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일선)김씨(善山(一善)金氏)의 시조(始祖)이신 순충공 휘 선궁(順忠公 諱 宣弓)(904-946)은 고려개국(高麗建國)의 정란보국 벽상공신 문하시중(靖難輔國 壁上功臣 門下侍中)이다. 처음 이름은 선(宣)이고, 善山(一善)金氏 시조(始祖)이니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7대손으로서 일선군사(一善郡事) 체의(體誼)의 아들이며, 대각간 추봉 예흥왕 민선(大角干 追封 睿興王 敏善)의 손자요, 상대등 안(上大等 安)의 증손으로 일선군(一善郡)에서 태어났다.
효공왕(孝恭王) 2년(898), 궁예(弓裔)는 신라의 패서도(浿西道), 한산주(漢山州)의 30여 성을 빼앗고, 8년에는 마진국(摩震國)을 세워 개성에 도읍한 다음 패강도(浿江道) 10주(州)를 차지하였다. 진성여왕(眞聖女王) 6년(892), 완산(完山)에다 도읍하고 일어난 후백제 견훤(後百濟 甄萱)은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고, 효공왕(孝恭王) 11년(907) 일선군(一善郡)에 들어와 10여 성을 공격하는 등 신라의 국운은 날로 쇠퇴하고 있었다.
이렇게 혼란한 때를 맞아 시조공의 부친 체의(體誼)가 견훤군(甄萱軍)에게 상해(傷害)를 당하니 그 때 시조공은 어린 나이로 졸지에 부친을 잃게 되었다. 시조공(始祖公)은 신라의 왕손(王孫) 으로서 국운의 쇠망과 더불어 부친마저 잃은 고아로서 절치부심(切齒腐心) 부친의 원수를 갚고 신라의 왕정(王政)을 흥복시키고자 어려서부터 화랑도(花郞道)에 입신하여 심신을 수련하였다. 그 후 공(公)은 사사로운 일보다 국가를 앞세워 당시 관아를 지을 터가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사는 집(현재의 군청사)을 청사로 국가에 바쳤다. 이어 公이 일선리(一善吏)에 재임중 마침내 고려 왕건 태조(高麗 王建 太祖)께서 후백제(後百濟) 정벌차(征伐次) 숭선(선산)(嵩善(善山))에 머물면서 장사(壯士)를 모집(募集)하니 공(公)이 신라왕손(新羅王孫)으로서 자원 종군(自願 從軍)하여 단번에 큰 공(功)을 세워 명장(名將)이 되었다. 公의 연세(年歲)가 당시 15세(十五歲)였다. 태조(太祖)께서 크게 기뻐하여 어궁 (御弓)을 하사 하므로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사명(賜名)하였다.
그 후 후백제 견훤과 싸워 대승하므로 마침내 삼한통합에 큰 공을 세우고 고려 개국을 익찬(翊贊)한 공으로 태조 원년(918), 통합공신(統合功臣)에 책봉(冊封)되고, 후삼국 통합 후 태조 19년(936), 삼한통합 익찬공신(三韓統合 翊贊功臣)에 책봉(冊封)되었다. 946년 公이 별세함에 정종(定宗)이 대승(大丞)을 증직하고 순충(順忠)이라 시호(諡號)하였다.
문종(文宗) 8년(1054) 12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하고 선산백(일선백)(善山伯(一善伯))을 추봉(追封)하였으므로 一善이 관향(貫鄕)이 되었다. 또 충렬왕 34년(1308), 문산계(文散階)를 제정한 후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추증(追贈)하였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公의 덕(德)과 의(義)를 칭송하여 진민사(鎭民祠)(비봉산 아래)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시조공(始祖公)의 벼슬은 고려개국 벽상공신 문하시중(高麗建國 壁上功臣 門下侍中)의 관직을 지냈고 고려조의 원훈(元勳)으로 일선백(一善伯)에 봉록되어 공신전을 받았다. 3대 정종원년(定宗元年)(946)에 시호(諡號)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는데 시호를 내린 교지(敎旨)의 사제문 내용은 계림고적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라의 국법은 상벌을 가장 중히 여기나니 공이 많은 자는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이를 보답하고 죄를 범한자는 엄한 법으로 다스린다. 전시 중에 선궁(宣弓)은 그의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고 그 충성된 마음은 일찍이 나라를 받들어 일월(日月)과 같이 빛나도다. 살아서는 나라를 위하여 밝은 정치를 베풀었고 죽은 후는 그 공훈에 더욱 빛나 청사에 길이 남는도다. 이제 다시 벼슬과 시호를 내리노니 영혼이 있으면 나의 뜻을 알지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公의 공훈(功勳)에 대한 나라의 보답이 융숭하였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실로 문식(文識)을 겸전하고 충절(忠節)을 다한 위인(爲人)으로 출장입상하여 어린 나이로 태조(太祖)를 도와 오백년 왕업의 초석을 이루는데 충성을 다하였다. 시조공(始祖公)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봉술(長子 奉術)은 습작(襲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시호(諡號)는 장절공(壯節公)이고, 차자 봉문(次子 奉文)은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환향(還鄕)하여 선주리(善州吏)가 되었다. 公의 후손중(後孫中) 명석(名碩)이 배출(輩出)되어 절의(節義), 문장(文章), 덕업(德業)등 공적(功蹟)이 크게 빛났으니 이로 미루어 많은 경사(慶事)가 쌓임을 알 수 있다. 순충공 휘 선궁(順忠公 諱 宣弓)은 우리 善山(一善)金氏의 시조로 선산 해평 미석산(善山 海平 彌石山)에는 公이 돌아가신지 천년(千年)이 지난 지금(只今)도 향화(香火)를 받드는 묘소(墓所)가 있고 公이 성장(成長)하신 곳 선산 비봉산(善山 飛鳳山) 아래 봉하루지(鳳下樓址)와 진민사지(鎭民祠址)가 남아 있으며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있다.
【문헌】 고려사, 동사, 김종직편이존록, 조선금석총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
【文獻】高麗史, 東史, 金宗直編彛尊錄, 朝鮮金石總覽, 新增東國與地勝覽, 增補文獻備考
(대종회 홈 시조님 유래 옮김)
(경북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466번지 소재 시조 선궁 할아버지 산소 바로 아래 위치한 미석제 전경) 해마다 시제 때면 전국의 종인들이 모여 시제를 준비를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