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붕1877년, 캔버스 유채파리, 루브르 미술관 이 그림은 피사로의 초기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걸작품이다. 따스한 이른 봄의 햇볕을 받아 언덕을 등지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배후의 언덕은 경사면의 중후한 느낌이 잘 나타나 벽돌색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이 그림은 피사로의 초기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걸작품이다. 따스한 이른 봄의 햇볕을 받아 언덕을 등지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배후의 언덕은 경사면의 중후한 느낌이 잘 나타나 벽돌색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포도밭의 여인, 1877년, 캔버스에 유채, 45.4 x 65cm 1884년 퐁투아즈 지역을 떠난 피사로는 그 근방의 에라니 쉬르 엡트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피사로는 1885년경부터 쇠라와 시냑을 알게 되면서 작은 색 점을 캔버스에 점을 찍듯 그린 점묘법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는 대신에 캔버스에 순색의 작은 색점들을 캔버스에 바로 바르면, 눈의 망막에서 색의 혼합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신인상주의의 원리를 수용한 이후, 피사로 작품의 변화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피사로는 포도밭의 풀밭과 나뭇잎들에 순색을 그대로 병치시켜 발랐다. 자연스럽고 묵직한 색감으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여주었던 그의 화풍은 작은 붓터치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변화하였다. 1889년 이후 피사로는 다시 예전의 화풍으로 돌아가 1990년부터는 파리나 루앙의 길을 깊은 투시로 묘사한다.
퐁투아즈의 봄, 피사로, 1877년, 캔버스에 유채, 65.6 x 81cm 1871년 6월 피사로는 런던에서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시엔느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1872년 퐁트와즈에 정착해서 1884년까지 그 곳에 거주했다. 이 무렵 피사로는 시골의 자연과 농촌생활을 그리는 화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밀레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세계는 밀레의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피사로는 물이나 물위에서 반사하는 빛보다는 땅이나 경작지, 들과 언덕, 마을과 과수원, 집과 나무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그는 성실하고도 사실적으로,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농부들과 시골 시장들을 묘사한다. 거목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이 작품은 정확한 삼각형의 나무 형태로 짜여져 있다. 나무 뒤로는 하늘색의 파란 지붕의 건물이 있고, 화면 아래 수평으로 깔린 초록색의 채마밭은 묵직한 색감으로 그림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봄의 분위기는 흰색의 작은 꽃봉오리들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밀 졸라가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대지의 심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카페 오 레1881년, 캔버스 유채시카고 미술관 인상파 화가들의 기술의 기본은 날렵하고 세밀한 운필에 의한 필촉 분할에 있다. 이 그림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나 있는데, 형태는 정확하게 묘사되어있고, 빛의 효과도 잘 나타나 있다. 화창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앉아있는 소녀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정겹다.
파리의 르 아브르 광장1893년, 캔버스 유채시카고 미술관 피사로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파리의 호텔 창문으로 본 가두 풍경의 연작을 그렸다. 용솟음치는 듯한 자연스러운 활력이 보인다. 피사로는 나이가 들수록 가두 생활 속에서 화제를 찾고 도시 경관에서 영감을 얻었다.
몽마르뜨 밤거리 1897년, 캔버스 유채런던, 내쇼날 갤러리 피사로의 연작 중 몽마르뜨 거리를 표현한 것이다.
눈덮인 퐁트와즈 사육장1879년, 캔버스 유채시카고 미술관 피사로는 1879년을 퐁트와즈에서 보냈는데 생활이 몹시 비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퐁트와즈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면에 채색하는 피사로의 붓의 움직임이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볍게 느껴진다.
루브시엔느의 밤나무, 피사로, 1871∼72년, 캔버스에 유채, 41 x 54cm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크고 두꺼운 화폭 위에 그려져 한번도 캔버스 틀이 보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래의 약식 테두리 틀에 끼워져 있었다. 미술관에 소장되기 전 전혀 복제되거나 전시된 바가 없다. 그러나 반 고흐가 오베르의 가셰 박사 집 첫 방문 때 "가셰 박사는 겨울눈 속의 붉은 집을 그린 아주 아름다운 피사로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있다"며 경탄했다는 사실로 이미 유명해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피사로의 아들, 루시앙 피사로는 "붉은 집은 피사로 가족이 살았던 곳, 루즈시엔느 근방에 있었는데, 은퇴하여 혼자 외로이 은둔해 살았던 수수께끼 같은 한 노인의 소유였다"고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이렇게 소재가 루브시엔느에서 취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 유력한 것으로 보아, 날짜는 적혀있지 않지만 이 작품이 1869년이나 1870년이나 1871-1872년 겨울, 피사로 가족이 오베르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루브시엔느의 길, 피사로, 1872년, 캔버스에 유채, 60 x 73.5cm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 라고 말한 카미유 피사로는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1870년대 내내 프랑스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완고하고 때로는 따분하며 심지어 권태로울 정도로 자연 관찰에 주력하였다. 1878년에 한 비평가는 그를 "그들 모두 중 최고의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1870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피사로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왔고, 클로드 모네를 만난다. 거기서 그들은 콘스터블의 예술에 매혹되었고, 특히 그들 자신의 회화적 탐구와 아주 유사한 터너의 "눈과 얼음의 효과"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 놀라운 효과가 흰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원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수많은 서로 포개어진 다양한 터치들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피사로는 서리가 내린 풍경이나 눈 덮인 풍경을 즐겨 다루었다. 파리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루브시엔느의 길을 그린 이 그림에서도 잔설이 남아 있는 길에 오후의 짧은 햇빛이 드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길 오른쪽의 양지와 왼쪽의 음지는 전통적인 원근법 구도 속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한적한 시골길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하얀 서리, 피사로, 1873년, 캔버스에 유채, 65 x 93cm 이 작품은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바르비종파와 밀레의 진정한 후계자인 피사로는 시골 생활에 깊게 매료되었다. 화면 위로 점차 상승하는 원근법을 씀으로써 화면에 하늘을 작게 담아 상대적으로 서리가 내린 겨울 들판이 전경에 가득 차도록 하였다. 수평선이 가로지르는 간결한 구성은 이 시골 풍경에 없어서는 안 될 견고함을 부여한다. 나무들의 비스듬한 그림자가 서리가 덮인 밭고랑을 가로지르고 있다. 거칠고 마른 붓질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 살려내고 있다.
자화상, 피사로, 1873년, 캔버스에 유채, 56 x 46.5cm 1883년 피사로는 자신의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 자신의 인생관이자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신념을 짧게 피력한다. "내가 촌스럽고 침울한 성격이며, 거칠고 야생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나를 관대하게 바라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할 것이다. 그렇지만 슬쩍 보고 그저 지나친 사람들은 표상만을 볼뿐이지. 시간도 없이 그들은 스쳐 지나가 버린단다! 그러나 그림은 다르지, 예술은 나를 황홀케 한단다. 나의 삶이지. 그 이상에 무엇이 있겠니? 예술가들이 모든 바램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얘기가 너무 길어 졌구나 .. " 이 짧은 글은 피사로의 내면을 가득 채운 예술에의 열정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확인시켜 준다. 평소 동료들부터 모세나 하나님에 비교될 정도였던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동료들과 훌륭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던 피사로였지만 그 무엇도 예술만큼 피사로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던 듯하다. 전형적인 초상화 형식을 따른 이 작품은 단순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의 훌륭한 인품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퐁투아즈에서 세잔느와 함께 작업을 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이후의 자화상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제작되었다.
빨래 너는 여인, 피사로, 1887년, 캔버스에 유채, 41 x 32.5cm 1884년 지조르 근처의 에라니에 정착하면서 피사로의 예술은 체계화되고 보다 단순한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자신도 참가했던 앙데팡당전에 출품된 쇠라의 <아니에르에서 목욕하는 여자>에 감탄하여, 1886년 마침내 신인상주의로 전향한다. 그는 신인상주의를 인상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체계 위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서 피사로는 쇠라, 시냑과 나란히 분할묘법의 미학에 따라서 그려진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이 미학을 열렬히 선전하는 예술가로 나타난다. 이후 약 4년간 성실하게 신인상주의를 실행했으나 그의 방법은 쇠라나 시냑의 것에 비하면 유연한 것이었으며,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터치로 볼 때는 쇠라나 모네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점묘법의 실험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온화한 색조의 조화와 밝은 햇살의 표현 등을 통해,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왼쪽의 어린아이의 머리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완만한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길은 깨끗하게 빨아 널은 침대보처럼 포근함을 준다. 모든 날카로운 선이 제거된 동글동글한 오브제들은 화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일러주고 있다. |
시슬레 (Alfred Sisley 1839.10.31 ~ 1899.1.29)
영국 국적이지만 파리 출생. 자연을 외광(外光) 아래서 포착하는 밝은 화풍을 확립. 인상파 중에서도 특출하게 순수한 풍경화가로 자연을 대상으로 물과 숲의 반짝임을 묘사한 많은 수작을 남겼다. 대담하다기보다는 균형을 존중하는 감각을 기조로 하여 온건하고 섬세한 색의 뉘앙스를 통해 대상을 부드럽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 젖게 했다.
아르쟝테이유 근방의 보리밭 1873년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센 강변 아르쟝테이유로 모네를 방문하여 이 곳의 정경을 종종 함께 그렸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르느와르와 같이 이 곳 근방의 언덕에서 제작에 전념한 적이 있었다. 이 때에는 전년에 주로 센 강변을 사생한 것과는 달리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주제가 되었다. 당시 시슬레는 길이 화면의 중심으로 뻗치는 투시 원근법의 구도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서도 보리밭이나 채소밭으로 뒤덮인 언덕 경사면을 아래에서 올려다본 각도에서 거리감이 강조된 묘사를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회색을 주조로 한 부드러운 색조에서 벗어나 녹색과 노랑이 강조된 작풍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생 마르탱 운하의 전망 1870년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초기의 시슬레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한 사람은 쿠르베와 코로였다. 1865∼66년 사이에 그는 르느와르와 같이 퐁텐블로 근방 마를로트와 마를리에서 쿠르베식의 어두운 색조와 중후한 필치의 풍경화를 제작하였는데, 그 후 점차 코로식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연기가 피어 오르는 듯한 수목의 묘사, 건물과 하늘의 부드 러운 필촉, 그리고 화면 전체가 은회색으로 통일된 색조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편 수면의 점묘법에 의한 빛의 표현은 모네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시슬 레는 이미 인상파 화풍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이러한 경향을 받 아들이면서도 넓은 공간의 전개와 또한 시정 넘쳐 흐르는 표현에 의해서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화 풍을 뚜렷하게 정립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루브시엔느의 초설 1870년보스턴 미술관 소장
베르사이유 근방 루브시엔느는 피사로가 한때 (1868∼82년)살았던 마을이다. 시슬레는 종종 이 곳에 들렀는데 아마도 피사로의 권유에 따른 듯하다. 그는 이 곳에서 동일한 장소의 반복된 풍경을 제작함으로써 계절에 따른 색채와 형체의 변화를 연구하였다. 설경은 쿠르베와 모네가 즐겨 다룬 모티프였다. 그러나 시슬레의 설경은 쿠르베와 같은 딱딱하 고 중후한 느낌이 아니라, 가볍고 부드럽게 쌓인 설경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모네 와 같이 흰 눈에 반영된 빛과 그림자의 인상을 추구하려는 표현도 아니었다. 시슬레는 회색을 주조로 해서 색채의 구성에 마음을 더 썼으며, 색채 고유의 성질을 화면상에서 충분히 살려 처리 하였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색조와 서정적인 조화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루브시엔느 설경, 알프레드 시슬리, 1878년, 캔버스에 유채, 61 x 50.5cm 영국인 부모를 둔 시슬리는 평생을 파리 인근에서 보냈다. 하지만 1857년부터 1861년까지는 런던에 머물렀고, 1874년에도 영국에 있었다. 거의 풍경화만을 그린 그는 특히 영국 화가들 특유의 자발적인 터치와 수채화 기법의 자유스러움이 눈에 띠는 작품들을 남겼다.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시슬리는 남 프랑스의 강렬한 태양 아래 있는 그대로 드러난 자연보다는, 은밀하고 베일에 싸인 부드러운 자연을 선호했다. 이러한 성품과 취향은 그대로 그의 화폭에 반영되었다. 그의 그림은 홍수로 물살이 사나운 센느 강의 묘사에서조차 한가로운 뱃놀이 장면으로 착각할 정도로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이다. <루브시엔느의 설경>은 전통적인 원근법에 근거해 거리감이 느껴지는 사실주의적인 공간감을 연출하고 있지만 붓 터치는 이미 인상주의 기법을 쓰고 있다. 소실점에 위치한 불명확하게 개략적으로 묘사된 인물은 어떠한 서술적 기능도 가지지 않는 시각적인 요소일 뿐이다. 인물은 이야기를 하려고 작품 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하얗게 쌓인 눈의 인상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거의 청색 빛을 띄는 흰 눈이 모든 사물들을 뒤덮고 있다. 하늘과 배경의 풍경은 그 자체로 광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루엥 운하, 알프레드 시슬리, 1892년, 캔버스에 유채, 73 x 93cm 1889년 11월 시슬리는 모레-쉬르-루엥에 정착하였다. 조그만 마을의 정감 어린 풍경은 시슬리를 곧 사로 잡았고, 시슬리는 생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종종 루엥을 따라 셍-맘메의 센느 강가를 그렸다. 셍-맘메는 루엥과 센느 강이 힙류하던 곳이다. 1884년 3월 7일 시슬리는 뒤랑-뤼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네. 강가에서 진행 중인 몇 점의 캔버스가 있다네." 화가는 운하가 곡선을 그리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고 믿둥이 드러난 포플러 숲을 따라 흐르는 강을 보았다. 모티브를 다루는 이러한 방식은 수평선에서 사라지는 휘어진 도로와 함께 펼쳐진 전경에 주목하도록 한다. 이 그림을 완성한 후, 시슬리는 자신이 이 그림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하여 비평가 타베르니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한다. "하늘은 배경으로 존재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이 그림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점입니다. 나는 화폭에서 배경이 아니라, 풍경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포르 마를리의 홍수 1876년파리 인상파 미술관 소장 프랑스 혁명이 터지기 5년 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말하자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다가올 혁명의 정신을 예고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실상 이 작품은 '미술이 혁명을 앞질렀다.'라는 말을 낳게도 했거니와, 혁명 전야의 정신적 풍토를 반영한 작품으로서, 작품 발표 당시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주제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建國史)에 수록된, 고대 로마 건국에 얽힌 전설에서 따 온 것이다. 장면은 늙은 부친 호라튜스 앞에 한 줄로 선 삼 형제가, 조국을 위해 용약 싸움터를 떠나기에 앞서 부친께 맹세를 하는 긴박한 순간이다. 무대 장치와 같이 간결하고 거의 헐벗은 원주와 아아치를 배경으로 하고 노(老) 호라튜스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칼자루 앞에서 오른팔을 들고 맹세하는 씩씩한 모습의 삼 형제, 그리고 오른쪽에는 슬픔에 젖어 있는 연약한 부녀자들의 모습이라는 대비가 이 장면을 한층 더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부지발의수문과배 눈쌓인루브시엔뜰 함프턴코오트다리 풍경 디사블랑의숲의근방 아르장떼이유의 광장 브뇌-나두에 쌓인 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