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장 전반부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의 고유 자료가 담겨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다른 복음서 기자도 알고 있었지만 채택하지 않은 자료를 누가만 채택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복음서 기자는 모르는 자료를 누가만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고, 누가의 창작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1~5절을 보겠습니다.
1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가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과 뒤섞이게 하였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5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본문에는 두 개의 사건이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갈릴리 사람들이 희생제물을 바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몇몇 사람이 예수님께 보고하는 이야기인데, 이 설화가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면, 성전에서 민란이 발생했거나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빌라도가 판단하여 죽였을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사람이 갑자기 재난을 당하는 것은 무언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도 그런 해석에 동조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설화가 정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데 전승을 거쳐 50년 후에 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인지, 아니면 어느 누군가의 창작이 전승을 통해 누가에게 전달된 것인지, 아니면 누가의 창작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이건 간에, 재난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는 건 고대인들의 한계일 뿐이지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지구마을에서는 비행기 사고 같은 인재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재난도 발생하고, 지진이나 수해 같은 자연재해로 수천수만의 생명이 한꺼번에 희생되는 끔찍한 재난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재난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죄라는 관념조차 없는 어린 아이도 있고, 슈바이쳐 박사나 테레사 수녀 같은 훌륭한 성직자나 수도사도 있을 수 있고, 평생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온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난과 사고는 죄의 유무를 가려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의 경우에는 누군가의 부주의로, 자연재해의 경우에는 그냥 그 재해의 범위에 들어가 있었던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이천년 전 사람입니다. 갈릴리의 현자였지만, 그 지혜의 번뜩임이 놀라웠지만, 예수님도 그 시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이 정말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 하더라도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순진한 교우님들이 너무 아파하시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말하지 않으면 저는 결국 위선자가 되고, 교우님들은 교리의 덫에 갇힌 채 예수께서 전해주신 복음이 아닌 배타교리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현대 신학자들이 한 결 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의 본산지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는 상당히 많이 변했습니다. 대부분의 유럽 교회들은 신구교를 막론하고 배타와 독선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자유롭고 포용적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더는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속의 도전에 똑같이 위기에 처해있기에, 서로 돕고 왕래하며 ‘어떻게 하면 돈만 바라보는 이 위기의 시대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함께 염려하며 기도합니다. 불교와 같은 동양의 심오한 종교와도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며 연합행사도 갖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후진국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미국과, 그 미국의 선교식민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이천년 전에 만들어진 그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본문도 누가의 고유 자료입니다. 6~9절을 보겠습니다.
6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해서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이 본문은 누가의 고유자료지만, 그 원본은 마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21장에 있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예수께서 저주하시는 이야기일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이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이렇게 각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강해할 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뿐인데, 단지 자기가 시장하다는 이유로 나무를 저주하는 것은 예수님답지 않다고, 누군가 예수님의 능력을 과대포장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가 전승을 거쳐 복음서에까지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역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누가의 고유 자료입니다. 10~17절을 보겠습니다.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12 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이여, 그대는 병에서 풀려 났소"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인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므로,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해야 하는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러지 마시오."
15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내용 자체는 누가의 고유 자료인데, 메시지는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메시지는 아닙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자주 나오는 안식일 논쟁의 메시지는 언제나 거의 같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안식일에 일을 해도 괜찮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서 여기저기에서 너무나 많이 반복되고 있는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요. 이 메시지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즘 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법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 법이 사람의 생명과 가치를 지켜준다는 공동체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아니 수없이 많이, 법이 사람의 생명과 가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파괴하는 수단으로 작용했습니다.
이삼천년 전 유대 땅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수없이 발생하는 일입니다. 1970년대 유신헌법이 그랬고, 21세기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에도 그런 요소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법이 오히려 사람을 해치기도 하는 역설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할 종교가 사람을 옥죄는 현실과도 통합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하셨다는 행동들과 말씀들은, 안식일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법이 만들어진 의도를 생각하지 않고 문구 자체를 절대화해서 문자 그대로 신봉하고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법과 제도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사람의 행복을 위해 수단으로 존재해야 할 그것들이 오히려 사람을 지배하고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옥같은 진리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었기에, 현대 신학자들이 성서의 기록들을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기독교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라는 이런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삶을 바꾸었노라고, 그 말씀으로 인해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노라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그 말씀들이 자신들을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는 빛이라고,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전히 오늘날 ‘나의 구세주’라고, 현대 신학자들 대부분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기에, 이런 이론을 교우님들에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들은, 모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7장에,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는 장면은 마태복음 23장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