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노동자> 5월호 (16면-주춧돌)
천만 비정규직이 단결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남신 소장 인터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으로 활동하는 이남신 회원님이 지난 4월부터 월간 <구속노동자> 편집팀에 새롭게 합류했다. 이남신 소장은 한국 비정규직 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이랜드노조에서 파업 투쟁을 이끌다 두 차례나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510일 동안의 뉴코아-이랜드 파업 과정에서 구속된 뒤 해고되어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뒤 2010년 7월부터 한국비정규센터 소장을 맡아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소장은 처음부터 “노동운동에 투신할 마음은 없었다”고 말한다. 1983년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이는 비합법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 1985년 선배들을 따라 인천 주안공단에서 야학 활동을 하다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게 된다. 군대 영장이 나왔지만 1년 동안 징집을 거부하며 수배 생활을 하다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군대를 갔다 왔다. 그 뒤에도 활동은 계속했지만 회의가 들었다. “운동가의 길, 혁명가의 길이라는 게 나같이 소심하고 소시민적인 사람들이 하기엔 너무 힘들다. 이러다 진짜 폐가 망신하는 게 아닌가?” 고민 끝에 선배한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그때 얼마나 위축되고 민망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하는 그이는 우여곡절 끝에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1991년 이랜드에 입사를 했다.
별명이 “일랜드”일 정도로 많은 일을 시키는 그곳에서 그이는 박성수 회장을 롤 모델로 삼아 5년 동안 일중독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1993년 이랜드 그룹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당시 광주지사에서 영업팀원으로 일하던 그이는 “학생운동 했다는 놈이 조합 가입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가입은 했지만 열심히 활동하지는 않았다.
초창기 이랜드노조의 활동은 순탄치가 못했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의 경영 방침 때문에 1997년까지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마침내 노조 집행부는 파업을 결행했다. 하지만 파업 참여한 조합원은 고작 20여 명. “소수가 하는 싸움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끝까지 파업에 반대했지만 결국 상황에 떠밀려 그이도 파업에 동참했다. 57일 동안 파업을 한 노조는 단협을 쟁취하면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구어 낸다. 노조가 잘 싸운 덕분에 시간이 흐를수록 파업 동참 조합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 57일 파업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놨어요” 파업이 끝난 뒤 그이는 노조의 부름을 받아 사무국장으로 상근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랜드노조는 열악한 처지에서 일하고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2000년 이랜드노조는 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킨 후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다시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부곡 물류센터에서 근무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거나 갓 졸업한 “동생들”이었는데 “여름에는 찜통, 겨울에는 냉장고” 같은 곳에서 일을 하고도 월급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50만 6천 원을 받고 있었다. 그때 노조가 내걸었던 구호는 “못살겠다 50만 원, 먹고 살자 70만 원”이었다. 대기업이 된 이랜드는 지불 능력이 충분했기에 파업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사측은 의외로 완강하게 나왔다.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조합원들을 전원 해고시켜 도급업체로 넘기려 했다. 소박하게 시작한 임금 인상 투쟁이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내건 전국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노조는 265일 동안 파업을 하며 불완전하지만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를 쟁취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그이는 이때 처음으로 구속의 고통을 맛보았다.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 이랜드노조가 정규직 노조로서 모자란 것도 많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하는 그이는 “이제는 이기는 투쟁, 비정규직 문제 가지고도 자본을 압도하는 투쟁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이랜드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기는 투쟁’을 할 수 있을까? 이 소장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파업이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결국은 헌신적인 지도부가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싸움은 대중투쟁으로선 잘 안 맞아요. 그러면 조직화가 어렵거든요.” 그이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싸움”은 비정규직 당사자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승패를 떠나 적극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엄호해야 하지만 이와 별개로 그동안 해 온 투쟁 경험들을 살려서 사업장에서 최소한 과반수 이상을 조직해 낼 수 있는 투쟁, 가능한 1/n의 책임과 부담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규모 있는 투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장은 최근에 부쩍 조직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케이블방송 비정규직 투쟁을 주목하고 있다.
이 소장은 박근혜 정권에서도 노동운동이 잘만 하면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상시·지속 업무를 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2015년까지 전원 정규직화”하겠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에 대해선 공공부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간접고용, 민간위탁 노동자들을 배제시킨 절름발이 대책이라고 비판하지만 “박근혜한테 뭘 기대해!”라는 태도보다는 “끈질기게 비판하고 저항하면서 한편에선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양동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민간 부문을 이끄는 공공부문의 특성상 공약대로만 이행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는 더 넒은 투쟁 공간이 열릴 거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현재 “재생산 구조가 흔들리고 있는” 한국 경제 상황을 볼 때 이제는 자본가들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게 이윤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일정 부분 깨닫고 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의 비정규직 공약 또한 이런 배경 속에서 나왔다.
비정규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남 탓하지 말고 우리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 소장은 “기업의 담장을 넘어 미조직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을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투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운동의 중요한 주체이지만 비정규직 투쟁과 관련해선 전면에 나서기보다 당사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든든한 보급 부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1천만 비정규직이 단결하면 대통령도 뽑고 세상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이는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투쟁으로 떨쳐 일어난다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버금가는 투쟁도 벌어질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98%의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높이에 맞춘 투쟁 방안과 정책 대안들을 제시하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고생하는 구속노동자들을 위해 한 말씀 해달라고 했더니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다. “무엇보다 옥에 계신 분들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늘 희망이라는 걸 늘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가족과 헤어져 여러 아픔들을 겪고 계시겠지만 충격이 큰 만큼 자기의 존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긴 호흡으로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좀 더 인간미 넘치고, 강한 활동가가 되어 투쟁의 현장에서 만나 뵙길 바란다”고 전했다.
자신이 지나온 길이 “운명의 장난” 같지만 20대 때 포기했던 꿈을 다시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이남신 소장,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인터뷰 정리-이광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