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34:10-30
[서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가?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앞서 자신이 다룬 고난의 문제(33장)를 넘어,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신가?"라는 질문입니다. 욥이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욥 34:5)라고 항변했다면, 엘리후는 그 항변의 전제 자체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결코 불의를 행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붙드시는 분이 불의하면 세상이 무너진다(34:12-15)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 고난이 부당하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38장 이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에도 불의하신 게 아니라, 인간이 알 수 없는 더 큰 그림 안에서 다스리고 계셨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 본문의 논증을 떠받치는 미쉬파트(מִשְׁפָּט, 정의·재판), 나사 파님(נָשָׂא פָנִים, 얼굴을 들다·편애하다), 포알(פֹּעַל, 행위·소행)은 신약에 이르러 한 인물, 즉 만민을 정의로 심판하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오늘 이 세 단어를 따라가며, 치우침 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미쉬파트(מִשְׁפָּט) —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는 정의
본문 12, 17절에서 엘리후는 단언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급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정의(미쉬파트)를 미워하시는 이시라면 어찌 그대를 다스리시겠느냐." 여기서 "미쉬파트"는 단순한 법 집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지탱하는 존재론적 속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미쉬파트를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미쉬파트이시기에 세상이 유지된다는 논리입니다(욥 34:14-15, "그가 만일 뜻을 정하시고... 온 육체가 다 함께 죽으며").
철학적으로 이는 플라톤이『국가』에서 다룬 질문, "정의로운 것이 신들에게 사랑받기에 정의로운가, 정의롭기에 신들에게 사랑받는가"(에우튀프론 딜레마)에 대한 성경적 응답입니다. 성경은 이 딜레마 자체를 넘어섭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정의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정의는 하나님 바깥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옵니다.
신약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합니다. 요한복음 5:22, 27은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고 선언하며, 사도행전 17:31은 하나님이 "이에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정말 정의로우신가"라는 회의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질문을 뒤집습니다. 정의는 하나님이 시험받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주어지는 실재입니다. 성도는 눈앞의 부조리 앞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정의로 심판하실 것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나사 파님(נָשָׂא פָנִים) — 얼굴을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
본문 19절의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나사 파님)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를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는 이 장의 사회적 정의를 다루는 핵심 구절입니다. 여기 쓰인 "나사 파님"(직역: 얼굴을 들다·향하다)은 재판관이 권세 있는 자의 얼굴을 보고 판결을 굽히는 관행, 즉 편애·편파성을 가리키는 관용구입니다. 하나님께는 이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신약은 이 관용구를 헬라어로 그대로 옮겨 사용합니다. 사도행전 10:34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προσωπολημψία, 프로소폴렙시아 — '얼굴을 받다', 나사 파님의 직역)를 보지 아니하시고", 로마서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갈라디아서 2:6, 야고보서 2:1도 동일한 원리를 교회 윤리로 확장합니다.
철학적으로, 이는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과 흥미롭게 공명합니다. 롤스는 공정한 정의의 원칙은 자신의 지위·재산·능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합의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논리는 더 근원적입니다. 하나님은 무지의 베일을 쓰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욥 34:21-22,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앎이 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히 공정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지위, 재산, 배경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면 이는 야고보서가 경고한 바로 그 죄입니다(약 2:1-4). 하나님이 얼굴을 보지 않으시듯, 교회 공동체도 직분과 재정 기여와 사회적 지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공동체로 자라가야 합니다.
셋째, 포알(פֹּעַל) — 행위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본문11절 "사람의 행위(포알)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에서 "포알"은 사람이 행한 구체적인 소행, 실제로 이루어 낸 일을 의미합니다. 이는 34장 전체의 논증을 마무리 짓는 원리로, 하나님의 심판이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실제 행위와 정확히 대응하는 정밀한 판결임을 강조합니다.
신약에서 이 원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직결됩니다. 로마서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흥미로운 것은, 이 원리가 율법주의적 공로 사상이 아니라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행위에 대한 평가라는 점입니다(엡 2:8-10, 은혜로 구원받았으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로서의 행위).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논한 "배분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 각 사람의 몫(axia)에 따라 정확히 배분되는 정의 — 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포알은 단순한 산술적 등가 교환을 넘어, 존재의 실제 궤적(그가 걸어온 삶 전체)을 반영하는 인격적 판결입니다.
성도는 구원이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음을 확신하면서도(엡 2:8-9), 동시에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값싼 은혜(cheap grace)에 안주하지 않고, 각 사람의 실제 삶의 자리에서 자랑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는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의미 있음을 가르치고 살아내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정의를 신뢰
미쉬파트, 나사 파님, 포알 — 정의, 무편파성, 행위대로의 보응이라는 이 세 단어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떠받치는 세 기둥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약에서 한 인물, 만민을 정의로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얼굴을 갖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심판을 위임받으신 분이시며(요 5:22),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며(행 10:34),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하실 분입니다(고후 5:10).
이 본문이 오늘 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욥처럼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할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정의는 언젠가 완전한 얼굴로, 편애 없이, 각 사람의 실제 삶을 따라 드러날 것입니다.
서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 가지로 응답해야 합니다.
ㆍ눈앞의 불공평 앞에서도 궁극적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정의(미쉬파트, מִשְׁפָּט)를 신뢰해야 합니다.
ㆍ우리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나사 파님, נָשָׂא פָנִים) 공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ㆍ행위(포알, פֹּעַל)를 값없이 판단하지 않는, 하나님의 정의를 닮은 작은 사회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아 각각 그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욥 34:10-11)라는 말씀 대로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 받은자로서의 행위가 우리 삶에 가득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