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화심리학 < 놀고 있다..♡ >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새로 쓰여질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살다보면 너무나 유명해서 잘 모른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개념들이 있다. 진화도 그중 하나이기 쉽다. 당연히 알고 살아온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해보면 멘붕 온다. 이럴수가, 내가 이딴 걸 모르고 살았다니! 과학 맹신의 사회라는데, 이만하면 거의 반사회적 삶. 아앙~ 가까이 하기엔 조또 멀었던 당신. < 시간에 대한 한가지 이치가 있다면 모든 일은 단 한번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 진화란 대강 무엇인가 진화는 진보, 발전 따위의 개념과 비스므리하게 인식되기 쉽다. 퇴화를 진화의 반대말 정도로 생각하는 게 흔한 예다. 진화의 반대 개념은 <변이없음>이지, 퇴화도 변이의 일종이다. 경영학 일각에선 전략적 퇴화 드립을 치면서 그 이름도 지긋지긋한 <선택과 집중>을 떠들어샀는데, 엄밀히 말해 이거도 틀렸다. 진화는 전략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다. 생물은 그저 다양성만 증가해왔다. 모든 생명은 변이하는데, 그게 다 달라서 생존과 번식에 차이를 낳는다. 늑대가 출몰하는 환경에서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건 생존에 큰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빠른 양의 유전자가 살아남는 거다. 세월이 겁나 쌓여 교배가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지면, 종 분화가 이뤄진다. 이게 자연선택이고 진화론의 핵심이다. 빨리 달리는 게 생존에 유리한 능력이라고 해서 반드시 빠른 양만 살아남지도 않는다. 운과 환경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느린 양이 겁나 번식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전략적으로 퇴화까지 해가며 복잡한 인간으로 발전해왔다.는 개소리란 거다. 걍 우짜다보니 호모 속 중에서 현생 인류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99%의 종이 사라졌고 살아남은 종은 1% 밖에 안된다. 이들은 더 진화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생물이 다양하게 변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연이 쌓여 지금 여기에 살아숨쉬고 있다. 한마디로 로또 터진 거다. 진화는 계획적이지도 않고, 미래를 내다보지도 못한다. 방향성이 없다. 따라서 더 진화하고 덜 진화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왼쪽이 창조설화 팬클럽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그림이다. 자못 <과학적으로> 진화론을 털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지, 그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정작 저 그림은 1882년에 그려진 걸로 이미 폐기된지 오래고, 오른쪽 그림으로 대체됐다. 생명을 단일한 진화계통으로 파악한다면, 진화에 대한 어마무시한 오해를 조장한다. 말은 졸라 많은 종 분화가 일어났고, 대부분 전멸했다. 그 기나긴 진화 과정을 통해 에쿠스란 종 하나만이 살아남아 말 근육도 우람차게 세계를 달리고 있는 건데, 왼쪽 그림은 현생 종이 되기 위해 일직선상으로 발전해왔다는 느낌이 강하다. 별로 복잡한 개념도 아닌 진화가 자꾸 헷갈리는 이유가 이거다. 일직선상의 발전 관념. 그 배후에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이 있다. < 세계를 달리며 변이하는 에쿠스 >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전통적인 교리 체계가 일대 변혁의 미션 앞에 선 오늘날, 한국창조과학회는 떠내려가는 도그마를 붙잡으려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과학자 집단에도 신앙인이 많다는 둥의 얄팍한 물타기 전략은 과학자가 신앙 갖는 게 별로 안 이상하다는 상식 앞에 물거품이 됐고, 호기롭게 천명한 <과학적 방법>이 <유사과학적 주장>임이 밝혀지면서 자폭하고 말았다. 2009년엔 저 유명한 한기총에서조차 퇴출 당했다. 안티 단체인 <한국창조괴학회>는 지금도 SNS를 누비며 저격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헛소리다. 왜냐하면 그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 수는 없겠으나, 애초에 종교적 신앙을 과학의 프레임에 우겨 넣은 거 자체가 헛질이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손상 받는다면, 그건 이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이미 과학빠.. 과학으로 신앙을 뒷받치려는 시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싸그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극단적 세계 이해와 묘하게 닮았다. 현대물리학의 성과와 잘 연결된다하여 불교가 위대한 게 아니고, 과학적 이해와 당장 연결되지 않는다하여 성경의 가치가 강등되는 것도 아니다. < 교회 가는 걸 포기하게 만드는 악질 찌라시.. > 흔히 알고 있듯, 종교와 과학에 대해, 특히 진화론에 대해 기독교 전통에서 썩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인상이 강하다. 나는 개신교 신학자들 가운데서 진화론과 현대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쪽이다. 신학적 교리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실제로 지난 2000년의 역사 과정을 통해 볼 때, 신학적 교리들은 늘 당대의 지식, 특히 자연철학들과 대화하면서 형성되어온 것들이다. 기존의 일반적 창조론이 갖고 있는 진화론에 대한 거부감은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고, 이에 대한 논의는 앞으로 훨씬 개방적으로 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신재식 여기서 뭔가 낯선 느낌이 든다. 어째 개신교 신학자가 상당히 호의적이다? 생명과학에 강한 우려를 표명해왔다는 기억과 뭔가 어긋난다. 왜 그럴까? 신학계 내부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오감에도 불구하고, 걍 싸잡아 개신교는 다 그렇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뭉뚱그려 하나로 생각하는 범주의 오류는 <사회생태주의란 무엇인가>와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충분히 살폈다. 종교라고 다를 게 없다. 종교에 관한 뜬구름표 이미지들은 거의 태반이 오해에 가깝다. 신학적 교리는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현실과 대화하며 거듭나고 있다. 그 거듭남조차 진화의 매커니즘으로 벌어진다.는 관점이 진화심리학의 토대다. 진화심리학이란 대강 무엇인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우리가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유전자를 많이 퍼트리는 방식을 따르더라는 게 핵심이다. 도킨스가 널리 알린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베이스로 삼는다. 예컨대, 닭이 알을 낳는 게 아니고, 알이 더 많은 알을 퍼트리기 위해 닭이라는 생명기계를 만들었다는 거다. 이게 유전자 차원에서 벌어져왔다는 건데,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말거나 동물행동학에서는 정설이 됐다. 이후 인간도 매한가지란 연구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바로 진화심리학. 진화심리학은 개인의 차원에서 심리를 파고드는 학문이 아니다. 인류의 기나긴 적응 흔적을 탐구한다. 치킨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를 함 보자. 수렵채집기에 지방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 지방을 좋아하는 사람이 생존에 유리했고(고열량 확보), 자손을 더 많이 퍼트렸으며, 이게 졸~라 오래 반복되다보니 현생 인류의 대부분은 지금도 기름기 터지는 치킨에 환장한다는 거다. 입맛을 자연 선택의 관점에서 접근한 케이스다. 이외에도 온갖 예들을 연구하는데, 한마디로 압축하면 <그게 다 잘 먹고, 잘 싸려고 그랬던 거> 되겠다. 인간만사 다 먹고싸니즘이란 견해는 유서 깊은(?) 인간 이해 중 하나다. 이걸 250만년의 진화사 속에서 설명할라 카는 게 진화심리학의 새로운 점. < 싸니즘에 관한 저자의 다른 책. 이유 참 많기도 하다.. ;;;;;; > 인류 진화의 역사를 250만년이라고 치고, 그걸 1년 365일 달력으로 환산해보자. 그럼, 현재 시점은 12월 31일밤 12시다. 최초로 가축을 시도한 때는 12월 31일 오전 6시다. 도시가 형성된 건 오후 3시. 산업혁명이 일어난 건 밤 11시 40분이다. 지금 굉장히 세련된 문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화의 역사를 쭉 훑어보면 절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우리가 수렵채집기를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나 정신은 다 그때 적응한 걸로 봐야 한다. 그럼 그 흔적들이 남아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진화심리학에서 수렵채집기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장대익 우주 방어 생물학적 결정론이 까이는 건, 엄한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보편적 기준이 있고, 남자는 여자의 콜라병 몸매를 좋아하는 심리적 기제를 타고 났으며, 바람을 피우는데도 유리하게끔 진화되어 왔다, 즉 이 모든 게 다 원래 그래 생겨먹어서.라는 대목에서 수많은 여자사람들이 뒷목 잡고 엎어지는 거다. 생물학적 결정론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시킨 연구들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다. 나치 등 인종주의 개나발의 참상을 겪은 뒤라 분노는 더 했고. < 어디서 개가 씨발라 먹을 소리를...!! > < 잠깐만.. > 그런데 말이다. 콜라병 몸매 좋아하고, 쉽게 바람 피우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다고, 그게 정당화가 되나? <인간이 우째 생겨먹었는가>는 <인간에 우째 살아야하는가>와 같지 않잖아? 남자사람은 많은 수의 성관계 파트너를 원하는 게 본능이다. 따라서 남자사람이 바람 피우는 건 그닥 문제될 일이 아니다. 이러면 누가 봐도 뭔가 이상하다. 진화심리학이 무슨 악당 마초들만 모인 깽판집단도 아니고 명색이 과학자들인데 논리가 이따구면, 창조과학회하고 친구 먹어도 될 지경이다. 당연히 이렇게 주장하지 않는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이 지점에 참호 파고 방어선을 친다. 이른바 <자연주의적 오류>. 과학적 사실에서 어떤 당위로 비약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거다. 즉, 유전된 경향은 이런데, 글케 행동하고 살아도 된다는 근거가 될 순 없다, 그러니 괜히 확대 적용하지 말라, 되겠다. 굴드가 손가락질한 거랑 딴 손가락이긴 하다만, 어째 달에서 만나는 듯? 사람들이 선천적 본성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까닭은 사회적인데 있다. 인종, 성별, 환경이 다른 인간 간의 평등이 유지되려면 본성의 선천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관념이 그것이다. -스티븐 핑커 진화심리학은 유전과 환경을 동등하게 놓고 그 상호작용을 연구한다. 일부 편견에 사로잡힌 과학자들이 뻘소리를 해대지만, 그건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진화심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화심리학의 형님뻘 되는 사조들이 역사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으나, 학계 내외부에서 자정 노력을 기울여왔다. 게다가 현대 진화심리학은 <협동>을 인간 진화의 중요한 원리로 파악하고 열심히 연구해왔다. 정치·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온 부분은 싹 빼버리고, 지금도 연좌제로 묶어 혐의를 들이대면 억울하다는 입장.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진화심리학에 대한 비판은 가혹한 측면이 좀 있다. 이 이론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남성과 여성의 기회 불평등을 옹호하려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진보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러한 염려는 사라질 것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또한 <자연주의적 오류>가 우려스럽다 하여, 그 위험성 때문에 연구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이것도 노답 나가리다. 글케 가면, 진화의 관점에서 접근한 인간 이해가 인종주의, 성차별, 가부장제, 계급사회, 엘리트주의 등을 정당화한다고 함부로 규정짓는 거야말로 <유사과학적 주장>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다수의 대중이 <자연주의적 오류>를 겁나 쉽게 범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성과를 두고 벌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논쟁은 이걸 충분히 알고, 고려함으로써 격화된다. <자연주의적 오류>를 바로잡는 노력보다는 그걸 감안해 각자의 신념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늬앙스를 설계하는 게 훨씬 쉽다. 쓰레기 언론은 거들 뿐. 완전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게 불가능한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현대 과학의 신화를 의도적으로 이용해온 부분도 분명 있는 거다. 그게 보수적 신념의 편견 아래 놓인 과학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직도 너무나 순진하다. 순진하게도, 이쯤에서 문득 궁금한 게 생긴다. 그럼, 인간이 자연주의적 오류에 쉽게 빠지는 건 사회적 경향일까, 아니면 진화의 찌꺼기일까. 이와 관련하여 현대 뇌과학은 내 탓인지, 뇌 탓인지 골 때리는 통찰을 던진다. 특히 <나>, <현실>, <선택> 등에 관하여, 야메로 알고 있던 본성 개념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능... 어따 무너져 내렸는지 캄캄 절벽이라면, 잉여로운 시간에 아래 링크 클릭하여, 차분히 감상해보자. 멘붕 오고 참 좋더라. http://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48460&rid=248 신경과학의 이해 - 뇌, 현실, 기계지능 <유사과학적 주장>과 <과학적 인문학>의 틈새 1945년, 우리는 일본 원폭 투하에 대해 그토록 기뻐했다. 일제의 치가 떨리는 학살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그날 밤 우라늄 핵분열의 원리를 발견한 오토 한과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 등의 과학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과학을 저주했고, 미국에게 분노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인과응보로 이해할 때, 존중 받아 마땅한 보통 사람의 보편적 가치는 민족과 국가로 갈기 갈기 찢긴다. 전쟁은 그 자체가 비극이다. 어느 장면에서나. 그렇다고, 과학기술도 그 자체가 비극인가? 어느 장면에서나? 그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은 이론의 한계에 대한 이해이며, 또한 이론이나 모델들이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다. -엘리너 오스트롬 우리는 <문명=산업자본주의=과학문명>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과학도 현대의 신화라지만, 근거 없는 반과학주의도 일종의 맹신일지 모르는데. 과학은 이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고, 기술은 그걸로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과학과 기술을 구분해서 접근해야 하고, 기술도 안 좋은 게 아니다. 기술 덕에 우리는 반복적으로 수백만이 죽어나가는 기근과 여러가지 재앙을 극복해왔다. 과학기술 자체가 우리의 사고와 선택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한 폐해를 극복하는 건 과학기술의 억제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사회적 관계를 경계하며 살피는 시민성이다. 유전자가 발견되고,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열리고 있지만, 시민 다수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관심이 없거나, 관심을 둘 겨를이 없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격리야말로 또다른 과학기술의 재앙을 낳는다.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과학기술 자체가 아니라, 과학기술과 시민이 떨어져 있는 <단절 상태>인 거다. < 물은 이 책이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이 책이 사기인 이유는 메시지가 아니라 방법이 벙 찐다는데 있다. 과학 조또 모르는 내가 봐도 이게 대체 말이 되는가 싶은 어거지를 갖고 <과학적 방법>이라 우긴다. <유사과학적 주장>이 되려면 최소한 과학이랑 유사해보이기라도 해야 되는데, 이건 걍 사기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자기의 바람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음에 환호하며, 똥인지 된장인지 따지지도 않고 이를 받아들였다. 메시지는 언뜻 과학이라는 신화를 넘어서는 듯 보이나, 이 사기극에 휩쓸린 다수는 과학이라는 신화 속에 여전히 자빠져있다. 클래식 틀어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둥, 고운 말 쓰면 밥알이 더 예쁘다는 둥, TV에서 그랬쪄!!에 인생 걸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다. < 우왕, 욕 먹어야 잘 큰다ㅋㅋ > <물>과 <관계망>에 대해서는 상선약수를 위시한 도가 철학과 불가적 연결망, 우주의 거대한 순환 체계를 담은 사상들을 통해 위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굳이 이 따위 멍멍소리가 아니라도. 이게 대충 사기인지 아닌지 감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눈치.는 우리 야메들의 목표 수준이다. 학자 될 것도 아니고, 그 정도면 <유사과학적 주장>과 <과학적 인문학>의 틈새에서 떠내려가지는 않을 테니까. 결정론을 극복할 결정적 가능성 야메적 관점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하나님 결정론>이라면, 진화생물학적 세계관은 <유전자 결정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아예 없는가? 양측 모두 불완전한 자유의 가능성은 긍정한다.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도 시험 앞에서 선택의 자유는 있는 거고, 유전자의 복제본능이 선택을 강요하더라도, 그걸 거부할 자유는 있는 거다. 시대의 거대한 압력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없을지라도, 타고난 욕망의 관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거부의 결단으로 하나님 품고 나아갈 수 있는 거다. 가능태로서 인간은 죽는 그날까지 나아질 수 있다.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없다면, 과거는 아무 의미도 없다. 거부의 결단이야말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결정적 의지인 거다. 이기적 유전자는 읽고 나서 <아, 결국은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구나>하는 책이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어떻게 유전자는 이기적인데 이타적 인간이 출현할 수 있는가?>이다. 어떻게 이기적인 유전자가 더 많은 유전자를 퍼트리기 위해서 인간을 이타적으로 만드는가? 많은 동물을 협동적으로 만드는가? 하는 거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협동적이다. 인간은 자기를 교양시키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면 대부분 이기적 유전자로 다 설명이 된다. 인간은 곧 동물인 거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돼지와 개는 못하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게 중요한 점이다. -장대익 < 같이 놀자..♡ > |
첫댓글 아...최고입니다. 정리 잘 읽고 가요!
정말 꿀잼이네요.
대인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