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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권_우애(2)
제1장_우애에서 동기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
서로의 동등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모든 우애에서 동등성을 확보해주고 우애를 보존하는 것이 비례이다. 예컨대 국가공동체에서 제화공은 자기가 만든 구두의 가치에 비례하는 대가를 받으며, 그 점은 직조공과 다른 장인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공동의 척도는 화폐의 형태로 제공된다. 따라서 모든 것은 화폐와 관련되고 화폐로 환산된다. (334쪽)
* 여기서의 '비례'는 '기하학적 비례'(기여도에 따른 비례, 제5권 제3장)를 말함. (박희택)
누가 봉사의 가치를 정할 것인가? (336쪽 정리)
(1) 봉사하는 사람이 봉사받는 사람에게 맡긴다. (프라타고라스 경우)
(2) 약속한 것을 하나도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합의한 것을 지키지 못하니 비난받아 마땅하다. (소피스트들 경우)
(3) 봉사에 관해 서로 합의한 것이 없을 경우 상대방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비난받지 않는다. (미덕에 근거한 경우)
(4) 보답은 시혜자의 의도에 비례해야 한다. (우애와 미덕에서 의도가 중요한 경우)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같은 사물에 동등한 값을 매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가 제공하는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니 말이다. 그러나 보답은 받은 사람의 가치평가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평하는 평가는 아마도 받은 사람이 받은 뒤 그것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치가 아니라, 그가 받기 전에 그것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가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337-338쪽)
제2장_우애의 여러 요구로 인한 문제점
봉사의 크고 작음이나, 봉사의 고매함과 필요성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체로 가까운 친구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보다는 먼저, 받은 은혜를 갚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친구에게 돈을 주느니 빚을 갚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이 몸값을 내주어 그대가 납치범들한테서 풀려났다고 가정해보자. (338쪽)
일반적으로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지만, 만약 베푸는 일이 월등히 고매하거나 월등히 필요하다면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규칙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받은 만큼 갚는 것이 공정하지 못할 때도 있다. (339쪽)
우리는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듯 부모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경의를 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같은 경의를 표해서는 안 되며, 부모에게는 현자나 장군에게 걸맞은 경의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걸맞은 경의를,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 걸맞은 경의를 표해야 한다. (340쪽)
제3장_우애가 해소되는 이유
또 다른 난제는 전과 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우애를 해소할 것인지 말 것인지이다. (1) 우애가 유용성이나 쾌락에 근거한 경우, 우리 친구들이 더이상 그런 자질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우애를 해소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 (2) 우리의 성격 때문에 사랑하는 척한다면 불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친구들 사이의 다툼은 대개 그들이 서로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친구일 때 생기기 때문이다. (341쪽)
그렇다면 우애는 당장 해소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경우에 그럴 필요는 없고, 치유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자들과의 우애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들이 교정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재산보다도 그들의 성격을 구제해야 한다. 성격은 더 고귀한 것이고 우애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 친구는 전과 다름없는데 다른 친구는 더 나아지고 미덕에서 훨씬 훌륭해진다면 그런 차이가 나더라도 전과 다름없는 쪽을 친구로 대해야 하는가? 그것은 분명 불가능하다. (342쪽)
제4장_자기애에 근거한 우애
어떤 사람은 친구를 '친구를 위해 좋거나 좋게 보이는 것을 바라고 행하는 사람' 또는 '친구를 위해 친구가 존재하고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규정짓는다. 이것은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갖는 또는 사이가 벌어진 친구들끼리 갖는 태도이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를 '자기 친구와 함께 소일하며 같은 것을 선택하는 사람' 또는 '자기 친구와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것은 어머니의 특징이기도 하다)이라고 규정짓는다. 우애도 이런 특징 가운데 어느 하나에 따라 규정된다. (343쪽)
무슨 일에나 미덕과 훌륭한 사람이 기준인 것 같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과 일치해서 생각하며, 그의 혼 전체가 같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것과 좋게 보이는 것을 바라고 실제로 행한다. (344쪽)
사악한 자들은 함께 소일할 사람을 찾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피한다. 혼자 있으면 자신이 저지른 불쾌한 행위가 자꾸 떠오르고 비슷한 행위가 예견되는데, 남과 같이 있으면 그런 행위가 잊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받을 만한 자질들이 없기에 자신에게 우애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신과 기쁨도 슬픔도 나누지 못한다. 그들의 혼은 내분상태라 혼의 한 부분은 타락해 무엇인가를 멀리하면 고통을 느끼는데 다른 부분은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346쪽)
이렇듯 악인은 자기 자신에게도 우호적이 아닌 것 같다. 그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가 아주 비참한 것이라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사악함을 피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과 사이가 좋을 수 있고, 그래야 남과도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46쪽)
제5장_ 우애와 호의의 차이
호의는 우애와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호의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부지중에 느낄 수 있지만 우애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 호의는 애정과도 다르다. 호의에는 긴장과 욕구가 내포되지 않지만, 애정에는 이 둘 모두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또한 애정은 친교를 내포하지만, 호의는 경기 때 서로 경쟁하는 선수들에게 생겨나듯 갑자기 생겨나기도 한다. (346-347쪽)
호의는 우애의 시작인 것 같다. (...) 사람들은 서로 호의를 느끼지 않고서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호의를 느낀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우애'라는 말의 의미를 확대하여, 호의는 오랜 친교를 통해 우애로 발전할 잠재적 우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의는 유용성이나 쾌락에 근거한 우애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 때문에 호의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47-348쪽)
제6장_우애와 화합
화합 또한 우애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화합은 의견 일치돠는 다르다. 의견 일치는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 주제에서나 의견이 일치한다고 해서 '화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 이처럼 화합은 실천적 목적, 그중에서도 쌍방이 또는 모든 시민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중대한 목적에만 관련된다. (348쪽)
화합은 세상 사람들 말마따나 정치적 우애인 것 같다. 화합은 시민들의 이익과 생활에 관련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화합은 훌륭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말하자면 마음이 한결같아서 자신과도 화합할뿐더러 서로 간에도 화합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옳고 유익한 것을 원하며, 그런 것들을 공동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조금밖에 친구가 될 수 없듯이 조금밖에 화합할 수 없다. 그들은 어려운 일과 공공봉사에서는 제몫을 적게 하면서도 이익은 제몫 이상을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옳은 일을 행하도록 서로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행하지 않음으로써 분열을 일삼는다. (349-350쪽)
제7장_왜 시혜자가 수혜자보다 더 사랑하는가
수혜자가 시혜자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시혜자가 수혜자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은 마치 역설인 양 논의되었다. 대다수의 생각에 따르면 수혜자는 채무자이고 시혜자는 채권자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빌릴 경우 채무자는 채권자가 없어지기를 바라지만 채권자는 실제로 채무자의 안전에 관심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시혜자는 자기가 베푼 은혜를 돌려받으려 수혜자가 생존하기를 바라지만 수혜자는 은혜를 갚을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350쪽)
사람들은 대개 쉽게 잊어버리며 남에게 베풀기보다는 남이 자기에게 베풀기를 더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본성에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시혜자는 돈을 빌려주는 사람(채권자)과는 전혀 유사하지 않다.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채무자에게 우애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빌려준 것을 돌려받기 위해 채무자가 안전하기를 바라겠지만, 시혜자는 지금도 소용이 없고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도 수혜자를 사랑하고 좋아하니 말이다. (350-351쪽)
모든 장인은 작품이 태어나면 작품이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다. 시인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시인들은 자기 시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친자식인 양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혜자의 처지와도 비슷하다. 혜택을 받은 것은 그들의 작품이고, 그래서 그들은 작품이 제작자인 그들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작품을 사랑하니 말이다. (351쪽)
우리는 활동함으로써(즉 살아서 행위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 제작자는 어떤 의미에서 작품 활동을 통해 존재한다. 그래서 제작자는 자기 존재를 사랑하기에 자기 작품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하다. 제작자의 잠재된 가능성을 작품이 현실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시혜자에게는 자신의 행위가 고매한 것이기에 시혜자의 행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즐겁지만, 수혜자에게는 시혜자인 행위자와의 관계에서 고매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기껏해야 약간의 이득이 있을 뿐이므로 덜 즐겁고 덜 사랑스럽다. (352-352쪽)
사랑하는 것은 일종의 능동적 경험이고, 사랑받는 것은 수동적 경험인 것 같다. 따라서 사랑과 우애는 행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또한 사람들은 누구나 노력해서 얻은 것을 더 좋아한다. 예컨대 자수성가한 사람이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 또한 남한테서 혜택을 받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남에게 혜택을 베푸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낳느라 수고를 더 많이 하고, 자식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시혜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352쪽)
제8장_진정한 자기애의 본성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비하해서 부른다. (...) 사람들은 가장 친한 친구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장 친한 친구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353쪽)
사람은 그의 지성(nous)의 통제를 받는지 받지 않는지에 따라 자제력 있는 사람이거나 자제력 없는 사람으로 불리는데, 지성이 그 사람 자신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나쁜 사람에게는 그가 해야 하는 것과 그가 하는 것이 상충한다. 반면 훌륭한 사람은 그가 하는 것과 그가 해야 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지성은 언제나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훌륭한 사람은 지성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355-356쪽)
고매한 행위를 하려고 남달리 노력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칭찬한다. 그리고 저마다 고매한 것을 위해 노력하고, 가장 고매하게 행동하려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공공복리도 증진되고 개인도 저마다 최고선을 향유할 것이다. 미덕이야말로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356쪽)
그는 그 무엇보다도 고매한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를 위해 고매한 행동을 할 기회마저 포기할 수 있으며, 그에게는 자신이 행하는 것보다 친구가 행하게 하는 것이 어쩌면 더 고매할 수도 있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대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357-358쪽)
제9장_행복하려면 친구가 필요한가
친구는 제2의 자아인 만큼 누군가 혼자 힘으로 마련할 수 없는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 '신께서 만사형통하게 해주신다면 친구가 왜 필요하겠어요?'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모두 나눠주면서도 외적인 좋음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간주되는 친구들을 주지 않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 역경에 처한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줄 사람이 필요하고, 잘나가는 사람은 자신이 잘해줄 사람이 필요하니 말이다. (358쪽)
인간은 사회적(politikon) 존재이고 본성적으로 남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행복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본성적으로 좋은 것들을 갖고 있으니까. 따라서 그도 낯선 사람이나 우연히 만난 사람보다는 친구나 훌륭한 사람과 함께 소일하는 것이 분명 더 나을 것이다. 그러니 행복한 사람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다. (359쪽)
행복은 일종의 활동이며 활동은 분명 생성되는 것이지 재물처럼 누군가에게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행복이 삶과 활동에 있고(우리가 처음 말한 바와 같이) 좋은 사람의 활동이 그 자체로 훌륭하고 즐겁다면, 그리고 자신의 것이 즐겁고 우리 자신보다 이웃을, 우리 자신의 행위보다 이웃의 행위를 더 잘 관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좋은 사람에게는 자기 친구인 훌륭한 사람의 행위가 즐겁다면(이 두 가지 속성은 본성적으로 즐거우니까) 더없이 행복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친구가 필요할 것이다. 더없이 행복한 사람은 훌륭하고 자신의 것인 행위들을 관조하기를 선호하는데, 그의 친구인 좋은 사람의 행위들이야말로 그런 성질의 것이다. (360쪽)
* '이 두 가지 속성'은 좋다는 속성과 자신의 것이라는 속성을 말함. (주 38)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친구에게 느낀다면(친구는 제2의 자아이니까), 그렇다면 각자에게 친구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가 바람직한 만큼 또는 그와 비슷한 정도로 바람직할 것이다. (362쪽)
따라서 더없이 행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본성상 좋고 즐겁기에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이라면, 그리고 친구의 존재도 그 점에서 덜하지 않다면, 친구 역시 바람직할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든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점에서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훌륭한 친구가 필요하다. (363쪽)
제10장_친구는 얼마나 많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친구는 되도록 많아야 하는가? 아니면 혹시 '손님은 많지도 않고 없지도 않아야 한다'는 손님 접대에 관한 시인의 조언이 적절한가? 그래서 이 조언은 우애에도 적용되어 친구는 전혀 없어서도 안 되고 너무 많아서도 안 되는가? (1) 유용성을 위한 친구들의 경우 이런 원칙은 백 번 옳은 것 같다. (...)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친구는 필요 없다. (2) 또한 쾌락을 위한 친구들의 경우에도 마치 음식에 양념을 조금만 쳐도 충분하듯 소수의 친구면 충분하다. (3) 그러나 훌륭한 친구라면 우리는 되도록 많이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한 국가의 인구처럼 그 수에 제한을 두어야 하는가? (...) 친구의 수에도 어떤 제한이 있을 텐데, 그것은 아마도 함께 살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수일 것이다. (...) 많은 친구가 아니라 친한 친구와 동아리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만큼만 친구를 가지려는 것이 옳을 것이다. (...) 친구가 아주 많으며 친구마다 절친한 것처럼 대하는 사람들은 누구의 친구도 아닌 것 같다(동료 시민들이 친구라면 몰라도,)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아첨꾼으로 불린다. 동료 시민들이 친구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의 친구이면서 아첨꾼이 아니라 진실로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163-365쪽)
* 이상적인 인구수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1326a35-b25 참조. 노예와 거류민을 제외한, 완전한 자격을 갖춘 시민의 수를 말함. (주49, 50)
제11장_친구는 잘나갈 때 더 필요한가, 불운할 때 더 필요한가
우애는 사실 불운할 때 더 필요하다. 그래서 불운할 때는 유익한 친구들을 원한다. 하지만 우애는 잘나갈 때 더 고매하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찾는데, 그 이유는 그런 사람에게 베풀고 그런 사람과 소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366쪽)
친구가 우리 자신의 불운을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롭다. 누구나 친구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은 피하려 하니까. 그래서 대장부다운 남자는 자신의 고통에 친구들을 끌어들이지 않으려 조심하며, 유난히 고통에 둔담하지 않은 한 자신이 친구들에게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생각을 견뎌내지 못한다. (...) 불안한 친구에게는 그쪽에서 청하지 않더라도 기꺼이 찾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어렵지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야마로 친구의 몫이기 때문이다. (366-367쪽)
* 청하지 않아도 찾아가는 친구를 [유마경] 불국품에서는 불청우(不請友)하며, 불청지우(不請之友)라 함. [무량의경] 덕행품에는 불청지사(不請之師)라는 구절도 있음. (박희택)
제12장_친교의 가치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각이 바람직하듯, 친구의 존재에 대한 지각은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런 지각은 함께 살 때 활성화되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각자에게 자신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건, 또는 각자가 살기를 선택하는 목적이 무엇이건, 각자는 친구들과 더불어 그것을 추구하려 한다. (368쪽)
훌륭한 사람들의 우애는 훌륭한 것이 되고, 교제를 통해 증진된다. 또한 훌륭한 사람들은 우애를 실천하고 상대방을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함으로써 자신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 (369쪽)