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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道農園]

전남의 한 골목에 네덜란드식 돌담이 있는 이유

옛사람들 정취와 애환, 정겨움 가득 한 강진 한골목

25.01.24 10:17l최종 업데이트 25.01.24 10:18l 이돈삼(ds2032)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진 한골목 돌담. 소박한 골목을 따라 오토바이를 탄 우편배달원이 지나고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설날을 앞둔 이맘때면 유난히 옛 생각이 난다. 눈이 소복하게 내린 골목과 돌담 풍경은 그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때 그 시절 골목과 돌담은 고만고만한 어깨를 마주한 친구들의 놀이터였다. 마을사람들도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골목에는 그때 그 시절의 정취와 애환, 정겨움이 배어있다.

'남도답사일번지'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한골목이다. 길게 이어진 돌담이지만, 여느 마을과 다르다. 층층이 엇갈려 지그재그로 쌓은 것이 별나다. 담장도 높다. 우리 전통이라기보다, 네덜란드식 담쌓기라고 전해진다. 돌담에는 수백 년 이어온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1630∼1692)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층층이 엇갈려 지그재그로 쌓은 돌담. 하멜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식 담쌓기로 알려졌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강진 한골목 돌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범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한 하멜 일행은 1653년 8월부터 13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했다. 11년은 전라도에서, 그 가운데 7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하멜은 생계를 위해 병영성에서 노역하고,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다. 춤판을 벌여 돈도 받았다. 한골목 돌담도 그때 쌓은 것이라고 한다.

하멜은 조선을 유럽에 처음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하멜은 조선에 머문 기간의 노임 청구서를 자신이 소속돼 일하던 동인도회사에 냈다. 청구서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 표류기'다. 하멜의 기록을 통해 조선이 서양에 처음 알려진 순간이었다. 강진군 병영면에 하멜 동상과 기념관이 들어선 이유다. 기념관에선 하멜의 흔적과 함께 범선 모형, 나막신 등을 만날 수 있다.

하멜 기념관에서 한골목 돌담을 따라간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골목은 넓고 길다. 돌담도 높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골목은 성동, 성남, 삼인 등 여러 마을을 잇고 있다. 하멜의 한(恨)이 맺힌 길이기도 하다.

담장이 높아 까치발을 해도 집안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다. 당시 말을 타고 다니던 전라병영성 군사의 눈을 피하려는 방책이었다. 남정네들은 상인이 되어 장사하러 가고, 집에 혼자 남은 아낙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전라병영성과 해자. 농업용수 순환시스템에 의해 인근 저수지에서 흘러들게 만들어졌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전라병영성은 1417년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 장군이 쌓았다. 4개의 성문을 둔 1060미터 성에서 호남과 제주의 53주 6진을 통할했다. 병영성이 들어서고,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군수물자와 생필품 수요가 늘었다. 물자 유통을 담당할 상인도 생겨났다. 병영상인이다. 이후 병영상인은 개성상인과 함께 조선의 상권을 좌지우지했다.

진도에 살던 남농 허건(1907∼1987)도 병영으로 이사 왔다. 허건은 성동리, 지금의 수인정미소 자리에 살며 병영공립보통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다녔다. 전라병영성은 1895년 갑오경장 때까지 유지됐다. 동학농민전쟁 때 불타고, 성곽만 남았다. 지금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마음도 금세 편안해지는 곳

▲성동리 은행나무. 8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병영천 상류로 흐르는 적벽청류. 병영성 사람들의 피서지이면서 풍류공간이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한골목에서 눈에 띄는 게 성동리 은행나무다. 키 32미터, 가슴높이 둘레 7미터로 수려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나무 아래에 고인돌도 있다. 은행나무와 고인돌은 무려 8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사람들에 쉼터를 제공했다. 마을에선 해마다 음력 2월 15일 평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은행나무 옆 교회도 명물이다. 일제가 제국주의 발톱을 세우던 1902년 첫 예배를 봤다. 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회 옆으로 정미소도 있다. 골목과 돌담이 한데 어우러지는 정미소다.

수인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도 한골목과 만난다. 병영천 상류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흐르는 물이다. 물길은 절벽을 따라 마을 옆으로 흐르며 여름날 피서지가 됐다. 병영성 군관도 더위를 식히고, 양반들은 풍류를 즐겼다. 200미터 넘는 평평한 바닥도 바위를 쪼개 다듬었다. 커다란 바위를 쪼개려고 파 놓은 '쐐기 구멍'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적벽청류의 쐐기 구멍. 적벽청류를 만들면서 바위를 쪼개려고 판 흔적이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돌담 아래로 지나는 물길. 담장 아래 물길이 집 마당으로 이어진다. 농업용수 순환 시스템이 그대로 남아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물 확보를 위한 옛사람의 세심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지형을 이용해 하천에서 집안으로 물길을 이어 생활용수와 텃밭 농업용수를 확보했다. 쓰고 남은 물은 배수로로 흘려보내 농사용 물로 썼다. 농업용수 순환시스템이다. 오래전 하천을 따라 만들고, 집 마당을 관통한 수로가 지금도 남아 있다. 국가중요농업유산, 세계관개시설물유산으로 지정됐다.

하고제, 중고제, 요동제, 돌야제, 용동제 등 5개 저수지의 높이를 똑같이 한 게 비법이다. 저수량에 따라 물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홈골제와 상림제 물은 병영성 북문 해자를 통해 하고제를 오가며 성내 연못은 물론, 서문과 남문 수로를 통해 성동들과 성남들, 한들평야를 적셨다.

▲홈골제의 가을 풍경. 상림제 물과 함께 병영성 북문 해자를 통해 하고제와 연결되는 물이다. ⓒ 강진군관련사진보기

병영천변을 따라 삼인리 비자나무도 만난다. 나무는 60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 수호신 대접을 받고 있다. 곧게 자라지 않은 덕에 지금껏 살아남았다. 병영성을 쌓을 때 많은 나무가 베어졌는데, 목재로 쓸모가 덜한 비자나무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비자나무는 키 10미터, 가슴높이 둘레 5미터,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13∼15미터 퍼졌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마을사람들로부터 제사상을 받는다. 천연기념물이다. 비자나무 숲그늘에서 한골목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삼인리 비자나무. 60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마을 수호신 대접을 받고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한골목에서 만나는 옛 병영양로원. 지금은 방치돼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한골목길은 천변을 따라 병영면 소재지로 이어진다. 재래시장과 학교, 농협, 행정복지센터, 양조장 등 기관단체가 다 있다. 일품으로 소문난 연탄돼지불고기 맛집도 여기에 있다. 복닥복닥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만나고, 골목을 오가면서 건네는 눈인사도 살갑다.

한골목에는 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공존한다. 고향 그리며 한숨짓던 하멜, 쫓고 쫓기던 동학농민군과 관군, 친구들과 뛰놀던 어린 허건 이야기도 배어있다. '경수야 노올∼자!'를 외치던 옛친구들 그림자도 서성인다.

골골샅샅 거닐며 여기저기 엿보고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집마다 감나무 많고, 정원도 단아하게 꾸며져 있다. 모든 것이 가난해도 정겨웠던 그때 그 시절 흑백사진 속 풍경 같다. 고향마을에 온 것처럼 내 마음도 금세 편안해진다. 한골목을 따라 하늘거리다 보니, 겨울 한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강진 한골목 돌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