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6대 고종실록]
2. 고종의 가족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는데, 명성황후 민씨가
왕자 척(순종)을 낳았으며, 귀비 엄씨가 영친왕을, 귀인 이씨가 완화군 등 2남을, 귀인 장씨가
의친왕을, 귀인 정씨가 1남, 귀인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명성황후와 영친왕, 의친왕의 삶을 약술하고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약력을 함께 붙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아들이다.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촌수로 따지면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가 되는
셈이다. 그의 이름은 하응이며,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에 어미니를 여의고 17세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지내는 호신 생활을 통하여
서민 생활을 체험했으며, 민간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흥선군은 1863년 12월 자신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 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 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 정책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는 1873년 11월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대권에서 손을 떼야 했다. 외척세력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영락한 향반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했지만, 오히려 그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고종은 그 당시 이미 22세의 성년으로 친정을 원하고 있었고, 왕비 민씨는 대원군 축출 작업을
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게 한다. 그 결과 1873년 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축출된 그는 이때부터 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 끊임없이
정계복귀를 꾀하게 된다.
1881년 '조선책략' 반포를 계기로 민씨 일파의 개화 시책을 비난하는 전국 유림의
척사상소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자, 대원군 계파인 안기영은 고종의 이복형 재선을 옹립하여 민씨
척족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를 꾸몄다. 대원군은 재집정을 위해 이 계획에
가담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척사상소운동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하였고, 대원군 자신의
입지도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일어난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정국
개입을 요청받아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위임받고 재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885년 2월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함께 귀국한 후 여전히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러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하여
큰아들 재황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고, 청·일전쟁
이후 온건개혁파가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영입되어 군국기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그가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흥집 내각에 의해 경장 사업 추진이 진행된다.
이 이후에도 그의 정계 복귀 노력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 존봉의절이
제정되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한받았을 뿐 아니라 외국 사신들과의 만남도 정부의 관헌
입회하에서만 가능해지게 되었다.
을미사변 때 일본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왕비 민씨가 죽은 후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실각하여 곧은골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98년 79세를 일기로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 3대 60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낸다. 1873년의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민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
영친왕 이은(1897-1970)
고종의 넷째아들이며 귀비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월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년 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방자)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쳐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장애아 교육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 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의친왕 이강(1877-1955)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년 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 해 6월에 적십자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손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 1895년 10월 8일 새벽 명성황후께서 시해 당하신 건청궁 곤령합.
* 명성황후 시해 당시 일본왕 메이지 무쓰히토
* 명성왕후 시해 당시 일본 총리 이토히로부미.
* 명성황왕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 낭인들. 술에 취한 채 일본도를 들고 건청궁에 침입해 고종과 세자척(순종)을
잡고 황후의 침실 곤령합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낭인들은 일본도로 황후를 찌르고 20여명이 강간을
했으며, 거리에서 서민들이 보는 가운데 가슴까지 도려내는 만행을 자행했다.
영친왕 이은
* 영친왕 이은. 영친왕은 장성한 형 의친왕 이강을 꺼려하는 일본에 의해 세자가 되고 일본에서 일본 여인과
1920년 4월 28일 결혼한다. 영친왕과 결혼한 일본여인은 일왕 메이지의 조카이며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와
미쓰코의 딸인 마사코이다. 한국명 이방자. 이방자 여사는 일본의 황족으로 일왕 히로히토의 강력한 배우자 중
한명이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의 영친왕과 결혼한다. 일본 패망 후 황족의 지위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한국으로부터 귀국을 거절당하고 영친왕이 병마에 시달리는 고단한 삶속에서도 꿋꿋하게 영친왕의 곁을 지켰다.
* 영친왕 부부의 첫아들은 진, 둘재아들은 구이다.
* 일본군 사단장 시절의 영친왕과 가족.
* 11세의 어린 영친왕과 한국인의 영원한 불구대천의 원수로 조선에 대한 모든 만행의 원흉들
중 주요인물인 이토히로부미.
* 좌로부터 덕혜옹주, 이방자여사, 황후 윤씨, 순종, 영친왕
* 영친왕은 이승만 대통령시절에 귀국이 거절되었으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협조로 1962년에 한국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한다.
의친왕 이강
* 의친왕의 정비. 덕인당 김수덕
* 의친왕비 김수덕과 장자 이건.
* 의친왕의 얼짱아들. 2남 이우
* 의친왕의 아들 이우부부와 아들 이청
* 의친왕의 아들 이우부부 결혼사진
덕혜옹주
* 대한제국의 옹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비운의 여인. 고종은 고명딸 덕혜옹주만큼은 영친왕 이은처럼 일본인과 정략결혼
시키지않으려고 대한제국 대신의 아들과 약혼시도한다. 그러나, 일본에 의해 일본으로 가서 쓰시마도주의 후예인
쇼 다케유기와 결혼한다. 조발성치매(정신분열)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병마로 결혼 생활은 파탄에 이르고 1955년
이혼한다. 딸정혜마져 결혼했으나 실패하고 일본 남부산악지대에서 실종한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귀국도 거부당한다.
1962.1.26 영구귀국해 한국에서 살다가 1989.4.21일 낙선재에서 7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