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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정송강사_한국가람문학회
2017. 05.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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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문학기행 회상사기]
■ 학정 올린 진천 <농다리, 초평호> 자세히 보기
▶ http://cafe.daum.net/kgaram/MIy0/61
■ 학정 올린 진천 정철의 <정송강사> ; 현재page
■ 학정 올린 진천 <보탑사> 자세히 보기
▶ http://cafe.daum.net/kgaram/MIy0/59
■ 학정 올린 진천 김유신 장군 <길상사> 저세히 보기
▶ http://cafe.daum.net/kgaram/MIy0/60
■ 학정 올린 <진천 종박물관> 자세히 보기
▶ http://cafe.daum.net/kgaram/MIy0/57
■ 진천문학기행 단체사진
▶ http://cafe.daum.net/kgaram/MIy0/56
1. 진천 정송강사의 정철 선생 신도비 앞에서 / 이재익 빠지고
2. 진천 정송강사의 정철 선생 신도비 앞에서 / 이재익 들어가고
진천 사기四奇
이 재 익
삼국통일 김유신 장군 생가지,
길상사 여기 있네.
황량한 옛터는 불후의 사랑터전*
장군의 탄생음이 '생거生居 진천'* 넓은 들에
종박물관 포뢰음*으로 거듭난다.
비문 없는 보탑사 기이한 백비白碑
비구니들 꽃공양에 족히 서있다.
부처님 팔만 사천 설법 두고도
설한 바 없다 했음이니.
28수宿* 돌무더기 농다리籠橋 건너
농암정 올라 초평호 바라보며
고려 임장군 회고한다.
칼은 녹슬어 없어지고,
애민정신은 천년을 버텨온다.
연고 아닌 곳에 정 송강 산소
단지斷指 효자 둘째 아들 귀애하네.
기행문학, 귀양발길 번다했으니
유택은 차라리 인적 드문 곳으로,
훈민가 가사문학이 송강사에 빛난다.
넉넉한 영혼의 집 아늑함
태산에 오른 듯 광활한 지평
천년의 역사 말굽소리도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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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본 진천의 네 기이한 곳 ;
김유신 사당 길상사, 보탑사 백비, 농다리, 송강 정철 사당 송강사.
* 사랑터전 ; 김유신 장군 부 김서현과 모 만명부인이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진천에서 김유신을 낳음
* 생거生居 진천 ; 마음씨 고운 진천 추천석이 저승사자 착오로 잡혀갔다가 환생하여
용인의 마음씨 나쁜 추천석의 몸을 빌려 살았다는 전설(생거 진천, 사거 용인)
* 포뢰 ; 용의 아흡자 중 잘 우는 아들, 범종 머리에 장식한 용
* 28수 ; 별자리 총칭
3.
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정철은 1536년(중종 31) ~ 1593(선조 26) 향년 58세. 출생지 서울 장의동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칩암거사(蟄菴居士), 시호는 문청(文淸), 진천에 산소와 사당이 있다.
1) 가계
-아버지 돈녕부판관 정유침(惟沉)과 죽산 안씨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貴人)이며, 막냇누이가 계림군 유의 부인으로, 왕실 인척으로서 어린 시절 경원대군(후일의 명종明宗)과 친하게 지냈다.
-1545년(인종 1) 10세 때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고, 큰형도 고문으로 죽고, 아버지가 유배당해 집안이 몰락했다.(1551년, 명종 6년에 풀려남)
2) 교육 ; 부친을 따라 전라도 담양에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울 태생이기는 하나 조부의 산소가 담양 창평에 있고, 또 어린 시절에 낙향하여 지냈으므로 고향이라 해야 하겠다. 16세가 되어서야 겨우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양응정, 임석천,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훌륭한 스승을 만나 수학하고, 이이·성혼·송익필 등과 교유했다.
3) 출사 ;
-26세 때 진사시 급제, 27세 때 문과 별과 장원,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로 출사하였다. 명종으로부터 사헌부 지평을 제수받았으나 처남을 살해한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에서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로 명종의 뜻을 거슬려 말직에 머무르다 1567년에 지평이 되었다. 이어 곧 북관어사가 되었으며 1568년에는 이이와 같이 사가 독서당(讀書堂)에 피선되고 수찬·좌랑·종사관·교리·호남어사 등을 지냈다.
-1571년 부친상을, 1574년 모친상을 당하고 주로 경기도 고양에서 지냈다.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 전한,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까지 역임하고, 서인의 영수로 명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붕당 정치의 한가운데 있었다.
4) 정치적 부침
-수차례의 사화와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여러 번 파직과 유배를 거듭했다.
-1575년 심의겸과 김효원 대립에서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붕당에서 서인이 되었다.
분쟁에 휘말려 전라도 담양 창평에 내려가 있다가 1578년에 조정에 다시 나와 장악원정·직제학·승지 등을 지냈다.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 처리문제로 탄핵당해 또 향리로 돌아갔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강원도에 1년 동안 머무르면서〈관동별곡〉과 훈민가 시조 16수를 지었다. 1581년에 병조참지·대사성을 지내다.
노수신에의 비답(批答)이 논핵(論劾)에 가깝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어 관직에서 물러나 창평으로 돌아갔으나 곧 전라도 관찰사를 제수받아 1582년까지 1년간 역임했다. 도승지·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그곳의 시폐(時幣)를 상소로 올렸다.
-1583년에 조정으로 돌아와 예조판서로 특진했다.
'기주실의'(嗜酒失儀; 술을 좋아하여 예의를 잃었다)하고 '강편기극지인'(剛偏忌克之人; 성격이 강하고 편벽됨)이라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이 논핵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584년에 대사헌(사헌부의 장) 이 되어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총마어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1585년 양사(兩司)가 논핵하자 스스로 퇴임했다. 이후 약 4년간 향리 창평에 은거하며
〈성산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1589년 전라도 완주 출신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정철은 우의정에 특배되어 최영경의 옥사를 다스렸다.
정여립은 어떤 일물인가? 벼슬하다가 과격한 사상으로 퇴임하였고, 전라도 향리에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하며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을 넓혀갔다. 그는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 우임금은 왕위를 세습하지 않고 서로 물려줬으니, 그들은 성현이 아닌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 (忠臣不事二君)은 왕촉(王蠋)이 한 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고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나."
왕위 세습을 부정하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당시 지극히 반체제적인 발언이었다. 결국 곤경에 처하자 정여립은 자결하였고, 그 때 옥사의 최고 책임자가 정철이었다. 연루된 희생자가 최영경을 비롯해 천 여 명이나 되었다. 그 뒤에 신원(伸寃)된 사람이 많았던 것을 보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이 많았던 것같다.
옥사가 마무리 될 즈음에 선조의 태도가 돌변하여 '정철이 서인 세력을 만회하려고 제멋대로 무고한 사람을 연루시켰다' 며 정철을 강계로 귀양 보냈다. 선조가 동인 서인의 대립을 이용하였고, 서인 세력이 강해지자 또 서인을 견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590년(선조 23) 좌의정이 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이 되었다.
* 부원군府院君 ; 조선 시대, 임금의 장인이나, 正一品 공신에게 주던 작호(爵號)
-1591년 건저(建儲; 광해군 세자책봉 건의)를 주장하여 왕의 뜻을 거슬려 파직된 뒤에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유배생활을 했다.(함께 주장하기로 해놓고 동인 이산해가 빠지므로 혼자 주장했다, 이상해의 책동에 바짐)
-정철의 마지막 모습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풀려났다. 평양에 있는 왕을 알현하고 의주까지 호위했다. 3도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에는 명나라에 사은사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결국 남인의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칩거하다 선조 26년인 1593년 12월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 인물 평가
-문집으로 〈송강집〉7책과 〈송강가사〉1책이 전한다.
-강직하고 청렴하나 융통성이 적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성품 탓에 동서 붕당정치의 와중에 동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정치가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문학인의 재질을 발휘하여 국문시가를 많이 남겼다. 〈사미인곡〉·〈속미인곡〉·〈관동별곡〉·〈성산별곡〉 및 시조 100여 수는 국문시가의 질적·양적 발달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가사작품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걸작이다.
6) 문학
-국문학사에서 윤선도·박인로와 함께 3대 시인으로 꼽힌다.〈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107수의 시조를 남겼는데, 사후 편찬된 《송강가사》, 《송강별집추록유사》, 《송강집》 등에 실려 있다.
-정철은 탁월한 비유법과 우리말 어법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언어 구사,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관동별곡〉, 〈사미인곡〉,〈속미인곡〉을 두고 "우리나라의 참된 글은 이 세 편뿐이다." 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성산별곡〉은 그가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편〈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4.
5. 인성부원군, 문청공, 좌의정, 총마어사(왕에게 말을 하사 받았다고 붙인 별칭) 어르신 여기 계시네. 마지막 안식처, 좌측의 부인과 합장묘
6.
7. 정송강사
[구조] 신도비(묘소앞 비석)→홍살문→재실(우)→문청문(외삼문, 문청은 송강 시호)→유물전시관(우)→충의문(내삼문)→송강사(사당)
* 정철(鄭澈 1536-159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시인. 자는 계함,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 서인의 영수로서 당쟁에 깊이 관여함.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고전시가 문학의 쌍벽을 이루며,가사문학의 최고봉이다.
* 작품에는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사설시조인 '장진주사(將進酒辭)' '훈민가(訓民歌)'를 비롯한 시조 100 여 수가 있음. 저서에는 <송강가사>와 문집인 <송강집>이 있다.
* 초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가족묘원이었으나. 후손 양과 송시열 선생이 논의하여 현종 6년 (1665)에 진천으로 이장하였다. 아울러 사당을 세웠다. 정철 선생 사후 72년 후이다.
8. 정철 선생 정송강사 앞과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신도비
* 홍살문 앞에서 좌측으로 300m 올라가면 묘소가 있고, 홍살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송강사
9. 송강 정철 신도비
* 신도비(神道碑) ; 임금이나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앞이나 근처 길목에 세워 죽은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 유허비(遺墟碑) ;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10. 외삼문은 문청문이다. 文淸은 정철 선생 시호이다.
11. 내삼문인 충의문 윗쪽에 사당이 있다.
12. 외삼문인 문청문 앞, 문예시대 배상호 회장
13. 진천 정송강사 경내의 송강기념관
14. 사당에 있는 정철 선생 초상화
* 자-계함季涵 ; 字는 부모님이나 집안 어른이 본명 외에 지어준 칭호.
* 호-松江 ; 號는 친구, 스승, 본인이 짓는 칭호
* 시호-文淸 ; 諡號는 功臣에게 임금이 사후에 붙여는 칭호
* 정철의 시호 <문청공>은 조선시대 정철 포함 모두 11명이다.
15. 기념관에 있는 영정인데, 정철 선생은 아니고 영의정 78세 초상화이다. 정철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정철은 58세, 그래서 찾아 보니,
영의정 장암丈巖 정호鄭澔(1648~1736). 정철의 현손, 송시열의 문하다. 노론의 선봉.
아래 인물도 동일인이다.
16. 영의정 장암 정호, 정철 선생 현손
* 현손 ; 손자의 손자, 고손자
17. 담양의 송강정 사진
묘는 진천에 있어도 문학 창작과는 무관한 지역이다. 창작지는
관동별곡-강원도 삼척 죽서루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 전라도 담양 송강정, 식영정 등
18. 내삼문(충의문) / 우측은 유물전시관
19. 사당인 제일 위쪽 송강사 영정 좌우에 있는 병풍
20. 사당인 제일 위쪽 송강사 영정 좌우에 있는 병풍
21. 유물전시관에 있는 관동별곡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22. 유물전시관의 사미인곡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편〈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23. 유물전시관의 성산별곡
<성산별곡>은 그가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24. 송강 400주기(1993년)가 되는 해를 기념하여 임현기(林怰圻) 서예가께서 송강이 읊은 시 한 편을 두 쪽으로 나누어 썼다. 정철 선생이 34세 때 존경하는 이황 선생이 휴가를 얻어 고향 경상도 안동으로 떠날 때 그 소식을 늦게 접하고 뒤쫓아 전송하려 갔으나 이황 선생이 탄 배는 광나루에서 저만치 떠나가고 있었다.
<別退陶先生>
追到廣陵上 뒤쫓아 광나루에 당도해 보니
僊(선=仙)舟已杳冥 신선탄 배 이미 떠나 아득하구나
秌(=秋)風滿江思 가을 바람에 그리운 생각 강에 가득차서
斜日獨登亭 지는 해 바라보며 홀로 정자에 오르네.
25. 재넘어 성권농(成勸農)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줄타고
아해야 네 권농계시냐 정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정 철)
* 성권농; 성혼을 가리킴, 권농은 농사를 권장하던 유사
* 언치; 안장밑에 까는 털,헝겁. / * 지즐타고; 눌러 타고.
* 정좌수; 정철자신,좌수는 향소(郷所)의 어른.
송강과 성우계(우계 성혼)와 교분이 두텁다. 송강이 소를 타고 신나게 성우계의 집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것도 잠자는 소를 발로 차 깨워서 안장 놓아 눌러 탄다는 대목은 송강의 익살스러운 면이다.
이 시조와 <장진주사>라는 사설시조 및, '기주실의'(嗜酒失儀; 술을 좋아하여 예의를 잃었다)는 이유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비방 장계가 올라온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어지간한 애주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58세 이른 나이에 별세한 것도 술병이 심했던 것은 아닐까?
<신라 팔백년에>
신라 팔백년에 높도록 무은(쌓은) 탑을
천근 든 쇠북소리(종소리) 치도록 울릴시고(울리는구나)
들 건너 적막산정(寂寞山亭)에 모경(暮景) 도울 뿐이라. (鄭 澈)
* 모경(暮景) : 해질 무렵의 경치
26. 정철의 시조 2편
오날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쟈스라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27.서거 400주기를 기념한 현대인의 작품,
<충청절의>는 선조 임금이 정철 선생 서거시에 내린 애도 교시
여기에 충청은 충청도의 절의라는 의미가 아니다. 충(충성), 청(청백한 삶)
충직하고 청백하며, 절의가 높았던 정철의 공로와 인품을 종합해서 평가한 글귀다.
28. 1993년 정철 400주기 기념으로 정철의 贈別栗谷을 다시 써서 게시했다.
<정철과 율곡>
* 정철은 율곡 이이 선생과 동갑내기 친구다. 그러나 뜻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정철이 율곡과 헤어질 때 주었던 글; <贈別栗谷>이다.
(서인 정철이 40세 때 1575년, 동인 김효원 탄핵을 주장하자, 같은 서인 율곡도 반대하여 정철은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을 때이다.)
君意似山終不動 그대 뜻은 산같이 끝내 움직이지 않는데
我行如水幾時廻 내 걸음은 물같아 어느 때나 돌아오려나
如水似山皆是命 물같고 산같은 것은 모두다 운명인가?
白頭秋日思難裁 흰머리 늘어나는 가을날에 헤아리기 어렵구려
* [참고] 율곡 이이 선생 49세로 1584에 별세하고 이듬해 1585년에는 친구 군망 신용시까지 별세하자, 슬픔에 잠겨 애도하는 시를 썼다.
만우(挽友) / 정철
사람들은 말하길 인간세상이 저승보다 낫다하나
나는 저승이 인간세상보다 낫다네.
왼쪽에 율곡 오른쪽에 군망의 손을 잡고
한밤중에 솔바람 부는 푸른산에 누웠으니.
29. 이것은 4월 말엽 철쭉이 핀 시기의 모습이다.
30. 홍살문 안쪽에서
31. 5월말 막 벌초를 한 직후라 묘소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32. 송강정철 묘소 안내문. 부부 합장묘, 둘째 아들 부부 합장묘이다. 아들이 斷指 효자라는 말이 감동적이다.
33. 앞의 무덤은 둘째 아들 종명 부부 합장묘, 뒤의 묘는 정철 선생 부부 합장묘
34. 정철 묘의 비석에는 비석 이수(덮개)가 있으나, 아들 묘는 없다.
35. 비문 이해하기
* 有明 ; 명이 멸망한 후에 나타남.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의미함. 1636년 병자호란 겪으며 반청감정이 고조되고 임진왜란시에 명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명이 멸망한 후에도 정신적인 사대관계가 지속된 것. 이 비문은 1665년에 제작된 것이다.
* 실제관직 ; 좌의정, 인성부원군(1품 공신)
* 시호는 文淸 / 호 송강, 정철의 묘 / 졍경부인 문화 유씨 부인은 좌측에 함께 묻힘.
* 정경부인 ; 1품관직 上은 부부인. 1품관직 下는 정경부인
36. 정철의 아들 정종명 합장 묘비
* 증贈은 사후에 공적에 따라 명예로 자헌대부(정2품) 으로 올려준 것 , 병조판서도 마찬가지로 증직된 것.
* 이 분의 실제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이고, 강릉부사를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 관직명 앞에 <行>자가 붙었다. 정3품 중에서 上에 해당되는데 품계보다도 실제 관직이 낮은 경우 行자를 앞에 쓴다. 만약에 품계(신분)보다 실제 관직(실무)의 수준이 높은 경우는 <守>자를 붙인다. 관원 수와 관직 수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도 정3품이 맡기는 하지만, 3품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 부인도 증贈해서 <정부인>이 됐다. 정부인은 2품관리 자헌대부와 걸맞는 품계이다.
37.
38. 정철 선생 자는 계함, 호는 송강, 시호는 문청이다. (14번 참고)
39. 내삼문인 충의문은 지붕이 외삼문(문청문)보다 멋지다.
40. 송강 정철의 묘. 우쪽의 문인석이 좌측에도 있다.
41. 관동별곡 (일부를 새긴)비석
아래 정철의 한시 <산사 야음> ; 산사의 밤을 읊다.
42. 우수수 나뭇잎 지는 소리
성글은 빗소린 줄 그릇 알고서
중(동자승)을 불러 나가 보랬더니
시내 건너 나무에 달이 걸렸다네.
43. 정철의 훈민가 일부를 새긴 비석
44. 정철의 훈민가 시조들, 그 중에서 네편을 골라서 이 돌에 새겼어요.
오른쪽 부터 첫째-(1), 둘째-(2), 셋째-(8), 넷째-(11)
[1] 부의모자(父義母慈) ,효도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면 이 몸이 살았을까
하늘같은 가없은 은덕을 어디에다 갚사오리
[2] 자효(子孝)
어버이 사라실 제 섬기길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3] 형우제공(兄友弟恭) , 형제우애
형아 아우야 네 살을 만져 보자
뉘에게 태어났건데 양재(모습)조차 같으신다
한 젖 먹고 길러나 이셔 딴 마음을 먹지 마라.
[4] 부부유은(夫婦有恩) ,부부 사랑
한 몸 둘로 나누어 부부를 삼으셨기에
있을 때 함께 늙고 죽은 후 한데 간다
어디서 망령된 것이 눈 흘끼려 하나뇨.
[5] 충의
임금과 백성사이 하늘과 땅이로다.
나의 설운 일을 다 아뢰려 하시거든
우린들 살진 미나리 혼자 어찌 먹으리.
[6] 남녀 내외
여자가 가는 길을 남자가 에돌아가듯이
남자 가는 길을 여자가 비켜가듯이
제 남편, 제 아내가 아니거든 이름도 묻지 마오.
[7] 자제유학(子弟有學), 교육
네 아들 효경 읽더니 얼만큼 배웠나니
내 아들 소학은 모래면 마칠로다
어느 제 이 두 글 배워 어질거든(지혜롭게 되거든) 보려뇨.
[8] 향려유례(鄕閭有禮)
마을 사람들아, 옳은 일을 하자스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옳지옷 못하면
마소를 갓 고깔을 씌워 밥먹이나 다르랴.
[9] 장유유서(長幼有序), 노인 공경
팔목 쥐시거든 두 손으로 받잡아라
나갈 데 계시거든 막대 들고 좇으리라.
향음주(鄕飮酒) 다 파한 후에 뫼셔가려 하노라.
[10] 경로정신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11] 붕우유신(朋友有信), 벗과 신의
남으로 태어난 중에 벗같이 유신(有信)하랴.
나의 그른 일을 다 말하여 하노매라.
이 몸이 벗님 곳 아니면 사람됨이 쉬울까.
[12] 빈궁우환 친척상구(貧窮憂患親戚相救), 친척 화목
어와 저 조카야 밥 없이 어찌할고
아, 저 아저씨여 옷 없이 어찌할고
머흔 일(궂은 일) 다 일러사라 돌보고저 하노라
[13] 혼인사상인리상조(婚姻死喪隣里相助), 상부상조
네 집 상사들흔 어도록(어떻게) 찰호산다(차리는가)
네 딸 셔방은 언제나 마치나산다(맞이하는가)
내게도 업다커니(가진 것 없지만)와 돌보고져 하노라
[14] 무타농상(無惰農桑), 근면, 상부상조
오날도 다 새거다 호미 메고 가쟈스라
내 논 다 매여든 네 논 좀 매어 주마.
올 길에 뽕 따다가 누에 먹여 보쟈스라
[14] 무작도적(無作盜賊), 죄 짓지마라.
비록 못 입어도 남의 옷을 앗지 마라
비록 못 먹어도 남의 밥을 빌지 마라
한번만 떼묻으면 고쳐 씻기 어려우리
[15] 노름 하지말라, 준법정신,무학도박.무호쟁송(無學賭博.無好爭訟)
쌍육(雙六) 장기(將碁) 하지 마라 송사(訟事) 글월 하지 마라.
집 배야 무승하며(집 망치고) 남의 원수 될 줄 어찌,
나라가 법을 세워서 죄 있는 줄 모르난다
45. 정철 작품비 안내
46. 사미인곡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새김
47. 관동별곡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새김
48. 사미인곡 부분 새김, 위치 문청문 들어가기전의 뜰 왼쪽. 오른 쪽엔 재실
단기 4312년 새겼네. 서기는 1979년.
49. 진천 정송강사의 정철 신도비 앞의 347년 생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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