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다는 것은 악덕이 돼 있으며 노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사람으로 소외당했다.
논다는 가치가 우리나라처럼 비가치화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여가관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립돼 있었다. 소대 그리스
사람들은 어떤 그럴사한 이유가 있더라도 여가가 없는 생활을 최저의 생활로
여겼다. 바꿔 말하면 놀거나 쉬지 않고 생업에 열중, 부자가 되느니보다는 가난한
대로 여가 있는 생활을 보다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생활이란 어느 정도의 토지와 노예와 가축을
갖고 오전 중에 목장이나 밭을 둘러보고 시장에 가서 가축이나 농산물을 팔아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고는, 오후에는 저하고 싶은 대로 각박하지 않게 놀고서 밤에는
향연에 참석한다. 곧 오전만 일하고 오후와 밤을 즐긴다. 그 여가의 오후에는
도처에 만들어져 있는 경기장에 가서 경기 연습을 한다. 그 경기장은 비단 경기
연습만 하는 곳이 아니라 사교장이요, 정보 교환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서로
얼려 정치나 학문, 문학, 연극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는 공개 진행하는 재판소,
민회에 들렀다가 이발소에 가서 시정배들과 잡담을 하고 집에 돌아온다. 밤에는
친구들을 번갈아 초대, 향연을 베푼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 보면 그 향연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고 있다. 저녁밥을 마치고 신들에게 포도주를 바치고 신들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른 다음 손님들에게 화관을 나누어 주고서 술자리에 앉는다.
자정을 넘게 지속되게 마련인 이 향연에서 지성적인 의논이 오가기도 하고, 피리
부는 직업 여인이나 무희를 불러다가 여흥을 즐기기도 한다. 향연에 나갈 때는
정장을 하도록 돼 있으며 항상 맨발로 돌아다녔다. 또 소크라테스도 향연에 나갈
때만은 가죽으로 만든 샌들을 신었다 할 만큼 예의가 강하게 요구되었던 것 같다.
이처럼 그리스 사람들은 여가를 최대로 벌어 그 여가를 농도짙게 즐기는 데에
갖은 지혜를 짜냈던 것이며, 이 여가 향유에서 후세 유럽 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그리스의 독특한 문화가 꽃 피어나고 있다.
전시에는 용감한 전사가 되고, 민회에서는 능변의 대변자가 되며, 경기에서는
챔피언이 되고, 가무에 빼어나며 학문과 시작에도 일가견을 갖게 된다. 이같은 여유
있는 생활 아니고는 직접 민주제에 의한 도시국가 사회를 유지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같은 여가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사가들은 생업을 대행해 주는
노예제도가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주된 생업인 목축업이 사람의
일손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던 데에도 큰 이유가 잇다.
결국 여가관을 달리하게 하는 큰 요인은 생업에 있다. 이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 목축업이나 상업을 주된 생업으로 영위해 온 유럽 사회의 여가관이
그리스의 여가관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생업 때문이었다. 11세기부터
유럽에서 주로 짓기 시작했다던 농사도 우리 한국의 농사에 비기면 농사도 아니다.
초겨울에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이듬해 봄에 응어리진 흙을 깨어주고는 수확만
하면 되는 그런 유럽 농사에서는 얼마든지 여가를 얻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이 세상에서 가장 급격하게 자주 기후가 변하는 몬순 지대에서 가장
일손을 많이 요구하는 벼농사를 주로 지어온 우리 한국 사람은 그 생업 구조가
여가를 낼 겨를을 주지 않았다. 가령 호남 지방에서는 중복에서 이레 안으로
세벌김(세 번째 제초)을 매지 않으면 논에 잡초가 자라나서 수확이 떨어지든지 하는
어느 시한 안에 정해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각박한 시한 구조로 연속돼 있다.
여가가 끼어들 틈이 없는 곳이다. 거기에 24시간 노동을 해야 했다. 유럽에서는 7,
8시간만 집중적으로 일하고 나머지 16시간은 바캉스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에서는
유럽처럼 집중 노동은 할 필요가 없지만, 잠을 자면서도 물꼬 걱정을 해야 하고,
비가 쏟아지면 넘칠 걱정을 해야 한다. 걱정은 바로 정신 노동이며 걱정하고 있는
도안은 여가가 아니다.
그러기에 몬순 지역의 농사는 언제 끝나고 언제 시작하는 노동과 여가의 경계가
흐리다. 그래서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는 이상한 노동관과 이상한 여가관에
체질화될 수밖에 없다. 곧 노동 속에 여가가 매몰 혼합돼 버려 어느 만큼이
노동이고 어느 만큼이 여가인가 분간해 내기가 어렵다.
미국 공장에는 프린지 워크라는 게 있다. 과외의 부가작업이랄 수 있다. 작업의
교대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노동자들은 두부를 칼로라도 자르듯 작업을
멎고 미완의 작업 현장을 그대로 두고 퇴근해 버린다. 물론 작업에 쓰던 공구도
그대로 놓아둔 채다. 그같은 중도반단의 미정리 작업 현장에 교대된 노동자가
들어서면, 그것을 정리하고 또 자신의 작업에 맞게끔 조정하는 데에만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비능률을 제거하고자 교대하는 중간에 현장을 정리하는 전담 작업을
따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그런 부가작업을 프린지
워크라 한다. 이것은 노동과 여가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유럽 사회의 여가관이
필연케 한 작업인 것이다.
이토록 한계가 분명하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뽕 따면서 임도 보고, 나물
다듬으면서 시누이 흉도 본다.
이처럼 여가를 가려낼 수 없기에 여가를 이용할 줄 모른다. 그리스처럼 여가를
현명하게 이용하는 전통도 없고 따라서 여가를 가치로 인정하는 어떤 도덕도 형성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논다는 것은 악덕이 돼 있으며 노는 사람은 패가망신할 사람으로
소외당했다. 논다는 가치가 우리나라처럼 비가치화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구미 사회에서 일한다는 것은 여가를 얻기 위한 수단인데 우리나라에서 일한다는
것은 단지 살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목적이 돼 왔던 것이다.
논다는 것은 인간에게 공통된 본능적 욕구이기에 최소한도로 보장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극소화 상태에서 보장했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는 세시명절이다.
더도 말도 덜도 말게 이 세시명절을 안배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놀게 했던 것이다.
홀수 달에는 홀수가 겹친 날-곧 1월 1일(설), 3월 3일(삼짇), 5월 5일(단오), 7월
7일(칠석), 9월 9일(중양)을 명절로 삼고, 짝수 달에는 2월 15일(연등), 4월
8일(석탄), 6월 15일(유두), 8월 15일(추석), 10월 15일 하원(하원), 그리고 11월에
동지와 12월에 그믐으로 안배시키고 있다. 이 제도화된 여가 외에 동제나 개인제 등
제삿날에 제사를 핑계한 여가, 곧 놀지 않는 것처럼 노는 '하면서 주의'의 여가를
소극적으로 절도한 것이 한국 전통 사회에 있던 여가의 전부였다.
이렇게 놀 줄도 모르고 논다는 것을 저주해 온 한국인에게 현대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여가를 안겨주었다. 논다는 것에 대한 가치체계도 예전대로이고, 또 논다는
것에 대한 윤리체계도 예전대로이며, 또 어떻게 노는 것인지에 대한 체험체계도
전혀 돼 있지 않은데, 밀어닥친 여가는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한국적 피서의 특징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인이 누리는 여가는 정상이 아닌 이상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 이상 증후를 하나씩 진단해 보고자 한다.
첫째 집중성을 들 수 있다. 한국적 바캉스의 집중 현상은 시간과 공간, 양
측면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즐기고 싶은 여가는 반드시 연중 어느 계절에 제한받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나의 개성이나 나의 선호에 따라 연중 어느 계절, 어느 때에 선택할 수 있다. 한데
한국인이 택하는 바캉스 시기는 거의가 한여름 한더위가 지속되는 복중에 집중되는
집중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외적인 구속 조건도 없지
않다.
첫째, 몸담고 있는 대부분의 직장이 이 시기에 휴가를 주는 것이 거의 관습적으로
제도화돼 있기에 그 시간적 구속을 자의로 헤어나갈 수 없다.
둘째, 같이 누려야 할 자녀들의 방학이 이 시기에 집중되었기에 그 시기를 택할
수밖에 없다.
셋째, 더위를 피한다는 이득이 겹친다는 등의 이유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같은 외적 조건 말고도 내적 조건이 이 시간 집중 현상을 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직장은 동시에 많은 사람이 직장을 떠나가는 것은 업무 지속이나
생산 지속에 커다란 타격을 받는다. 그러기에 휴가를 연중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경영상 유리하다. 그래서 많은 회사에서 이 휴가의 확산을 시도했으나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 이 복중 이외의 바캉스 시기를 선택한 사람은 회사에 따라서 5__8
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곧 직장에서 제도적으로 휴가를 복중에 집중시키기에
바캉스의 시간 집중 현상이 일어난다기보다 이 시간을 집중적으로 원하고
선택하기에 집중 현상이 벌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방학은 시간 집중 현상의 비중 큰 부분적 이유일 수는 있으나 이 역시
그 전적인 이유는 못 된다. 왜냐하면 자녀가 없거나 있어도 모두 장성하여
개별적으로 바캉스를 떠나 버리고 없는 사람들도 예외없이 이 여름 시기를 택한
것으로 미뤄 알 수 있다.
피서 이유도 그렇다. 서양 사람들처럼 기후가 차가운 고원이나 원거리에 장거리
이동을 하여 별장 같은 데서 한 달 남짓의 장기간을 체류하는 그런 바캉스가 아닌
이상, 3, 4일 길어야 일주일 남짓 동안 더위가 차이 없는 근거리에, 또 집중
현상으로 붐비는 인파의 열기 속에 오가며 몇 시간 동안 바닷물에 잠기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었다 해서 피서를 했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자신도 더위를 모르고
지났다고 자족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시간대뿐만 아니라 장소대에도 동시동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 한국적 바캉스의
특성이다. 곧 사람이 몰리는 곳에 몰리고, 집중적으로 몰리긴 하지만 그것은
태양열에 굶주린 유럽 풍토에서 햇볕을 쬐기 위한 생리적 욕구가 강하게 발동한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모든 곳이 가서 쉴 수 있고 놀 수 있는 관광지요, 피서지일
수도 있는데 굴지의 몇 곳에만 집중적으로 몰린다. 집중 현상이 일어나기에 조용히
쉬고 시원하게 지내며 교통편이나 먹고 자는데 편리해야 할 바캉스의 3대 조건은
완전히 유린당하고 만다. 그래서 대체로 바캉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곳에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맘먹고 돌아오면서도 이듬해에 또 그곳을 찾아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다중이 몰리는 곳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중이 몰리기에 그곳이 좋을 것이라는 그런
객관적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시간 집중 현상을 유발했던
한국인의 동시동조성의 의식구조가 크게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수천 년간 한 마을에 태어나 그곳에 죽어가길 대대로 해온 정착민은 같이 사는
사람끼리 서로 모나지 않게 개성이나 의견을 완강하게 내세우지 않고 서로 동조
조화하는 것을 요구받아왔다. 곧 동시동조성의 의식구조가 체질화돼 있기에 동시의
바캉스, 그리고 같은 곳에 가는 동조의 바캉스를 지향하게 된다. 또한 정착해 사는
공간 그 내부에서 모든 것이 자급자족되었기로 그 한계 밖에 나가는 일이 없고, 또
나갈 필요가 없이 살아왔기에 그 밖에 나갈 때는 불안하고 서먹서먹해 한다. 외지,
곧 객지에 미숙한 의식 체질은 불안을 극소화시키기 위해 동류를 추구한다. 곧 나와
같은 불안해 하는 사람끼리 얼리고 싶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고
싶어한다.
시간 공간에만 동시동조의 집중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캉스에 가서
즐기고 놀고 구경하고 하는 것도 동시동조로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을 즐기고 놀고
구경하려 든다. 곧 개성을 다중 속에 매몰시킨다는 것도 한국적 바캉스의 특징이랄
수가 있다. 많은 사람이 설악산에 갔다 해도 설악산에서 선택해 쉬고 놀고 구경할
곳은 무한대로 있는데도, 개성대로 찾아가 개성있게 쉬고 구경하질 못하고 다중이
가는 굴지의 몇 곳에 몰림으로써 마치 남대문 시장의 잡담 속에 젖는다.
둘째로, 한국 바캉스의 특징으로 단기성을 들 수 있다.
이 역시 유럽처럼 한 달이나 20일 또는 보름 동안 휴가를 주질 않는다는 외적
조건도 전혀 무관하지 않지만, 우리 한국 사람은 그렇게 긴 휴가를 주어도 그것을
알차게 누리고 감내할 만한 의식 체질이 돼 있지가 못하다. 일주일 휴가도 지루하다
하여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뿐만 아니라 휴가지에 가 있어도, 일해
왔던 리듬이나 사이클을 단절하지 못하고 조석으로 사무실이나 가게나 집에 전화를
걸어 노동 사이클을 휴가지에까지 연장 지속시킨다.
이같은 행위는 밤에도 눈물 걱정을 해야 하는 우리 전통적 생업의 '24시간
노동성'이 의식 속 깊이 체질화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이동성
여가의 전통이 전무했고 그저 하루에 나갔다 돌아오는 정착성 휴가에만 체질화돼
있는 데는 이 단기성 바캉스 체질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한국적 바캉스의 특성으로 한국인은 여가를 과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결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바캉스에 설악산이나 해운대에 갔다는 그
결과만 얻으면 된다. 가고 오고 또 그곳에 가서 어느 만큼 바캉스라는 그 시간적
과정을 안락하게 도 유익하게 누렸는가의 과정 농도에 대해 미숙하고 등한하다.
이를테면 휴가지를 설악산으로 선택했을 때 서양 사람들은 설악산 그곳만을
휴가지로 생각하질 않는다. 그곳까지 가는 과정, 치악산이며 대관령이며 오대산이며
또 그 과정에 있는 사찰이며 풍경이며 그 모두를 엔조이한다. 설악산은 그 과정,
관광의 종점이요, 과정에서 즐기는 많은 곳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곧 결과를
점이라 하고 그 점까지 이르는 과정을 선이라 한다면 서양 사람들은 선을 즐기는
바캉스 체질이다. 한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점을 즐기는 바캉스 체질이다. 그래서
설악산을 점으로 설정한 이상 그곳까지 이르는 선은 짧을수록 좋다. 그러기에 그
선이 길수록 지루하고 그 지루함을 잊기 위해 코를 골고 졸거나 속세를 벗어나고
있으면서 속세의 이야기를 담은 주간지를 읽거나 술을 마시거나 껑충껑충 뜀으로써
과정을 무화시키고자 피나는 노동을 한다.
설악산에 가서도 설악산에 왔다는 그 결과를 충족시켜주는 명소 몇 군데만
집중적으로 몰린다. 그 넓은 광역의 설악산 도처에 멧부리요, 도처에 계곡인데도
비선대나 금강굴, 울산암, 권금성 등 몇 군데에 집중되고, 그것만 봄으로써 바캉스가
충족됐다고 생각한다. 곧 집중현상은 한국인의 이같은 결과주의에도 원인이 있다.
여가를 과정으로 파악하면 붐비고 피로하고 고달픈 그런 인파에 끼어 '여가노동'을
하지 않고 오히려 인적이 없는 맑은 계곡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것이다.
관광을 해도 결과주의이기에 보다 많은 점을 단시간 안에 보다 많이 얻고자
하기에 시간을 두고, 보고 알고 느끼고 그 무드에 젖는 질적인 관광을 하지 못하고
주마간산식으로 피로하기만 하고, 고달프다는 것 이외에 남는 것이 없다.
우리 한국 사람이 관광지에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결과주의
때문이다.
땀 흘려 불상이 있는 한 '점'에 이르면 대뜸 그 불상을 배경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놓고 본다. 사진만 찍으면 그 점이 사유화되고, 그렇게 점만 얻으면 관광은
끝난다. 그저 "석굴암 부처보다 크구만." 하는 정도의 외형적인 관찰로 끝내고 다음
'결과'를 향해 또 발을 서둔다. 그 불상이 언제 어느 때 것이고, 그 불상이
아미타불인지 관음상인지 여래상인지, 또 조형이 다른 불상과 어떻게 다른지, 왜
자비로운 표정이 더한지 등등 알고 느끼고 할 것이 엄청나게 많지만 그것은 '과정'의
요소이기에 별반 흥미가 없다.
이같은 결과주의 바캉스는 여름 해수욕장에서 종종 목격할 수가 있다. 일단의
아가씨들이 아름다운 수영복 차림으로 해변에 나와 물 속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데
서서 찍고 앉아서 찍고 누워서 찍고 어깨동무하고 찍고, 찍고 싶은 대로 다
찍었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후회나 불만도 없이 해수욕장을 떠나가 버린다. 곧
해수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해수욕장에 왔다는 결과만 얻고, 또 그것만 증명하면
바캉스 욕구가 충족되는 그런 이상한 바캉스 생리를 우리는 아무런 저항없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소비성을 들 수 있겠다. 달리 말하면 여가를 소비 기회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우리 한국 사람은 집 안에서 사는 실제 수준보다 집 밖에서 사는 남이
보는 나의 수준을 한결 높여서 산다. 그러기에 항상 경제적으로 무리를 하며 살게
되고 바캉스도 '남이 보는 나'를 과시하는 소비의 기회로 삼아, 그 소비를 통해
자신과 그의 가족의 사회적 위신 내지는 지위를 남들에 대해 승인시키고자 노력을
한다. 곧 여가 소비가 지위 심벌로써 이용되고 또 그로써 전시 효과를 누리려 든다.
그래서 온 가족이 바캉스를 떠날 때는 옷가지를 새로 사고 레저 도구를 장만하며,
값 비싼 매식을 하고 남들처럼 값 비싼 숙박소에 투숙을 한다. 그 이면에는 일 년에
한 번인데 낭비 좀 한들...하는 심리도 크게 작용한다.
이같은 소비성 바캉스 생리 때문에 바캉스는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커다란 부담이 되고 그 때문에 가계에 구멍이 생기며 짧은 바캉스를 위해 몇
곱절이나 긴 시간을 덤으로 노동을 해야 한다.
이같은 한국인의 바캉스 생리 때문에 우리 한국인은 바캉스 차일드랄 수 있으며
성장해야 할 너무도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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