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셨다
물론 엄격한 부분도 있으셨다 그건 거짓말, 화투치기, 형제간 싸움.....
으스름해지면 동네 집집마다 어머니들께서 저녁 지으시는 동안 서울이지만 동네아이들이 모두 골목에 나와 놀았다
구슬치기도 자치기도 하고.. 공기놀이도 오랫말도 하면서
야구 비슷한 공을 던지곤 굴뚝과 굴뚝울 집으며 한바퀴 돌아오는...(놀이 이름은 잊었다)...
아버지께선 퇴근하고 집에 오실때면 항상 우리들 먹일 간식 거리, 학용품등을 품에 안고 오셨다
동네 친구들에게도 나누어 주시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항상 잊지 않으셨다
우리들 공부도 가르쳐 주시고 놀아주셨다
공부하다 불이 나가면 성냥캐비에 불을 붙였다 꺼서 성냥알 빨간 불똥으로 허공에 글을 써서 알아 맞추기 내기도 같이 하셨고
우리가 더 어릴땐 말같이 업드려 등에 태우고 방을 기어 다니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무릎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업어주기도 많이 하셨다 밥도 따로 잡숫지 않고 동그란 원탁에서 뺑 둘러 앉이 다 같이 먹었다
얼마나 우릴 귀여워 해주시고 사랑하셨는지 발을 다 빠셨다 그러면 우린 깔깔데며 도망다니곤 했었지..
아버진 정계에 계시다 환멸?(적응을 못하신것?) 을 느끼셔서 그만 두시고 학계로 오셨다
6.25 전. 입학전
난 언니와 오빠 하고 아버지가 계신 동숭동 법대 마당에 말판을 그려놓고 오랫말하며 기다리던 생각이 난다
몇차례 하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활짝 웃으시며 나와 우릴 데리고 맛있는 음식을 사 주신곤 화신백화점으로 가서
무엇을 샀는진 기억이 잘 안나지만 갖고 싶은걸 골르라 하신곤 사주셨던 것 같다
훅하면 법대 마당에 가서 놀았던 생각이 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사주실때마다 가슴속에서 하얀 편지 봉투를 꺼내서 돈을 지불하시는 것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봉급날이면 우릴 부르셨던것 같다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다 언제부턴지 ...그 행복한 행사가 없어졌다 그리곤 얼마지나지 않은 어느날 국교 입학하고 몇달되지 않아
전쟁이 난 것이다 6.25사변...
혼란의 시대...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부산에 가셨던 때라 친척들이 트럭을 갖고와 부산으로 가자고 할때 아버지 기다리느라 못 가서 1.4후퇴때
꽁꽁 언 한강을 빠질까 두려워 하며 아버지 손을 꼭 잡고 건너 경기도 광주밖에 못 내려 갔다
공산군과 국군이 번갈아 가며 우리가 문간 방 하나 얻어 기거하는 곳에 들이 닥쳣었다
공산군이 올대면 방에서 숨소리도 내지않고 모여 앉아 있었다
우린 남들보다 일찍 한강을 작은 나루배를 타고 건너 집으로 았다
집안은 군화 발로 다녀 엉망이었다 옆집은 문틈으로 들여다 보니 마당에 풀이 잔뜩자라있었다
옆집은 마굿간으로 썼대고 다행이 우리집은 사무실로 쓴것 같다고 하셨다
시험보고 입학했던 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상급생 언니들이 그렇게 귀여워 해주던 학교엔 멀다고 못가고 (성동역(분교)에 있던 예쁜 꽃밭이 가운데
크게 있던 아름다운 학교는 폐쇠되어 을지로6가(본교)로 다녀야 했으므로) 가까운 학교로 다니게 되었다
2학년 2학기인것 같다
학교엔 거미줄로 얼켜있고 책 걸상이 어즈러히 있는 교실이 많았고 .. 띄엄 뛰엄 학생이 있는 교실엔
반 정도의 아이들은 우동집의자(그 당시엔 그렇게 말했다)를 책상삼아 쓰고 반은 바닥에 업드려
모래알로 만든것 같이 커칠은 심이박힌 연필로 칠판에 써 주신 글을 공책(그 당시엔 변변한 공책이 없고 인쇄한 종이 뒤편을
공책삼아)에 썼다 앞의 아이 엉덩이에 꼭 붙어서..
난 큰 언니가 한전에 다녀 거기서 갖다주는 인쇄 안되있는 통신 뒤쪽을 공책으로 사용했다
세월이 가며 한 학년씩 올라 갈때마다 거미줄 교실들은 하나 둘씩 말끔이 청소 되어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로 점점 늘어났다
운동회도 하게 되었다 내가 5학년? 때인가 운동회에서 우리학년이 단체로 무용을 했는데 그때의 노래 앞 구절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포 소리 사라진 거칠은 벌판
불어오는 바람조차 쓸쓸한 전선
붉은 피로 물들인 산천초목도...
백의의 용사들 우러러본다...
멸공의....
.....'
업드려 공부하던 아이들은 우동집의자로 우동집의자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은 책상으로...
나날이 발전해 나갔다
내가 6학년이 되던때는 살펴보진 않았지만 빈 교실이 거의 없어진것 같았다
학생수도 많아져 조회땐 운동장에 학생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시험보고 들어 간 중학생이 된 어느날
아버지 학교를 나 혼자 간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니 중학생된 나를 축하해 주고 싶으셨던것 같다 그땐 왜 그리 아무 생각이 없었던지...
운동장벤취에 앉아 있으니 아버지께서 학교건물에서 나오시며 날 보더니 또 활짝 웃으셨다
그리곤 신세계백화점 지하(?) 식당가로 데리고 가서 양식집에 들어가셨다
아버지께서 무얼 먹겠냐고 물으셨다 난 메뉴판을 한참보다 '하이라이스'라고 했다
처음보는 이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돈까스를 시키신것 같다
아버진 그날도 하얀편지 봉투를 양복 상의 가슴속에서 꺼내어 음식을 시키곤 옆에 서 기다리던 사람에서 음식값을 지불하셨다
하얀 봉투.. 학교 가기전 꼬마가 아닌 중학교 1학년인 그때의 내겐 그 봉투가 커 보였고 봉투의 무게도 느껴졌다
순간 아버지한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가 크게 보였다
지금도 신세계식당에서 어린 딸에게 밥 사주시며 좋아 하셨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른거린다
아빠~~~~~~~~~존경합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