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시와사람} 여름(통권 제77호)
아, 그랬습니까?/ 금은돌
내 사람이 될 수 없을 때
당신은 참 좋은 분이라 말해 드립니다.
이불 안에 품을 수 없는 행성일 때
다소 쓸쓸한 구두코 주름과 마주칠 때
두툼하고 낮은 언덕 같은 목소리에 기대어 보고 싶을 때
같은 버스 안에서 기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
치마를 먼저 걷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만으로
내 칼을 무디게 해 줄 수 있는 호흡이어서
막 내린 공항버스에서 다른 여자의 짐을 내려 줄 때
비집고 올라오는 질투가 좋아라.
괜스레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며
먼지 날리도록 웃어보는 것이 좋아라.
행성 근처에 맴도는 것이 좋아라.
불가능, 이라는 낱말로 차오르는
넉넉한 막막함이 좋아라.
구두코 주름진 그늘 아랫자락에서
비행기 좌석 앞, 뒤, 옆에서
부서지는 먼지를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
깊은 설렘, 당신이 모르도록
엷은 인연, 그대가 모르게
10년 뒤 어느 창가에서
벙어리 손짓으로 고백해 보고는
아, 그랬습니까? 아, 그랬습니까?
하는 말, 듣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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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미사/ 김효숙
나무는 지금
물드는 게 아니고 버리는 중이다
태생이 붉은 알몸이라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물만 들이던 잎새는
물을 버리고 붉게 우화한다
저 타오르는 단풍들
비우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강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앉기 위한
깨끗한 마무리
마지막 장엄미사다
마른 잎 같던 한 사람
가뿐하게 져 내려
빈 껍질 벗어 단풍나무 숲에다 불 지르고
강 건너
북망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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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와사람} 가을(통권 제77호)
통영(統營)/ 이진우
왔는데도
그리운
보기에도
아까운
눈물 나게도
고마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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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발성/ 박완호
문득, 길들이 송두리째 지워졌다 언젠가 가볍게 던진 말들이 부메
랑이 되어 날아들었다 칼날에 스친 말들, 잘려나간 받침들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이별의 기미는 자주 모음엣 비롯되는 법, 안녕, 이라고
말하는 여자의 얼굴이 물낯처럼 반짝였다 햇살 아래 서 있는 사람은
해 지는 데서 왔는지 몰라, 그리로 한 발 다가서면 늘 한 발짝 앞서
비껴가곤 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마다 고개가 젖혀지며 나는
소리보다도 먼저 그림자를 놓치고 있었다 어떤 사랑은 임계점을
넘지 못한다 붉은 신호등 앞에 설 때마다 누군가는 이별을 말하지만
그 소리는 번번이 귓전을 비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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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문정영
나를 건너려고 너를 잡는 순간
하나는 여기 있고 또 하나는 멀리 있다
하나는 건너가고 하나는 건너온다
쓸쓸한 것 오래되어 멀리 있는 너를 한 손으로 잡으면 두려움이 출렁인다
그때 내가 잡고 있는 네가 생명인 줄 알았는데 그 길 건넌 후 나는 너를 돌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는 가는 줄을 잡고 건너가고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오는 줄을 잡고 건너오고 있다
무어라 물으면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말이 다르다
한때 건너려는 길이 같았고, 그 길 건너려 따뜻한 손 너에게 내민 적이 있었다
손을 놓으면 그 아래는 문신한 눈썹 같은 상처뿐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줄 알면서도 그 손 놓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
네가 줄이고 내가 길이었을 때, 가끔은 네가 길이고 내가 줄이었을 때 아무 것 묻지 않고 서로를 건너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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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 장두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인생의 속살을 만져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고
비로소 해묵은 꿈에서 깨어난다
지나온 발끝에서
찬란했던 별들은 안개 속에서
빛이 바랬지만
내가 만지는 인생의 삶에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는
뜨거운 삶의 체온을 느낀다.
그러나 이토록 달아오른 체온은
영원히 식지 않을 것이다.
쓰고 단맛이 임무를 교대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삶의 숭고함을 어루만지며
또 다시 찾아오는 생의 희열 속에
무한한 축복의 서광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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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는 롯데마트에서/ 서연정
시간이 정지된 곳 도깨비에 끌려다닌다
청빈이라 우기던 풍성한 가난
허기를 사들인 건가
고프다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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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나무/ 서연정
눈바람이 키워온 아름드리 빛줄기
등허리에 서원을
정수리에 사원을
선 채로
사백서른 해
못다 읽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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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어맨/ 박정석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김수영이 쓴 말이다
배추뽑기 알바하는 할머니 엉덩짝에
깔려 있다
방바닥도 따지고 보면 넓은 의자
잠자고, 밥 먹고, 사랑을
의자 위에서
버스기사는 늙어간다
목 좋은 사설독서실은 몇 달째 만원이다
마트 캐시어의 의자는 화장실에 있다
의자라는 인생
의자라는 의지
의자라는 의절
체어맨은 우리말로
회장이다
학과장이다
휠체어를 미는 사람이다
가마꾼이다
우리는 빙그르르 돌아간다
어디서 멈춰야할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 줄 모른다
극에서 극으로 끌려 다닌다
체험보다 빠르고
체험만큼 거대하다
싸가지 없이도
지치거나 출렁거리지 않는다
의자는 의지가지없는 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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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와사람} 겨울(통권 제78호)
빈 집/ 김승종
추석 전날, 둥근 달 뜨려 하는데
돌아온 마누라가 이제야 돌아오겠다고 하네
아, 돌아오네 나도 돌아오네
마누라와 아이들이 오손도손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오네 추석 전 날 빈집으로 돌아오네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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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이정민
누군가
나무의 곁가지를 베어내고
약을 발라 놓았다
꽃 같다
상처가 아름답구나
너는 말했다
상처투성이 마음에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름답다는 말
꽃다운
상처를 품고
아름다워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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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2/ 석정호
외아들을 하나 둔 할머니는 끊임없이 어머니와 고부갈등을 일으
켰는데 어느 날은 마을을 돌아다니던 장사치에게 밥솥 하나를 샀다
고 또 쥐 잡는 고양이처럼 몰아세우기도 했다 삼대독자로 농사일을
할 줄 모르는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할머니 편만 들고 어느 가을걷
이가 한창인 오후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읍내의 이모집에 가는 것이
분명한 옷매무새도 머리카락도 헝클어진 어머니가 끈 떨어진 연처럼
바람에 날려갈 듯 흔들리며 걸어가는 것을 만났다 나에겐 눈길도 주
지 않았다 할머니 아버지 패에게 또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 일이 있
고 하루쯤 지난 저녁이었을까 돌아온 어머니를 또 어떻게 구멍을 막
고 몰아댔는지 부엌에서 숨죽인 울먹임이 들리더니 늘 뻘처럼 깊이
를 알 수 없는 표정과 눈빛 속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걸
어 나와 며느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할머니의 이마를 담뱃대로 땅! 한
대 내리치는 것이었다
경상북도 문경군 공평면 대로변에 그냥 잡초 밭인 듯 물풀들 우거
져 않은 보이지도 않는 늪이 하나, 다만 이곳은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팻말을 세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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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내란 영상에서/ 전학춘
다 드러냄보다 조금은 남기라 했든가
히잡으로 머리 두른 채 먼 허공 응시하는
눈 코만 살짝 열린 이슬람 여인,
슬픈 아름다움이다
조국 예멘의 전란에 홀로 끌려간 연인 찾아
온종일 소코트라섬의 적막한 바다에 젖어
어둑한 하늘 끝 구름 향해 시선을 담근 그녀
약속 없는 끝길 같은 밀물에 오늘을 거두고
긴 치마에 얼굴 파묻는 소녀에 입 닫힌 하늘
저널의 섧은 영상에게
눈물 한 점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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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에서/ 금란
아버지는 오늘도 마당을 쓴다
흙의 뼈가 드러나도록 쓴다
먼지까지 골라내어 쓴다
항아리 뚜껑처럼 윤기가 흐르는 마당
동네 어르신들은 볼 일이 있어도 결코 집 안으로 들어서는 일이 없다
의식처럼 신발을 벗어야만 될 것 같은 번거로움이 싫은 이유다
적막이 동그랗게 내려앉은 마당 구석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공기놀이하듯 쥐었다 펴보는 손바닥으로
애인의 허리가 만져지는지
끈적거리는 중얼거림이 마당을 가득 채운다
집 밖에서 기다리는,
지루한 엄마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는
마당에 돋아난 잡풀을 발정난 애인처럼 끌어안고 있다
마지막 애인이 될 지도 모를 잡풀은
사지를 벌리고 가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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