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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 : ㄱ~ㄴ
ㄱ
가는 손님은 뒷꼭지가 예쁘다.
집에 와서 밍기적거리고 있는 손님은 밉지만 볼 일만 보고 가는 손님은 뒤통수까지 예뻐 보인다.
옛날에 어떤 가난한 집에 사위가 다니러 와서 도무지 갈 생각을 않고 양식만 축내고 있었다.
장인은 어떻게 하면 사위를 쫓아 보낼까 궁리하다가 어느 날 아침 마당을 쓸다가 말고 급하게 대문 쪽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허, 별놈의 인간 다 보겠네, 남의 사위야 오래 있건 말건 지가 무슨 상관이람, 우리 집이 가난하면 가난했지, 사위 하나 못 먹일 줄 아나?”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자 방안에서 장인이 하는 소리를 들은 사위는 아침밥도 먹지 않고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휑하니 가버렸다.
가르친 사위
아주 못나서 가르쳐준 것 밖에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옛날 어느 고을에 미련한 사또가 왔다.
하루는 한 농사꾼이 찾아와서 “어젯밤 저희 집에 소가 죽었는데 어찌하오리까?”하고 물었다.
사또는 “네 소가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하오리까 하는 것이 뭔가?” 하며, 농사꾼을 내쫓고는 안으로 들어와서 자기가 잘한 듯이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부인은 “그건 당신이 잘못했지요, 소를 잡아서 가죽은 벗겨 시장에 내다 팔고, 고기는 점점이 나눠서 동네 사람들에게 팔아서, 내가 주는 쉰 냥을 합쳐서 큰 소를 만들어라. 그렇게 하셔야지요.”라고 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사또는 그 농사꾼을 다시 불러 부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 사또께서 참으로 명판이시다” 라는 칭찬이 귓전에 들렸다.
그 다음날 또 한 사람이 와서 “우리 어머니께서 죽었는데 어찌하오리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또는 “그럼 내 돈 쉰 냥을 줄 테니 네 어미 가죽은 벗겨서 팔고 고기는 점점이 베어 동네 사람들에게 팔아서 이 돈과 합해서 처녀 하나를 사다가 네 어머니를 삼아라.” 라고 했다.
가림은 있어야 의복이라 한다.
가릴 곳은 어느 정도 가려야 옷이라 하듯이, 사람도 어느 정도 갖출 것은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어떤 집에 한 나그네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자고 했다.
주인은 마침 심심하던 참이라 나그네를 들여서 저녁을 잘 대접하고는, “당신, 옛날 얘기 할 줄 아시오?” 하고 물었다.
나그네가 “난 옛날 얘기를 할 줄 모르오”라고 하니까, “그럼 바둑은 둘 줄 아시오?”하자, “바둑도 둘 줄 모르오”하니까, “장기는 둘 줄은 아시오?”하고 물었다. “장기도 둘 줄 모르오”하자, “그럼 고누는 둘 줄 아는가?”라고 했다. “그것도 모르오”하니까, “그럼 아는 게 무엇이오?”하고 물으니, 나그네가 의기양양해서 “밥은 먹을 줄 안다오”하고 대답했다.
강경장에 조깃배 들어왔나.
강경장의 분주함을 빗대어 왁자지껄하고 시끌벅적한 소란스러움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평양, 대구, 강경장을 일컬어 전국의 3대 장으로 꼽았다.
강경은 금강 하구에 위치하였는데 금강은 전북의 장수에서 발원하여 충청남북도를 거쳐 흐른다.
이 강경에서 조선 전기에 장시가 개설되고, 후기로 오면서 더욱 발달한 대표적 상업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충청, 전라지역의 수군들이 보호하여 더욱 발달케 되기도 했으며, 지리적 여건으로도 금강 상류의 공주, 부여, 연기, 청양 지방과 전주에 까지 이르는 상업 요충지였다.
또한 금강 하류는 비옥한 평야지대로 이 고장 사람들은 거의가 들판뿐이라서 높은 바위를 보면 벼락을 맞은 듯이 넋을 잃고 큰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본다고 해서 ‘강경사람 벼락바위 쳐다보듯 한다.’는 말까지 만들었다.
이처럼 당시의 강경은 자체에서 생산되는 산물도 많았지만, 강과 바다가 만나는 물산의 집산지로도 유명하여, 크고 작은 어선의 출입이 끊이지 않아 고군산 어장뿐 아니라 서해의 수산물이 다 모여 들었고, 거기에다 조기 등을 가공하기 위해 중국에서 소금을 수입하여 강경시장은 더할 수 없이 활력이 넘치면서 장날의 요란함이 대단 했다고 한다.
이 곳이 번창하면서 인근의 은진도 덕을 봐서 ‘은진은 강경으로 꾸려간다’는 말이 생겼는데, 후일엔 이 말에 의미를 더하여 남의 덕으로 어떤 일을 꾸려 갈 때 일컫는 속담이 되었다.
대단했던 강경도 이젠 스러졌다. 1905년 경부선 개통, 1912년 군산선 개통, 1914년 호남선의 개통으로 물류 이동의 수단과 길이 변하면서 크게 위축되고, 더구나 강경에 있는 군청이 논산으로 옮겨가고 논산의 연무대에 훈련소가 생기면서 강경의 명성은 역사 속에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강경읍에 있는 옥녀봉(玉女峰)에 용영대(龍影臺)라는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서, 그 옛날 강경으로 드나들던 배의 안전운항과 상업의 융성을 기원하던 향냄새가 서려있다.
가랑니가 더 문다.
같잖거나 시시한 놈이 더 괴롭힌다는 말이다.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갔을 때에 겪은 일이다.
하루는 급창이 송사 하러 온 백성을 두고 농간을 하는데, 사또는 아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성내어 꾸짖고, 사또는 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고함을 지르고, 사또는 부드러이 말하는데 제가 나서서 고함을 지르고, 사또는 긴 말이 없는데 제가 나서서 잔소리를 하고, 사또는 명령하지 않는데 제가 큰 소리로 “매우 치라!”라고 하더란다.
* 급창 : 관아의 노비로서 하루 종일 뜰에 서서 사또의 말을 전하는 자.
개구리도 옴쳐야 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뜻이다.
옛날에 하루 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바퀴벌레 사냥만 하는 아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화가 나서 “야, 이놈아, 다른 집 애들은 돈도 많이 벌고 하는데 너는 맨 날 구들장에 처박혀서 바퀴벌레만 잡고 있으니 이거 어떻게 살겠노?” 하고 잔소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이놈은 “엄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요” 라는 말만 했다.
아이는 얼마 후 바퀴벌레 사냥을 끝내더니 이번에는 머리카락으로 홀치(올가미)를 만들어서 뛰는 벼룩을 나꿔 채 잡는 연습을 했다.
이렇게 해서 벼룩을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잡게 되자, 아이는 “이만하면 산짐승 사냥 나가도 쓰겠다” 하며 굵은 밧줄을 가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한 곳에 가니 범이 큰 바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레둘레 보고 있었다.
아이는 밧줄을 던져 범의 목에 줄을 걸고 잡아당겼다.
범은 화가 나서 달려들어 아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아이는 범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똥구멍으로 기어 나와서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큰 나무 주위에 뱅글뱅글 돌면서 꽁꽁 잡아 매었다.
범은 더욱 화가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데 차츰차츰 범의 모가지는 입으로 들어가고 막판에는 그 모가지가 똥구멍으로 나와서 범은 홀랑 뒤집혀져 버렸다.
아이는 이렇게 하여 범을 숱하게 잡아서 가죽을 벗겨 팔아 많은 돈을 벌었다 한다.
개천아 네 그르냐, 봉사 내 그르냐.
봉사가 앞을 못 봐서 개천에 빠지고는 애꿎게 개천을 탓하듯이, 자기가 잘못해놓고 남을 탓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충주에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이장천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도둑이 들까봐 돈을 산 속에다 묻어두고, ‘이장천이 돈 묻어둔 곳’ 이라는 팻말을 세워두었다.
며칠 후에 가보니 누가 돈을 파가고 없어서 이장천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내가 파묻었다고 팻말까지 해두었는데 파가다니” 하며, 탄식을 했다.
또 그는 서울에 가서 여관에 든 적이 있는데, 돈과 옷을 잃어 버릴까봐 벽장에 집어넣는다고 한 것이 들창을 열고서 밖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옷을 입으려고 벽장이라고 생각했던 들창을 열었더니 벽장도 없고 옷도 없거든, 그러니까 이장천은 “야, 서울 놈들 지독하구나. 벽장을 송두리째 떼어가다니!” 하더란다.
개천에 내다버릴 종없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다 쓸모가 있다.
옛날에 여러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풍파가 심해져서 배가 엎어질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목숨만 살려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만은 거꾸로 제발 죽게 해달라고 빌었다.
누구 덕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 후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져서 배는 무사히 육지에 닿게 되었다.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이놈아,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독하게 빌었냐?” 하고 욕을 퍼부으면서 죽게 해달라고 빌던 사내를 늘씬하게 두들겨 팼다.
그러니까 이 사내는 두들겨 맞으면서도 “당신들, 내 덕에 살아난 줄이나 아쇼” 하며, 사람들을 쫘악 노려보았다.
그러자 때리던 사람들이 하도 이상해서 “어째서 당신 덕에 살아났느냐?” 하고 물으니까, 이 사람은 “나는 평생에 원하는 대로 되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소. 내가 원하면 꼭 거꾸로만 되거든, 그래서 제발 죽게 해달라고 비니까 바람이 잦아서 살게 된 거 아니요. 만일 내가 살려달라고 빌었더라면 나도 죽고 당신들도 죽었을 거요!” 하더란다.
건너 산보고 꾸짖기
누구를 직접 꾸짖기가 거북할 때 다른 사람에게 빗대놓고 꾸짖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옛날에 배돌석이란 사람이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와 몸 부칠 데가 없자, 친구네 집에서 자고 먹고 했다.
처음 몇 달은 그 집 부모형제들이 내색 없이 잘 대접하더니 차츰 대접이 달라져서 마침내는 바깥늙은이가 빗대놓고 욕설을 하는데, 꼭두새벽인데도 작은 아들에게 나무를 안 해온다고 아들을 향해 “개새끼는 도둑을 지키고 달기새끼는 홰를 치는데, 사람의 새끼가 왜 놀고먹는단 말이냐, 싹수없는 자식이 못된 것은 잘도 보고 배우는구나” 하고, “수족 성한 거지냐, 사족이 멀쩡하게 생긴 녀석이 어디가 무슨 일을 못해서 얻어먹는단 말이냐. 우리 집에서 공밥 잘 먹인다는 소문이 났더냐?” 하더란다.
검은 머리 가진 짐승은 구제 말란다.
사람은 은혜를 잊어버리니 구해줄 필요가 없다.
공주에서 금강을 이십 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인불구(人不求)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나오는데 이 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홍수가 졌을 때 한 나무꾼이 이 바위에 나와 물 구경을 하다가 떠내려 오던 뱀과 노루와 한 젊은이를 건져주었다.
그 후 노루가 보물을 갖다 주어서 나무꾼은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물에서 꺼내준 젊은이가 시기가 나서 나무꾼이 도둑질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무고를 했다.
나무꾼은 노루가 금은보화를 갖다 주었다고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사또는 믿지를 않았다.
그래서 나무꾼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또가 뱀에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또의 몸이 뚱뚱부어 거의 죽게 되었다.
이때 뱀이 옥으로 찾아와 나무꾼을 깨물고는 이상한 풀잎을 주고 사라졌다.
나무꾼도 뚱뚱부었지만 뱀이 놓고 간 풀잎을 바르자 깨끗이 나았다.
그걸 본 나무꾼은 사또에게 말해서 사또도 깨끗하게 낫게 해주었다.
비로소 사또는 나무꾼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나무꾼을 풀어주고 모함한 젊은이를 대신 옥에 가두었다.
이후로 사또는 이 일을 두고 짐승도 구해주면 은공을 아는데, 사람은 구해줘도 은공을 갚기는커녕 해만 끼친다며, ‘인불구(人不求)’ 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겨서 교훈케 하였다.
겉 볼 안이라
겉을 보면 속을 알 수가 있다.
석가모니는 친구들과 함께 고행을 하다가 고행을 포기하고, 보리수 아래서 홀로 명상함으로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멀리 떨어져 고행을 계속하고 있던 동료들은 석가모니가 다가오자 “저기 변절자가 온다”하고 본체만체 하려 했지만 석가모니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그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존경심이 일어나서 의발을 받아주었다.
* 의발 : 가사와 바리때
가사(袈裟) : 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法衣). 종파에 따라 빛깔과 형식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경점 치고 문지른다.
시계가 없던 옛날에 경점 치는 군사가 경점 칠 시간이 아닌데 경점을 치고 나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 북이나 징을 문질러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한다는 뜻으로, 일을 그르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자기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함을 이르는 말이다.
경점을 친다 : 조선시대 의 시간 용어는 시(時)와 경(更), 점(點), 각(刻)이 있었는데, 하루는 24시가 아니라 12지로 나누어, 두 시간 중 첫 절반에 초(初)를 붙여 자초시(밤11시~12시), 축초시(밤 2시~3시) 등으로 불렀다.
시의 아래 개념으로 각(刻)이 있으며, 각은 1시간을 8로 나눈 단위로 15분으로, 일각(15분), 이각(30분), 삼각(45분), 반각(=1시간, 정시), 오각(75분), 육각(90분), 칠각(105분), 정각(120분)이 되며 ‘정각’은 현재에도 사용된다. 또 다른 용어인 경(更)은 해가 지는 일몰부터 해가 뜨는 일출까지의 밤 시간을 5등분한 것으로, 1경의 길이는 시와 비슷한 2시간 정도지만, 밤 시간만을 지칭하는 데서 차이가 나며, 술시(저녁 7시)부터 신시(새벽 5시)까지를 말한다.
초경은 저녁 7~9시, 2경은 9~11시, 3경은 11~새벽 1시, 4경은 1~3시, 5경은 3~5시이다.
경의 하위 단위는 점(點)으로 1경을 5등분하였으며, 오늘날의 시간으로 환산하면 약 28분 정도다.
서울의 성문이 닫히는 것은 해정시(밤 10시)로 이를 인경이라 하며, 종을 28번치고 통행을 금지하였다.
성문이 다시 열리는 것은 오경 3점이며, 대략 새벽 4시로 33번의 종을 쳐 통행금지를 해제하며, 이를 파루(罷漏)라 하였다. 그리고 흔히 쓰는 ‘경각에 달렸다’의 경각(頃刻)은 각(15분)의 잠깐을 이르는 말로 ‘아주 짧은 시간 또는 눈 깜짝 할 사이’를 뜻한다.
경각보다 더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것에는 촌(寸)이 있어 이것 또한 아주 짧은 시간을 나타내며 ‘촌각(寸刻)을 다투다’라는 표현에 남아있다.
농업사회였던 옛날에는 해가 뜨면서 일과가 시작됨으로 시계가 없던 당시엔 지금처럼 명확한 구분이 없어서 구체적인 시각이 아닌 어림하여 새벽, 아침, 점심, 저녁, 해 질 녘, 밤, 낮 등으로 통용했다.
하지만 수도인 서울엔 밤에도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가 궁궐 안에 있어서 미 물시계(자격루 또는 금루)를 관리하는 금루관이란 관리가 매일 밤 10시엔 북이나 징을 28번 쳐서 통행금지 시간을 알리듯, 경점마다 시간에 맞는 북이나 징을 쳤는데, 이들이 실수로 시간을 잘못 알리면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경주인 집에 똥 누러 갔다가 잡혀간다.
경주인이 위에 바칠 것을 못하고 있으면 차사(差使)가 와서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다 잡아가면서 똥 누러 갔던 사람까지도 잡아갔다는 뜻으로, 애매한 일로 봉변을 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경주인(京主人) : 고려·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지방 수령이 서울에 파견한 아전 또는 향리를 말하며, 일명 ‘경저리(京邸吏)·저인(邸人)·경저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한양의 경저·경재소·경소(京所)라고 하는 처소에서 일을 하였는데, 이들의 임무는 선상노(選上奴 지방에서 차출하여 중앙으로 보내는 노비)의 입역과 도망한 선상노의 보충, 대동법(大同法) 실시 이전의 공물 상납과 그 읍의 부세(賦稅), 상납에 관한 주선, 자기 고장 지방민에게 잠자리와 식사 제공, 공무나 번상으로 서울에 올라오는 관리나 군인들이 각 관청에 배치되어 종사할 때 그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등, 잡다한 일을 주선하여 경향간의 연락을 꾀하는 동시에 향청(鄕廳)과 같이 지방관을 견제하기도 했다.
이와 동시에 입역자의 도망 및 상번(上番)하지 않는 자에 대한 보상, 중앙과 지방과의 문서 전달, 지방에서의 각종 상납물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대납(代納)의 책임도 졌다.
그 외에 신임 수령이 부임지 고을에 가기 전에 미리 통지문을 띄워 알리기도 하였다.
특히 경주인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세력과 결탁하여 먼저 공물을 대납하고 나중에 몇 배의 이자를 붙여 지방 관청에 요구하여 많은 이득을 보았다. 때문에 공납의무자인 농민을 더욱 괴롭히는 폐단을 발생시켰는데 이를 ‘방납(防納)의 폐’라 하였다.
이런 현상은 이미 고려 후기에 시작하여 조선시대는 더욱 성하여, 세종·성종 연간에는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종래 지방민을 경주인으로 삼던 제도를 폐지하고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을 경주인으로 고용하고, 역가(役價)라는 보수를 지급하여 지방 관청과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게도 하였다. 또 선상노 대립자가 부득이한 사유로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대립하고자 하는 자는 종래 경주인을 통하던 것을 수령이 직접 해당 관청에 보고하도록 하기도 하였으나, 폐단애 시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동법 실시 이후엔 공물 청부업자의 구실도 아울러 하면서, 이들 저역(邸役)의 담당이 이권화하여 역가를 바치고 경주인으로 공납 청부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울의 관리와 양반들은 경주인의 자리를 사들여 자기 하인에게 일을 맡기고 이익을 보면서, 역가는 더욱 올라가 대읍의 경우는 1만 냥이 넘고, 소읍은 5,00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철종 13년엔 경주인의 역가를 원정(元定)인 60석 이외는 일체 가산하지 못하게 조처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관을 비롯하여 이속(吏屬)들이 경주인으로부터 빌려 쓴 돈이나 경저에 숙박한 비용은 빠른 시일 내에 갚아야 했는데도 그것을 갚지 못하면 경저의 부채, 즉 저채(邸債)를 지게 되었다. 게다가 또 이자를 붙여서 청구하여 액수도 증가해 조선 후기엔 각 지방 관청마다 4,000∼5,000냥의 저채를 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를 갚기 위해 농민을 수탈할 수밖에 없어서 세도정치 때 백성들에게 각종의 부과세를 징수하는 등, 이서(吏胥)들의 부정·협잡이 자행되면서, 정약용(丁若鏞)은 영주인(營主人)과 함께 경주인을 나라 안의 큰 폐단으로 규정하고, 경주인역가 폐지를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저리(邸吏)의 폐단은 향리보다 심하다. 내가 어릴 적에 경주인이라는 자를 보았는데, 모두 노예나 하천(下賤)으로 무뢰하고 비천한 자였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이 기풍이 크게 무너져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000냥이나 되며, 영주인의 자리는 1만 냥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그 역가가 날로 증가되어 전보다 100배나 되었는데, 이것은 이익이 100배요, 백성을 벗겨낸 물건이 100배임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경저와 영저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기름진 관청의 아전과 권세 있는 가문의 청지기로서 비단옷에 얼굴이 깎은 옥 같은 자가 곧 저리가 되었다.
역가미가 오르는 이유는 네 가지인데, 첫째는 조정의 귀신(貴臣)이 저리 자리를 사는 것이고, 둘째는 수령이 뇌물을 받는 것이며, 셋째는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은 것이고, 넷째는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함이다.”라고 하였다.
영주인(營主人) : 조선시대 서울의 경주인처럼 감영(현재의 도청)에서 각 군·현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지방의 향리로 영저리(營邸吏)라고도 하였다.
사주인(私主人) : 조선의 세종∼선조시대 200년간 외방공리(外方貢吏) 등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세공물(稅貢物)을 보관·매매·방납하는 것을 전업으로 한 특수상인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방관의 파견원으로 일정한 국역(國役)에 종사하는 경주인과 도시의 일반 상고(商賈)와는 성격이 달랐다.
계란에도 뼈가 있다.(계란유란 鷄卵有骨)
운수 나쁜 사람은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다.
‘계란이 곯았다’를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식으로 재미나게 표현했다.
조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黃喜)는 청렴한 생활을 하다 보니 관복도 한 벌밖에 없었으며 장마철에는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
세종대왕은 황희를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다가, 새벽에 성문을 열었을 때부터 저녁에 닫을 때까지 하루 동안 성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다 관비로 사들여서 황희에게 주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그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몰아친 폭풍우가 종일토록 멈추지 않아서 성을 드나드는 장사치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어 문을 닫으려 할 때쯤 한 사람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오기에, 그걸 사서 황희에게 주었다.
영의정 황희는 달걀 한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모처럼 집에서 원껏 달걀을 먹어려고 우선 날 달걀 하나를 깨었는데 곯아서, 다른 것도 보니까 한 알도 먹을 게 없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 순조 때의 학자 조재삼이 지은 ‘송남잡지(松南雜識’ 의 방언류(方言類)에 나온다.
따라서 이 사자성어는 중국에서는 쓰이지 않고 한국에만 쓰인다.
여기서 ‘골(骨)’은 ‘곯다’의 음을 따서 쓴 것으로 일종의 가차자(假借字)이다
계집 바뀐 건 모르고 젓가락 짝 바뀐 건 아나
정작 중요한 것이 바뀐 건 모르고 시시콜콜한 것이 바뀐 것만 아느냐는 말이다.
콩쥐 팥쥐 이야기에서 콩쥐가 평양감사의 아내가 되자, 팥쥐는 시기가 나서 콩쥐를 물에 빠뜨려 죽였다.
팥쥐는 콩쥐의 옷을 입고 평양감사의 아내 노릇을 했다.
콩쥐는 얼굴이 고운데 반해 팥쥐는 얼굴이 얽고 검었지만 평양감사는 아내가 바뀐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가 이를 분히 여겨 감사에게 술상을 대접하는데 젓가락을 일부러 짝짝으로 놓았다.
감사가 물었다.
“왜 젓가락을 짝짝으로 놓았소?”
이때 다시 살아서 장롱 속에 숨어있던 콩쥐가 나오며 말했다.
“사또는 어째 젓가락 짝이 바뀐 건 알아도 계집 바뀐 건 모르십니까?”
계집의 곡한 마음 오뉴월에 서리 친다.
계집이 비뚤어진 마음을 먹고 원한을 품게 되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신립은 고자의 아들로 기생의 몸을 통해 출생하였다.
신립이 저잣거리에서 걸식을 하고 다니다가 율곡의 눈에 들어서 공부를 하여 호랑이를 부리고, 귀신도 알아볼 수 있는 신이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권율이 관상을 잘 보는데, 신립이 삼국대장 재목이라 사위를 삼았다.
하루는 신립이 사냥을 나갔다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인가를 발견했다.
사람을 찾으니 소복을 한 여인이 홀로 있는데, 그 여인은 자기 집에 종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인집 식솔과 종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녀는 종의 아내가 되든지 맞아 죽든지 택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신립이 의기가 충천하여서 종을 없애려고 그 집에서 묵었는데, 한밤중이 되자 종이 나타났다.
신립이 화살을 쏘아 종을 죽이고 처녀를 구해 주었다.
처녀는 의지할 데가 없다며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 하였다.
이에 신립은 이미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취처를 한 몸이라 청을 받아 줄 수 없다 하고 거절을 하자, 처녀는 이튿날 집에 불을 지르고 자결 하였다.
신립이 장인 권율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크게 잘못한 일이라며 호되게 꾸짖었다.
그리고 처녀가 자결한 이후로 신립에게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처녀 귀신이 나타나서 이러이러하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는데, 가르쳐 준대로만 하면 일이 틀림없이 잘 풀려서 신립은 이 처녀 귀신을 믿게 되었다.
장인 권율에게 선택을 받아 무관으로 출사한 신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로 임명을 받고, 문경 새재에서 진을 치려고 가는 중인데 또 꿈에 처녀 귀신이 나타나 문경새재로 가는 것보다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하면서, “장군님 어찌 험산에서 포진을 하려고 하십니까? 저 넓은 충주평야로 적을 유도해서 초개처럼 섬멸시키는 것이 천하명장의 기개라고 생각되옵니다.” 하였다.
신립은 꿈에서 처녀에게 들은 대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왜군과의 접전이 벌어지자 대문산 탄금대 북쪽의 기암절벽인 열두대에 화살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번개처럼 활시위에 화살을 먹여 쏘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활시위에 열이 올라 불덩이처럼 뜨거워지자 백 여척이나 되는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강물에 열을 식혔다고 하여 열두대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처녀가 일러준 대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던 신립의 군대는 아홉번 싸워 아홉번 패하여 신립이 이끄는 조선의 전군은 전멸하고, 신립은 자결하였다.
그리고 신립이 배수진을 친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 또는 견문산으로 불리던 산으로, 북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이 흘러내려 서로 만나는 곳에 있는 독산(獨山)이다.
산세는 평탄하면서도 남한강 쪽으로 암석이 첩첩이 솟아 기암절벽을 이루고,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이다.
탄금대라는 지명은 신라 때 악성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신립의 이야기에서 질기게 기다린 처녀의 원혼을 두고 생긴 속담이, ‘계집의 곡한 마음 오뉴월에 서리친다.’ 이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
말을 못하고 끙끙거리는 사람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하는 소리다.
옛날에 아이가 없던 늙은 소작인 부부가 두꺼비를 아들로 삼아서 키웠다.
그런데 하루는 두꺼비가 건너 집 정승의 딸한테 장가가고 싶으니 그 집에 가서 말을 좀 넣어달라고 했다.
두꺼비가 감히 정승의 딸한테 장가를 가다니 두꺼비의 어미인 할멈은 기가 찼으나, 두꺼비가 장가를 못가면 죽고 말겠다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정승의 집으로 갔다.
그렇지만 차마 말을 못하고 하루 종일 삿귀(삿자리의 귀퉁이)만 뜯고 왔다.
할멈은 다음날도 가고 그 다음날도 가서 정승네 집 삿귀만 뜯고 있으니까 정승이 “노친네는 왜 줄창 우리 집에 왔다가 아무 말이 없소? 좌우간 무슨 일이 있기에 오지, 말은 해야 맛이라는데 죽을 말이고 살 말이고 해보구려.” 하고 말하기를 재촉했다.
이에 할멈은 “이거야 어디 말이나 될 말이요?” 하며 겨우겨우 사정을 이야기했다.
정승은 좌우간 딸들에게 물어나 보자고 해서 딸 셋을 모아 놓고 얘기를 했더니, 셋째 딸이 좋다고 해서 두꺼비는 장가를 가게 되었다.
그런데 장가가는 날 두꺼비는 허물을 벗고 고운 새신랑이 되어서 혼례를 치뤘다.
이것이 우리 민담에 나오는 유명한 두꺼비신랑 이야기로 이 속담의 근거가 되었다.
고운사람 미운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데 없다.
고운 사람은 아무렇게나 해도 이뻐 보이고, 미운 털이 박힌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미워 보인다.
춘추시대 위나라에 미자하라는 미소년이 있었는데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미자하가 복숭아 한 개를 따서 먹어보니 너무 맛이 좋아서 제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먹였다.
그런데도 임금은 꾸짖기는커녕 “미자하는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제가 달게 먹던 것도 잊고 나에게 먹이다니.” 하고 칭찬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가 임금의 총애를 잃고 나서 사소한 잘못을 저지르자 임금은 “저놈은 저 먹던 복숭아를 나에게 먹인 발칙한 놈이 아니더냐?” 하며 미자하를 죽였다고 한다.
고쟁이가 열두 벌이어도 보일 것은 다 보인다.
고쟁이는 가운데가 터진 옷이라 아무리 겹쳐 입어도 중요한 부분이 다 보이듯, 비밀은 아무리 감추려해도 드러난다.
옛날에 한 가난한 선비가 갑자기 사또가 되었는데, 입고 나갈 옷이 없어서 마누라 고쟁이를 입고 동헌에 나 앉았다.
그러나 마누라가 문틈으로 보니 남편 밑천이 다 보여서 조심하라고 쪽지를 보냈더니, 사또는 화를 벌컥 내면서 “저는 이것도 못 입은 주제에 큰 소리여?” 하더란다.
고쟁이 : 한복에 입는 여자 속옷의 하나로 속속곳 위에 단속곳 밑에 입는 아래 속곳으로, 통이 넓지만 발목 부분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지고 밑을 여미도록 되어 있다.
여름에 많이 입으며 무명, 베, 모시 따위를 홑으로 박아서 짓는다.
구멍을 파는 데는 칼이 끌만 못하고, 쥐 잡는 데는 천리마가 고양이만 못하다.
평범한 일은 평범한 사람이 더 잘한다.
옛날에 힘이 무척 센 장수가 있었다.
이 장수가 쉬는 짬에 이를 잡으려고 큰 바위에 이를 얹어놓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런데 바위만 깨지고 이는 죽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부하가 이를 손톱으로 눌러 죽였다.
장수는 놀라서 “야, 내가 주먹으로도 못 죽이는 이를 손톱으로 죽이니 너는 여간 힘이 센 게 아니구나!” 하더란다.
곰 창날 받듯 한다.
워낙 미련해서 스스로 해치는 모습을 이른다.
옛날부터 곰을 잡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방법이 바로 이 속담이다.
사람이 굴 안으로 창을 들이밀면 미련한 곰은 창을 움켜쥐고 쑤욱 잡아당긴다.
이때 사람이 창을 잡아당기면 곰은 뺏기지 않으려고 더 힘차게 잡아당긴다.
한참 서로 잡아당기다가 사람이 갑자기 창을 놓으면 자기 가슴을 있는 힘껏 찌르고 죽는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이다.
장정 칠팔 명이 참나무 토막을 한짐 씩 지고 산으로 올라가서, 곰이 들어있는 굴에 참나무 토막 하나를 집어넣는다.
곰은 장정들이 집어 넣은 참나무 토막을 받아서 제 옆에다 놓는데, 그러면 다른 참나무 토막을 또 집어넣는다.
곰은 또 받아서 제 옆에 차곡 차곡 쌓아놓는데, 이런 식으로 얼마든지 집어넣다 보면 곰은 나무토막을 다 받아서 하나씩 쌓아놓다가 차츰차츰 굴 입구까지 밀려 나오면서 결국에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때 사람들이 창으로 마구 찔러서 잡는 방법이다.
광주리에 담은 밥도 엎어질 수 있다.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일도 잘못될 수가 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는데 동네 영감 하나가 와서 “임자, 이제 쌀밥 먹게 됐구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가 봐야 알지요.”라고만 대답했다.
그 후 벼를 찧을 적에 영감이 또 와서 “임자, 쌀밥 먹게 됐구려.”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또 “가 봐야 알지요.” 했다.
그 후 쌀밥을 지어 밥그릇에 퍼놓고 막 먹으려고 하는데, 이 영감이 또 와서 “임자, 이제 정말 쌀밥 먹게 됐구려.”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도 “가 봐야 알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영감은 성이 나서 “밥숟갈을 딱 들고 있으면서도 가 봐야 알지요가 뭐야? 이놈의 화상이 사람을 놀리네!” 하면서 밥그릇을 둘러메쳐 버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그거 보시라고요. 내가 가 봐야 안다고 안 그럽디까?” 라고 했다.
구렁이 아래턱 같다.
동양에서 용은 천년 묵은 구렁이(뱀)인 이무기가 승천해서 된 존재인데, 아마 여기서의 구렁이는 용을 잘못 말한 것으로 보인다.
구렁이의 아래턱에 귀중한 구슬이 있다는 것으로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국 명나라 시대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용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낙타처럼 생긴 머리에 뿔은 사슴과 같으며, 토끼와 같은 눈에, 목은 뱀처럼 길고, 잉어 같은 비늘이 몸통에 돋아 있으며, 발톱은 독수리처럼 날카롭다. 또 입에서 나는 소리는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것과 같으며, 입 언저리에는 용염이라 불리는 수염이 길게 나있고, 턱 밑에는 용주(여의주)라 불리는 구슬이 있더라.’
구름 따라 용이 가고 바람 따라 구름 간다.
명종 때 사람 단청령 이억순은 피리를 잘 불기로 유명하고, 영변 기생 초향이는 가야금을 잘 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단청령 이억순이 영변으로 가서 일부러 거지 차림을 하고 초향의 집 앞에서 거적대기를 깔고 누워 있었다.
밤이 이윽해지자 초향이는 가야금을 타기 시작했다. 때를 놓칠세라 단청령은 초향의 가야금 자락에 맞추어 피리를 불었다.
초향이는 단 한 번도 단청령의 피리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단청령이란 것을 알고는 버선발로 쫒아 나왔다. 그 후 두 사람은 묘향산 구경을 함께 나서더니 바람 따라 구름가고 구름 따라 용이 가듯이 정답게 붙어 다니며 서로를 아울렀다고 한다.
* 바람 따라 구름 가고 구름 따라 용이 간다.
구멍 봐가며 말뚝 깎는다.
조건을 보아가며 일을 추진한다는 말이다.
옛날에 재산 많고 인물 좋은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는 수절할 마음이 있어서 늘 가슴에 칼을 품고 다니며 “누구든지 나한테 사내 얘기를 하든지 시집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찔러 죽인다.” 고 했다.
그래서 이 과부한테는 개가하라는 사람도 없고 집적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이웃 동네에 한 홀아비가 이 소식을 듣고 어디서 큰 칼을 구해가지고 휘두르고 다니면서 “세상에 어떤 놈이든지 날보고 다시 장가들라고 하는 놈이 있으면 당장에 이 칼로 쳐 죽일 테다.” 하고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는 허리에 장검을 차고 과부가 늘 다니는 뒷산 밑 샘에 가 있다가 과부가 물 길러 오는 것을 보고는 칼을 뽑아들고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날보고 장가들라고 해, 십여 년이나 수절하고 있는 나를 보고 어쩌라고? 이놈이 이리 도망쳐 왔는데 어디로 갔지? 나오기만 해봐라. 단칼에 쳐 죽여야지, 내가 한번 결심한 이상 내 마음이 변할 줄 알고?” 하면서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과부가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하고 방불하거든, ‘세상에 저런 남자도 다 있나? 저런 남자라면 상종해도 일 없겠다!’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남자가 곁으로 오더니 “에이, 한참 소리를 질렀더니 목이 마르네, 여보시오. 나 물 한 바가지만 떠주시오.” 라고 했다.
과부가 물 한 바가지를 떠서 주니까, 이 남자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바가지를 휙 던져주고 아무 말도 않고 가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과부는 길에서나 밭가에서 홀아비를 만나면 눈인사를 하게 되고 또 차츰 짧은 입인사도 하게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서로 허물이 없게 되어 홀아비는 과부네 집을 드나들면서 나뭇단을 부엌에 들여다 주고, 마당에 있는 것을 헛간에다 들여다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둘은 점점 가까워져 결국엔 혼인을 하게 되었다 한다.
국상에 죽산마 지키듯
죽산마는 왕족의 장례의식에 쓰이는 말 인형으로 일반인은 거의 모르는 물건이어서, 다 만든 죽산마를 지키고 있으라면 그게 뭔지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지도 모르고 남이 시키는 대로 멀거니 서서 지켜보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국상(國喪) : 국민 전체가 복상(服喪)을 하던 왕실의 초상으로, 태상왕(太上王), 상왕(上王), 왕, 왕세자, 왕세손 및 그 비(妃)의 상사(喪事)를 이른다.
죽산마(竹散馬) : 국상의 장례식에 쓰는 거대한 말 인형으로서 지체 높고 고귀한 분이 저승을 갈 때도 말을 타고 편안히 가시라는 뜻에서 만들어졌으며, 국상에는 보통 2~10개 정도의 죽산마가 쓰였다.
말 인형은 대나무로 실제 크기의 말 정도로 형태를 잡은 후, 거기에 종이를 발라서 잿빛 칠을 하고 말총으로 갈기와 꼬리를 만들며, 눈알도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완성된 말 인형은 두꺼운 널(나무판자)로 만든 井자 모양의 틀 위에 고정한 후, 두 바퀴가 달린 수레 위에 실어서 죽은 사람의 관을 실은 상여 앞에서 여사군(轝士軍 ; 국상 때에 가마나 상여를 메는 사람)이 끌고 갔다.
장지에 도착한 죽산마는 하늘로 치솟는 불길과 함께 죽은 자를 편안히 모시고 가라며 불로 태웠다.
그리고 이런 말 인형은 등에 안장을 씌운 죽안마(竹鞍馬)와 안장을 씌우지 않은 죽산마(竹散馬)로 짝을 이루게 하였다.
국수를 못하는 년이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
옛날에 피나무로 만든 안반에 국수를 만드는 밀가루 반죽을 하는데, 요리 솜씨가 없는 여자가 국수가 잘 안 되는 핑계로 안반이 잘못되어서 그렇다는 것처럼, 자기의 기술이 모자라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도구가 나빠서 그렇게 되었다고 책임을 돌린다는 말이다.
피나무 안반[案盤] : 흰떡이나 인절미 등을 치는 데 쓰이는 받침으로 피나무 재질로 만든 안반을 말하며, 안반을 병안(餠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떡뿐 아니라 밀가루 반죽을 해서 국수를 만들 때도 사용한다.
굿 구경을 하려면 계면떡이 나오도록
굿이 끝나고 무당이 사람들에게 던져 주는 계면떡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로서, 어떤 일이든지 끝까지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계면 굿 : 무당이 단골집이나 일반 가정을 상대로 쌀이나 돈을 얻으려고 돌아다니며 하는 굿으로, 제사를 지낼 때 무당이 계면 굿을 하는 경우에는 집주인의 행운과 태평을 빈다. 일명 걸립굿 또는 계면놀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계면 굿을 주재하는 집과 굿 당에 모인 사람들을 위헤서도 무당이 축원 정성을 발원하여, 굿이 끝나면 무당이 구경꾼에게 음복(飮福 ;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 주는 떡이 바로 계면떡이다.
계면떡은 쌀로 만든 조그마한 흰떡으로 계면 굿에서 청보장단에 맞춘 무녀의 푸너리 춤이 끝나고 청보 무가(靑褓 巫歌)를 길게 부른 다음 무녀가 ‘고기씨앗이다’ 또는 ‘농사씨앗이다’ 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귀때기 떨어졌으면 이 다음에 와 찾지.
꾸물럭대지 말고 한시 바삐 이 자리를 떠나자는 말이다.
일국의 권세를 쥐고 흔들던 우암 송시열이 노년에 괴산 화양동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는데, 어느 날 남쪽으로 부임하는 병사의 행차가 호기 있게 화양동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젊은 병사의 행차니 오죽이나 요란한가.
“물렀거라!” 소리가 요란하니까 촌사람들은 모두 꿇어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웬 늙은이 하나만은 장죽을 입에 물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거든, 그 모양을 본 병사는 괘씸해서 “여봐라. 저놈을 당장 잡아와 굴복시켜라.” 하고 호령했다.
부하가 곧 가서 늙은이를 잡아와 병사 앞에 무릎을 꿇렸다.
병사는 “네가 누군데 감히 병사 행차를 우습게 보느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호령조로 물었다.
늙은이는 “예예, 잘못되었습니다. 소생의 이름은 송시열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병사가 들어보니 이거 큰일 났거든, 그렇지만 병사는 기지를 내서 “네 이놈, 네가 감히 그분이 누구라고 그 어른 함자를 도용해 가지고 송시열이라고 하느냐? 이런 무례한 놈이 어디 있느냐?”
하고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저놈은 아마도 정신이 돈 놈일 게다. 저런 미친놈은 상대할 것이 없다. 네가 바쁜 행차니 어서 가자!” 하고는 비바람처럼 거기를 휩쓸어 가버렸다고 한다.
송시열(宋時烈) : 1607(선조40)~1689(숙종15) 정치가와 학자로 자는 호는 우암(尤庵)이며 서인(西人)의 거두로 남인(南人)과 논쟁하고, 후에 노론(老論)의 거두로 활약하다가 숙종 15년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염을 사서 사약을 먹고 죽었다. 저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등 100여 권이 있음.
학문은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아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다.
귀머거리는 제 마음에 있는 소리만 한다.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제 마음에 있는 소리만 하듯, 남의 얘기는 들지도 않고 제 얘기만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옛날에 온 식구가 몽땅 가는귀를 먹은 집이 있었다.
하루는 방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있는데, 나무장수가 “나무 사려, 나무 사려” 하고 외쳤다.
영감이 그걸 듣고 “이 늙은 걸 어쩌자고 또 부역을 나오라는 거여?” 하고 화를 벌컥 내니까, 마누라가 “점잖지 못하게 밥에 돌 좀 들었기로 그렇게 화낼 건 뭐라우?” 하고 쫑알거렸다.
그러자 아들이 “저 요새 술 안 먹어요.” 하고 시치미를 떼니까,
며느리는 “어제 콩죽 사온 거 어린애 멕일라고 사온거지, 저 먹자고 사온 줄 아세요?”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계집종이 “아침에 생선사고 남은 돈 저 한 푼도 안 떼먹었어요.” 하며 도리질을 치니까, 머슴은 “이놈의 집구석은 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 나가라 말라 해!” 하며 밖으로 팽하니 나갔다.
이때 마침 거지 늙은이가 밥을 얻으러 들어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하도 기가 막혀서, 저 화상들한테 밥 좀 달라고 했다가는 몇날 며칠이 걸릴지 몰라 허기 만나 죽겠다 하고, 말도 걸어보지 않고 나가더란다.
급하면 밑 씻고 똥 눈다.
똥을 누고 밑을 씻어야 하건만, 급하면 순서가 뒤바뀐다.
춘추시대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울 때 얘기다.
진나라 군이 급작스럽게 궤멸하여 진나라 장수 봉백은 조그만 병차에다 두 아들을 태우고 정신없이 달아나는 참이었다.
이때 조전이라는 장수가 맨발로 쫓아오며 “나 좀 태워주오!” 하고 외쳤다.
봉백은 그것이 조전의 음성인 것을 알고 황급한 김에 한다는 소리가 “속히, 속히 달려라. 그리고 돌아보지 마라.” 하고 두 아들에게 분부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으나 “아버지, 조전이 저렇게 쫓아오며 태워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며 태워줄 것을 간절히 청했다.
그랬더니 봉백은 화를 내며 “너희들이 이미 조전을 봤다면 어째 태우지 않았느냐? 속히 내려가서 어서 모셔라.” 하고 꾸짖었다.
꾸중을 듣고 어리둥절한 두 아들은 황망히 뛰어내려 조전을 떠받쳐 태웠다.
이미 혼이 나가 있던 봉백은 조전이 타자, 두 아들이 탔는지 어쩐지도 모르고 그냥 병차를 몰고 달아났다. 그래서 미처 병차에 타지 못한 두 아들은 그날 난 중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기갈 든 놈은 돌담조차도 부순다.
사람이 몹시 굶주리면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도 저지르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우물가에 가서 숭늉 달라고 하는 사람이나 돼지 꼬리 잡고 순대 달라는 사람처럼 성미가 급해 병통인 경우가 있다. 또한 ‘다짜고짜가 으뜸’이라고 막무가내로 덤비는 사람도 많다. 이는 다 무엇에 기갈 든 사람들이다. 여자에 기갈 든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웬만한 방해물은 의식치 않고 덤벼들면서 심하면 강간까지도 저지른다.
기력이 쇠하면 앙심으로 견딘다.
몸에 힘이 다하면 앙심(怏心), 즉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견딘다는 뜻으로 정신으로 부족한 기력을 보완한다는 말이다.
앙심(怏心)에 얽힌 고사(古史) 이야기
중국 전국시대에 중산군(中山君; 위나라 초대왕인 위문후의 태자 격擊)이라는 왕이 사대부들을 불러 가무를 즐기던 연회석상에서 사소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양고기국을 배식할 때가 되어 사대부들 앞에 양고기국이 한 그릇씩 다 놓여 졌는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한 사람 앞에서 국이 그만 딱 떨어진 것이다. 국을 퍼는 사람이 양을 조절하지 못해 생긴 실수였다.
모두 양고기국을 먹는데 자기만 먹지 못한 사마자기(司馬子期)라는 사람이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달빛을 타고 야밤에 이웃 초나라로 망명했고, 그 후 초나라 왕으로 하여금 중산군(中山君)을 토벌하도록 권유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중산군은 이리저리 쫓기다 그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는데, 갑자기 난생 처음 보는 청년 둘이 적들의 빗발치는 공격을 막아내며 그를 피하게 해줌으로써 중산군은 목숨을 건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중산군이 그 청년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했는가?”
그들이 자초지종을 아뢰었다. “저희 부친이 살아계실 때 왕의 군대의 병졸로서 왕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패퇴하여 쫓기던 중에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대왕께서 저희 부친을 불쌍히 여겨 당신이 드실 찬밥 한 덩이를 친히 건네주셔서 죽기 직전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왕께서 초나라에게 급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중산군은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숨을 내신 뒤 이렇게 말했다.
“타인에게 베풀 때는 많고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중요하며, 타인에게 원한을 사는 이유는 크고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에 있구나! 허어, 내가 고깃국 한 그릇에 나라를 빼앗기고, 찬밥 한 덩이에 목숨을 구했도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정성을 다해 세밀히 살펴보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 속의 교훈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다치기 쉬운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한몫 끼지 않은 우물은 없다.
우리나라에 김씨가 흔하다는 뜻으로, 그 중에도 김해 김씨는 우리나라 인구의 6분의 1이나 된다.
김해 김씨가 흔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왕이라 일가친척이 전혀 없어서 외로웠다.
김수로왕이 세상을 떠날 때 좋은 묘자리가 세 자리 났는데, 하나는 자손이 많이 퍼질 자리고, 또 하나는 부자 될 자리고, 나머지 하나는 벼슬할 자리였다.
그런데 김수로왕은 일가친척이 없어 외로웠기에 자손이 많이 퍼질 자리를 택해서 지금 김해 김씨가 그렇게 많이 퍼졌다고 한다.
까마귀 제아무리 흰 칠을 하여도 백조로 될 수 없다.
못난 놈이 갑자기 잘난 놈이 될 수 없고, 천성을 바꾸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옛날에 바보 신랑이 처갓집에 가겠다고 하니까 바보의 어머니가 술, 부침개, 인절미 그리고 닭 한 마리를 싸서 주었다. 신랑은 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보따리를 풀어 보았는데, 뭐가 뭔지 이름을 몰라서 하나하나 들춰 보다가 이름을 제멋대로 지었다.
인절미는 늘렸다 놓으면 쪼르르 줄어든다고 해서 늘쪼르래기, 부침개는 기름이 질펀하니까 질펀이, 술은 흔들어보니 울렁출렁 소리가 나서 울렁출렁이, 닭은 꺽꺽 울며 날개를 푸드득거린다고 해서 꺽꺽푸드더기라고 지었다.
처갓집에 도착하자 장모가 맞으러 나오며 물었다.
“자네, 뭘 그렇게 많이 가져오는가?”하자,“예, 늘쪼르래기하고, 질펀이하고, 울렁출렁이하고, 꺽꺽푸드더기, 가져왔어요.” 라고 대답 했다.
장모는 사위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어서 짐을 풀어보니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 나오기에 기가 막혀서, “아니, 이거 바보 아냐?” 하며 부지깽이로 사위를 때렸다.
이걸 본 색시는 바보 신랑을 뒤 곁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가지고 온 것은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니 혹시 우리 아버지가 다시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세요.” 하고 가르쳐 주었다.
장인이 밖에서 들어오자 장모는 “여보, 우리가 이거 바보 사위를 얻어서 야단 났수다.” 하고 사위 흉을 보았다.
그러나 장인이 사위를 불러서 “뭐뭐를 가져왔느냐”고확인 차 물으니까, 사위는 장모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색시가 가르쳐 준 그대로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라고 제대로 대답을 했다.
장인은 사위가 물건 이름을 제대로 대니까 “이놈의 여편네가 아무렇지도 않은 사위보고 바보라고 해?”하며 장모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장모가 맞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사위란 놈이 뭐라고 하긴 해야겠는데 장모란 말도 생각이 안 나고 도망간다는 말도 생각이 안 나니까, “고놈의 노친네가 일루루(이리로) 간다. 저년의 노친네가 델루루(저리로)간다.” 하여서 바보의 근본을 드러내고 말았다고 한다.
* 까마귀 학이 되랴.
까마귀 학이 되랴.
못난 놈이 갑자기 잘난 놈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옛날에 바보 신랑이 처갓집에 가겠다니까 어머니가 술, 부침개, 인절미 그리고 닭 한 마리를 싸주었다.
신랑은 가다가 고갯마루에서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그런데 뭐가 뭔지 이름을 몰라서 하나하나 들춰 보다가 이름을 제멋대로 지었는데, 인절미는 늘렸다 으면 쪼르르 줄어든다고 해서 늘쪼르래기, 부침개는 기름이 질펀하니까 질펀이, 술은 흔들어보니 울렁출렁 소리가 나서 울렁출렁이, 닭은 꺽꺽 울며 날개를 푸드득거린다고 해서 꺽꺽푸드더기라고 지었다.
처갓집에 도착하자 장모가 맞으러 나오며 물었다.
“뭐를 그렇게 많이 가져오는가?”
“예, 늘쪼르래기하고, 질펀이하고, 울렁출렁이하고, 꺽꺽푸드더기, 가져왔어요.” 라고 했다.
이 말에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던 장모가 짐을 받아서 풀어보니, 거기엔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 나오거든, 기가 막힌 장모는 “아니, 이거 바보 아냐?” 하며 부지깽이로 사위를 때렸다.
색시는 바보 신랑을 뒤 곁으로 데리고 가서, “가지고 온 거는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니 우리 아버지가 묻거든 그렇게 대답하세요.” 하고 가르쳐 주었다.
장인이 들어오니까 장모는 “이거 바보 사위를 얻어서 야단났수.” 하고 사위 흉을 보았다.
그러자 장인이 사위를 불러서 뭐 뭐를 가져왔냐고 물으니까, 사위는 색시가 가르쳐 준 대로 인절미, 부침개, 술, 닭이라고 제대로 말했다.
장인은 사위가 물건 이름을 제대로 대니까 “이놈의 여편네, 아무렇지도 않은 사위보고 바보라고 해?” 하며, 오히려 장모를 때리려고 달려들었다.
장모가 맞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사위란 놈이 뭐라고 하긴 해야겠는데, 장모란 말도 생각이 안 나고 도망간다는 말도 생각이 안 나니까, “고놈에 노친네, 일루루(이리로) 간다. 델루루(저리로)간다.” 하더란다.
까치발을 볶으면 도둑질한 사람이 말라 죽는다.
까치가 일 년 신수와 일기예보를 본다고도 한다.
나뭇가지로 켜켜이 쌓은 까치집을 짓는데는 굉장히 많은 나뭇가지가 필요한데 그걸 다 다른데서 물어 온 것, 즉 훔쳐 온다. 얼키고 설키게 엮어서 지은 가치 둥지를 짓기 위해 제가 사는 곳의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사람이 사는 집 주변에서 적당한 것을 물어가서 짓는다. 이런 도둑놈도 발을 볶아서 고문하면 들통나는데 내가 계속 찾으면 도둑놈을 못 잡겠냐는 식으로 떠벌이면 그 말을 계속 듣는 사람은 굉장히 괴로울 것이다.
이처럼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이 훔친 사람을 대강 짐작하여 상대를 떠볼 때 쓰는 말이다.
꿈은 아무렇게나 꾸어도 해몽만 잘하면 된다.
매사를 낙천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고려 말에 이성계가 왕이 되고 싶어 경상도 남해 섬의 금산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 그는 연 사흘 동안 이상한 꿈을 꾸었다.
첫째 날은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는 꿈이고, 둘째 날은 목 없는 병이 보이고, 셋째 날은 큰 가마솥에 들어가는 꿈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점쟁이 노파네 집을 찾아갔는데, 마침 점쟁이 노파가 없어서 그 딸에게 물어보았더니 “서까래 세 개는 관에 끌려가서 곤장 세대를 맞는 꿈이고, 목 없는 병은 목 짤리는 꿈이고, 큰 가마솥은 팽형(烹刑 ;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을 꿈입니다.” 하고 해몽해주었다.
이성계는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는 정반대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면 왕(임금왕; 王)자가 되니 왕이 되는 꿈이고, 목 없는 병을 들려면 누구나 조심해야 하니 조심하고 우러러 보는 인물이 되는 꿈이고, 큰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은 금성철벽(金城鐵壁) 같은 굳은 성채로 들어앉는 꿈입니다.” 하고 해몽해주었다.
노파의 해몽을 들은 이성계는 크게 기뻐하며 이후로 즐거운 기색을 하고 돌아갔다.
그 후 이성계는 노파가 해몽해준 것을 믿고 적극적으로 거사를 진행시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꿩 대신 닭
필요한 것이 없으면 비슷한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풍속지에 보면 옛날에는 설날 흰 떡국을 반드시 꿩고기로 끓였다고 한다. 그러나 꿩을 잡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어서 꿩이 없으면 꿩 대신 닭을 썼고, 닭이 없으면 소고기를 썼다고 한다.
꿩 잡아먹은 쑥구렁이 같다.
쑥밭에 있는 쑥구렁이는 대단치 않은 평범하고 흔한 뱀인데, 이런 뱀이 자신보다 덩치가 더 큰 꿩을 잡아먹었다면 엄청난 사건이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있듯이, 큰일을 저지르고도 느긋하게 있을 때 하는 말이다.
* 옛날에 임신한 어떤 여자가 베를 짜다가 기운이 없어 소쿠리를 들고 들에 나가서 쑥을 캐던 중에 논두렁 밑에서 꿩 한 마리가 파닥파닥하고 있는 것을 잡아와서 요리를 해서 먹었다.
그 뒤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들꿩을 먹고 낳았다 하여 이름을 들꿩이라고 지었다.
들꿩이가 자라서 어여쁜 각시에게 장가 갈 날을 받아놓고 서당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길 도중에 짚동만한 구렁이 한 마리가 나오더니 “내가 잡아먹으려고 독을 품어놓은 꿩을 네 어미가 먹었으니 네가 장가갔다 오는 날에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가 간 첫날밤에 들꿩이가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시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근심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다.
들꿩이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각시가 하도 조르는 바람에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각시는 그 말을 듣고는 걱정하지 말라며 들꿩이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신행(新行)을 가는데 각시는 신랑인 뜰꿩이에게 뒤따라오라 하고는 자기가 앞서서 갔다.
한참 기을 가는데 정말 신랑라이 말한 그 짚동만한 구렁이가 신랑을 잡아먹겠다며 혀를 날름거리며 스르르 또아리를 풀고 있었다.
각시는 그런 구렁이에게 다가가서 신랑을 잡아먹으면 죄도 없는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겠냐며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구렁이는 각시에게 네가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보물을 주겠다고 하였다.
각시는 그렇다면 보물을 보여 달라고 하자, 구렁이는 사각 모양의 쇳덩어리 네 개를 내놓으며 첫째 것에는 돈이 나오고, 둘째 것은 밥, 셋째 것은 옷이 나온다고 하였다.
각시는 마지막 것에는 무엇이 나오느냐고 묻자, 구렁이는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각시가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신랑을 잡아먹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할 수 없이 넷째 것은 그것으로 미운 사람을 때리면 죽는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각시는 그것으로 구렁이를 때리자 구렁이가 죽어버렸다.
신랑도 살리고 보배도 얻은 지헤로운 각시는 그 후로 아들딸도 낳고 부자가 되어 잘살았다고 한다.
이 들꿩 신랑과 구렁이 설화는 임산부가 음식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사항과 아무리 위기에 처하고 힘이 없어도 용기와 지혜를 가지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도 있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ㄴ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해라.
자기 자신은 잘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는 잘하라고 한다.
옛날에 한 영감이 사랑방에 있는데 안경 장사가 와서 잘 보이는 안경을 사라고 했다.
영감은 그 안경을 써봤더니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잘 보여서 안경을 샀다.
그러나 아들이 나중에 보고 “아버님, 이건 알은 없고 테만 있는 안경인데요.” 하자, 영감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아뿔사, 그놈한테 속았구나.” 했다.
며칠 후 며느리의 친정어머니가 다니러 왔다.
그런데 며느리가 친정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서 영감은 딴 생각이 났다.
영감은 홀아비로 허전하게 지내는 터라 며느리를 불러 “며늘 아가, 너는 나보고 아버님! 하고 부르고 너의 친정어머니보고는 어머니! 하고 부르니 어매 아베가 한 방에서 자도 괜찮겠구나. 그러니 오늘부터 한 방에서 자게 하자.” 하고 말했다.
그러나 며느리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그 후 영감은 늙어 죽게 되었는데, 평생 깨달은 바를 알려주려고 자손들을 다 불러놓고 “얘들아,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첫째, 안경을 살 때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찔러보고 사거라. 둘째, 며느리가 친정어머니보고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한 방에서 같이 자겠다고 하지 말거라. 내 이 두 가지를 유훈으로 남겨주니 명심하고 그래도 시행해라.” 하더란다.
나무에 올려놓고 흔든다.
좋은 낯으로 꾀어 일을 시켜놓고는 난처한 지경에 빠뜨린다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 때의 간신 이임보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천거하여 그 사람을 안심시켜 놓고는 뒤로 공작하여 그 사람을 다시 떨어뜨리는 간계를 많이 썼다.
* 이임보(李林甫 ?~752년) : 아명(兒名)은 가노(哥奴)며, 당 고조 이연(李淵)의 할아버지인 이호의 5세손으로 황실의 먼 종친이며 현종 때에 18년간 재상을 지냈다. 죽은 뒤엔 태위와 양주대도독으로 봉해졌지만, 양국충(양귀비의 오빠)에 의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부관참시을 받았으며 자손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며 법전을 ‘당률소의(唐律疏議)’라는 법전을 정비한 업적도 있지만, 황제의 신임으로 전권을 휘둘러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신료나 백성의 충언이나 간언이 전달되지 못하게 언로를 막고,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을 모함하여 죽이거나 내쫓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며 유능한 인재를 배척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만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이로써 현종 초기 요숭, 송경 등에 의해 ‘개원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세를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특히 749년 변경의 장수들이 조정으로 돌아와 자신의 반대 세력이 되는 걸 막기 위해 문사(文士)들이 담당했던 변경 절도사를 이민족 출신의 번장들도 대체하였다. 현종에게는 문사를 장수로 삼으면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무서워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므로, 용맹한 한족이나 번인을 장수로 삼는게 낫다고 건의하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안녹산, 고선지, 가서한 등을 절도사와 장수로 임명했다.
이로써 뒷날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그는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눌러서 그의 서재인 언월당에 밤새워 불이 켜져 있으면 다음날엔 반드시 누군가가 주살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안녹산도 이임보를 두려워 해 그가 죽은 뒤에 반란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임보는 음험하고 정치적 수완과 모함에 능해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졌으며, “겉으로는 감언을 일삼으며 친한 척하지만 뒤에서 모함을 일삼는다는 “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구밀복검(口蜜腹劍)’의 사자성어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낙락장송도 근본은 종자
가지가 척척 늘어진 키 큰 소나무도 처음엔 보잘 것 없는 솔방울이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처음엔 조그만 마을의 아전으로 정장(초소의 장)노릇을 하던 사람이었다.
낙숫물은 떨어진데 또 떨어진다.
한번 버릇이 들면 고치기가 어렵다.
옛날에 한 영감이 소를 팔러 장에 갔더니 사돈 영감도 소를 팔러 장에 와 있었다.
이 영감이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는 암소를 팔고 황소를 사러 왔소.” 하니까, 사돈은 황소를 팔고 암소를 사러 왔다고 말했다.
“이거 마침 잘 됐소. 서로 바꾸기만 하면 되겠구먼.”
두 영감은 사이좋게 황소와 암소만 서로 바꿔 가졌다.
두 사람은 일이 기막히게 잘 된 터라 기분 좋게 술집으로 가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술이 잔뜩 취해가지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각기 바꾼 소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람은 소를 바꿨다지만, 소야 바꾼 줄을 알게 뭔가, 낙숫물이 떨어진데 또 떨어지듯 소는 원래 자기 집으로 갈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기 옆에 누워있는 여자는 자기 마누라가 아니고 사돈 마님이거든, 이 영감 깜짝 놀라서 “이크, 우리 집에서도 야단이 났겠구먼.” 하고, 죽어라고 집으로 쫓아가더란다.
난봉자식이 마음잡아야 사흘이다.
마음잡는다고 제 버릇 남 주지 못하듯이, 어디든 깊이 빠진 사람은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효종 때 류씨 성을 가진 정승이 아들을 북평사로 보내며 자기 화상을 그려 아들에게 주었다.
류정승은 아들의 난봉 버릇을 알고 근신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얼굴 그림을 준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한 요상스러운 기생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화상을 걸어놓고 밤낮 쳐다보며 울었으나, 끝내 여자를 끊지 못하고 마침내 기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 북평사 :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밑의 문관
난시에는 앉은뱅이도 삼십리를 간다.
급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선조 임금의 어의인 양예수는 천하 없이 권세가 높은 대신들이 병을 봐달라고 해도 다리가 아파 걷지를 못한다는 핑계로 대신들의 병을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나서 의주로 파천을 갈 때는 워낙 다급하니까 그 아픈 다리로도 잘 걸었다.
이것을 보고 시대의 만담꾼인 이항복은 “허허, 양동지의 다릿병에는 난리탕이 그만이로군!” 해서 사람들을 웃겼다고 한다.
난쟁이 교자꾼 참여하듯
가마꾼은 키가 골라야 하는데 난쟁이가 저도 하겠다고 한다. 축에 끼지 못할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비웃는 말이다.교자꾼 : 가마꾼(가마를 메는 사람).
옛날 어느 집 사랑방에 날마다 동네 노인들이 모여서 우스운 얘기를 하며 노는데, 정작 이 집 주인 영감은 가는귀가 먹고 눈이 어두워서 친구들이 웃을 때 같이 웃지를 못했다.
그래서 하루는 친구들에게 “여보게들, 나는 보고 듣는 것이 시원치 않아서 자네들이 웃을 때 웃지를 못하니 웃을 일이 있거든 나도 같이 웃게 옆구리 좀 찔러주게.” 하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그러마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웃는 대목에 가서는 주인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을 번번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 친구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다 웃고 난 다음에 주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니까, 주인은 우스워 죽겠다고 손뼉을 치면서 “이 사람들아, 자그만치 웃겨라. 이러다간 배꼽이 다 떨어지겠다.” 하더란다.
남 몰래 가만히 먹으라니까 눈치 없이 뜨겁다 한다.
저를 위해주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이 어긋난 짓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한 신랑이 처갓집에 갔더니 각시는 인절미에 팥고물을 묻혀가며 떡을 썰고 있었다.
신랑이 옆에서 보고 있자니까 각시는 제 신랑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서 떡 한 덩이를 뚝 떼어 부모 모르게 신랑 손에 쥐어주었다.
신랑은 깜짝 놀라서 “아, 뜨거! 앗, 뜨거!” 하고 소리를 질렀다.
각시는 부모 보기가 민망하여 “팥고물 하나 튀어간 걸 가지고 뭘 저래?”
하고 혼자 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신랑은 쥐고 있던 떡 덩이를 장모 앞에 쑥 내밀며 “아니, 이게 팥고물 하나여?” 했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는 피가 난다.
남에게 모진 짓을 하면 더 심하게 앙갚음을 당한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방연과 손빈은 한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방연이 먼저 위나라에 가서 벼슬을 살자 손빈이 따라가서 같이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방연은 손빈의 재주를 시기하여 손빈을 외국의 첩자로 몰았다.
결국 방연은 자신의 높은 벼슬을 이용해서 손빈에게 없는 죄를 씌워서 그의 얼굴에 ‘외국과 내통한 자’ 라는 먹 글씨를 새겨 넣고 무릎 뼈를 도려냈다.
이로써 손빈은 꼼짝없이 앉은뱅이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손빈은 미친 사람 행세를 해서 방연의 눈을 속이고 제나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몇 년 후 제나라와 위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위나라에서 도망친 손빈은 제나라의 책사가 되어 위나라의 군대를 유인하려고, 후퇴를 하면서 밥 짓는 아궁이를 처음에는 10만개 파고, 그 다음에는 5만개, 또 그 다음에는 3만개, 이런 식으로 차차 줄여 파면서 퇴각했다.
위나라 장수 방연은 이게 속임수인지도 모르고 “제나라 사람들은 겁이 많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구나, 이 아궁이를 봐라. 벌써 반수 이상이 달아났잖아! 이제 이기는 건 시간문제다.” 하고, 기뻐하며 젊고 날랜 소수 병력만 데리고 급하게 추격했다.
그러나 손빈은 고개 마루에서 매복해 있으면서 큰 나무 껍질을 벗기고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는다.” 라고 써놓고는 방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연이 강행군으로 밤늦게 도착하여 나무에 써 있는 글자를 보려고 불을 켜자, 매복해있던 만 명의 궁노수가 손빈이 이야기 한 대로 불빛을 보고 있는 대로 활을 쏘았다.
결국 방연은 그 자리에서 수많은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서 죽었다.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
남의 잘 잘못을 끄집어내서 말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옛날에 어느 정승의 아들이 무식쟁이에다 말썽꾼이어서 아비의 속을 썩였다.
아비는 타이르기도 많이 하고 야단도 많이 쳤지만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서 아예 꼴을 안 보면 속이 편할 것 같아 아들을 어떤 고을의 원으로 내보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저게 원 노릇을 잘 할까, 늘 걱정이 되어 하루는 장황하게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
얼마 있다가 아들한테서 답장이 왔다.
아들은 무식하니까 글로는 못써 보내고 그림으로 된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는 빗자루와 죽사발이 그려져 있었다.
정승은 이게 무슨 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몰라서 어느 대신에게 편지를 해석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대신은 편지를 보고 곰곰히 생각하더니 “빗자루는 자기 앞이나 잘 쓸어라는 얘기고, 죽사발은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라는 뜻 같입니다.” 하더란다.
남의 소 들고 뛰는 건 구경거리
남의 불행은 구경거리다.
이괄의 난 때 무악재에서 조정 군사와 반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구경하기 하기 좋아하던 백성들은 안산과 인왕산에 하얗게 올라가서 싸움 구경을 했다.
아무리 난리가 나도 알고 보면 권력 다툼은 일반 백성들이야 상관없는 일이기에, 구경거리가 흔치 않던 백성에겐 남의 일이라면 제일 볼만하다던 불구경, 물난리, 그 위에 싸움 구경인데, 그것도 대규모의 사움인 난리가 났으니, 백성들에겐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 셈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기든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내 배 부르면 종의 밥 짓지 말란다.
내 배가 부르면 남의 배고픈 줄 모른다.
옛날에 어떤 왕비가 대궐 밖에서 백성들이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밥이 없으면 떡을 먹으면 될 거 아니냐?"고 하더란다.
남이 장에 간다 하니 거름 지고 나선다.
남이 좋은 옷을 입고 장에 간다고 하니 거름을 푸다 말고 거름통 지고 따라 나서듯이, 줏대 없이 남을 따라 한다.
옛날에 시골 사람 하나가 서울에 올라왔다가 길가 노점에서 파는 풀을 음식인 줄 알고 사먹었다.
서울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걸 보고는 “아니, 이거 천치(天癡 선천적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 아냐? 옷에 먹이는 풀을 사먹다니!” 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 말을 들은 시골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걸 알고 무안해서 “허, 당신 모르는 소리 하시요. 이게 허리 아픈 데는 그만 이라우.” 하고 둘러댔다. 그랬더니 서울 사람도 마침 허릿병으로 고생을 하던 터라 그걸 약인 줄 알고 사먹었다.
그러니까 시골 사람이 그 자리를 뜨면서 “허, 별놈 다 보겠다. 나야 모르고 먹었지만 알고 먹는 이놈은 상천치(천하의 둘도 없는 바보) 아니냐!” 하며 길이 떠나가라 웃더란다.
낮에 난 도둑
벌건 대낮에 남의 것을 빼앗아 가는 놈.
함경도는 여진족과 접해 있었기 때문에 사또를 보낼 때 무관으로 뽑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이 무관 사또들은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 마음대로 혹형을 일삼고 세금을 지나치게 받아냈다. 간혹 문관을 보내기도 하지만 문관 역시 좋은 사또감은 매우 드물었으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낮도적이라고 불렀다.
어떤 함경도 사람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는데, 성균관 앞길에 이르자 친지에게 물었다. “이곳은 무슨 관청이냐” 그랬더니 그 사람은 “응, 이곳은 조정에서 낮도적들을 모아서 기르는 못자리야.” 하더란다.
내 부모 나쁘다고 내버리고 남의 부모 좋다고 내 부모라 할까.
부모 자식 간은 천륜이라 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정장공은 동생과 함께 모반을 꾀한 어머니를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내 황천에 가기 전에는 다시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소.” 하고 맹세를 했다.
정장공은 곧 후회했지만 자신이 한 맹세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영고숙이란 사람이 “적당한 곳에 땅을 파서 샘물이 나거든 그곳에 지하실을 만드십시오. 그러면 거기가 곧 황천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계책을 가르쳐 주었다.
정장공은 어느 산 아래에 지하실을 파고 어머니를 모신 후에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가 어머니에게 절하며 “저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고 울었다.
그러자 어머니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정장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손수 말고삐를 잡고 서울로 돌아오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성들이 다 길에 나와서 같이 기뻐했다고 한다.
내 울음이 정 울음이냐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하는 거다.
옛날에 한 영감이 무남독녀 외딸을 고이 길러 시집보내고 어떻게 사는 가 궁금하여 딸네 집을 갔다.
그러나 딸은 아버지를 대접하기는 커녕 베틀에 앉아서 마저 베를 짜야 한다는 핑계로 내려와 보지도 않았다.
화가 나서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딸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자기가 죽은 척 거짓 부고를 냈다.
이에 딸은 신을 벗어들고 울며 쫓아와서 “아이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 저번에 오셨을 때 내가 씨암탉도 잡아주고 떡도 해드렸더니 저 건너 개똥밭 세 마지기하고 우물 앞 오려논 닷 마지기도 주신다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다니!”하며 애고 애고 하고 울었다.
그러자 병풍 뒤에 숨어 있던 아버지가 불끈 일어나며 “이년아, 내가 정말로 죽은 줄 알았냐?” 했더니, 딸은 “그럼 내 울음이 정 울음인 줄 알았소?” 하더란다.
* 오려논 : 올벼를 심는 논
너무 고르면 지내 고른다.
너무 고르면 지나쳐서 오히려 나쁜 것을 고르게 된다.
옛날에 한 부자가 무남독녀 외딸을 두고 사윗감을 고르는데 보통 총각은 안 되고 재주 있는 이인 사위라야 된다고 방을 써 붙였다.
그 후 벼라 별 재주를 가진 총각들이 숱하게 찾아왔지만 성에 차지 않아 다 퇴짜를 놓고 딸이 늙어가고 있을 무렵, 하루는 누더기 차림에 못생긴 노총각이 찾아와서 맑은 하늘을 가리키며 오늘 비가 올 테니 빨래며 곡식을 치우라고 말했다.
비설거지를 끝내고 났더니 과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 후에도 노총각이 비가 온다고 하는 날은 꼭꼭 비가 와서 영감은 총각의 지감에 탄복하고 드디어 사위로 삼았다.
혼례를 올리고 나서 어느 날 영감은 사위를 보고, 너는 어째서 그렇게 비가 오고 안 오는 것을 잘 맞 추냐고 물었더니 사위가 “별 거 아녜요. 전 몇 해 전 부터 옴이 올라서 비가 오려고만 하면 사타구니가 가려워 견딜 수가 없거든요.” 하더란다.
옴 : 옴진드기가 기생하여 일으키는 전염성 피부병으로, 손가락과 발가락 및 겨드랑이의 연한 살에 기생하는데, 특히 남녀의 성기 주변에 심하여 성병의 일종으로도 보며, 몹시 가렵고 헐기도 한다.
넉살 좋은 강화년과 넉 살 좋은 강화 연
체면도 염치도 모르는 여자를 조롱하는 말이다.
강화도는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굴곡의 흔적을 지닌 곳으로, 고인돌부터 단군 시조를 섬기는 마니산 참성단, 정족산성으로 이어지는 서해 방어와 항로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갑비고차(甲比古次), 고구려의 혈구(穴口), 신라의 해구군(海口郡)으로 이름을 바꾸며 삼국혈전사의 무대로서, 고려 때는 항몽의 수도로서 삼별초(三別抄) 항쟁의 시발점이기도 했으며, 조선시대는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유린당하고, 근대에도 1866년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1875년 운양호 사건에 이어, 1876년엔 이곳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쇄국의 빗장이 풀림과 동시에 일제 침략의 길을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치 마피아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이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는 치열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외세의 침범에 맞선 방파제 구실과 함께 투쟁과 침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환경적인 영향으로 질기고 강한 사람으로 단련 되었다.
현재에도 북한 땅이 훤히 보이는 근접지에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과 인접해 있는 섬인 강화도엔 여자라도 다른 지역과 달랐다.
특히 1900년 에밀이라는 프랑스인이 6년간 조선에 살다가 남긴 체류기에서 ‘조선 반가의 모든 집에 화문석(물들인 왕골에 꽃무늬를 넣은 돚자리)이 있다.’ 할 정도로, 강화도의 가내수공업 규모는 대단했는데, 개항 과정에서 강화는 크고 작은 전란과 함께 언제나 처럼 한반도에서 선진문물을 최전선에서 먼저 받아들였다.
1905년까지 70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주민의 10프로가 감리교 세례를 받았으며, 민족기업이 성장하였다.
일본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을 본받아 외국에서 원사를 들여와 조선에서 직조한 후 인조견을 판매했지만, 강화에는 평생 화문석을 짜는 준비된 직인들이 대거 포진하여 약 6800명의 화문석 조합원인 이들의 활약으로 자생적인 방직산업이 번성하였다.
그리고 인조견을 직조한 것과 팔러 다녔던 것도 강화도의 여자들(방직공, 여자 판매원)이었다.
그래서 서슬 퍼런 일제시대에도 강화도 여성들은 큰소리를 쳤으며, ‘강화 며느리 얻으면 집이 부자 된다.’ 는 속설과 함께 강화 여성들의 악착 같은 삶과 살림하는 것을 두고 넉살이 좋다고 했다.
강화의 특산물은 ‘인삼, 화문석, 인조견, 강화 말’ 이었지만 진짜 강화의 특산물은 강화도 사람, 그것도 강화도 여자인성 싶다.
여기서 유래한 다음의 속담들도 있다.
‘넉살 좋은 강화년(광해년)과 넉 살 좋은 강화 연(광해년).’ : 여기서 ‘넉 살 좋은 강화 연’은 강화에서 만들어 띄우는 연(鳶 ) 중에 살대를 4개로 만든 연을 말한다.
‘강화 여자 발가벗겨 놓아도 30리는 뛴다.’
‘딸이 셋이면 부자된다.’
눈 가리고 아웅 (일엽장목 ; 一葉障目)
가랑잎으로 눈만 가리고 고양이인 척 아웅 하듯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짓으로 남을 속이려 든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희한한 가랑잎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가랑잎을 이마에 붙이면 몸이 감쪽같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산에 가서 가랑잎을 한 짐 해다가 방에 쏟아놓고 아내에게 “이제부터 생전 놀고먹게 될 보물을 찾을 테니까 잘 보고 내가 묻는 대로 대답해요.” 해놓고는 가랑잎을 하나 집어 이마에 붙이고 “내 모습이 보이는가?” 하고 물었다.
마누라는 당연히 남편이 보이니까 “보이지.” 라고 대답했다.
서방은 또 다른 가랑잎을 붙이고 “지금도 보이는가?”하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내외간에 “지금은?” “이젠 어때”..... 이런 식으로 밤새도록 되풀이 하는데, 밤은 깊어가고 졸음은 솔솔 와서 할 일없는 남편의 하는 짓이 귀찮아진 마누라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안 보여요” 라고 해버렸다.
서방은 자기가 안 보인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좋아서 “참말로 안 보여?” 하고 되물었지만, 마누라는 하품을 하며 “안 보이니까 안 보인다고 하지! 왜 자꾸 물어 싸?” 하고는 몸을 팩 돌려서 드러누워 버렸다.
이에 못난 서방은 ‘드디어 내가 보물을 찾았구나!’ 하고 다음날 그 가랑잎을 이마에 붙이고 곧장 옷감가게로 가서 비싼 옷감을 들고 나오다가 주인과 행인들에게 붙잡혀서 뒤지게 뚜들겨 맞았다고 한다.
* 엄이도령(掩耳盜鈴). 엄이도종(掩耳盜鐘), 엄목포작(掩目捕雀), 폐목포작(閉目捕雀), 이장폐천(以掌蔽天).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다.
보기는 보는데 중요한 것은 못 본다.
옛날에 오리를 기르는 영감이 있었는데 이 영감은 저녁마다 오리를 짝지어 세곤 했다.
어느 날 하인이 오리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그날 저녁 영감이 오리를 세어보니까 한 마리가 모자라거든, 영감은 하인을 불러다놓고 매로 때리며 “이놈, 주인 몰래 오리를 잡아먹었지? 내일 장에 가서 당장 사다놔! 그렇지 않으면 내쫓을줄 알아라.”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하인은 그날 밤에도 또 오리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다음날 저녁에 또 오리를 세어본 영감은 보니까 짝이 딱 맞았다.
그러자 영감이 “그러면 그렇지, 매를 맞더니 즉시 사다 놨군! 역시 도둑놈은 매로 때려야 해.” 하더란다.
눈치를 사먹고 다닌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 돈을 주고 눈치를 사먹고 다닌다는 말로서, 눈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흥부가 양식을 얻으려고 놀부를 찾아가서 “형님 떠나온 지 몇 해 만에 안녕하옵신지요?” 하고 공손히 절을 하자 놀부는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물었다.
“뉘신지요?”
흥부는 정말 모르는 줄 알고 일러주듯 말했다.
“갑술년에 나간 형님 동생 흥부요.”
놀부는 그래도 모르는 체 하고는 “흥부? 흥부? 일년 세경 먼저 받고 모 심을 때 도망한 놈, 그 놈은 황보렸다. 쟁기질 보냈더니 소 가지고 도망한 놈, 그놈은 숭보렷다. 흥부? 흥부? 아무래도 모르겠는 걸.” 하고 시치미를 떼었다.
흥부가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수작이 이러하니 무슨 양식 부탁을 하겠는가, 썩 일어나서 나왔으면 매도 안 맞을 것을, 좀 더 자세히 알려주면 뭐라도 줄 줄 알고 “형님 친동생 흥부요.” 하였다.
덕분에 밥은 못 얻어먹어도 매는 죽사발로 얻어먹더란다.
눈치가 없으면 매를 얻어먹고, 눈치가 있으면 떡도 얻어먹을 란가?....
늙은 말이 길을 안다.
경험이 많은 노인이 방법을 안다.
옛날에 고려장이 있을 때에 한 아들이 칠십이 넘은 어머니를 차마 고려장 시킬 수가 없어서 움 속에 숨겨두고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갖다 드렸다.
이즈음 중국 황제가 조선왕한테 재로 새끼를 꼬아 보내라는 통지를 보냈다.
‘짚으로 새끼를 꼴 수는 있지만 재로 어떻게 새끼를 꼬아?’
조정에서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재로 새끼를 꼬아오는 사람한테는 큰 상을 내리겠다는 방을 내 걸었다.
효자는 움에 숨어있는 어머니에게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딱한 듯이 말했다.
“새끼를 꼬아서 태우면 재로 꼰 새끼가 되는데 넌 그것도 모르느냐?”
효자는 새끼를 태운 재를 나라에 바치면서 문제를 푼 것은 고려장 시킬 어머니라고 솔직히 얘기했다.
임금은 노인의 지혜에 감탄하고 그 후로 고려장을 지내는 법을 없앴다고 한다.
능참봉을 하니까 거둥이 한 달에 스물아홉 번이라.
경기도 수원에 살던 칠십 영감 하나가 평생소원이 벼슬인데, 변변한 벼슬하나 한 것이 없어서 한숨을 내리쉬고 올려 쉬다가, 어떻게 해서 수원 옆에 있는 장능(사도세자의 무덤)을 지키는 능참봉을 하게 되었다. 물론 돈은 좀 썼지만 평생소원을 이룬 것이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남들이 “능참봉도 벼슬이냐”고 하겠지만, “나는야 그래도 좋아!” 하고, 흐뭇하게 여겼는데 잠시 후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
그건 정조 임금이 매일 같이 능에 내려오셔서 70살이 넘은 능참봉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대략 아는 바와 같이 장능은 뒤주 속에서 죽은 사도세자가 묻힌 능이고, 정조 임금은 효성이 지극한 그의 아들이라 틈만 나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원 근처에는 여기에 관련된 전설도 많다.
장능 주변의 소나무를 해치는 송충이대장을 잡은 정조임금이 입으로 직접 깨물어 삼켜버리자, 이에 놀란 졸개 송충이들은 그 다음부터 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아서 소나무가 청정하였다는 임금님의 효심을 뻥티기한 터무니 없는 전설부터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지만, 아무튼 효성 많은 임금님 때문에 죽어나는 것은 칠십을 넘긴 노구의 능참봉이었다.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임금님의 거동은 한 달 내내인 스무아흐레가 되겠다.
물론 임금님이 실제로 국사를 제치고 매일 내려 오셨겠는가마는, 늙은 참봉으로는 견딜 수 없는 고역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자 모처럼 일이 잘 되는 줄 알았다가 성가시고 실속 없는 일만 생겼다는 속담을 생산하는 재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능참봉이 조금 틔기긴 했지만 필시 이랬을 것 같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축 처진 몸으로 잠깐 목을 축일 겸 주막에 들러자, 누군가 벼슬아치를 해보니 어떠시냐가 묻자, “여든에 능참봉을 하니 한 달에 거둥이 스물아홉 번이라” 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