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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 너머에 터오는 하나님의 영성
김제의 너른 들판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침 무렵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여 있었다. 푸른 하늘 아래 잘 정돈된 농지가 반듯한 수직선을 긋고 있다. 그러다 보았다. 아! 지평선(地平線), 우리나라 어디에서 지평선을 볼 것인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만들어 지는 곳 만경평야. 하늘과 땅이 맞닿는 저 곳에는 그분께서 그어놓으신 수직선이 보인다. 끝도 없이 멀어지고 끝도 없이 늘어나는 긴 수직선. 길 위에서 이미 마음을 열어 버렸다.
임상교회는 중후한 고성(古城)같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은 3층이었는데, 커다란 아치형 창문이 벽마다 간격을 두고 나 있었다. 부드러운 녹색의 교회탑 위로 십자가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교회 마당에는 수명이 오래된 나무들도 많았지만, 특히 인상적인 것은 오래된 소나무였다. 곧게 뻗은 가지가 위로 오를수록 휘어져 있고 푸른 솔잎이 다북하여 교회의 풍경과 상당히 잘 어우러졌다.
마중 나온 박경철 목사와 수인사를 하고 교회 옆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염천기념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교회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이 아니라 십자형 건물이었다. 박 목사는 먼저 교회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임상교회는 염천 한상용 장로가 1920년 9월 1일 설립했다. 김제 만경 지대에 염천의 땅을 안 밟고 지나갈 수 없다고 할 만큼 만석꾼이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부흥회에 참석하면서부터였는데, 그때부터 온전히 기독교에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다. 초기의 신앙형태는 변화된 모습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한 그는 집안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땅도 함께 주면서 노비를 해방시켰는데, 후손들에게 미칠 영향이 있기에 다른 지역으로 멀리 떠나 살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우리는 그 시기에 주목합니다. 교회설립연도인 1920년은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있었던 다음해에요. 이 지역은 풍요로운 땅이자 일제 수탈의 현장이기도 해서 한 맺힌 땅입니다. 한상용 장로는 삼애정신을 갖고 있었는데, 바로 애신, 하나님 사랑이고, 애린, 이웃사랑이며, 애토, 땅사랑이에요. 3·1운동 실패 이후 그 세력이 개화운동으로 번졌는데, 한상용 장로께선 대지주였지만 남다른 땅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었어요. 이분은 그 정신을 갖고 하나님 사랑으로 교회를 설립하고 이웃사랑으로 양로원을 설립했습니다. 이분께서는 갈 곳 없는 할머니들을 친히 업고 오셨다고도 해요.”
염천이 설립한 애린양로원은 1925년 세워졌는데, 우리나라의 최초 사회복지시설인데, 지금도 성지처럼 여겨져 뜻있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곳이다. 그뿐 아니라 농우회라는 농민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사람들에게 소작농에게 땅을 주어 일제의 수탈에 맞서기도 했다. 또 개화운동의 측면에서 교회 옆에 중생학원을 설립하여 당시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친 시기임에도 우리말과 한국교사를 두어 교육을 하게 만들었다. 또 농민들은 학교에서 배울 기회가 없으니까 교회에서는 야학운동도 펼쳤다. 6·25 한국전쟁 이후에는 전쟁고아를 위한 애육원을 지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았다.
애린양로원은 임상교회 아래 있었다. 교회와 양로원은 설립자가 같은 것 말고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임상교회 출석 교인수는 60여 명, 그 중 20명이 양로원 어르신들이다. 애린양로원을 방문하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반갑게 박 목사를 맞이했다. 함께 행사도 치르기도 하고, 안면을 틀 기회가 많아서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박 목사가 사람 좋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예배가 10시 반이에요. 그런데 양로원의 어르신들은 9시에 교회로 출발하세요. 저 같으면 1분 만에 올라오는 거리인데도 말이에요. 한걸음씩 떼기도 힘드신 분들이시니까 정말 천천히 올라오시는 거죠. 그렇게 오셔서 예배시작 전에 미리 교회에 앉아 계세요. 농촌 교회가 다 그렇지만 거의 농민들이고, 다 나이 드신 분들이잖아요. 교단에서는 장로임기제를 말하지만, 여긴 그걸 따르면 힘들죠. 청년회 회장이 65세, 이러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우린 은퇴 없다고 그래요. 제가 와서 교회 정관도 새로 만들었어요. 우리는 양로원 분들이 계시니 평균연령은 다른 농촌교회보다도 훨씬 높습니다. 저흰 장로님이 세분이시고, 권사님이 다섯분 계세요.”
박경철 목사는 2004년 4월 1일자로 임상교회에 부임했다.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2001년 여름에 돌아왔으니, 만 십년 세월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전주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그 뒤 감신대, 한신대 등에서도 강의를 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에는 목회는 하지 않고 공부만 하겠다며 다짐하고 떠난 터였다. 하지만 독일에 있었을 때 살았던 베텔지역에서 디아코니아 마을과 디아코니들을 보며 영향을 많이 받았고, 생태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은 어느새 도시가 아닌 농촌에 있었다. 농촌의 한 지역에서 농촌에 남겨진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하면서 농촌이라는 현장 속에 들어가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때마침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생태공동체 프로젝트를 맡아, 농촌을 시골로서가 아니라 대안론으로 점점 생각이 바뀌게 되어 농촌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중에 임상교회를 오니 마치 독일의 베텔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에 양로원도 있으니 생태공동체에 대한 일도 도모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미래인 생태공동체가 촌락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발견하면서 계획해 가던 그의 생태적 선교적 모습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참으로 그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교회에 와서 염천 한상용 장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애린원에 쓴 어느 날의 주보에는 염천과 애린양로원을 만나면서 가지게 된 자랑과 부끄러움과 사랑을 엿보게 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도시의 빌딩 숲속에서 자라온 나에게, 머나먼 이국땅에서 월드컵을 치룬 “대~한~민~국”의 한 일원임을 자랑하며 IT 강국을 뽐내던 나에게 농촌은 잠시 도시인이 쉬어가는 한가로운 쉼터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던 나에게, 염천에 얽힌 끊길 듯 이어지는 옛 이야기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참으로 얼마나 귀중한 땅이며, 거룩한 땅인지를 새삼 소스라치게 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을 적어가던 애린원 기념 축사 원고의 잉크가 채 마르기 전까지만 해도 애린원의 ‘어르신’들은 나에겐 여전히 ‘양로원’의 ‘할머니, 할아버지’일 뿐이었다. 양로원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른바 배운 지식인 목사에겐 다만 보다 잘 사는 국가사회가 만들어 가는 사회복지의 한 프로그램의 대상들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거동을 잘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잠시 손잡아 주는 일이면 충분해 보였다.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목사가 할 수 있는 예배와 성경공부란 단지 재미있는 구연동화 정도만으로 때우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잘난(?) 목사에게 던진 한 할머니의 외마디가, “목~사~님~~ 그 얘기 다~~ 알아~~”였다.
박경철 목사는 농촌교회는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임상교회는 도시를 선교하는 교회로 그 거점을 삼는다. 도시의 문명에 의해 피폐해지고 삭막해진 삶들이 시골에 와서 다시 생명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선교는 사람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농촌의 생태적인 삶으로 평화 선교사역의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박 목사는 도시의 교회에서 중고등부나, 청년부들이 농촌을 선교하러 왔다고 하면 그 시각을 바로 잡아 준다.
“그들이 와서 여름성경학교도 해주고, 농활도 해 준다고 하면 제가 그래요. 너희들이 여기 도와준다고 하면 엉뚱한 고추나 따고 하지 별 도움은 안된다. 그렇지만 너희가 잘못 따더라도 따는 느낌을 통해 느끼는 게 있다면 우리가 기꺼이 밭을 내주겠다. 그러면 배워라. 들녘의 노을을 보며 명상하고 한없이 걸어보는 거. 새벽의 여명을 느끼며 깊은 묵상을 하는 거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농촌이 너희를 선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해줘요.”
또 그는 지역목회자들을 위해 삼애학당을 열었다. 성서공부를 하는 그 모임은 염천기념관에서 한다. 도시에서 하는 게 아니라, 농촌에 직접 와서 공부도 하고, 실제 보고 느껴야만 제대로 된 공부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염천기념관은 옛 애육원 자리인데, 박 목사가 처음에 왔을 땐 사용을 하지 못할 정도로 버려져 있었다. 그것을 박 목사가 교회 분들을 설득하고, 헌금과 대출을 받아 새로 정돈을 했다. 그곳에서 그전까지 없었던 예배가 끝나고 공동식사를 하게하고, 세미나 등을 통해 그곳을 활용하면서 대출금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임상교회는 홈페이지(www.imsang.net)가 있다. “교회에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르신들이 컴퓨터를 쓰시는 것도 아닌데도, 어르신들이 그런 거 모르신대도 ‘목사님이 도시선교한다’는 그런 자부심들은 가지고 계세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우리 권사님들이 허리가 구부러져 힘들어도 밥은 해 줄 테니 도시 사람들 가르쳐 주시라고 하세요.”
앞으로 예배당의 모습은 내부적으로 조금 리모델링 할 생각이다. 처음 와서 보니 너무나 높은 강대상은 보기가 좋지 않았다. 교회개혁은 강대상을 바꾸는 것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권위가 제단이고 강대상이니 강대상을 낮추고 제단화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르신들이 강대상을 보려니 목이 너무 아프다는 말이 들렸고, 차츰 한 칸씩 낮추자고 설득시켜 마침내 지금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제단은 성서적 내용을 빌어 큰 통나무 위에 장작더미를 세우고 가시덤불을 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전등을 켜 두었는데 그리스도 수난일 때만 불을 끄도록 했다. 직접 구운 도자기를 촛대로 삼고, 항아리 안에 보리와 밀을 심었다.
박 목사는 한국교회가 그동안 자본화 되고, 시장화 되고, 권력화 되어 왔지만, 그것을 개혁할 실천적 삶은 농촌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 생태를 지켜내는 것을 당면과제로 삼는다. 하나님의 영성을 느끼는 것도 시골에서만이 가능하다.
“저는 혼자 산에서 비박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 새벽녘 별을 보거나 햇살이 떠오르는 그것을 보았을 때 짜릿함이 있어요. 그 짜릿함이 신과 연결되는 것인데, 명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어쨌든 내 안에 신앙화 되어 있는 기독교 신앙이 있으니까 그걸 보고 느끼며 하나님의 영성이 이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거죠.”
농촌교회의 현실은 물론 어렵다. 시골교회에 목회를 할 신학생들도 점차 없어지고, 농촌교회는 다만 도시교회로 옮겨가기 위한 한 거점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임상교회에 목회실습을 온 목사후보생들이 농촌교회에는 유일하게 11명이었다. 마침 종교개혁주일날 온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마치 수도원 분위기가 났다. 그때 박 목사는 ‘다시 한 마리 백조를 꿈꾸며’라는 설교를 했다.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가 화형을 당했는데, 후스가 보헤미안 지방에는 구스(거위)로 불리었다고 한다. 후스는 자신은 부패한 교회권력에 의해 불타 죽지만, 백년 후에는 백조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백년 뒤 마틴 루터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길 하면서 우리 교회 뿐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농촌교회를 봤는데 여러분이 본 선배들은 검게 그을린 거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한 마리 백조가 나타날 것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강의하는 학교의 학생이기도 한 그들을 보고 저와 여러분은 동역자다 하는데 제가 왈칵 눈물이 나더라고요. 예배가 끝나고 그 사람들을 보니 다 울어요. 존경하는 마음은 물론 가지고 있지만 현실적인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상황에선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 어렵다는 말을 하면서요.”
인터뷰 도중에 애린양로원의 원장인 한규택 장로가 들어왔다. 염천 한상용 장로의 맏손주인 그는 박 목사가 오면서부터 생각을 새롭게 많이 바꾸었다고 했다.
임상교회가 자랑할 만한 곳이래도 내색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교육 받았고, 또 모태신앙으로 평생 이 곳에서 살아왔기에, 다른 교회와 비교도 해 볼 생각을 안했다고 했다. 한규택 장로는 박 목사를 만나면서 생각이 성서적으로 바뀌어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올해 73세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수를 믿었고, 제 처가 쪽도 모두 예장 장로이고 권사이고, 목사도 있고 그래요. 그런데 지금 목사님 만나 새롭게 성경 공부 하면서 생각을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처가에 가서도 성서를 알려면 제대로 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말해요. 박 목사님을 10년 전에 앞서 만났다면 신앙생활이든 뭐든 더 달라졌을 텐데,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박경철 목사는 임상교회의 특징을 예배가 가장 다르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리마예식서를 거의 하려고 하며, 중요한 건 교회력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점이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의 삶은 교회력 삶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벽기도는 주일에 있는데, 불을 밝히지 않고 동틀 무렵 시작한다. 박 목사도 설교는 하지 않고 앉아 묵상을 한다. 새벽이 주는 영성을 느끼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자연의 흐름에 따라 흐르는 하나님의 영성과 만나기 위함이다.
임상교회로 오면서 본 너른 들녘이 혹 하나님의 영성이 아닐까. 김제시 용지면 반교리. 점점 좁은 지역으로 들어가는 데도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분이 벌써 마음속에 임재하고 계셨기 때문일까. 그래서 마음을 쉬이 주었던 것일까. 자꾸 궁금증이 났다. 물어볼수록 행복한 느낌이었다. 바람이 불고, 융단처럼 깔려 있던 은행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몸을 내맡기며 어디론가 하염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교회와목회 (2007년 1월호)에서 퍼온 글입니다. 글_이영란·사진_김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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