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과 목화솜
벌써 5년째다. 마늘 수확기가 되면 식탁 앞에 앉아 마늘을 까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우리 집은 김장을 하지 않으니 거창할 것까지는 없다만, 일 년 내내 양념으로 쓸 다진 마늘을 준비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어 버렸다. 올해는 유난히 양이 많다. 아내와 나, 장모님이 밭에서 함께 작업한 마늘이 무려 세 박스. 마늘밭에서 갓 뽑은 것을 이틀간 마당에 말려 다시 박스에 담아 문지방에 놔두고 하나씩 꺼내 까니, 까도 까도 끝이 보이지 않아 절로 한숨이 난다.
칼에 손이 베어 따갑고 매운 기운에 눈시울이 시려올 때쯤, 문득 머릿속에 『삼국유사』의 한 구절이 스치고 지나간다. 고조선의 탄생 신화,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동굴 속에서 100일을 버텨 마침내 여인이 되었다는 웅녀(熊女) 이야기다.
물론 역사학적 해석은 분분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 세력이 3천 군사와 천부인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에 나라를 세웠고, 곰은 그 지역의 토착 부족을 의미한다는 것. 즉, 이주민과 토착민이 갈등을 넘어 화합을 이루며 세운 나라가 바로 조선이라는 해석이다. 그렇게 환웅과 웅녀가 만나 낳은 아들이 단군왕검이다. 일연 스님은 전해지는 사료가 있었기에 『삼국유사』에 세상에 떠도는 여러 이야기들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신화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서는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단군조선을 싣지 않았다.
내 생각의 나래가 고대사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국가적 기틀은 어디서 출발했을까. 나는 단군 신화 속의 청동기 시대보다는 한반도 곳곳에 설치되었던 한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 세력을 몰아내는 치열한 투쟁과 융합의 과정에서 우리 역사의 기초가 세워졌다고 믿는다. 평양 일대의 고구려 벽화들을 보라. 무덤의 주인공과 해석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속의 인물도와 행렬도 등에는 당시 한나라의 문화적 양식이 짙게 배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가 이 땅에 잔존하던 한(漢)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고대 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고려 시대 관료 겸 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한 공로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그는 왕에게 올리는 글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부족한 글 솜씨를 자책했으나, 삼국의 역사를 정립한 위대한 학자임이 틀림없다. 당시 고려는 최충의 구재학당을 비롯한 사학(私學)이 크게 발달하여 서책이 대중화되고 인재들이 많았던 시대였다. 그런 문화적 토양 덕분에 위대한 사서가 집필되고 목판으로 인쇄되어 후대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문화 역시 고대 한나라의 영향권에 있던 시기에 기틀을 다지지는 않았을까? 이 땅에 오직 착취와 탄압만 존재했을 리 없다. 한나라 관료들이 입는 면화 옷의 제작을 위해 그때 이미 이 땅에서도 목화가 재배되지 않았을까. 역사를 상식의 눈으로 바라본다. 지배자들의 착취는 토착민들을 봉기하게 했고,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사명 아래 선진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 과정에서 한자, 의복, 관혼상제 등 전 분야에 걸쳐 고대 문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탄생했던 것이다.
문득 고려의 관료 문익점의 목화씨에 대한 의문도 숙제로 남는다. 고려 시대 이전의 겨울은 지금보다 훨씬 혹독하고 추웠다는데, 그 차디찬 겨울을 우리 조상들은 무명옷도 없이 어떻게 버텨냈을까. 삼베옷 사이에 갈대나 새털을 채워 넣고 칼바람을 견뎠을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매운 마늘 냄새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과연 목화가 그렇게 늦게서야 이 땅에 들어왔을까? 국제 무역항인 벽란도를 통해 진즉 수입되었을 수도 있고, 이웃 나라들과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이토록 늦어졌을 리 없다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아직 숨어 있는 고대 유적들이 발견되지 않아 고증이 되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실제로 백제 능산리 사지 유적에서 문익점보다 800년이나 앞선 고대 면직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나와 같은 범인의 직관이 맞았던 것이다. 역사는 이처럼 유물이 증명하기 전까지 침묵할 뿐, 우리 민족은 결코 미개했다는 식민사관의 틀에 갇힐 존재가 아니었다. 문익점이 장인에게 건넨 씨앗은 한반도에 최초로 목화를 전래한 사건이라기보다는, 당시 우량 품종의 도입과 씨앗 분리 및 실뽑기 등 직조 기술의 혁신을 이룬 계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내가 부지런히 마늘 껍질을 벗겨내면, 그것을 가져가 믹서기에 가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노랗고 하얗게 다져진 마늘이 통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니 마음이 든든해진다. 이 마늘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기이하다. 우리 음식에서 이 녀석이 들어가지 않으면 도무지 맛이 나질 않는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도 넣고, 배추 겉절이를 담글 때도 넣고, 각종 나물을 무칠 때도 필수다. 심지어 늦은 밤 라면을 끓일 때 대파 대신 넣는 다진 마늘 한 숟가락이 국물 맛을 기적처럼 살려놓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늘은 우리 음식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즉 맛의 정수다.
웅녀가 동굴 속에서 쓴맛을 견뎠듯, 비록 신화 속 마늘이 실제로는 야생 달래나 산마늘이었을지라도 그 매운 인내의 본질은 같으리라. 나 역시 세 박스의 마늘을 까며 일 년 동안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할 양념을 완성해 간다. 어느 시대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사람들은 마늘을 양념으로 먹고, 솜이불을 덮으며 두툼한 면화 옷을 입고 추위를 이겨냈다. 오늘 저녁 찌개에 들어갈 마늘 한 숟가락의 알싸한 향을 생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수천 년 전 신화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마늘과 목화는 여전히 한국인의 영혼을 달래는 소울푸드와 따스한 면직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