝에 차였다. 후르륵후르륵 벼메뚜기가 날았다. 짹, 찌기 찌기 찌기 찌기……짹, 찌기 찌기 찌기……, 여치가 한 마리 울고 있었다. 아무도 없고 혼자였다. 햇볕이 쨍쨍 뜨거웠다.
둑 아래 맑은 웅덩이에 붕어떼 노는 것이 보였다. 금붕어였다. 붉은 빛, 깜정빛, 무지개빛 열대어였다. 잡고 싶었다. 어릴 때 마음 그대로, 훌훌 벌거벗고 뛰어들어 모조리 훔켜서 잡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잡을까 잡을까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갑자기 붕어가 간 곳 없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호랑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마음이 언짢고 슬펐다. 그렇고나, 내가 지금 어릴 때 고향으로 낙향을 온 거지, 정말 그렇게 절실하게 실감이 나는 실감. 그 죽음의 도시 서울, 모든 것 다 버리고 영원히 이곳으로 낙향을 온 거지, 혼자서 엉엉 울면서 걸었다.
개구리가 한 마리 펄쩍펄쩍 뛰었다. 주먹만한 청개구리, 얼룩덜룩한 콩밭의 청개구리. 헐덕헐덕 당황하며 바로 내 발 앞을 가로질렀다. 이상했다. 다시보니, 새끼 뱀장어만한 독사가 한 마리 청개구리의 덜미를 깊숙히 물고 늘어져 있었다. 가엾어라 청개구리가 죽는구나 저렇게 먹혀서 죽는구나 하고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청개구리가 커다랗게 한 번 땅재주를 넘더니 큰 입 쩍 벌리고 독사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신났다. 햇볕이 쨍쨍 쬐이고 있었다.
저만치 동네가 하나 보였다. 둥치가 붉은 적송이 몇 그루 서 있고, 초가집이 네댓 집,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동네였다. 쓸쓸하고 슬펐다. 저기가 아마 옥이네 동네 저 집이 바로 옥이네 그 집, 쑤루룩 쑤루룩 가슴이 무너졌다. 어디 갔을까, 어디 갔을까, 그 눈동자 까만, 눈썹 까만, 희디 흰 살결의 어릴 때 옥이. 어릴 때 그 때처럼 훌적훌적 울었다. 옥이네 옛 동네는 비어 있었다.
가도 가도 풀밭, 아무도 없고 나 혼자뿐이었다. 쨍쨍 햇볕이 퍼붓고, 모든 것 다 버리고 온, 죽음의 도시 서울 영원히 영원히 아득하고, 띠리루루 띠리루루 낮 귀뚜라미 잊은 듯 다시 울고,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온 들 온 풀밭, 가도 가도 아무도 사람이라곤 없고, 사실은 어디로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주여 나 여기에 왔나이다. 여기에 홀로 있나이다. ―풀밭 빈 들 어릴 때 그 고향 그 논두렁……흑흑 느끼는데 이상했다.
아까 그 개구리 녹색 얼룩개구리가 펄적펄적 나타났다. 금테두리 두 눈, 금테두리 입, 금테두리 두꺼비처럼 불컥불컥 숨을 쉬며, 볼 동안에 크게 크게 온 몸뚱이가 부풀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어리, 주홍빛 거대한 입 쩍 벌리고, 놀라웠다. 하늘 중천의 햇덩어리, 주렁주렁 내려오는 금빛 열 개의 햇덩어리를 하나씩 늘름늘름 삼켜 버렸다. 온 들에 뒤떨어져 나만 혼자 서 있고, 대낮인데 어둠 펑펑 밤눈 펑펑 쌓였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푸른 하늘 아래 박두진
푸른 하늘 아래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어서 오너라.……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피닉스 박두진
피닉스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에서도,
아직은 숨어 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 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 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 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 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하나씩의 별 박두진
하나씩의 별
하나씩의 별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픔의 피로 지는
침묵(沈黙)들의 낙엽(落葉),
아무도 오늘을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더러는 서서 울고
더러는 이미 백골(白骨)
헛되이 희디 하얀 백일(百日)만
벌에 쬐는
하나씩의 순수(純粹)의 영겁(永劫)의
넋의 분노(憤怒)
벌판을 치달리던
맹수(猛獸)들의 살륙(殺戮),
그 턱의 뼈도 흐트러져
하얗게 울고 있다.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하지절 박두진
하지절(夏至節)
한나절 산중 첩첩 휘파람새 운다.
햇살 펑펑 쏟아지고,
칡넝쿨, 댕댕이 다래 넝쿨, 머루 넝쿨 칭칭 감고,
골짜기 푸섶에 떨어진 여름의 시 한 구절,
어려워서 외다 외다 뻐꾹새 그냥 날아가고,
그 휘파람새, 황금새도 와서 읽다 어려워 그냥 날아가고,
전라의 알몸뚱이
해죽해죽 달아나며 유혹하는 너
마구마구 쓰러뜨려 가슴 덮친다.
더덕냄새 박하냄새 암노루냄새 난다.
뭉개지는 젖과 땀, 이글대는 눈의 꿈,
아니, 바람냄새 출렁대는 바다냄새 난다.
미역냄새 홍합냄새 그 흡반냄새 난다.
몸뚱어리 몸뚱어리
배암 친친 굽이 틀고,
한나절내 산중 첩첩 꽃비 흥건하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항아리 박두진
항아리&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탁結居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해 박두진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 청만사, 1949
향현 박두진
향현(香峴)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山) 넘어 큰 산(山) 그 넘엇 산(山)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山), 묵중히 엎드린 산(山), 골 골이 장송(長松) 들어섰고, 머루 다랫넝쿨 바위엉서리에 얽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 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山)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구리 등(等)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山), 산(山), 산(山)들! 누거만년(累巨萬年) 너희들 침묵(沈黙)이 흠뻑 지리함직하매,
산(山)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 확 치밀어 오를 화염(火焰)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화비명 박두진
화비명(花碑銘)
하나씩의 꽃잎이 떨어질 때
두들기는 땅의 울림은 천둥이다.
하나씩의 꽃잎이 절벽에 부딪쳐 떨어질 때
먼 하늘의 별들도 하나씩
하늘가로 떨어지고,
떨어질 때 켜지는 별들의 빛난 등불
별들이 흘리는 은빛 피
떨어져나온 별들의 자욱에 새겨지는 푸른 이름
그것은 넋의 씨다.
떨어지는 꽃과 별
별과 꽃이 윙윙대는
날개의 불사조
죽어도 살아나는 불씨
죽여도 죽지 않는 승리
죽일수록 살아나는 영원한 불사조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흙과 바람 박두진
흙과 바람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 넣이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 사이
햇살 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 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 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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