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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양들메길 원문보기 글쓴이: 풀소리(최경순)
자연과 역사유적이 잘 어우러진 아마존길
이번에 가고자 하는 올레코스는 「고양올레길 만드는 사람들(http://cafe.daum.net/gyolle)」에서 개발한 10코스입니다.
이 코스는 산악자전거 타시는 분들이 일명 「아마존 구간」이라고 부르는 구간과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합니다. ‘아마존’이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도심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인데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구간에는 공양왕릉을 비롯한 역사유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원한 그늘이 좋고, 여전히 개구리가 울어대고, 백로가 노니는 논들을 지나가는 것은 유쾌한 일입니다. 다만 교통이 조금 불편하지만, 30분만 더 투자한다고 생각하면 뜻하지 않는 즐거움을 만나실 겁니다. |
* 코스 : 식사오거리 일산종합철강(오일뱅크 건너편) - 능선길 - 논길 - 대궐약수 - 탄약대대 - 이량묘 - 공양왕릉 - 능선길 - 원흥동 원당헌뼈해장국 앞(주주동물원 근처)
* 소요시간 : 약 2시간 30분
* 대중교통 : 식사오거리 정류장 하차
일반버스 및 좌석버스 : 7733, 7728, 771, 2, 05, 5, 567, 1, 11, 550, 919, 9703번
마을버스 : 97, 98, 99번
- 만약 원당역에서 오실 경우 : 원당역 2번 출구로 나오면 큰길 쪽으로는 일반버스 정류장이
등 뒤로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빨리 오는 버스를 타시면 됩니다.
일반버스 및 좌석버스 : 7733, 567, 9703번
마을버스 97, 98, 99번
오일뱅크 건너편 일산종합철강 쪽 구길로 들어오면 쌍용자동차서비스센터가 나옵니다.
이곳을 끼고 좌회전해서 언덕을 오르면 정상부분에서 오른쪽으로 비포장길이 나옵니다.
이제 막 숲에 들어왔을 뿐인데, 풍경은 금새 깊은 산속으로 바뀝니다.
계속 직진하다 보면 숲속에 뜬금없이 시멘트 포장길이 나옵니다.
군부대에서 또 군부대로 잇는 길입니다. 시멘트 포장길에서 좌회전해서 오르면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부대가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부대를 건너 능선길을 계속 가야하는데, 길이 막혔죠? 그러나 오른쪽 축대 밑으로 길이 있습니다.
이무 : ?~1409(태종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 자는 돈부(敦夫). 아버지는 판서 거경(居敬)이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밀직사사(密直司使)가 되었으나 유배된 조영길(趙英吉)이 도망간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아 한때 파직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이인임(李仁任)의 일파라 하여 곡주(谷州)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 개성부윤이 되었으며, 그뒤 중추원사가 되어 예성강·강화 등지를 시찰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해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다녀왔다. 1396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5도의 병선을 지휘하여 일본의 이키 섬[壹岐島],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했으며, 그뒤 참찬문하부사·판예조사·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를 지냈다. 1398년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방원(芳遠:뒤의 태종)에게 밀고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1400년(정종 2) 동북면도순문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겸 의흥부윤(義興府尹)이 되었으나, 그해 정도전 등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에는 판삼군부사가 되어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해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2년에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 우정승 겸 판병조사(判兵曹事)가 되었다. 1406년 김사형(金士衡)·이회(李) 등과 함께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를 합편·정리하고, 조선과 일본을 넣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들었다. 1408년에 병으로 사직하고, 이듬해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서 사형당했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
다시 능선길로 조금 더 가면 능선길을 가로지르는,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비포장 길이 나옵니다. 바로 원당중학교옆에서 식사동으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비포장길을 건너 산길을 오릅니다. 몇 차례 갈림길이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녔을 만한 길로 가면 됩니다.
어느 길이 더 사람이 많이 다녔을까 헛갈리는 길이 나타나면 친절하게 나무에 글씨를 써 놨습니다. '게이트볼장' 따위로 말입니다.
좀 더 직진하면 모래주머니로 쌓아올린 방공호가 있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여기서 '농로' 방향으로 내려오면 곧 논이 나타납니다.
논과 숲의 경계에 농기계가 다닐 수 있는 농로가 있습니다.
이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논을 건널 수 있는 좀 넓은 논두렁길이 나옵니다.
그리로 건너 좌회전 하면 대궐약수입니다. 대궐약수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 이 근처에 귀양와 계실 때 드시던 샘물이라고 합니다.
대궐약수에서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탄약대대 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나옵니다.
여기서 좌회전해서 탄약대대 정문까지 갑니다.
올레길을 다니신 분들은 여기 오시면 길이 생각날 겁니다. 바로 1코스 길이기 때문입니다.
탄약대대 정문에서 우회전해서 가다가 왼쪽 밑으로 무덤들이 보이는 무덤을 끼고 죄회전해서 무덤을 따라 내려오면 곧바로 이량의 무덤이 나옵니다.
이량(李樑)
1519(중종 14)~1563(명조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거(公擧).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5대손이다. (태종→효령대군→보성(寶城)군→율원(栗原)군→여양(呂陽)군→전성(全城)군→이량(李樑))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沈氏)의 외삼촌이다.
명종이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중용하여 1559년 도승지·대사간·예조참판·동지중추부사·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1561년 문정왕후의 미움을 받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왕의 특명으로 1562년 공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를 거쳐 1563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명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감(李戡)·신사헌(愼思獻)·윤백원(尹百源) 등과 당을 만들어 횡렴을 일삼으며 정치를 농단했다. 사림들이 비판을 하자 이감·권신(權信) 등과 더불어 사화(士禍)를 일으켜 기대승(奇大升)·허엽(許曄)·윤두수(尹斗壽) 등 사림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사림들과 친교가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이 일을 명종에게 밀고해 보령에 유배되었다. 이어 강계로 옮겨지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당시 윤원형·심통원(沈通源)과 더불어 3흉(三凶)이라고 불렀다. - daum 백과사전 |
이량의 무덤에서 내려와 농로를 따라 하류 쪽으로 내려오다 논둑길로 논을 건너면 아스팔트 길입니다.
이곳에서 좌회전 하면 공양왕릉이 나옵니다. 공양왕릉 위로 조선 사대부 무덤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 가장 먼저 생긴 무덤은 송강 정철의 큰 증조할아버지인 정자양의 무덤입니다.
그리고 이곳 맨 위의 무덤은 정자양의 외손자이자 신숙주의 손자인 기재 신광한의 무덤이 있습니다.
신광한묘 1484(성종 15)~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대제학을 지낸 당대의 문장가로 2편의 몽유록과 소설에 근접한 2편의 전(傳)을 남겼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영의정 숙주(淑舟)의 손자이고 내자시정(內資寺正) 형(泂)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급제,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전교가 되었다. 조광조 등과 함께 신진사류로서 1518년(중종 13)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다음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등용되어 이조판서·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다. 같은 해 우찬성으로 양관대제학을 겸임,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필력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과 전을 남겼는데 〈안빙몽유록 安憑夢遊錄〉·〈서재야회록 書齋夜會錄〉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몽유록이다. 〈안빙몽유록〉에서는 급제하지 못한 안빙이라는 사람이 꽃동산에서 잠들었다가 꽃나라에 가서 놀고 시를 읊었다고 했다. 〈서재야회록〉은 어느 선비가 못 쓰게 된 벼루·붓·먹·종이가 버림받게 되었다고 서러워하는 것을 엿듣고 정중하게 땅에 묻은 뒤 제사지냈다는 내용이다. 두 작품 모두 몽유록에 가전체를 더해서 지었다. 〈최생우진기 崔生遇眞記〉는 최생이 선계(仙界)에서 놀고 용궁에서 시를 짓다 돌아와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지 알 수 없다고 한 내용으로 김시습의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과 비슷하다. 〈하생기우록 何生奇遇錄〉은 과거공부를 하던 하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하고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나 부부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와 비슷하다. 그러나 두 편이 모두 기이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하는 데 치우치고 자아와 세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아 소설이 되다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금오신화〉의 영향을 외적으로만 받아 오히려 소설의 정착을 저해했다는 평을 받는다. 1553년(명종 10) 목판본으로 간행된 〈기재기이 企齋記異〉에 실려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daum 백과사전 |
신광한의 묘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신광한의 아버지인 신형의 무덤이 나옵니다.
그 무덤 뒤로 작은 소로가 있는데 이길을 조금만 가면 이내 자전거들도 다니는 등산로가 나옵니다.
등산로에서 좌회전해서 오르다 갈림길에서 우회전 해서 내려가면 이내 능선길입니다.
길은 제법 넓어져서 잃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한참을 계속 직진해서 가면 T자형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합니다.
그 길을 계속 직진하면 이내 길은 포장길로 바뀌고 마을이 나옵니다.
이곳이 주주동물원 근처 한때 해장국으로 유명한 원당헌해장국집이 있는 동네입니다.
이곳이 끝입니다.
이곳에서의 대중교통은 5(일산방향), 85, 85-1, 1082(원당, 화정, 행신방향), 마을버스 38-1(원당역, 화정역) 등 버스가 수시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