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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요약
이 책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아준다.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곧 발전이라는 사회 의 보편적 룰을 벗어나 ‘느림’의 철학을 주장하는 저자의 반론은 도태나 일탈이 아닌 ‘여유로움이라는 내적 통찰이다. 한가롭게 산책하며 다른 사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면의 느낌을 적어보는 글 쓰기는 목적도 없이 발맞추기에 급급한 세상사를 초월한, 권태를 즐김으로 인해 얻는 수많은 가치들을 위한 것이다.
저자는 느리게 사는 지혜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며 빈둥거릴 것, 신뢰할 만한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무의미할 때까지 반복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권태로움에 빠질 것, 자기 안에 희미하나마 예민한 하나의 의식을 간직할 수 있는 꿈을 꿀 것, 가장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릴 것, 마음 의 고향 같은 존재의 퇴색한 부분을 간직할 것, 술을 마실 것, 절제보다는 절도를 가질 것 등을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되풀이되는 ‘하루’의 분주함이 아니라 ‘하루’의 감성적이고 시적인 형태를 포착하여야만 한다. 아침에는 햇살이, 저녘에는 어둠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웃음이나 불만이 어떻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빠른 현대 리듬 속에서도 굼뜨게 사는 능력이다. 천재나 예술가의 특이한 능력들 중 하나도 고급스런 게으름뱅이 기질이다.
차례
머리말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 한가로이 거닐기
-고급스러운 권태
-모데라토 칸타벌레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
-문화적 흥분
-하루의 탄생
머리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느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하다. 흔히 느린 사람들은 고집이 세다는 소리를 들으며, 매사에 동작이 굼뜬데다가 서투르다는 말도 듣는다. 심지어 매우 힘들고 까다로운 작업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워낙 행동이 느려서 그렇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좀 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여유 있는 동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도 우아함이라고 보기보다는 운동신경이 느리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 그들은 일을 할 때도 온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 대강대강 시간만 때운다는 의심을 받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머리 회전이나 동작이 느린 사람보다는 민첩하고 빠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 후자들은 잽싼 손길로 식탁을 정리하면서도, 나지막하게 부탁하는 소리까지 금방 알아듣고는 재빠른 동작으로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 준다. 뿐만 아니다. 속셈에서도 그들을 당할 자가 없다. 그들의 신속한 동작, 재빠른 반응, 예리한 시선, 날씬한 외모, 선명한 윤곽 속에는 반짝이는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한 마디로 그 들은 활발하고 패기 발랄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없어요. 어쩌다 곤경에 빠졌다 해도 금방 헤쳐 나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느림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나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강의 한가로움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수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들은 수세기를 이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해 간다. 아주 천천히, 그것은 영원에 가까운 느림이다. 독자들은 내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게 될 ‘느림’이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는 점을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한 기간을 정해 놓고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특성 가운데서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에너지가 결코 고갈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양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노력을 들이고 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에너지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잠복기를 지나고 나면 결국 다시 회복되고 말지만…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자들에게서는 이런 과정을 볼 수가 없다. 정신적인 요소가 그처럼 큰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일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흥분감, 기쁨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바로 그 흥분 감이 그들로 하여금 한계량 이상의 에너지를 방출하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그들의 에너지는 흥분하게 되면 왕성한 분출로 고갈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흘러 넘친다 반대로 가라앉은 열정으로 일할 때는 방금 언급한 사이클이 제대로 작동이 안되고, 역설적으로 에너지가 상당량 고갈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때 사람들은 의기소침이라든가 슬럼프라든가 그 밖의 다른 불안 증후군들로 해석한다.
지칠 줄 모르는 자들이 피곤이 어떤 것인지를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사설이 나는 지극히 불만스럽다. 우리를 강하게 자극하고, 잠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훼방 놓는 피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 다. 전 생애를 통해 조금씩 우리의 신체를 점령해서 파고드는 그런 피곤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우리는 문득 손의 악력이 점점 느슨해지고, 눈가에 주름살이 잡히는 순간을 예감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겨나는가? 그것은 그 동안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맡았던 과제를 잘 해낸 덕분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곤이란 것은 (사랑처럼, 배고픔처럼) 육체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피곤이 찾아올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며, 필연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기쁨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그 피곤 역시 조금씩 키워 왔던 것이다. 이 피곤은 우리가 노력으로 얻어온 것들을 다시 검토해 보고, 기억해 보며, 우리의 육체 속에 새로이 확인시켜 놓는다. 피곤한 얼굴과 신체가 고귀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문화 속에서 은폐되어 왔던 육체가, 감동적일 정도로 진지하게 다시 우리 눈에 그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정신이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라, 정신이 근육의 움직임과 뒤섞이는 그런 순간이다.
한가로이 거닐기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더 이상 긴장감 속에서 경계심을 품은 채 이 세상을 조사, 관찰하지 않아도 된다. 한가롭게 걷는 동안에는 물건을 사고 싶다는 소망 없이 자연스럽게 상인들을 응시해도 된다. 조심스럽게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주목을 끌어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몹시도 분주한 도시 한가운데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은 언제나 나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한가롭게 거니는 여인의 걸음걸이에서는 고귀한 어떤 것, 우려한 어떤 것이 엿보인다. 한가롭게 거니는 남자의 빈틈없고 호기심 많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선에서는 지성이 풍겨 나온다. 내게 있어서 이들은 기분 좋게 고찰해 보고 싶은 대상이다.
바쁜 사람들은(책임감을 잔뜩 지고 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바쁘다) 결코 한가로이 거니는 법이 없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기들은 낭비할 시간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특히 그들이 도시에 관한 문제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데 시간을 전혀 쓸 수가 없다거나 이벤트나 공연물 같은 것을 계획하든지, 아니면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든지, 아무튼 그들은 항상 들뜬 상태 속에서 언제나 긴급한 일에 직면하여 살아간다. 이벤트 기획 자는 도시의 거주자들을 즐겁게 해주고, 자신의 창조력을 고갈시키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어떤 운동이나 계획들을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것 이 바로 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고급스러운 권태
현대의 복잡한 생활 때문에, 또는 내 마음의 무질서 때문에 나는 가끔씩 심장의 고동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는 이상 현상 속에 빠지곤 한다. 항상 분주한 도시. 그 도시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길을 걷노라면 적당한 속도로 걸으려는 나의 노력은 아랑곳없이, 항상 군중들 속에 파묻혀 바삐 끌려가게 된다. 나는 온 힘을 다해서 가까스로 그들의 대열에서 빠져 나온다. 그러나 이번엔 높은 빌딩들 위에서 빛나는 네온사인들이 내게 현란한 추파를 던진다.
지금은 밤. 그리고 여기는 나의 은신처. 나는 내 방의 어둠과 정적 속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 하지만 도시는 이처럼 입에 재갈을 물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나를 들볶는다. 내 귀에는 도시의 고통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다. 명소에도 서툴렀던 나의 손은 이제 완전히 내 통제를 벗어난 듯하다. 나의 입술과 혀도 더 이상 온전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그 단어들을 분쇄하여, 비참하게 조각을 내서 간신히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흥분한 나의 정신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 어쩌면 내 삶의 방식을 바꿔보는 것이 현명할 는 지도 모른다. 신을 향해 기도하고, 한가로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멍하니 무언가를 응시하고, 가스통 바슐라르 식의 몽상에 빠지기도 하는 내 삶의 방식을.... 이런 고상한 방식 대신, 어쩐지 권태가 나를 궁지에서 구해 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선 권태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권태에는 고상한 권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권태라는 것이 있다. 그런 권태는 피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무한성의 시선에 비추어 자신의 초라한 존재를 의식하고서 모든 일상생활을 우습게 보는 자들이 느끼는 권태이다. 이런 권태에 빠지게 되면 두려움과 허무를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극히 초라하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과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無) 사이의 거리는 심히 좁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온 실제적인 결과는 매우 유감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확실히 나는 권태를 예찬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이 권태에 뿌리박고 있을 경우엔 잘못된 길 들어설 위험이 있다. 나는 당신이 단지 권태의 외양만 갖게 될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권태는 우리 생각 속에서 둥지를 틀어야 한다. 우리를 가두어 놓는 온갖 것들을 느긋한 마음으로 멀찌감치 서서 바라보며 하품하는 것, 그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거만함, 안락함, 사회적 신분 등에다 우리 인간들이 부여한 가치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을까!
모데라토 칸타빌레
절제, 그것은 대수로울 것 없는 교활한 미덕일까? 숭고함이라는 미덕에 필적하기 위해서는, 또는 다른 가치,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극단을 사용해야만 하는 걸까? 미켈란젤로, 나폴레옹, 헤겔, 아르퉁과 같은 사람들의 중도(中道)와는 다른 것이다. 절제는 범속함이라는 진흙탕 속을 결코 걸어가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환경 때문에 극단으로 이끌리게 되고, 그래서 극단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고, 또한 본래의 운명으로부터 비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그때 우리가 불러내야 할 미덕은 다름 아닌 절제일 것이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능력을 갖추고, 가치를 지니는 것, 이런 것은 우리 의 명안을 깨뜨리고 괴롭히게 된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 소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궁핍을 모르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크게 부풀려 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사물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더군다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재산을 증식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능력 있는 사람? 인간은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이며, 감각 및 운동 능력이나 지적 능력의 총체이다. 내가 세상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을 때 재상은 내게 낯설지도 않고, 더욱이 적대적이지도 않다. 다만 나의 자유가 타인들의 자유와 충돌을 일으키게 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복종시키든지 아니면 그에게 복종하든지, 이 두 가지로 선택이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앞에서 노예 상태로 존재하는 타인들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게 된다.
가치 있는 사람? 우리는 타인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성공을 의미하며, 우리가 뛰어난 존재임을 뜻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타인을 유혹하고 부패시키고, 우리를 인정하게 만들려는 온갖 시도들이 생겨난다. 우리에 대해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본래 우리의 모습이 서로 같다는 생각도 그와 같은 그릇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절제라는 미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는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율 이야기하고자 한다. 적온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적온 것만으로 만족하도록 선동하여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적은 것으로 출발해서 놀랍도록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해야 할 일을 자진해서 찾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기술은 결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능란한 솜씨를 필요로 한다. 적은 것으로 살아가는 기술은 살아가는 방법, 곧 지혜를 의미한다. 얘를 들면 함부로 비판하지 말 것,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 것, 상황이 제공해 준 것들을 최대한 이용할 것, 사회계층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을 비통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 것, 시도해 봤다는 자긍심을 갖기 전에 자신의 취향과 운명에 따라서 착실히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것 둥이 그것이다.
리듬의 교체(막간의 시간)
그 동안 신념을 갖고 주장해 오던 것이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과 토론을 벌이게 된다. 나는 또 하나의 나에게 칼자루를 쥐어 주었다가 다시 빼앗고, 다시 넘겨주었다가 또 빼앗는 치열한 결투를 벌인다. 독자들은 이런 진보와 후퇴와 공격과 움츠러듦의 과정에서 내 길을 잃지나 않을지 염려할지도 모른다.
느림을 하나의 미덕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닐까? 이에 대한 견해는 남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느림은 무감각일까? 아니면 의지결핍일까? 만일 누군가가 아주 간신히 힘겹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는 세상이 그에게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감각은 병리학에 속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느림에 영향을 미친다면 무감각 역시 움직임의 과정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정초가 아니던가? 우리는 천성적으로 느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천성적으로는 얼마든지 샘처럼 솟아오르고 튀어 오를 수 있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그럼에도 느린 갱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침착한 자들에 대한 평판은 대체적으로 매우 좋다. 그들은 앵글로색슨 문화의 장점을 지켜 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그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중대한 사건 앞에서도 그들은 침착성을 잃지 않는다. 그들에게서는 신경의 가련한 외침 같은 것은 전혀 볼 수가 없다.
흔히 우리는 ‘냉정하게’ 보이도록 하고, ‘스트레스’에 굴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는다. 사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 명령 아닌 명령은, 느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존재방식이 아니다. 이런 충고는 긴장을 늦출 상황에서나 어울리는 것으로 잔치의 흥을 돋우는 것을 목표로 하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태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래서 삶의 한 방식에 불과할 뿐, 우리의 진실이나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태도는 될 수 없다.
느림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선호할 만한 미덕으로 승격시킬 수 없다.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은 느림과 빠름을 적절히 교대해 가는 것이리라. 또한 이상적인 느림을 위해서는 파악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파악이란 것은 우리가 도시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거의 무의미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까지, 또한 불확실한 것마저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도시를 점차적으로 흡수해가며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파악하는 일에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는 안 된다. 미리 시간을 정해 놓고서 그 짧은 기간 동안 날아갈 듯이 뛰어다니면서,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의식한 채, 수많은 이 미지와 감각과 귀에 들리는 말들을 조심스럽게 모아가면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독서를 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몇 번씩이나 되풀이해 읽으면서 텍스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재검토하고, 쉼표 하나 주석 하나까지도 세심히 살펴보는가 하면, 어떤 때는 전속력으로 돌격해 나가기도 하고, 또 행복감을 느끼며 저자 보다 앞서가기도 하고, 혹은 저자의 뭇에 비추어 봤을 때 혹시 엉뚱한 길을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조바심에서 오던 길을 되짚어 보기도 하는 그런 독서 말이다.
문화적 흥분
문화가 넘쳐나고 있다고 변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일까? 차라리 어떤 사람을 향해서 너무 지성적이다거나, 너무 착하다거나, 혹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구실로 비난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내가 그런 식으로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그래도 흥분하여 어쩔 줄 모르는 문화가, 자신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까지 끌어들여서 문화 전체를 쇠약하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문화가 소멸하고 있다고 통탄하는 자들도 있는 이때에, 세상을 마구 들 볶는 식으로 그와 같은 시도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문화에 열광하는 데는 납득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하다. 그중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고, 또한 가장 집요하게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즉 인류가 계속 진보하고 있으며, 또한 진보해야만 하는데, 이 진보란 것이 더 많은 양심과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다. 양심과 자유. 이 두 가지 가치는 바로 문화의 특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계몽 철학을 인정하며, 헤겔과 마르크스 사상도 인정한다. 많은 공화국들이 문을 열면서 이 철학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 철학을 통해서 후손들이 더욱 명확한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문화적인 활동을 계속해서 더욱 활기차고, 더욱 능률적으로 펴나갈 필요도 있다. 왜냐하면 문화와 민주주의는 해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람이란 자신을 짓누르는 욕구들을 의식할 수 있는 자이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거부할 수도 있고, 더 바람직한 경우에는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그 욕구들을 오히려 이용할 수 있는 자이다. 노동의 상실만이 한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에 족쇄를 채우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자신의 말과 욕망마저 빼앗길 수가 있다. 하루 빨리 버려야 하는 온갖 조작과 몰수 행위, 그리고 널리 확산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문화는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호사스러운 것도 아니고, 오락거리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이 되어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다. 문화는 우리가 조금 더 많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재화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든, 아니면 우리에게 제시된 것을 완성시켜서 갖기 위해서든 우리는 문화에 의해서 창조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하루의 탄생
나를 더욱 불안하게 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아마도 독자들은 이미 눈치챘겠지만 어떤 일을 완성할 때 필요한 흥분이기보다는 기분전환을 위한 오락에서 요구되는 흥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을 불만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행운을 가능한 한 지켜가고 싶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앞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이로써 세상이 그 복된 놀라운 모습을 내 앞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나는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서,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또한 감격한다. 다섯 개의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감각하는 내게 만물은 끊임없는 선물을 쏟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루’에게 약속을 어길 때가 가끔 있다. 밤으로부터, 꿈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려운 때가 있는 것이다. 한 번 출발에 실패하게 되면, 나는 다른 자들의 꽁무니를 쫓아 출발하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행복하게도 내일이면 또 다른 새벽이 내게 찾아와 줄 것이다.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날 것이다. 내일 나는 다시 한번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물을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계절의 바퀴를 돌릴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이 내게는 정겹고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빛이 기울어질 때까지 빛과 동행할 것이고, 밤이 새벽에 의해 찢겨나갈 때까지 밤과 통행할 것이다. 누더기를 입고 있는 이 세상. 나는 이 세상에다 위엄 있는 의복을 입혀줄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나의 참된 충동들을 알고 있기에 세상이 입고 있는 누더기들을 벗겨낼 것이다.
내일,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로 있을 수 있는 이 행복한 기회를 소중하게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