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나무의자
김기택
한적한 길가에 긴 나무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종일 움직이지도 않고 한자리에만 서 있습니다.
채찍을 휘둘러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다리인데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감시하는 사람 없어도 앉거나 눕지 않습니다.
쇠사슬을 채워놓으니까 뭉특한 다리가 정말 움직일 것 같습니다.
고지식한 의자도 쇠말뚝에 단단하게 묶어둔 걸 보면
도망갔다 온 전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으슥한 밤중에 도둑의 어깨를 마차처럼 타고
언덕 너머 골목길을 돌아 관절 없는 다리가 도저히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본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등에 태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묵묵히 서 있습니다.
의자 등은 종일 비어 있지만, 가끔
맑고 선선한 밤이 되면 할머니 몇이 나와 앉아 있습니다.
그 때 할머니들은 의자가 쇠사슬에 단단히 매여 있나 확인하기도 합니다.
언제든 달아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꼼짝 못하는 척하는 걸 다 안다는 듯 말입니다.
의자 머리와 등을 조랑말처럼 쓰다듬거나 툭툭 두드려 주기도 합니다.
저녁에 그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벽과 천장이 없는 바람과 별빛을 받아 밤하늘 멀리 퍼져나갑니다.
그러면 의자 다리도 흥분한 듯 조금씩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야기가 활기를 띠면 의자는 할머니들을 태운 채로 밤하늘 높이 오를 것 같습니다.
의자가 들썩거리거나 말거나 밤하늘이 높거나 말거나
쇠사슬은 튼튼하고 이야기는 밤하늘에 끝이 없고 할머니들은 태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들 없는 날, 하루는 길고 쇠사슬은 할일이 없어
의자는 궁금한 길과 구름을 놔두고 홀로 무뚝뚝한 시간을 견딥니다.
차갑고 성실한 쇠사슬도 녹슨 시간을 견디며 의자 다리를 꼭 붙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