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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캐나다 한인문학가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조정숙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1982년 {시운동} 4집으로 작품활동 시작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지훈문학상 등 수상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97),
{산책시편}(민음사, 2000),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2003), {제국호텔}(문학동네, 2004)
산문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문학동네, 2003)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시
(류신/문학평론가)
이문재는 '도보 고행승'을 꼭 빼어 닮은 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사막이나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고행승의 선(禪)적인 포즈를 흉내내지 않는다. 또한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방랑시인의 음풍농월을 따라 부르는 법도 없다. 오히려 그는 느슨한 산책을 좀처럼 허가하지 않는 도심의 한복판을 걸으며 현실의 풍경을 세세히 돌아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부분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된다.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중심에서 그의 시적 모반의 전략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도시를 다음처럼 규정한다. "느림보는/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도시에게 당하고 말지요/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 ―散策詩 3').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는 빠른 것이 미덕이된 우리 사회의 숨가쁨과 헐떡거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반석(盤石)으로 깔려 있다. 발전을 위한 발전, 그 무한 질주의 급류 속에선 누구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 마련이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이런 광(光/狂)적인 스피드에 휘말려 그 흔적을 감추기 십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속도 숭배의 폐해와 위험성에 제동을 걸고,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게으른 사람만이 볼 수 있다"('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고 당당히 말한다. 전진만 있고 역진(逆進)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그 직핍한 세상을 천천히 에둘러가며 속도의 에스터시에 파묻혀 있던 삶의 진실과 실상을 찬찬히 끄집어낸다. 우리들은 지금 아주 아주 바쁘게, 지나치게 조급하게, 너무나도 조바심치며 앞으로, 앞으로만 줄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시인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에서 초고속 '정보고속도로'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디 한 곳, 오랫동안 편안하게 눈맞춤 할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변화면서 질주한다. 지속이 없다. 순간적으로 지지고 볶는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이리 저리 뛴다.
그래서 "깜빡거리는 것들은, 위험하다/엘리베이터 표시등, 병원 약국의 번호판/횡단보도 신호등, 카드공중전화의/액정화면, 컴퓨터 커셔……/이것들이 무시로 깜빡거리며/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버린다"('저 깜빡이는 것들'). 실로 끔찍한 세상이다. 우리가 이문재 시인의 조금은 헐겁고 느슨한 사색의 소롯길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다림'의 시학과 '느림'의 미학으로 구축된 그의 시의 풍요로움이 가만히, 여유 있는 보폭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
이문재/ 기사제공 : 한겨레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죄인입니까?" 스승이 말했다. "늘 죄만 생각하는 사람이 죄인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그 죄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는 파격적 견해다. 바꾸어 말하면,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죄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 그 역시 죄인이라는 일갈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생각'의 위력을 깨우쳐 주고 싶었으리라. 한 생각 바꾸면 내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화한다. 문제는 늘 내 안의 한 생각이다! 인도의 성자 라마 크리슈나의 말이다.
몇년 전, 조셉 켐벨의 신화학을 쉽게 풀어 쓴 책에서 저 구절을 접하고 난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름대로 번역해서 써먹곤 했다. 편집자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늘 책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답했고, 기자는 누구냐는 질문이 들어오면 늘 기사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대꾸했다. 어쩌다 시창작 특강을 할 때도, 시인이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말문을 열곤 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항상 시만 생각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인은 시를 쓸 때만, 시를 구상할 때에만 시인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 무한 경쟁 시대에 시에 대한 생각은 돈에 대한 생각(김수영이 그랬듯이)이 압도해 버릴 때가 많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해서, 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그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다. 시를 생각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이다. 온몸과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우주와 호흡하는 상태. 몸과 마음의 경계인 감각을 렌즈로 삼아,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의 맥락과 징후를 새롭게 읽어내는 열외의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늘 시만 생각하기 위해서는 수도자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극한 인위가 필요하다. 8년 전인가, 일본 나가노 현에 살고 있는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소설 『물의 가족』 『천년 동안에』, 수필 『소설가의 각오』 등으로 국내에도 열성 팬이 제법 있는 작가인데, 탐미적이면서도 강인한 문학 세계 뿐만 아니라, 자기 관리가 엄격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서북쪽으로 네 시간을 달려 시나노 오오마치에 닿았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겐지의 집은 논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집 뒤로 해발 3천m가 넘는 북알프스 산맥의 능선이 늠름했다. 오직 원고료 수입으로만 살고 있는 일본 '순문학'의 대표주자. 아이를 낳으면, 생활비가 많이 들어갈 것 같아, 부인과 단 둘이 지낸다. 문학을 위해, 세속적 삶의 조건들을 거의 다 포기했다. 하루 일과도 규칙적이다.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체력을 관리한다. 체중이 늘고, 머리도 둔해지기 때문에 저녁은 먹지 않는다. 술과 담배는 물론 하지 않는다. 도쿄 문단이나 중앙 언론과도 끊고 산다. 수도승과 다를 바 없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늘 삭발을 하고 있어서 수도승 이미지가 더 강조돼 보였다. 왜 삭발을 했느냐고 물었다. 겐지는 이렇게 답했다. "쉰 살 생일 아침에 문득 거울을 보니, 문학에 대한 각오가 자꾸 느슨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면도칼로 머리카락을 밀며 마음을 다잡는다." 겐지야 말로 진정한 소설가였다. 늘 소설만 생각하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밀어낸다. 수염처럼 자라나는 삿된 마음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겐지는 "소설은 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몸이 곧 자신의 펜이다. 한때 오프 로드 오토바이를 즐기기도 했던 그는 예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확보하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의 빼어난 문장과 상상력은 바로 저 삭발한 머리와 깨끗한 몸에서 나왔다. 시나노 오오마치를 떠나면서, 나는 술과 담배로 찌든 내 몸이 생산해 낸 시들에게 송구스러웠다.
내 몸의 상태가 단정해져야 한다. 우주 앞에서 당당한 자유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내 삶의 모양이 보다 단순해져야 한다. 순정해진 몸과 마음이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밖에서 오는 우연한 영감은 없을지 모른다. 문학적 감수성이란 결국 몸의 감수성일 것이다. 그동안 외면하고 무시해왔던 '지극한 인위'가 절실해지는 봄날이다.
어떤 어둠도 어김없이 밝히는 꼿꼿한 심지
'답다'라는 말이 있다. 학생답다, 사내답다 심지어 너답다…. 학생답기 위해서, 사내답기 위해서, 나답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하고 순응했던가. 그렇다고 딱히 ‘답게’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긴 하지만, 이 ‘답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에 항거해보기로 작심을 한 적도 있다. 언제부턴가 시작되어 여전히 진행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은 고민이 있다. ‘시다운 시’란 어떤 시일까?
마음이 너무 들떠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나 반대로 마음이 너무 무겁고 가라앉을 때면 가까이 두고 꺼내보는 시집이 있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노독> 부분)이 가 닿는 곳이라고나 할까. <마음의 오지>는 어떤 어둠 속에서도 어김없이 꼿꼿한 심지가 되어 마음을 밝혀주곤 했다.
나는 <마음의 오지> 안에 둥지를 틀고 한참씩 놀다오곤 한다. 가끔 부화가 되어 이 보금자리를 쪼는 연한 부리의 존재를 생각하기도 하고, 날개를 퍼득이며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어떤 것을 보기도 한다. 시 편편이 좋지만 시집의 끝에 시인이 쓰는 시 이야기 ‘미래와의 불화’도 좋다. 참 좋다.
떠도는 방랑자의 길 찾기 김종철(문학평론가, 『녹색평론』 발행인)
이문재의 초기시들은 지금 이곳을 연옥처럼 헤매는 젊은 망령의 중얼거림으로 가득하다. 그의 꿈은 죽을 때까지 제 죽는 곳을 가꾸는 것이지만, 저처럼 스러져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무 아래 눕기만 해도 나무를 돕는다고 말하는 그가 혹, 지금 당신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면 당신을 돕는 것이다. -이성복(시인)
1988년에 나왔던 이문재 시인의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가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원래 발표순으로 묶었던 것을 3부로 나누고 몇 군데 손을 본 것말고는 거의 처음 그대로다. 시인 자신이 "2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시들도 있다"고 했지만, 이때 '20년'은 단순한 시간의 기호가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조차도 아득한 시의 첫 강림, 그 태반(胎盤)의 풍경을 가리키는 걸 게다. 독자 역시 이문재 시인의 '처음'을 만나는 아득한 기쁨을 공유할 수 있을 테고.
길을 떠난 방랑자의 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최동호 교수는 그의 시를 가리켜 "방랑자의 길"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그의 첫 시집에는 「방랑자여 슈파……로 가려는가」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줄 때」 「저문 길이 무어라 하더냐」 「어디로 가는 길」 「길에 관한 독서」 「길」 「길 연작 3」 등등 방랑자의 초상이 짙게 드리운 시편이 많다. 일찌감치 세상과의 불화를 운명화해버린 몽상하는 소년의 이미지가 시집의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로부터 '길떠남'의 상상이 시적 사유의 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2003
기자는 이문재(44) 시인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최근 이 시인이 펴낸 ‘내가 만난 시와 시인’(문학동네)을 통해 시인을 만났다.
만나 보니 그에게는 출생지가 없었다(책은 시인이 선후배, 동료 등 20명의 시인과 가진 인터뷰집이다. 기자는 이 인터뷰집을 통해 저자인 이문재 시인을 인터뷰했다). 시인이 말한다.
“나는 출생지가 제거되었다. 시간적으로는 물론, 공간적으로 고향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행정적으로도 말끔히 삭제되었다. 김포 해안 쓰레기 매립지 근방이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곳.”
결국 인터뷰집인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만난 것은 그 20명 시인의 모습에 되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인터뷰는 대개 상대의 삶을 통해 내 삶을 이야기한다. 이씨는 이번 책에서 그 ‘거울이 되는 인터뷰의 길’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가 자신이 시인이란 사실에 대해 느끼는 바는 무엇일까. “시인은 이제 흔적이다. 화석이고 박제이다. 그 시인의 목에는 명패가 하나 달려 있을 뿐이다. ‘옛날에 시인이란 인생이 있었다’는 안내판. 시인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완료형이다.”
자신처럼 과거완료형이 된 시인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당대의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이다. 이성복 황지우 유하 송찬호 김혜순 이윤학 도종환 최승호 등….
이들의 삶과 시에 대한 애틋함과 연민, 굳건히 시인의 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 대한 경이와 존경이 시인론마다 묻어난다.
결국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한국현대시단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삶과 문학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에 슬쩍, 때론 강렬하게 숨어들어가 있는 시인 이문재의 인생이다.
/김영번 기자
2004
『마음의 오지』이후 오 년 만에 내놓는 이문재 시인의 네번째 시집. 시인의 언어는 부드러운 폭력으로서의 제국, 네트워크로서의 제국이라는 이 '멋진 신세계'의 참혹함에 대한 통렬한 시적 고발이다. 시인이 거기에서 달아나기 위해, 혹은 거기에 맞서 되살려내는 자연과 육체성에 대한 촉감과 기억은 애절하고, 결연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옛집 푸른 지붕을 떠나, 아버지의 평야를 등지고 땅의 끝까지 갔던 시인은(『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다시 돌아와 도시의 산책로 바깥에서 느리게 어슬렁거렸고(『산책시편』), 그 길의 바깥에서 오래된 미래, 농업박물관을 발견했다(『마음의 오지』). 그리고 지금 시인은, 이 21세기 디지털 도시의 한복판, ‘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는 자신의 근황을 전한다.새 시집의 화두는 ‘제국’이다. 이제 와서, 제국이라니, 식민지라니? 그러나 시인은 단호하게, 지금-여기를 제국의 변방, 또는 제국의 식민지라고 부른다.
시집의 발문을 쓴 고종석의 표현대로, 이 제국은 ‘촘촘하지만 부드러운 네트워크의 폭력’을 통해 관리되는 사회다. 스타벅스와 맥도널드와 온갖 스팸메일이 가득하고 천지사방에서 전자파가 난반사하는, 장벽이 무너져 모든 것이 장벽인, 오래된 책 표지들이 멈춰 서 있고 분수대에서 누런 피가 솟구치다가 굳어 있는, 더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는, 참혹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시인은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정경을 옮겨놓으며 “젊은이들은 / 관음증 환자인 동시에 노출증 환자였다”고, “제국에서 / 이루어진 꿈은 꿈이 아니다 // 그대들의 꿈★은 늘 미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냉소하기도 한다(「제국호텔―인도에서 소녀가 오다」).
시집의 화자는 이 제국의 변방에서 본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 “본국에서 가져온 가루약을 먹고 / 나른해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그는 그러나, “물이끼를 만져본” 기억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제국호텔―더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 그 ‘자연’에 대한 ‘감각’의 ‘기억’이, 제국으로부터의 절실한 탈주를 모색하는 단초가 된다. 그것은 곧 ‘전원(電源)이 곧 삶’인 이 제국의 네트워크에서 ‘도처의 전원을 끊고’ ‘두 손 두 발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냄새에 즉각 반응하고’ ‘피부를 활짝 열어놓는’ 일이다.
‘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일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멍하니 몸이 몸으로 돌아오는 사태를 만끽하는’ 일이다. 이렇듯, 여기 제국의 이면을 바라보는 형형한 부정의 시선과 자연과 몸을 향한 경건한 기도가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그의 덕분에 우리는 ‘제국호텔’이라는, 지금-여기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강력한 은유를 하나 가지게 되었다. 더불어 우리 시는 『제국호텔』의 도저한 부정의 시선 덕분에 지금-여기에 대한 더 치열하고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나는 걷는다 / 내가 걷는다
시인은 물이끼의 촉감을 기억하듯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무렵쯤에 속할 그 기억은, 예컨대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보거나 ‘라일락 하얀 꽃그늘 아래 꼼짝 않고 서’ 있거나 할 때 문득문득 시인에게 찾아오곤 한다. 「소금창고」 「일본여관」 「집중호우」 등의 애잔한 시편들에 담긴 그 기억은 깊고 진실해서, 때로 그로 하여금 ‘젖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기도 한다. 몸과 자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억에 대해 경건하다. 그래서 자신의 열일곱 살에게 “너와 나, 아니 나의 모든 나들은 이제 함께 가야 한다”(「기찻길은 기차보다 길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그 다짐이 과거를 미래로 만들며 그를 계속 걸어가게 한다.
시인은 지금도 걷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 “젖은 신발 벗어 / 해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나는 걷는다」). 혹은 “흠뻑 젖은 구두를 벗어 제국에게 보여주기도 할 것이다”(‘시인의 말’,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개정판)라고도 말한다. 요컨대, 그는 지금 그를 찾아온 ‘나의 모든 나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그는 생태학적인 관심과 제국이라는 화두가 그에게 아나키즘을 호출하고 있다고 했다(같은 곳). 시인이 앞으로 우리에게 전해줄 근황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상처를 치유하는 시인의 메타포
이문재의 초기시들은 지금 이곳을 연옥처럼 헤매는 젊은 망령의 중얼거림으로 가득하다. 신열에 들뜬 몽유병자의 헛소리와 헛손질에 놀란 새들은 공기의 슬픈 틈새로 날아다니고 이내 공기는 돌처럼 딱딱해진다. 수천 마리 양떼 염소떼 구름들을 몰고 어떤 종교의 발생지로 향하는 그의 꿈은 죽을 때까지 제 죽는 곳을 가꾸는 것이지만, 저처럼 스러져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무 아래 눕기만 해도 나무를 돕는다고 말하는 그가 혹, 지금 당신의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면 당신을 돕는 것이다. -이성복(시인)
나는 때로 이문재 시인이 언어를 좀 고단하게 부린다고 느꼈었다. 그것은 말들의 몸, 말들의 성감대에 대한 예리한 장악과 드문 자신감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행여 지나칠 때 말에 대한 일종의 성도착과 절망에 빠질 수도 있으리라는 염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다. ?제국호텔? 연작들은 이 멋진 신세계의 참혹에 대한 시적 적발로서 통렬하며 「소금창고」 「집중호우」 들에 고인 슬픔은 매우 깊고 진실한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떤가, 이제 말의 몸을 넘어, 말의 혼 같은 것을 보고 만지고 또 기다릴 수 있게까지 된 것인가. 미당 선생이 말씀하신 ?귀신하고 상면은 되는 나이?쯤에 이문재 시인은 이른 것인가. ― 김사인(시인, 동덕여대 교수)
시인이란 결국 남의 일을 자신의 일로 기억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한 기억의 능력에서 인간에 관한 일을 보편적인 진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의 힘이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이문재는 타고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많은 경우 끊임없는 자기 집중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자기를 비우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 /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만, 그의 부단한 자기 응시는 자기 집착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거나 버리려는 노력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이처럼 비워진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세상을 볼 때, 만물은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명의 진리가 한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문재의 시가 갈수록 생태적 관심의 흔적을 짙게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그의 내면적 움직임의 방향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경제만능주의에 의해서 급속히 부서져내리고, 우리의 삶은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다. 경제든, 정치든, 문화든, 엘리트들의 권력욕망에 의해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져가는 세계의 상처를 시인은 오로지 메타포로써 치유하려 한다. 그것이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허무의 언어일망정 누군가 우리의 망가져가는 삶을 꿰매고자 부단히 눈을 뜨고, 자신을 다스리려는 정신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
바깥의 사유, 바깥의 시
― 이문재와의 만남 ―
인터뷰/ 이홍섭(시인)
이문재 시인과의 만남은 언제나 편안하고 설렌다. 그 편안함은 그가 늘 타인에게 섬세하게 눈높이를 맞추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설렘은 그의 몸짓과 말투, 목소리에서 외로운 도보 고행승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대담을 하려고 했으나 시인은 쑥스럽다며 서면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질문요지를 미리 보낸 뒤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 부근에서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놀다가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 정성스런 글이 도착해 있었다.
엉성한 질문과 정성스런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삶을 옥죄는 문명과 자본의 횡포 속에서 시쓰기의 의미와 시인됨의 자기근거를 찾아가는 한 시인의 고행을 따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홍섭)소월시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소감문 제목 밑에 붙어있는 ‘어서 시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부제가 인상적이던데요. 혹 시인께서 원래 수상소감문 제목으로 삼았던 구절이 아니었는지요.
(이문재)그렇습니다. 늘 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강박이 강했지요. 나는 시인은 늘 시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시 쓰는 후배들에게는 늘 시만 생각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나는 시인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지요. 수상소감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열리던 청주에서 수상 통고를 받았습니다. 아마 집이나, 서울에서 수상 소식을 들었다면, 그런 느낌이 덜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시인은 시를 쓸 때만 시인이지요. 그리고 한 편의 시를 쓰고 난 순간, 어서 그 시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합니다. 지금 막 완성된 한 편의 시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쳐야, 새로운 시를 쓸 수 있게 됩니다. 연극배우들은 새 배역을 맡으면, 그 역을 살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씁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맡았던 배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시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어서 시로 돌아갔다가(들어갔다가), 또 어서 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시쓰기는 몸을 상하게 합니다.
― 수상소감문에서 시인께서는 첫 시집 이후 시를 ‘반인간적 문명과 맞설 수 있는 전망 좋은 관측소’라고 여겨왔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이러한 인식에는 변함이 없는지요.
그렇습니다. 양극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가 미국 일극 지배 체제로 바뀌면서, 나의 생각―시는 반인간적 문명의 전모를 파악하는 관측소―은 더욱 굳어지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곧 미국화이고, 미국화는 지구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반생태적 문명화 과정입니다. 이제 지구에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본주의와 무관할래야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종교와 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도 자본주의의 휘하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문학 가운데 시만은 자본주의와의 연관이 희박합니다. 저는 시집이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른바 인기 시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 대중문화의 시대에,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것은 대중들의 입맛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대중들과 거리를 둔 채, 전망 좋은 관측소에서 이 반인간적 문명의 범죄상을 지켜보고자 합니다. ‘시인과 농부’라는 음악이 있지요? 주페라는 사람이 작곡한 것으로 아는데, 나는 그 작곡가가 뛰어난 선각이라고 봐요.
지구를 과도하게 사용하면서, 결국 인간의 인간다움을 앗아가는 이 문명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삶은 시인과, 소규모 유기농을 하는 농부밖에 없다고 봅니다. 시와 소규모 유기농 농산물은 자본주의의 네크워크에 편입되지 않습니다. 시인과 농부가 수행하는 바깥의 사유를 저는 옹호합니다.
― 시인의 최근작들을 읽을 때마다 문명의 대안, 혹은 참다운 미래를 찾으려는 힘겨운 몸짓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가끔 내가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정도로, 문명의 현실과 그 대안에 매달려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20대 후반, 한창 직장 생활에 적응하고 있을 때, 대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시간이 채 10분도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억울했습니다. 삶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따위의 질문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시를 더욱 움켜쥐게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기댈 언덕은 시쓰기밖에 없구나. 시 밖에서, 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른바 ‘느림의 시학’으로 이동했는데, 그때 내 몸이 처해 있는 현실을 곰곰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몸이 엉망이었습니다. 몸은 우선 감각인데, 감각들이 만신창이였습니다. 시각만 비대해지고(그래서 나는 시각 패권주의라는 말을 만들어서 애용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은 퇴화하다시피 했습니다.
다섯 가지 감각이 온전해야 온전한 몸이 아닐까요. 산업 문명은 다섯 가지 감각을 기형화하며 진전해온 문명입니다. 산업 문명이 고안하고 유포한 도구들을 보십시오. 모두 다섯 가지 감각과 연관됩니다. 자동차는 두 발을 퇴화시켰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은 시각을 이상 발달시켰습니다. 도시 생활은 후각과 미각의 기능을 현저하게 떨어뜨렸습니다. 감각에 관한 한 인간은 ‘인조인간’입니다.
이 인조인간은 전원에 플러그를 꽂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전기인간’이기도 합니다. 나는 감각의 복원을 통한 몸의 복원이 참다운 문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진화해온 감각들이 거대 도시에 던져지면서, 지체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감각들은 시차를 적응하지 못하고 있거나, 문화 충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속도, 정보, 지식, 접속, 전원 따위의 개념이나 가치, 삶의 방식들이 나의 적들입니다. 나의 일상은 아직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적들로부터 떨어져 있는 독자적인 삶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립하는 삶, 자족하는 삶, 자존하는 삶 말입니다.
― 수상소감에서도 나와 있지만 최근작들을 보면 시인께서는 참다운 미래를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뭇 생명’이 보호받고, 옹호되는 세계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이 시를 관념화시키고, 단순화시킬 우려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나는 디테일을 숭상합니다. 글쓰기에서 디테일을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관념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과 직관에 길들여져 있는 탓인지, 관념적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때도 있습니다. 가끔 관념적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관념과 추상으로 어떤, 아주 쓸모 없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관념적이라는 말처럼 ‘순수’한 말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뭇 생명이 보호받는 세계는 생태적 상상력이 가동되는 세계이겠지요. 다른 말로는 유토피아겠지요.
유토피아란 ‘없는 곳’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데, 없는 곳을 지향하는 노력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실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듯이, 유토피아도 죽음 이후의 세계와 같은 것 아닐까요. 우리가 경험할 수 없지만, 늘 우리의 삶과 사유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존재. 언젠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태어나면서 내 죽음도 함께 태어나는 것이지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아주 빛나는 관념적인 시를 써보고 싶습니다.
다음은 단순화의 문제인데, 단순화도 나의 소망입니다. 단순함이 갖고 있는 힘과 영원성을 부러워합니다. 삶이나 글이나 단순할 수 없기 때문에 그토록 지리멸렬하고 장황한 것 아닐까요. 단순한 삶을 영위하며 단순한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극한 인위’라는 개념을 발명해 놓고 있는데, 우리가 노장의 세례를 받아서 무위, 무위하고 있지만, 무위는 거저 멍하니 있다고 해서 찾아오는 경지가 아닐 것입니다. 지극한 인위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인위를 통해서 단순함을 체화할 때, 무위적 상태에 닿을 수 있겠지요. 사랑이 곧 지극한 인위 아닐까요. 자기 극복이란 것도 지극한 인위겠지요. 자발적 가난, 자발적 망명도 지극한 인위의 한 구체적 장면들이겠지요.
― 최근 시인이 가고자 하는 세계는 다분히 불교적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명의 폐해를 벗어날 수 있는 불교적 해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스님들은 좋아하지만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저에게는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 대웅전에 가서 절을 하며, 기도를 올려보기도 했는데, 이런, 절을 어디에다 해야 하는지, 또 속으로 어떤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절을 하면서 가능하면 단순한 문장으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가 간절함의 전압이 높다면, 부처님이 알아들으시겠지,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란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요. 그런데 스스로 정진해 깨닫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가요. 선원에서 스승으로부터 섬세한 가르침을 받아도 잘 안되는 게 깨달음이잖아요. 기도하는 법이 장애물이 되고 있을 때, 연극하는 선배를 만났더랬습니다. 그 선배는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불교 쪽에 친화력이 있다’고 했더니, 선배가 ‘야, 그거 너무 어려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기독교는 있잖아, 무조건 하나님께 기대면 돼’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아주 약해져 있을 때여서, 기독교식 기도를 올리곤 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화살기도라고 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 화살을 쏘듯이, 짧은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지구를 생각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불교적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엄경이 무엇입니까. 우주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저 돌, 저 풀 한 포기, 저 물 한 방울이 다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요. 불교는 생태적 종교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실천의 문제입니다.
― 수상작 중 하나인 〈지구의 가을〉은 지리산 실상사의 공양게송으로 시작됩니다. 실상사와의 인연은 오래되었는지요.
1992년 가을, 선우도량 1주년 때 실상사에 처음 가 봤습니다. 그리고 1994년 조계종이 개혁한다고 몸살을 앓을 때, 실상사에서 올라오신 도법 스님을 서울에서 한두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지난해 봄부터 가을까지 실상사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초파일 직전에 도법 스님을 인터뷰하러 갔다가, 5월 초부터 17일간 수경 스님을 따라서 지리산 850리 도보 순례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해인사 청동대불 조성사업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또 실상사를 출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직업(기자)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나는 지난해 봄과 여름이, 내 개인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몸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수경 스님이라는 선승을 보름 넘게 따라다녔다는 것은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상사 공양간에 걸린 공양게송으로 문학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실상사와 나와의 인연은 결코 작달 수 없지요. 요즘도 마음은 자주 실상사에 다녀옵니다.
― 잡지사 기자와 《문학동네》 주간을 거쳐 현재는 〈시사저널〉 편집위원으로 재직중인데요. 혹 이러한 직업의식이 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요.
직업의식이란 것이 내게 있을까요? 시인의식이 부족하듯이 직업의식도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기자라면, 좀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이렇게 멍청한 얼굴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시인과 기자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두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기자란 직업이 고약스러운 데가 있지요. 빙산의 일각인 세상의 모난 데만을 보려고 합니다.
나는 기사를 써서 먹고사는 월급쟁이이지만, 성공한 직업인은 못됩니다. 우리 회사 사장님이나 선후배들이 들으면 언짢아할 이야기지만, 나는 기자를 그만두었을 때,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정말 미련이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직업의식이 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벌써 그만두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직업의식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내가 아둔해서 자각증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18년째인데, 비교적 적성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좀 산만한 성격인데다, 어디 한 군데 오래 앉아 있질 못하고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아마 기자가 되지 못했다면, 화물 트럭을 운전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대륙을 횡단하는 화물 트럭 운전사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 시인께서는 문학적 자전에서 문학청년시절 소설가 박상륭과 시인 김종삼을 좋아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점이 영향을 미쳤는지요.
박상륭 선생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여기저기 하도 많이 써서, 다시 말씀드리기가 새삼스럽네요.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선생의 소설을 꺼내들고 아무 데나 읽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어떤 말들이 꿈틀거립니다. 1990년대 후반, 선생께서 귀국하신 다음에는, 상계동이며 광화문이며 선생님 댁에 마구 쳐들어 가서 ‘행패’를 많이 부렸습니다. 반듯한 ‘시민’들이 사는 캐나다에서 사시다가, 지나치게 역동적인 ‘백성’들이 사는 서울로 돌아오셨을 때, 불편함이 많으셨을 텐데, 선생께서는 한 번도 궂은 표정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선생께는 어떤 거인의 풍모가 있습니다. 우주적 상상력, 유장한 문체, 종교와 신화, 인간에 대한 엄청난 지식, 글쓰기에 바치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과 정성…… 많이 배우고 있는데, 배운 것을 육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지요. 김종삼 선생은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선생의 시를 떠올릴 때마다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듭니다. 언어 경제라는 말이 있지요?
김종삼 선생으로부터는 그 깐깐한 언어 경제에서 비롯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을 배웠다고나 할까요? 박상륭 선생이나 김종삼 선생은 문학의 지향이나 그 방법, 표정들이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수도자적 면모가 있습니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은혜는 돌에다 새겨라.’ 그만큼 은혜는 잊기 쉽다는 것이지요. 은혜를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지요.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문학적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큰 숙제입니다.
― 시인께서는 연배로 보아 현재 문단의 허리에 해당합니다. 앞 세대 시인들과 시인 세대의 차이점은, 그리고 시인 세대와 후배 세대와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30대 후반 어느 날, 내가 갑자기 선배가 되어 있음을 알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무렵, 어느 시 월간지에 시를 발표했는데, 표지에 수록 시인들이 등단 순서대로 실리잖아요. 한 20여 명이었던 것 같은데, 글쎄, 내가 맨 앞에서 두번째인 거예요.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평생 선배가 되리라는 생각을 안 하고 살아왔던 겁니다. 늘 선배들만 따라다녔지요. 특히 김훈 선배는 문학뿐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선배여서, 그 정도가 심했습니다.
술이 고프거나,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자랑을 하고 싶을 때, 또는 고민을 털어놓을 때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선배들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주었습니다. 나는 선배는 으레 그런 줄 알았습니다. 새벽 네 시에 전화를 걸어도, 우리의 선배들은 다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밑에 후배들이 자욱해져 있는데, 아, 나는 그들에게 선배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이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오는 후배들이 원수처럼 보이는 거예요. 새벽에 전화질하는 후배는 쫓아가서 따귀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아, 나는 정말 선배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내가 막내 후배일 때에 견주면, 내 후배들은 잘 모이지도 않고, 모여도 술도 잘 마시지 않는 편입니다. 어떤 단절감까지 느낍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선배들에게 문학은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치열한 작가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악착같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문단은 다른 예술계에 견주어 따뜻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은 이른바 ‘멋’이 없습니다. 예술가적 풍모가 엿보이지 않을 때가 많아요. 시인·작가를 전문인이라고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소설가는 잘 모르겠지만, 시인은 바보입니다. 어리숙한 존재입니다. 영악한 시인은 논리적 모순이에요. 이것저것 다 따지다가 언제 존재의 뒷켠을 보겠습니까. 주류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면, 낮고 작고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바깥의 사유란 바보의 사유입니다.
― 비평가들은 문학의 시대가 갔다고 하는데, 최근 문학잡지는 꾸준히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문학잡지가 느는 까닭은 소위 출판 자본의 크기가 예전에 비해 커지고, 또 다양해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문학 인구, 특히 평론가들이 많아진 것도 한 원인일 것입니다. 군사 정권 시기에 비해 민주화가 조금 진전되었다는 것도 배경이 되겠네요. 문예창작학과가 급증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필자를 확보하고 신인을 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문학지의 양적 증가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몇 개 계간지와 월간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인지 수준 아닙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의 시대와 문학지 창간 붐은 함수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지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묵묵히 시를 쓰는 시인이 있겠지요.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썼을 때, 가까운 문우에게 전화를 걸어 막 태어난 시를 나지막하게 읽어주는 시인이 있겠지요. 어쩌다 읽은 시가 너무 좋아서, 밤길을 달려 그 시를 쓴 시인을 찾아가 맑은 술 한잔을 나누는 시인이 있겠지요. 요즘은 이메일로 좋은 시를 전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문학지에 너무 민감한 것은 시나 시인을 위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문학지에 무심하겠지요.
― 시인께서 발표하신 산문들을 읽어보면 독서경험이 폭넓고, 앎에 대한 욕구가 대단하구나라고 느끼게 됩니다. 앞으로 특별히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으신지요.
올해가 소월 탄생 100주년, 정지용 탄생 100주년입니다. 소월과 지용이 태어나면서 한국 현대시가 태어난 것이지요. 소월과 지용 탄생 100주년 앞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우리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는 1909년에 태어나셔서 1989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국 현대시사가 내 아버지의 생애와 겹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현대시의 역사가 결코 길다고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최근 정민 교수의 글을 읽다가, 다시 아버지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정민 교수의 문제의식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한국 현대시사는 고작 100년밖에 안 되는가, 한국시의 역사를 향가까지 끌어올릴 수는 없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갑오경장 이전의 한국문학과 100년밖에 안 된 ‘현대문학’을 연결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라고 정교수는 말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격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문학보다 우리 고전문학의 콘텐츠가 더 풍부한 것은 아닐까요? 내 아버지 말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요? 불경 공부와 함께 한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 우문 같습니다만, 혹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쓰시겠는지요. 아니면 다른 것을 해보고 싶으신지요.
시를 쓰는 사람이기보다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일상적 삶이 좋은 시와 더불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나는 아마 이번 생에서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농부거나 산림 간수, 도보 고행승 같은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 출처; 유심
[농 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땅에 넘어진 자,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나, 죄 조금 짓고
많이 뉘우치며 살 줄 알았다
밤새도록 번개칠 때
엘리베이터가 공중에서 멈출 때
분만실 앞에서 서성거릴 때
비행기가 뒤늦게 이륙할 때
생년월일시를 댈 때
땅에 넘어진 자는
넘어진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지 않고서는
일어설 수 없다
나, 죄 많이 짓고
조금도 뉘우치지 않고 살았다
나, 죄에 걸려 넘어지고서도
그 죄를 온몸에 묻히려 하지 않았다
*인지이도자 인지이기(因地而倒者 因地而起) : 보조국사 지눌의 법어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치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 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궈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 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
[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2004년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시인과 농부]
밥과 입 사이가
가장 아득한 거리
밥과 입 사이에
우주가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문명도
밥과 입 사이를
좁히지 못했다.
우주의 원(圓)
몸의 원이
밥과 입 사이에서
끊겨 있다.
홍문과 땅 또한
이어져 있지 않다.
밥과 똥
똥과 밥 사이가
두절되어 있다.
이문재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에서
[기도하는 법]
기도하는 법을 놓고 고민을 했댔으니, 내 삶이 도무지 절실하지 않았던 겁니다 무작정 도심 한복판에 있는 대웅전으로 들어가, 넙죽 엎드렸습니다 어느 부처님을 향해야 하는지, 절을 몇 번 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어떤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기도도 해본 사람이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흘낏 절하는 사람들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법이 기도하려는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법(방편)을 몰라 이르지 못하는 법(진리)이라면 그 법은 진짜 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대웅전에서 나는 내가 들고 있는 간절함을 내팽개치려 했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이 정말 여기 계신다면, 내가 법의 밖에서 중얼거린다고 해도, 내 기도가 애절하다면 들어주실 거라고, 그것이 진짜 기도하는 법일 거라고, 나는 우기다시피 했습니다.
대웅전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자꾸 길어지는 거였습니다 부처님 이렇게 해주세요, 부처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갈수룩 이상해졌습니다, 무슨 흥정 같아지는 거였습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싶어, 나는 단순명쾌하게 내 소원만 빌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내 안의 또다른 내가 튀어나와 옆구리를 치는 거였습니다, 야, 네가 뭔데 그렇게 요구만 하는 거냐,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
나는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내 소원은 나를 위한 것에서 내 피붙이들, 정붙이들, 일터, 이웃, 사회, 국가, 지구, 우주로 넓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하나만 잘된다는 게 도무지 현실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나 하나만 잘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나는 기도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시집 {제국호텔} (문학동네, 2004/12/10)
[화살기도]
기도하는 법을 몰라 난감해하는 제게 도움을 주신 분은 삼십 년 넘게 연극 무대에 서온 여배우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그분에 따르면, 기도란 무조건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처럼, 기도를 들어주시면,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약속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하느님께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무 살부터 연극과 함께 살아온, 눈이 아주 크고 맑은 여배우는, 자신은 힘이 없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배역을 살아왔으면서도 여배우는 스스로 깨우칠 자신이 없어 하느님께 의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혼자 힘으로 깨달을 수 있느냐, 그리고 그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 라구요
저는 뜨끔했습니다 무조건 간구하는 것이 기도라는 사실과, 당신은 스스로 대오각성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휘청거렸습니다 저는 충분히 작아져 있었습니다
여배우를 만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또다른 기도법을 얻어들었습니다 마흔이 넘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노작가분이 화살기도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거의 동시에 잃고 실어증에 걸리기까지 했던 노작가분은,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그 무엇이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화살을 날리듯이 하느님께 외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내 아이를 걷게 해주세요,처럼 단순할수룩, 그리고 강렬할수룩 화살기도는 효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생을 살아온 여배우와 또 수많은 삶을 꿰뚫어온 노작가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제대로 전수받은 것이었는데,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에게는 하늘로 쏘아야 할 화살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습니다 제가 하늘로 쏘아올린 첫 화살기도는 이랬습니다
하느님, 저로 하여금 이 많은 화살들을 버리게 해주세요
[활구活句]
대웅전에서 간화선 대토론회가 열린 날이었다
밖에는 소슬, 소슬한 가을비 내리고
법당 안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스님들과 학자들이 부처님 앞에 일렬로 앉아 있었다
마이크는 성능이 좋았고 청중들은 다소곳했다
화두에 대하여, 참선에 대하여, 불교의 미래에 대하여
수십 개 촛대에서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스님과 학자, 신도 사이에서 조주 무(無)자 화두를 놓고
논쟁이 오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런데 나를 만나면?
나는 아직 나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포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대웅전 천장에 빼곡하게 걸린 연등 사이에서
참새 두 마리가 사뿐히 내려와 앉는 것이었다
참새 두 마리가 법당 안에 사선(斜線)을 그릴 때
포르릉, 하고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참새 두 마리가 쌀 뒤주 위에 앉아
연신 쌀을 쪼아먹으며 짹짹, 짹짹거렸다
간화선 대토론회 사이에서 듣는 참새 우짖는 소리
그 새소리가 그렇게 맑고 고울 수가 없었다
젊은 부처들에게 얻어맞아 매번 죽는 부처님께서
씨익, 웃고 있었다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저문 비]
저문 비 내리고
나는 듣는다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보다 깊게 만나는 물방울의
맨 처음을 나는 듣는다 지나가버린 잠을
밟으며 잃어버린 발자국 소리를 건지며
저문 비를 곁에 둔다
오늘이 며칠일까 궁금하지 않던 날들을
저문 비에 젖게 하며
가문비나무 숲속
그믐밤의 흰 것보다 빛나던
그 밤의 파열을 한아름
나는 듣는다
[타워크레인-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7]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
의 것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
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
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
이 먼저 가 닿아 내가 불려가는 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겁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
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
고…… 안구 패여나간 나는 말할 뻔한다, 뻥 뚫려 허당
인 내 두 눈 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밝혀
놓는다, 의안은 울지 않느니 내 정수리 위에 거대한 타
워 크레인 하나 박혀 있다, 엔진 끄지 않는다, 몸속의
엘레베이터도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느니 내 안에 서울
이 죄다 들어와 있구나, 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것
들이, 어,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는 것들이, 저 분명한
것들이
(현대문학. 9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