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할머니가 제 친구인 본당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신부님, 제가 몇 마르크를 드릴 테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그리고 다른 기회에 그분보다 연세가 많은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신부님, 제가 신부님의 강론을 귀담아 듣지 않아도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신부님이 강론하시는 동안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멋진 것 같기도 합니다.
전례 중에는 본질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오늘날 주일에 성당에 오는 사람들은 잘 짜인 거룩한 시간을 체험합니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는 전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었습니다.“본당신부님이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십니다.”
제가 1960년대에 처음 로마에 왔을 때 성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당에 오겠습니까? 본당신부님이 신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는데…. 당시 일반 신자 가운데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독일에서도 신심 깊은 신자들이 미사 중에 묵주기도를 바치거나 성가를 함께 부르는 정도였지 미사의 본질에 함께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보이론 베네딕토수도원 소속 안셀름 쇼트 신부님은 라틴어 미사경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그 결과 신자들은 제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어떤 것도 미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에게 전례는 단순히 형식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맥박이었습니다. 제게도 전례는 가장 중요한 체험입니다. 저는 언제나 그 안으로 침잠하는 깊은 체험을 합니다. 전례는 일상생활에서 잠시 물러나는 것도,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영역도 아닙니다. 전례는 하느님 안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의 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가는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언제나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영원이란 행복의 다른 말입니다.
깊고 진지한 대화뿐 아니라 전례에서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미사 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참 좋았어요. 미사를 두 시간 동안이나 드렸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보통 때는 미사가 30분만 넘겨도 불평을 늘어놓던 이들이 말입니다.
우리는 삶의 기쁨을 몸으로 느낄 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례에서도 결정적 요소입니다. 많은 사람이 참석하든 적은 사람이 참석하든, 제게 미사를 봉헌하는 일은 언제나 축제입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대축일 미사를 드릴 때 어린아이들이 전례 춤을 추거나, 수녀들이나 어떤 그룹이 성가를 부르거나, 성찬례를 준비하기 위해 사람들이 빵과 포도주를 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제단으로 다가오면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며 참된 기쁨을 나눕니다. 물론 유럽에서는 표현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내적 기쁨과 감동이 관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를 드릴 때 제겐 시간이 사라지고, 제가 온전히 그곳에 있기도 하고 온전히 없기도 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거룩한 성체와 성혈로 변화시키는 예수님 말씀을 반복할 때면, 그리스도께서는 미사를 드리는 그곳에 참으로 현존하시고 저는 시간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본질적 신비체험입니다. 옥죄는 시간의 좁은 강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체험하며 다른 실재로 들어갑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시간이 완전히 멈추었다고 합니다. 이를 노래한 성가도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 어떤 중요한 것, 대단히 위대한 것, 시간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엑스터시이고 유한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전례에서 이러한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까요? 로마노 과르디니는 도대체 현대인이 전례를 함께할 만한가 의심스러워했습니다. 개인화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전례에 관심을 갖기는 할까요?
카를 라너는 신비 체험을 한 신비가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곧 전례를 쇄신의 원천으로 만들고 일시적인 것에서 오는 압박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영원의 숨결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를 미래에 대한 걱정과 과거에 얽매이는 것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상생활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전례를 통해 체험하는 행복입니다.
물론 전례가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거나 또한 이러한 것과 전혀 무관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전례는 시간에 질서와 의미를 줍니다. 전례는 우리에게 힘을 주어 우리 시간이 거룩한 시간, 구원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례 안에서 일어나는 결정적 신비입니다. 전례력에 성인들이 차례차례 기입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전례가 제대로 진지하게 거행되는 곳에서는 자연에 가깝고 전체적인 시간에 대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지닌 문제는 자연적 시간과 리듬대로 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례 안에서 하는 시간 체험은 인간성의 원형을 깨닫게 합니다. 거룩함은 우리 모두에게 현재화되어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삶 안에 구현됩니다. 전례는 덧없는 일시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체험 공간을 열어줍니다.
성당 건축 양식이 이러한 것을 잘 보여줍니다. 성당이 동쪽을 향하고, 성단 주축이 동서 방향으로 놓이며,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르고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향해 있는 것은 오래된 원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이 방향이 바로 태양이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문입니다. 오래된 성당들은 제단이 아니라 성당 정문이 동쪽을 향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라벤나에서는 성당 정문을 통해 떠오르는 햇빛이 성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도록 아침 일찍 성당 정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성당 건축은 우주적 실재와 더불어 신학적 작업과 연계되었습니다. 태양, 밝은 낮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요소임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빛은 우리 몸에 좋습니다. 해가 떠오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우리 영혼도 밝아집니다. 햇빛은 우울증을 치유하고 삶에 기쁨을 줍니다. 태양은 오래전부터 커다란 상징적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길 수 없고 사라지지 않는 태양입니다. 전례에서 이러한 원천적 느낌을 함께 체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시편 19,2.5-7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분 손에 솜씨를 알리네
그곳에 해를 위하여 천막을 쳐주시니
해는 신방을 나오는 신랑 같고
용사처럼 길을 달리며 좋아하네.
하늘 끝에서 나와
다시 끝으로 돌아가니
아무것도 그 열기 앞에서 숨을 수 없네.
전례는 자연적이고 일반적인 시간 체엄인 동시에 영원 체험입니다. 여기서 영원이란 고정되어 죽은 영원이 아닙니다. 정교회의 특별한 것이 무엇이냐는 제 물음에 아토스의 한 그리스정교회 수도원 아빠스는‘성인들의 공동체’라고 대답했습니다. 천 년도 더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전례 안에서 함께 현존하는 것입니다. 성인들뿐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교회 전체가 함께합니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모든 성인의 날(11월 1일)에 미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할 것을 본질적으로 예견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이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어디엔가 신비하게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 몸소 인간이 되시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시간이 멈춘다는 것은 역사적 시간이 멈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갑자기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순간 두려움을 느낍니다.
영원에 대한 느낌과 신적 현존에 대한 느낌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상태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은 죽음처럼 고요한 것과도 다른 충만하고 강렬한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내면세계에서 맴도는 것과도 다릅니다. 전례 중에 체험되는 이 시간은 강한 힘을 지녀 역사에 영향을 미칩니다. 시간이 새롭게 되고 이 새롭게 된 시간은 다시 구원의 시간이 됩니다.
기도와 세상 일, 미사와 세상에 대한 책임감은 서로 대립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와 미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 피조물과 이웃을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일과 활동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삐 서두르며 어떤 역할만 수행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전례를 거행하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가 신비 안으로 침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일상생활과 일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일상생활과 일이 진부해지고 조잡해지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공동체를 체험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체험은 우리 삶의 목표가 올바르고 위대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전례의 아름답고 결정적인 보물은 우리 삶의 신비에 대한 공동체적 체험입니다. 우리는 전례에서 삶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지녔음을 체험합니다. 이는 참으로 큰 행복이며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바라는 것도 공동체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 나를 위한 시간 / 노트커 볼프 지음, 전헌호 옮김/ 바오로딸
첫댓글 미사의의미 그동안 몰랐던 좋은 공부하고 갑니다.
아네스님, 고마워요^^~~
들어올때마다 좋은 공부를 하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공동체에서 영원을 체험하는것=참된행복^^
예전에 올려주신 글중 교황님께서 성덕의 기쁨으로 다섯가지 말씀해주신것을 일상에서 떠올려보기 위해서 일부러 외운적있습니다.
인내와온유함, 기쁨과 유머감각, 대범함과 열정, 공동체성, 지속적 기도.
그 중 미사는 네번째 성덕에 이르는 길이네요.
와우. 다섯가지 외운것 스스로에게 칭찬하며 미사를 통해 시간이 멈춘것같은 충만한 기쁨을 공동체안에서 함께 누리도록 하겠습니다ㅎ~
대단하십니다. 꼼꼼히 올린 글을 챙겨 읽으시고 기억하시고 삶에 반영하시고 큰 기쁨을 얻어가는 삶이 참 행복해 보이는 기쁨이군요,, 거룩한 미사 안에서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전례,, 참 큰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드리는 미사에서의 생명의 빵으로 오시는 주님과의 만남,,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가톨릭만의 신비로운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ㅎㅎ
제가 매일 매일 댓글은 못남겨도 올려주신 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잘~읽고는 있답니다.~^^
읽어주신 것만으로 감사하지요,, 행복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