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대 : 1417(태종17)∼1456(세조2)
유허비 : 대전 동구 가양동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충신으로 잘 알려진 박팽년은
대전광역시 가양동(더퍼리)에 그가 살던 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내력을 적은 비문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동춘 송준길(同春 宋浚吉)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충청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썼다.
박팽년의 자는 인수(仁 )요,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順天)인데,
대사헌 박중림(大司憲 朴仲林)의 아들이다.
평소 거문고 타기를 즐겨해서 자칭 '취금헌'이라고 호를 지었다 한다.
1434년(세종16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여러가지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世宗)의 유명을 받아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문종(文宗)을 보필하였는데, 왕이 재위 2년만에 돌아갈 때
역시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端宗)을 돕게 되었다.
단종 즉위년(1455) 왕의 삼촌이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선위(禪位)를 받자
팽년이 나라 일이 잘 되나가지 못 할 것을 알고, 경회루(慶會樓)에 몸을 던져
자결하려고 함에 삼문(三問)이 극력 제지하기를
「지금 보위(寶位)는 옮겼으나 상왕(上王)께서 아직 계시니 우리들이 죽지 않는 한,
오히려 일을 꾸밀 수 있으니 일을 하다 안되어서 죽는 것은 늦지 않으니
오늘의 죽음은 국가에 도움이 못된다」
하매 팽년(彭年)이 이에 따라 성삼문 등과 비밀리에 모의하다가
얼마 후에 충청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충청관찰사로 있으면서 세조(世祖)에게 보고할 때에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다만 관직과 성명만을 쓸 뿐이었으나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이듬해 들어가서 형조참판이 되어 성삼문과 그의 부친 성승(成勝), 유응부(兪應孚),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김질(金 ),
상왕의 외숙인 권자신(權自愼) 등으로 상왕의 복위를 꾀하였는데,
그 때 명(明)나라 사신이 마침 태평관에 유숙하고 있었을 때였다.
세조는 상왕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청해서 창덕궁에서 연희를 베풀려고 했는데,
성삼문과 박팽년이 서로 모의하기를 「이날 성승과 유응부가 별운검(別雲劒)으로
연희하는 자리에 입시(入侍)하게 되어 있으니 이것을 기회로 거사(擧事)하여
성문을 닫고 세조의 일당을 숙청하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유응부가 말하기를 왕과 세자는 내가 맡을 것이니 나머지는 자네들이 처치하라」
고하였다.
이와 같이 계획이 결정되었는데,
그날은 마침 왕명으로 운검(雲劒)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세자로 병으로 따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응부는 오히려 거사하려고 하매 성삼문이 굳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는데 운검을 쓰지 않은 것은 하늘의 도움이다.
만약 이때에 거사했다가 세자가 변보를 듣고 경복궁에서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성패는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을 기다림이 옳다」고 하였다.
유응부는 「일은 신속해야 되는 것이니 만약 늦추었다가는 비밀이 누설되기 쉽다.
세자가 안와도 그 일당이 모두 여기 있으니 오늘 모조리 죽이어서 상왕을 위로하고
무사를 호령하여 저 곳에 가서 세자를 제거할 것이니 천년에 한번 있는 기회라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박팽년과 성삼문은 「만전의 계교가 아니다」하여 드디어 중지하니 같이 모의했던
김질(金?)이 일이 안될줄을 알고, 달아나서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모의하기를
「오늘 세자가 불참한 것과 운검을 제외한 것과 박팽년과 삼문등이 일을 중지한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다.
먼저 이 사실을 고발해서 요행이 살 도리를 찾는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달려가서 고변하기를 「신은 실로 알지 못하고 김질이 홀로 참여했으니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왕이 김질과 정창손을 특사하고 박팽년 등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나
그 재주를 특별히 사랑해서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네가 마음을 돌려 나에게로 돌아와서 이번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숨긴다면
살려 주리라」 하였다.
박팽년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왕을 진사(進賜)라고 부르니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입을 무찌르며 「네가 이미 나에게 신(臣)이라 칭해놓고
지금와서 칭신(稱臣)하지 않는다는 말이냐?」고 호통을 쳤다.
박팽년은 대답하기를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진사(進賜)의 신하는 아니다.
일찍이 충청감사로 일년동안 있을 때 진사께 올린 계목(啓目)에 칭신한 일이 없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계목을 조사해 보니 과연 신(臣)자가 없었다.
그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이 모두 사형을 당하고 아내는 관비(官婢)가 되어
절개를 지켜 몸을 깨끗이 마쳤다.
헌(憲)은 생원에 합격하였고, 또한 정직하여 처형을 당할 때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난신(亂臣)이라고 말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癸酉年)에 죽은 사람들과는 다르다」 하였다.
김명중(金命重)이 그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서 사사로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호하여 이런 화를 당하는고」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마음속이 불편하여 아니할 수 없다」 하였다.
나의 장인 윤훈(尹?)이 일찍이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놀았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성공은 농담을 잘하고 방랑(旅浪)하여 담소를 잘하며
앉고 눕는 것이 절도가 없어서 외면으로 봐서는 지조가 없는 것 같으나
내심은 확고부동한 바가 있어서 빼앗을 수 없는 굳은 지조가 있었고,
박공은 종일토록 단정하게 않아 의관을 풀지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충경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하더라, 」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부중(府中)에서 연희가 있었는데,
박팽년이 시(詩)하기를 「묘당(廟堂) 깊은 곳에 슬픈 가락 울리노라.
모든일 지금 와선 모두가 알 수 없다.
버들은 푸르렀는데 실바람 불어오고, 꽃은 활짝 밝게 피었는데
봄날은 더디구나. 선왕의 큰 사업은 금(金)궤에서 뽑아냈고,
성주(聖主)의 넓은 은혜 옥(玉)술잔을 기울였네. 즐기지 않고 무엇하리오.
어찌 깊이 즐기지 않겠는가?
노래하고 취하고 배부르게 태평시대 누리리라.」
광묘(光廟, 즉 세조)가 칭찬하며 부중(府中)의 벽상에 걸어 놓도록 하였다.
공은 침착하고 과묵하였으며 소학(小學)으로 몸을 단속하고
문장은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맑았으며, 글씨는 종왕(鍾王)을 본받았다.
태사(太史)가 논하기를 「누구기로 신하 아니리오만 지극하다.
6신(六臣)의 신하됨이며. 누구나 죽음 있을 것이나 위대하라
육신의 죽임이여 ! 살아서는 임금을 사랑하며 신하의 도리 다하고
죽어서는 임금에 충성하여 신하로서의 절개를 세워서
충분(忠憤)이 백일(白日)을 꿰들어 의기가 추상처럼 늠름하여
백세에 남의 신하된 사람으로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여
의는 천금처럼 무겁고 목숨은 털끝처럼 가볍게 여겨 인(仁)을 이루고
의 (義)에 나아갔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殷) 나라에 삼인(三仁)이 있고,
동국(東國)에 육신이 있나니 자취는 비록 다르나 도(道)는 같다 하였으니
참 거룩한 일이시다.
삼가 생각컨대 혜장대왕(蕙莊大王, 즉 세조)이 황각(黃閣, 즉 정승)에 있을 때
공로는 주공(周公)에 비길만하였고 왕위에 오르셔서 덕이 순(舜)임금과 같아서
높고 넓으심이 말로 형용할 수 없으신데 육신이 복종 않으신들 무슨 루(累)가 되겠는고.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캤으나 주공의 덕이 떨어지지 않고
엄광(嚴光)이 동강(桐江)에서 낚시질했으나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의 공덕에
손상이 없으니, 아 !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같은 붉은 마음으로 흰머리가 되도록
강호(江湖)에 목숨을 보전해있었다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광묘(세조)의 정치도 더욱 융성하였을 것을 불행히도 중심에 격동한 바 있어서
드디어 불타는 벌판에 뛰어 들어갔으니 슬프도다.
삼가 조사(吊辭)를 짓기를「모진 바람이 처음 그칠 때에 모든 구멍이 모두 막히더라.
교교(皎皎)한 저 소나무 홀로 푸르구나.
신이 가진 뼈가 임금을 사랑하여 백골이 되었나니 머리는 꺾을지언정 절개는 못 굽히리라.
남이 주는 녹(祿)은 죽을지언정 한톨도 않먹으니 고죽(孤竹,
즉 백이 숙제의 절개를 말함)의 맑은 바람이요. 시상(柴桑, 즉 陶淵明을 가르킴)의
밝은 달이라. 땅 속에 귀신 있다면 한줌 원통한 피 있을 뿐이다. 아!」
박팽년의 묘(墓)는 성삼문(成三問), 유응부(論應孚), 이개(李塏)의 묘와 함께
현대 노량진(鷺梁津)사육신 공원묘지에 있다.
사육신(死六臣) 가운데 박팽년 선생만이 오직 혈손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력(來歷)인즉 다음과 같다.
그 당시 역적모의를 한 자에게는 삼족(三族,
즉 친가, 외가, 처가)을 멸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육신의 삼족은 모두 처형을 당했다.
그런데 박팽년의 둘째 아들인 순(珣)도 아버지에 대한 연좌(連坐)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아내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자원해서
대구관(大邱官)에 예속(隸屬)되었다.
이 곳이 친정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복(遣腹)이 있었는데 당시 조정의 명령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연좌(連坐)하고, 딸아이를 낳으면 관청의 비(婢)가 되는 법인데
마침 부인은 아들을 낳고, 종(婢)은 딸을 낳자 서로 바꾸어서 길렀다.
그러다가 1472년(성종3년) 공이 17세 때 진사공(進士公,
즉 박팽년 둘째 아들, 이름은 일산(一珊)의 동서인, 좌의정 이극균(李克均)이
본도 감사(監司)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 때 공을 불러 상면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성장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숨어서 기피하지는 못할 것이니 자수하라고 권하여
상경해서 조정에 자수케 했다.
이에 조정에 의해서 특명으로 사면되었다.
1831년(순조원년)에 진사공과 함께 정려(旌閭)의 특전을 받았다.
일산(一珊)이라고 하는 이름도 바다속에 있는 한 개의 산호와 같다고 해서
성종대왕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한다.
세간에는 종의 딸을 바꾸어 길은 것을 잘못 전해서 바꾸어 연좌하게 하였다고
전하나 박씨 가문의 전해 내려오는 채기나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어
바꾸어 길렀다고 하는 말이 옳은 듯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현재 대전시 대흥동에서 성화한의원(星華漢醫院)을
개원하고 있는
공의 17대손 영(한의학박사, 원광대학교 교수)박사가 입증해 주고 있다.
《자료 : 대덕군지, 대덕군지편찬위원회,
1979. 순천박씨 충정공파세보, 1.2권, 순천박씨 충정공파보소,
1984. 12. 국조보감, 장능지(莊陵誌)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실록,
해동명신록, 여지도서(輿地圖書,〔회덕〕》
♬배경음악: 없음♬
첫댓글 훌륭하신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