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다
한 동선
잠든 듯, 죽은 듯이 요양원의 일상이거늘 방금 깨운 티가 역력하다. 반쯤 감은 눈 형광등 빛이 부담스러운가 보다. 게슴츠레 찡그리시며 연신 눈을 껌벅껌벅 한다. “할머니 질녀래요” 간호 보호사가 말을 전해준다. “응? 누구? 우리 동선이가? 고맙데이 이실아”라며 울먹이신다.
큰 어머니는 슬하에 딸이 없다. 나를 딸처럼 대해 주셨기에 찾는 이 자주 없어 찐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명절 때나 어버이날, 고향 가는 길에 잠시 들러보고 하였는데 코로나나 이것마저 막아버렸다. 지난 한가위 때 비대면으로 뵙고 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백 세를 코앞에 두었으니 외로움을 가중하리라. 가끔 드리는 영상 통화 땐 반가워 어찌할 줄 모른다.
나 역시, 세월의 나이테가 이순을 훌쩍 감았다. 고향 요양병원에 계시는 큰어머니에게는 내가 보호자로 되어 있다. 병원 계실 때나 요양 병동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에게 연락이 온다.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 고속도로를 오고 간 세월이 강산이 몇 번 바뀌었다. 친정어머니와 이별한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다. 홀로 계시는 아버지께 가끔 반찬도 해 드려야 하고 병원에도 모시고 다녀야 한다. 보살핌이 많아지는 노령의 91세다. 백수의 큰어머니께 잘해 드리진 못했지만 이제 마음의 부담이 온다. 프랑스에서 목회활동을 하는 큰집 둘째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만 바라보며 사셨는데 큰어머니가 한이 많아 눈을 감지 못하시는 같다. 돌아가시기 전 작은아들 얼굴이라도 마주해야 반 푼의 한이라도 풀 기회를 드리지 않겠나? 그래야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많은 고생을 하시는 것 같으니 하루빨리 귀국하여 큰오빠와 큰어머니를 보호하라”고 전했다. 오빠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고 팔리면 한국으로 거처를 옮기겠다. 하였는데 코로나19가 지구를 강타하였으니 모자의 상봉은 더 어려워졌다.
의논한 지 이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영상 통화에서만 볼 수 있는 큰어머니의 모습에서 인생무상 아픔이 스마트 폰 화면 가득 넘어온다. 오빠는 하느님 말씀을 카톡으로 자주 보내주곤 하는데 종교가 다른 나에겐 별 감흥이 없다. 큰어머니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 고민에 고민이 보태지며 끄적거려 본 글을 가끔 보내주곤 하면, 오빠는 내가 보낸 글에 곡을 붙여 찬송가를 만들어 보내왔다. “이 곡이 누구인가에는 위로가 되길 소망하면서 기도한다.”라는 말과 함께, 내가 생각한 의도가 허공에서 맴돈다. 생각의 차이는 달랐다. 나는 당장 해결 해 보려 하려다 너무 성급한 것 같았고 오빠는 그쪽의 어려운 사정으로 마음만 아프게 한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고향에 있는 큰집 큰오빠에게서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또 무슨 일이 발생 한 것이 분명했다. 통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것 뻔히 알면서도 전화를 받았다. 예외는 없었다. 화면상 큰오빠는 무슨 말을 하는데 말귀를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뜻을 짐작하건대 보일러가 고장인 듯하다. ‘오빠 보일러 수리공 보낼게요.’를 입 모양을 크게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가 어두우니 내가 하는 얘기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본인 할 말만 계속 되풀이 한다. 보청기를 하고 전화하라고 양 손가락을 귀에 대며 입 모양을 크게 해도 소용없다.
6.25 전쟁이 끝이 났다. 사회주의를 동경한 큰아버지는 산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 눈을 피해 가끔 집으로 돌아왔다. 정적만이 흐르는 어느 날 가족은 생쥐가 된 마냥 고양이 같은 감시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대문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숨소리마저 줄였다. 큰아버지는 “나는 남한에 있으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을 면치 못한다. 목숨 부지하려면 이북으로 가야 하니 시국이 안정되면 돌아오겠다. 부모님과 자식 잘 부탁한다.”라며 당부하고 쫓기듯 고향을 떠나갔다.
큰아버지가 없는 집에는 적막만이 돌았다. 고양이처럼 불쑥불쑥 집을 드나드는 순경의 눈초리는 무섭고 두려웠다. 큰어머니와 할머니는 수시로 지서에 출두하여 갖은 고문을 당했다. 그 시절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었겠느냐마는 나의 아버지도 경찰서로 불려가 엄포 섞인 조사, 넘겨짚기, 대질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죄인이 되어버린 죄인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시키는 일은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보조 경찰이 되었다. 남한 사상과 다른 사람(빨갱이)들을 찾으러 다녔다. 큰오빠는 4살이었고 작은 오빠는 큰어머니가 임신한 몸이었으니 태어나지 않은 때였다.
큰어머니는 아들 둘 키우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똘망똘망하게 잘 커 가던 큰아들이 갑자기 열병으로 경기가 났다. 십리 길을 한달음으로 달려가 의원에게 보였지만 병의 후유증은 너무나 컸다. 글을 잘 읽고 그림도 잘 그렸다는데 열병이 지나간 자리에는 귀로 소리를 듣지 못했다, 들을 수가 없으니 성장이 또래 아이들보다 뒤처졌다. 기막힌 운명 속에서도 작은아들의 공부 수준은 언제나 전교 1등이었다.
세월은 흘러 작은 오빠가 대학에 갈 무렵이었다. 법대를 지망하려고 서울로 올라갔다. 큰아버지의 이념이 또 아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 시절 공무원이 되려면 가족뿐만이 아니고 사돈의 팔촌까지도 조사받던 시절이었다. 작은오빠의 법대 입학 희망은 무참히 꺾어졌다. 신학 대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결혼하여 목사가 되어 프랑스로 목회 활동을 떠난 지 어언 40년이 넘어간 세월이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다녀간 것이 전부이니 큰어머니는 남편을 보내듯 작은아들도 먼 이국으로 운명인 듯 그렇게 떠나보냈다.
남북 이산가족 만남이 있었다. 북에서 큰어머니의 남동생이 고향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한으로 왔다. 이북으로 가기 전 큰어머니의 동생은 대학생 신분이었다. 북에서 김일성대학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고 했다. 큰어머니는 동생을 통해 남편 소식을 듣기 위한 희망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서울 어느 호텔에서 가족의 상봉은 기쁨의 눈물이 바다를 이루고 한 많은 얘기는 끝날 줄 몰랐다. 큰어머니의 동생은 북으로 갈 임시 큰아버지를 한 번 만났지만 북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의 일행들과 다른 행보를 하였다고 했다. 북에서 큰아버지를 찾아보았지만 만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토로하며 상봉의 기쁨도 잠시, 다시 이별의 시간이 왔다. 헤어지는 날, 큰어머니는 남동생에게 다시 한 번 남편을 찾아봐 달라고 애원하며 이별을 고했다.
연명도 삶이다. 작은 창에서 계절을 읽는다, 꽃 피어 향기 날리면 봄, 녹음 우거지니 여름이라, 낙엽 지니 어느 듯 가을, 벌거숭이 나무에 눈 내리면 겨울, 느낌으로 짐작하며 누워 감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앙상한 가지 새움 터는 기억으로 주름진 인생노트 펼쳐 놓고 울고 웃으며 지나간 세월을 다시 산다. 찬송가 부르면서 남편을 기다린다. 아들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