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투티
정 성 천
‘후투티’, 아랍 계통의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하여 우리말로는 생소한 말인데 새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때 ‘후드티’로 들려 ‘후드’가 달린 티셔츠 종류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우리 집 정원 잔디밭의 단골손님이고 외모가 출중하여 내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던 새의 이름이란다.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사진을 보고서야‘후투티’라는 이름을 알았다. 뽕나무밭에서 잘 볼 수 있다고 해서 ‘오디새’라고도 불리고 머리에 돋은 깃털인 우관(羽冠)이 인디언 추장의 관처럼 멋있다고 ‘인디언 추장 새’라고도 불린단다. 겨울을 열대지방에서 나는 여름 철새인데 요즈음은 온화한 남부지방에서 겨울나기를 하는 모습이 가끔 관찰되기에 전문가들은 아마도 텃새로 적응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 내가 어릴 때는 잘 보지 못하던 새이니 분명 지구 온난화의 덕을 보는 것 같다.
‘후투티’를 처음 만난 날은 3년 동안 페루에서 생활하고 돌아온 직후인 4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의 석실에 앉아 바깥 잔디밭을 바라보니 처음 보는 새 한 쌍이 주위를 경계하면서 잔디밭 지렁이를 잡아먹는 게 아닌가? 생긴 외모가 특이할 뿐만 아니라 다소 긴 부리로 잔디밭 속에서 지렁이를 꼭 집어 빼내어 먹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본 경험이 있다. 내가 싫어하는 잔디밭 지렁이를 잡아먹으니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우리 집 잔디밭의 지렁이는 잔디밭을 전원주택의 필수 조건으로 생각하여 잔디 가꾸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나를 무척 애태우는 녀석들이다. 잔디의 죽은 잔해를 뚫고 초봄에 올라오는 잡초들을 일삼아 며칠이고 쪼그리고 앉아 캐내고 나서 봄비에 잔디의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면 잔디밭이 이내 푸른 초원으로 바뀌어 우리 집을 한결 더 운치 있게 변모시킨다. 하지만 꼭 이때쯤 잔디밭을 볼품없게 만드는 녀석들이 있다. 잔디밭 전역에 봉긋봉긋 솟아오르는 작은 흙무더기들 때문이다. 그것들은 훈훈한 봄기운에 활동을 시작하는 땅속 지렁이들의 활기찬 배설 활동의 산물이라고 한다. 우리 집 주위 밭들이 농약 살포로 잡초들을 제거하니 농약 기 하나 없는 우리 잔디밭이 그들에게는 살기 좋은 청정지역이었으리라. 주위의 지렁이들이 모두 우리 집 잔디밭으로 이주를 했는지 흙무더기가 잔디밭 구석구석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솟아난다.
어떤 이는 잔디는 죽이지 않고 잡초만 없애는 농약을 뿌리면 지렁이까지 잔디밭에 살 수 없으니 일거양득일 것이라며 그런 방법을 한번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하지만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라는 속담처럼 농약 사용만큼은 전원생활에 있어서 마지노선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지렁이들을 ‘후투티’가 잡아먹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 집 전원생활에서 성가신 존재가 하나 더 있다. 길고양이들이다. 우리 동네 전체에 거의 50마리 정도가 살고 있는데 5∼6 마리 정도 무리를 지어 전부 자기들만의 구역을 정해서 살아간다. 간혹 영역 다툼으로 암팡지게 싸우는 일도 있기는 하나 새끼고양이의 털 색깔로 미루어 보아 구역을 넘나드는 교배도 종종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집을 비우고 3년간 외국 생활할 때 우리 집에서 쥐를 잡아주기도 하고 집을 잘 건사해서 고맙다고 아내가 고양이 사료를 사서 먹이고부터 아예 우리 집의 길고양이들은 저희가 주인 인양 행세를 한다. 자칫 잊어먹고 사료라도 주지 않고 밖에 나가면 마치 “왜 우리의 정당한 먹이를 주지 않느냐?”라며 나와 아내를 나무라듯이 큰 소리로 ‘카르릉’ 거리며 잘못을 지적한다.
그런 수모도 그런대로 참아가며 잘 지내려는 데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7월 장마의 집중호우가 내릴 때 주위에 둘러친 배수로 때문에 들어올 수 없는 물줄기가 창고로 사용하는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깥에서 안으로 뚫린 쥐구멍으로 물이 새어들어 온 것이었다. 더 놀란 점은 그 쥐구멍의 입구가 바로 고양이 밥그릇 옆에 위치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사료로 배가 부른 길고양이들은 옆에 쥐가 다녀도 쥐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괘씸한 생각에 그 뒤로는 고양이 사료를 사지도 않고 먹이도 주지 않고 눈에 보일 때마다 우리 집에서 내쫓아 버렸다.
그랬더니 어저께는 길고양이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 버렸다. 한낮 강한 햇볕을 피해 오후 늦게 텃밭 일을 하려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도둑고양이의 공격에 무참히 살해된 ‘후투티’의 사체가 잔디밭 가장자리에 처참하게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목이 물려 꺾이고 그 아름답던 깃털이 뜯겨나가고 내장들만 꺼내 먹었는지 배 속이 비어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예민하게 주위 경계를 하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고양이의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우리 집 잔디밭의 지렁이가 그렇게 맛이 있었던가? 애석한 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 잔디밭에 짝지어 두 쌍이 왔었는데 오늘은 세 마리로 한 마리가 짝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너무나 안타깝다.
하지만 끔찍한 죽음 뒤에 남는 애석함과 허탈함 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우리 잔디밭은 지렁이가 한 마리도 없이 항시 깔끔해야만 되고, 그리고 ‘후투티’는 아무런 사고 없이 지렁이를 잘 잡아먹고 열대지방으로 무사히 돌아가야만 하고, 길고양이들은 우리 집의 쥐를 잘 잡고 또 온순해야만 된다.” 이것들은 모두 머릿속의 내 생각들이지 않겠는가? 꼭 세상이 내 생각대로만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누구를 탓하고 미워하거나 아니면 내 마음에 상처를 내고 괴로워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후투티’는 길고양이에게 잡혀 죽을 인연이라서 죽은 게 아닐까? 길고양이는 당연한 먹이 사냥을 한 것뿐이고, 성가신 쥐를 사냥하지 않고 이로운 ‘후투티’를 사냥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까? 잔디밭 지렁이도 꼭 해로운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지렁이의 배설물이 토양을 기름지게 해서 잔디의 성장에 도움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잔디밭 관리도 열심히 해보고 잘 되면 좋고 또 안되면 그대로 좋은 게 아닐까? 잔디밭, 아니 그 무엇에도 너무 집착하지 말자. 길고양이도 돈의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먹이를 사다 주고 집 비울 일이 있거나 못줄 사정이 되면 또 못 주기도 하는 거다. 너무 과거와 비교해서 괴로워하거나 미래를 앞서서 걱정하지 말자.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내 생각 속에 있고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언제나 진리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가볍게 살자. 애써 붙잡을 것도 없고 어디 걸릴 데도 없으니 강물 위에 떠내려가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살아야만 한다. 그래야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끝내는 바다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머물되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삶을 살자. 잘 될지 모르겠지만.
미당 서정주님의 시 귀가 생각난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첫댓글 낙운중학교 근무할 적에
뒷뜰에 흔하지 않은 저 놈을 첫 대면을 했었다오.
머리 벼슬이 참 멋져요, 예쁜 댕기머리를 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