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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문화유산을 만나다.3
서해바닷물은 서산시 해미면까지 거침없이 드나들었다. 인근을 해미(海美)라고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웠다. 최근에 AB지구에 방조제가 생기면서 뱃길이 끊기고 자연스럽게 내륙이 되었다. 태종 때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아내기 위하여 해미읍성을 쌓고 충청병영을 옮겨와 병마절도사를 두었다. 이순신도 군관으로 근무하였다.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사람들이 사는 곳을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평소에는 행정중심지이고 비상시에는 방어기지이다.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으로 손꼽히는데, 해미읍성은 동문 잠양루, 서문 지성루, 남문 진남문의 3문이 있는데, 진남문이 정문으로 원형이 보존되고 있으며 동문과 서문은 복원되었다.
러시아가 청나라의 톈진조약으로 연해주지방을 차지하였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게 되자 통상을 요구하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대원군은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아보려 하였으나, 영불연합군이 북경함락 이후 양인살육에 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했다.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하여 묵시적이었으며 궁내에도 교인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박해로 돌아섰다. 급기야 대원군은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여 천주교 탄압에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결국 ‘병인박해’는 1866년 봄에 시작되어 1871년까지 6년 동안 계속 되었으며 네 번에 거쳐 8,000여 명의 천주교 순교자를 내었으며 이곳 해미읍성에서만 1,0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겨났다. 대원군이 정권유지를 위하여 전무후무할 쇄국정책으로 서양인을 배척하는 무자비한 종교탄압이 되었다. 애꿎게 힘없는 양민들의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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