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토지면 구만들이 유명해진 것은 유이주란 사람이 1776년 오미동에 집을 짓기시작하면서부터이다.
당시는 집짓기에 마땅하지 않게 여겨 돌밭으로 남아 있던 땅을 일궈 집터를 닦았다.
그때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금구몰니(金龜沒泥)의 상징이다.
CSI보다는 X파일의 성향이 더 강했던 시절땅에서 나온 돌 거북은 분명 영물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정밀 감정을 하겠지만 불행하게도 CSI 시즌이 시작되기 전인 1989년에 도난당했다. 틀림없이 어느 신흥 대갓집 구중심처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역시 대부분의 경우 X파일과 CSI적 상황은 견우와 직녀 그것과 비슷하다.
유이주(柳爾胄 1726~1797)가 자리 잡은 집터는 지금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다. 기록에는 건평이 710평이라고 했는데 담장 안을 말하는 듯 하다.
대략 원형 당시 건평으로만 200평 정도였을 것이다.
흔히들 아흔 아홉 칸이라고 하지만 지을 당시에는 78칸이었다. 운조루(雲鳥樓)란 정확하게는 이 집 큰사랑채의 한쪽 누마루의 이름이었다. 1968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8호가 되었다.
오미동 들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솟을대문은 당시 유이주의 기세를 상징하듯 힘차다.
대문 오른편 행랑채 담벼락에 붙어 있는 것은 입장료 안내판이다.
운조루는 입장료가 있다. 어른은 1,000원이다.
바라보고 오른편으로 구례군에서 세운 중요민속자료 제 8호에 대한 사인물이다. 요금표는 남루하여 당당하지 못하고 안내 사인물은 그 형식이 조잡하여 없는 것만 못하다. 그저 이런 구조물에 대한 설명과 기타 등등은 조용히 없는 듯 있는 것이 최선이다. 깔끔한 인쇄물이 구비되어 있다면 좋을 듯 하다.
간혹 입장료에 대한 불만도 있는 모양인데 그것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받는 형식의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뒤에서 운조루 공개 및 보존 문제를 거론할 때 함께 다룰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개는 입구와 주변에 머문다. 나이는 집주인도 모른다. 연전에 도시에서 구경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간 개다. 운조루 주인장의 설명은 간명했다.
"밥 주니까 계속 남아 있네."
유이주는 처음 이사 와서 살았던 구만들의 이름을 본떠 귀만(歸晩)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의 집은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
점(占)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여러 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방마다 당호와 별칭이 붙어 있었지만 지금은 현판을 전부 철거한 상태라 최초의 상태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포괄적으로 운조루(雲鳥樓)라 한다. '삼수공'은 후손들이 유이주를 칭할 때 자주 사용하는 별칭이다. 雲鳥樓란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 이란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따온 글귀라고 하나 굳이 인용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호랑이 뼈다. 아닐 수도 있다. 원래는 저 솟을장식마다 뼈가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도둑이 들고 갔다. 유이주는 문경새재에서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은 장사로 알려져 있었다. 도둑맞은 이후 말머리 뼈로 대신하고 있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호랑이 뼈가 맞는다고 말씀하신다.
운조루 주인장은 이장의 '동네 아는 형님'인 탓에 좀 편하게 물었다.
"에이 형님, 도둑맞고 말뼈 걸어 둔 것이라고 책에 나와 있는데." "아니여, 호랭이 뼈 맞다니깐." "소문내면 또 도둑놈들 오겠네." "하하하. 몇 년 전에도 애 못 가지는 젊은 아주머니가 와서 하도 사정을 해서 쬐끔 갈아줬어. 그라고 그 아주머니 아들 낳았다고 기별도 왔어."
육안으로 개 뼈와 사람 뼈도 구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뼈인지 말 뼈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그 진위 여부가 지금에서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뼈나 살아 있는 놈이나 지금은 이 땅에서 당최 볼 수 없는 조선호랑이 흔적이 저 자리에 걸려 있어
집 안으로 들어오려는 나쁜 기운을 물리쳤다는 오래 된 팩트만으로 충분한 것 아닌가.
그래 나는 그냥 호랑이 뼈로 믿기로 했다.
"형님, 호랑이 뼈 같어. 냄새가 나." "하하. 들어가서 술 한 잔 할래." "형님, 저 술 못합니다." "그래… 그럼 맥주 한잔 할래?"
운조루를 내려다보면 이러한 모습이다. 통상 아흔 아홉 칸이란 궁궐 밖에서 누릴 수 있는 세도가를 상징하는 숫자일 것이다. 혹시 아직 1칸을 방 하나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옥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가 한 칸이다. 단위로서 한 칸은 아홉 자를 뜻한다.
한자가 대략 30cm이다. 얼마 전에 사라진 단위 한 평은 여섯 자이니 한 칸보다는 적은 치수다.
그래서 아흔 아홉 칸으로 알고 왔는데 실제 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작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근거 없는 전설을 만들기도 한 모양이다. 조선시대 대군들이 지을 수 있는 칸수는 60칸인데 99칸짜리 집을 지은 탓으로
흑심이 있는 것이라는 오해를 받아 유이주가 귀향을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유배되었고 다시 정권의 부름을 받은 이후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여하튼 운조루는 큰집이다. 710평이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빌딩 짓고 세상에서 제일 넓은 테마파크 짓기 시합이 예사로 벌어지는 시절을 기준으로 할 수는 없다.
집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행랑채가 펼쳐진다.
보통 두세 칸 정도의 행랑채가 흔한데 이 집은 이른바 줄행랑이다.
집을 지을 당시 운조루는 78칸이었다.
그랬던 원형이 화재로 인해 줄행랑채(5칸) 안사랑(4칸) 남쪽행랑(4칸) 서쪽협랑(3칸)
중외사채(3칸) 아랫와사채(4칸) 협문과 중문(2칸)을 잃었다.
지금 보다 시각적으로 훨씬 잘 짜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다시 복구하고 손질했지만 한번 타버린 것을 완전하게 복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남아 있는 칸수는 모두 73칸이고 차지하고 있는 건물의 평수는 129평이다. 최근엔 이 행랑 입구에서 밤을 골라내는 일을 하느라 모든 식구들이 분주했다. 사람이 살고 큰 농사를 짓다 보니 집 안엔 항상 살림 흔적이 많다.
담장의 길이가 동서로 165자, 남북으로 156자이니 이것이 710평이라는 대목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거의 정사각형의 울안으로 역으로 占자 모양의 집이 오미동 들판으로 향하고 있다. 대략 안채, 사랑채, 행랑채, 제실로 나눈다.
사랑채는 큰사랑과 아랫사랑으로 나뉘는데 큰사랑이 운조루에 해당한다.
집주인은 큰 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이했고 중요한 손님은 큰 사랑채에 재웠다.
행랑은 처음 지을 당시에는 대문을 좌우로 각 12칸씩이었으나 지금은 동쪽 11칸, 서쪽 7칸이 남아 있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다. 집주인이 보여준다는 것을 사양했다. 보면 촬영할 것이고 촬영하면 이곳에 올릴 것이니 그렇게까지 유난을 떨 일은 아니다 싶었다. 옛날에는 신문(神門)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종묘, 문묘, 향교 등에는 신이 드나드는 문이 있는데 이것을 신문이라 한다.
보통 세 칸으로 만드는데 세 칸 중 가운데가 신이 드나드는 문이며 양쪽 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다.
지난 봄 구례향교 춘계대제 때 가운데 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꾸지람 듣는 모습을 보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아랫사랑을 먼저 만나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랫사랑의 돌출 모습이 배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랫사랑은 큰사랑채인 운조루에 잇대어 ㄱ 자형으로 대문 쪽으로 뻗어 있고 이곳에도 누마루가 있다. 귀래정(歸來停)이라 한다. 농월헌(弄月軒)이라고도 불렀다는데 현판을 찾는다고 두리번거리다가 포기했다. 작은 며느님에게 물어보니 모두 보관해 두었단다. 이 역시 극성스러웠던 도둑놈들 때문일 것이다. 운조루를 완공한 것이 1782년이니 225년 동안 아랫사랑채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들의 건재함이 감사하다.
큰사랑채로 오르는 입구다. 이 집의 가장 대표적인 뷰포인터다. 유이주가 무관 출신이라 그런지 이 집의 배치는 스케일 있는 편이며 좀 완강한 느낌이다. 유이주는 성을 쌓는 일을 관리 감독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다.
건축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명확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준다.
마당을 둘러 싼 행랑채와 아랫사랑, 큰사랑의 배치 그리고 안채의 구성이 다른 한옥에 비해
방어적 개념이 많이 적용된 집이란 느낌은 나 혼자 만의 소감일 수도 있다. 올려다보면 약간 위압적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적당한 조망권을 확보할 수 있다. 먼 산이 계족산이다.
서행랑 끝으로 이동하면 가빈 터가 나온다. 시신을 안치하던 공간이다. 상喪을 당하면 내실에서 3일 모신 후 가빈 터로 나온다. 이때 관에는 옻칠을 한다. 그리고 틈 사이는 촛농으로 마감한다. 그렇게 100일장을 치른다. 함경도에서도 전갈을 받은 문상객들이 당도해야 하니 그 100일도 짧았다고 한다. 그리고 산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했다고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듣기로 3대에 해당하는 유억(柳億 1796~1852) 어르신 별세 후까지 그리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요즘의 시간 개념으로 보자면 참 답답한 소리일 것이다.
요즘 세상은 피붙이들의 결속력이 갈수록 옅어진다.
이런 얘길 하는 것은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무조건적 믿음에 기인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이 갈수록 피보다 술이 진하고 술 보다 돈이 진해지는 추세이고, 그것이 다른 생명 가진 것들의 관계망과는 너무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3년 시묘는 물론 전혀 현실적이지 않지만
원래 그 풍습의 발생이 우리가 태어나 최소한 3년은 부모님의 전적인 보살핌 속에서
명줄을 유지했던 것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무플이 악플보다 더 좋지 않다는 세상에 최소한 기억의 끝자리는 잡고 있어야지 않겠나.
가빈 터 앞 정원에 은행이 소복하게 떨어졌다. 최소한 집과 함께 시작했을 은행나무의 시간이다.
정원을 손보고 있던 차남 정수 씨가 홍시를 하나 건네준다.
추석 전에 지나가다가 끌려 들어가 밤을 한 되는 받았는데 이 은행은 말리고 나면 몇 개 얻어 겨울밤에 구워 먹어야겠다. 가을이라 그런지 정말 이 들판에서는 거지도 살찐다는 옛 말이 거짓이 아닌 듯하다. 길 가운데 입만 벌리고 있어도 지나가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무시래기와 쪽파, 홍시, 밤, 대추 등을손에 쥐어 주고 간다.
지금도 대평 댁이 사무실에 뭘 넣어주고 간다.
"밤 쪼까 구웠어."
마당 중앙에 서서 보면 큰사랑채, 이른바 운조루가 보인다. 바라보자면 왼편으로 툭 터인 누마루가 있어 여름 거처로 사용했다. 이 사랑채에 이산루(二山樓), 족한정(足閒亭), 운조루(雲鳥樓), 귀만와(歸晩窩) 등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지금은 역시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짐작컨대 저 중앙의 돌계단은 집주인이 주로 사용했을 것이다.
아랫사랑 아래로 난 경사로를 따라 올라 좌회전하면 큰사랑채로 이어진다. 멀리 누마루 난간이 보이고 이날 햇살은 따사롭게 마루를 데우고 있었다.
큰사랑채인 운조루의 서까래다. 누워서 한 동안 바라보았다. 호랑이를 때려잡는 장사인 무관 유이주에게는 타고난 어떤 미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집을 생각한대로 짓는 것은 미감만으로는 부족한 일일 터이고…,
이를테면 엔지니어적인 이해력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집은 유이주가 직접 설계한 집이다.
큰사랑채 안을 둘러보다가 어울리지 않는 문짝을 보고 집주인에게 물었다.
"저 문은…" "원래 그림이 붙어 있었는데 도둑이 들어 벽 자체를 들어가 버렸어." "도둑맞은 물건이 돈으로 보자면 얼마나 될까요?"
1987년 8월과 11월에 도둑이 들어 많은 유물을 도난당했다. 윤사국, 이익회, 김정희 등의 글씨 편액 수십 점과 추사의 팔곡병풍 등 글씨 십수 점, 석봉의 글씨 등 서첩 수십 점, 채용신이 그린 이산공영정 등 십수 점의 그림,
운조루를 그린 오미동 가옥도 등 도난당한 문화재급 작품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고
돈으로 따지자면 평생을 드러누워 끙끙 앓아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을 액수일 것이다. 운조루 소유의 것만으로도 하나의 박물관은 충분히 나왔을 것이다.
누마루에서 내려다 본 큰사랑채 앞마루의 시간이 경이롭다. 가까운 쪽의 통나무에 균열이 간 것이 보일 것이다. 보존과 복원이 시급하다. 아래쪽에서 보면 대략 손을 본 흔적이 있는데 이 마루 역시 함부로 요즘 사람이 수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통상 절집에 가서 단청을 새로 한 것을 보고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깔끔하니 좋다는 입장과 옛 맛이 사라져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양 극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후자 입장이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 사람이 여전히 살고 있는 집에 페인트칠이 다 벗겨졌다면 그걸 계속 두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수백 년 된 집과 물건의 경우라면 뭔가 충실한 고증과 전문적인 복원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조건 그대로 두자라는 주장도 능사는 아니다.
집이 원래 그렇지만 한옥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더 빨리 무너진다. 화학재가 아닌 자연재라 그럴 것이다.
유이주의 집안은 원래는 지금의 대구비행장 인근에서 살았다. 동구 입석동 부근이다. 유이주는 문화 유씨 곤산륜파 30대 영삼(1675~1735)과 영천 최씨 사이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726년이었다.
장사 같은 힘으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한양으로 올라갔을 때 훈련도감 김성응에 의해 발탁되었다.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인 1753년(영조29년)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라이선스 취득을 완료했다. 홍봉한은 소론 출신 시파인데 유이주의 유배와 복권은 홍봉한의 등락과 함께 한다. 서른 살 되던 해인 영조 31년(1755.2월) 홍봉한의 천거로 특채되었다. 홍봉한이 누군가?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정조의 외할아버지란 소리다.
사위 포기하고 외손자를 택한 당대의 권문세도가이다. 물론 해석의 차이로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혜경궁 홍씨와 친정아버지인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구할 수도 있는 위치였지만 위험보다는 안전을 택한 사람들로 이해한다. 여하튼 그 홍봉한에 의해 발탁된 사람이 바로 유이주다. 마흔두 살 되던 해인 1767년, 수어청 파총 성기별장이 되어 남함 산성 쌓는 일에 동원된다.
남한산성 일이 끝날 무렵 유이주는 전라도 병마우후가 되어 1771년(46세) 낙안군수로 발령 난다. 금주령을 위반한 죄로 1773년 삼수로 유배되었다고 전하나 이는 아마도 유배의 원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낙안군수 시절
한양으로 가던 세곡선이 침몰한 책임으로 귀양 간 것으로 나오는데 본질은 당쟁에 휘말린 탓일 것이다.
때는 영조 말엽이었고 그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홍봉한은 세손인 정조를 옹호했다.
벽파로 몰려 청주로 귀양 간 것이 유이주와 같은 1771년이다. 여하튼 유이주는 이듬해에 풀려났고 식솔을 거느리고 구례군 문척면 월평으로 이사했다가
곧이어 토지면 구룡정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한 1776년 홍봉한은 정치적으로 재기한다.
유이주도 1776년 함흥 오위장으로 재 등용되었다.
함흥 성을 쌓는데 다시 한번 그의 능력을 발휘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관련한 인사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장관이 잘리면 국장급까지 여파가 미친다. 입장 분명하면 출세도 쉽고 낙마도 쉽다. 입장 정하지 않고 녹봉 받기는 힘든 시절이었을 것이다.
구례로 칩거해서 살던 시절인 1775년 그의 조카인 유덕호(1756~1815)와
이곳 토호인 이시화(1725~1784)의 딸이 결혼하고 사돈 간이 된다.
칩거 중이지만 중앙에서 관료를 지냈고 낙안군수를 지낸 사람이다. 지방 토호인 이시화도 유이주라는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이주가 살던 구룡정은 오늘날 금환락지의 중심이라는 '용정'인 듯 하다.
15년이 흘러 1790년 삼수부사로 재직할 때 조카인 유덕호를양자로 입적한다.
재령 이씨 사돈 이시화는 지금의 운조루 땅을 이 무렵에 유이주에게 양도한다.
1776년에 터 잡기를 시작했고, 앞서 이야기했듯 바로 이때 땅을 파던 중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나온 것이다. 길이 25센티미터, 높이 12센티미터, 머리 3.5센티미터의 이 돌은
1989년 도둑맞을 때까지 함 속에 보관되어 가보로 전해져 왔었다. 운조루는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졌고 1782년에 유이주가 용천부사로 있을 때 완공했으니 6년 걸려 지은 집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운조루를 방문한 사람들의 방문기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나(또는 아무나) 능히 열 수 있다.'
운조루 뒤주 이야기는 가진 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항상 등장한다.
굴뚝 높이를 세 자 이상 올리지 않아 밥 짓는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한 것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절
큰 집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설계자의 혜안이었을 것이다.
그믐 무렵에 뒤주가 다 비워지지 않을 경우 이 집 큰며느리는 시부모님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잠시 밖으로 나가보자. 19번국도 구례에서 하동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왼편으로 문수사 가는 길을 지나면 사진의 주유소가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면 토지면사무소 거리가 나온다.
'운조루와 오미동 이야기-1'에서 오미동의 포괄적 풍수를 그림과 함께 설명할 때 언급했는데…….
"…국을 둘러싼 청룡과 백호는 내청룡이 짧고 외청룡이 길며 내백호가 길되 외백호는 짧다. 내청룡이 짧아 수구가 허하다고 여겼던지 수구 가까이에 조탑(造塔)을 만들어 비보(裨補)했다……."
그 비보했다는 돌무더기를 찾아가는 중이다.
그것이 뭔 문화재도 아니고 다른 무엇이 아니래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주유소 뒤로 난 길 옆에 버려진 듯 돌무더기가 수북하다. 원래는 지금 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 파출소 만든다고 돌을 파 갔다고 한다. 모르면 아무 것도 아닌 돌무더기고 알고 보면, 게다가 애정까지 품고 바라보면 시선이 안타깝다. 작은 팻말이라도 하나 설치한다면 이전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풍수를 어떻게 적용했는지 알 수 있는 교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상상이 이런 대목에서 작동한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길 위에 100년 전에, 300년 전에, 1,000년 전에 누군가 머물렀다면..., 풍수 보는 영감은 팔괘경을 들고 방향을 보고 있었을 것이고 유이주는 멀찍이 떨어져 오봉산을 바라보았을까. 아니면 비보할 당시에는 유이주가 아닌 조카 유덕호가 뒤에 서 있었을까. 아니다. 유이주가 직접 그 자리를 정하고 조카 덕호가 공사를 집행했을 것이다. 풍수적 마감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글을 쓰면서 지금 나는 사무실 창문 사이로 35도 정도 왼편에 위치하는 주유소를 흘깃 본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지네요. 한 편 더해서 끝내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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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마운 글이네 담에 꼭 가보고 싶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